[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5) 시기(猜忌)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시기와 질투 또는 투기는 같은가. 둘은 동의어가 아니다. 히브리어는 둘 다 ‘ha;n]qi’(킨아)다. 만군의 여호와와 이 단어가 함께 사용될 때는 ‘열심’으로 언급된다. 시기로 사용될 때는 언제나 나쁘게 쓰였다. 질투 혹 열정은 종종 좋은 일에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전자는 욥기 5:2에 시기로, 후자는 잠언 27:4에서는 투기 즉 질투로 사용하였다. 전자는 남들이 가진 것을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인해 슬픔을 유발하게 한다. 후자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질투는 어디에서 생기는 걸까?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 1937~ ,일본 여류소설가)가 그랬다. 질투는 본질적으로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생긴다고 말한다. Trench는 시기는 수동적이며 질투는 능동적으로 사용된다고 하였다. 공히 다른 사람의 선행에 적대 감정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고 하였다.

‘백설공주’에서 두 가지를 엿보게 된다. 이 동화는 그림 형제가 1812년 발표하였다. 백설공주에게 독이 든 사과를 먹인 사람은 못된 계모인 왕비인가? 아니면 친모인가? 후자다. 1857년 개정판이 나오면서 전자로 바뀌었다. 그럼 생모가 딸의 미모를 시기한 것이냐 아니면 질투한 것이냐. 자신이 갖지 않는 미모를 가진 딸에 대한 감정은 시기다. 뿐만 아니라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라는 물음에 최고의 자리를 잃게 되는 데 대한 두려움이라면 질투다.

성경에서도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창세기 30:1에 두 자매간에 시기 이야기가 나온다. 시기에 해당하는 킨아(히브리어: 시기, 질투, 열심)는 양가적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라헬의 킨아는 언니 레아에 대한 시기인가 질투인가.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제작진은 원래 예쁜 공주들과 잘생긴 왕자, 화려한 영상미는 그대로 남겨둔 채 스토리를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썼다. 왕자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 대신 자매간의 갈등과 자매애를 다뤘다. 라헬과 레아 이야기는 각색하지 않고 그대로 전한다.

미남, 미녀로 인식되는 대칭형 얼굴을 지닌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이기적 성향이 강하다는 연구 결과를 영국 일간 가디언이 보도했다. 영국 에든버러대와 스페인 마드리드자치대의 연구팀은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 실험을 통해 얼굴이 대칭인 사람들이, 즉 미남미녀일수록 선천성 질병을 앓을 확률이 낮고 생물학적으로 우월한 배우자를 만날 가능성이 크다는 기존 연구도 연구팀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로 보건데 라헬은 대칭형 얼굴이며 이기적 성향이 강한 여성이었다. 라헬은 미모가 뛰어나고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할 정도였지만 그에게 없는 것이 자식이었다. 반면 레아는 얼굴에는 밀리지만 자녀를 많이 낳았다. 그녀의 질투가 더 많은 자식을 낳게 하였다. 라헬은 외모로 보면 전혀 시기할 것이 못되지만 자신이 갖지 못하는 자녀의 복을 언니가 가지고 있고 이로 남편을 잃을까봐 노심초사한 것은 킨아, 즉 질투이다. 시기심은 열등한 사람만의 감정이 아니다. 열등한 사람과 간격이 좁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월한 사람의 시기심이 더 무섭다. ‘있는 사람이 더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감정을 독일의 ‘시기심 전문가’(?) 롤프 하우블은 ‘간격시기심(Abstandneid)’이라고 정의한다.

Dante's Vision of Rachel and Leah, Dante Gabriel Rossetti, 1855

마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게 한 결정적인 동기가 유대지도자들의 시기라고 전한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바라바처럼 정말 폭동을 주동한 반역자로 여기지 않았다. 단지 백성들에게 미치는 그의 영향력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자신에게 끌려왔다고 확신했다. 시기에 해당하는 ‘fqovno"’(phthonos)는 야고보서 5:4을 제외하고는 나쁜 의미로 등장한다. ‘부러움, (질시를 통해 나오는) 악의, 원한’이란 의미를 지닌다. 프도포스는 예수님을 빌라도에 넘겨주고 십자가에 처형시킨 감정이다. 속량 받지 못한 삶의 특징이다.

 

1. 시기와 질투 앞에 누가 서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 보다는 정치적 반역자로 몰아갔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바라바와 함께 반역을 꾀하였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세 개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빌라도가 이미 세 사람의 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하여 준비토록 명령했다는 사실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예수님을 이토록 세상 권력을 이용하여 죽게 한 것은 종교지도자들은 시기일까? 질투일까? 둘 다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였다. 자신들이 갖지 않는 백성들에게 미치는 예수님의 영향력을 인하여 행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을 질투하였다. 그의 영향력이 클수록 자신들의 기득권을 상실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처럼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는 예수님이 백성들에 의해 칭송받는 것처럼 보이는 이익을 얻는 자들을(advantages) 향해 배 아파하는 것이다. 영화 ‘Amadeus’에서 궁중음악가 살리에르는 망나니같은 모차르트의 천재적인 재능을 시기하는 마음이 점점 질투로 발전한다. 시샘은 시기로, 시기는 질투로, 질투는 증오로, 증오는 결국 ‘진혼곡’을 쓰도록 강요하여 과로사로 몰고 간다. 투기 앞에 설 자가 없음을 보게 한다. 훗날 노인이 된 살리에르는 자책감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물론 영화는 허구를 담고 있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 그리스도를 넘겨주게 되는 유대인들의 시기

마태는 바라바를 유명한 죄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악명 높은 ‘lh/sth"’(레스테스)였다. 레스테스는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아마도 반란 음모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26:55; 요 18:40). 반역행위는 사형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이런 악명 높은 반란자를 두둔하고 예수님은 넘긴 것은 어떤 연유인가. 마태는 종교지도자들의 예수님과 백성들에 대한 그의 대중성을 시기를 여러 차례 기록하였다. 게다가 예수님의 권위 있는 사역은 종교지도자들의 전체 삶의 방식에 큰 위협이 극에 달하자, 그들은 이제 그를 제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빌라도는 그들이 로마 통치에 위협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들의 안전과 자리를 위협하는 예수님의 인기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시기함으로 십자가 처형을 요구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기에 눈이 멀고 질투의 화신이 된 것이다. 바라바가 악명이 높은 지 탁월한지 구별이 안 된 것이다. ‘시기’라는 병에 걸리면 사리를 분별할 수 없다.

시기에 해당하는 영어는 envy다. 라틴어 ‘자세히 주의하여 보다’라는 뜻을 가진 invideo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보다’라는 뜻을 가진 invidia에서 유래했다. 히브리어 킨아는 비슷하게 ‘마주치다’(삼상 18:9)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주인이 불평하는 종에게 ‘네가 악하게 보느냐’(20:15; 막 7:22)의 표현은 ‘시기’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미국 켄터키대 심리학 교수인 리처드 스미스는 ‘샘통의 심리학’에서 히틀러의 수석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저자는 히틀러가 ‘내심 유대인을 동경하고 질투했다’고 분석한다. 병적인 질투가 증오로 이어졌고, 증오가 결국 대학살의 비극을 낳았다는 분석이다. 히틀러의 병적인 질투를 유대지도자들에게서 보게 된다. envy는 고통과 분노가 혼재하는 감정이자 타인의 번영과 행복에 대해 불쾌하게 느끼는 것을 말한다. 시기와 질투에 해당하는 ‘zh'lo"’(젤로스)는 일반적으로 ‘열심’으로 번역된다. 그 열심은 ‘열정적인 헌신(commitment) 능력이나 그러한 상태로서의 열심’이다(요 2:17; 롬 10:2). 이 단어가 복음서에서는 시편 69편을 인용한 요한복음 2:17에만 나온다. 그것은 의인의 열심을 가리킨다.

무모한 열심은 그리스도인들이 피해야 할 것이다. 질투가 외부를 향한다면 열등감은 내부를 향해 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나쁜 의미로는 ‘질투, 시기, 경쟁, 다툼’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시기에 해당하는 프도포스는 언제나 악한 일에 사용되었다. 시기는 남아 잘 되는 것을 싫어하고 샘하여 미워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부모의 편애, 사회적으로 경쟁의식이나 차별, 개인적으로는 실력이나 배경, 외모 등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유대지도자들은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백성들의 인기를 예수님이 갖고 있는 것을 시샘하였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들의 불쾌한 감정이 시기다. 또한 자신보다 훨씬 더 능력을 행사하며 인정을 받을 때 자신의 자리에 위협을 느끼고 불안과 고통과 분노를 느낀다면 질투다. 다른 성도의 은사를 통해 섬기는 것을 보고 고통하고 분노하며 그의 섬김과 행복에 대해 불쾌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복합적인 감정인 시기와 질투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넣게 만든 것이다.

3. 시기를 내려놓는 것이 아름답다

구약성경에 시기에 사로잡혀 악을 행한 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인다(창 4:5-6, 8). 악의는 상대방의 성공을 못마땅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가 가득찬 마음이다. 악의에 찬 인간은 인생의 기쁨을 자신 안에서 찾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찾는다. 사라가 잉태한 하갈을 시기하여 학대한다(창 16:5-6). 라헬은 남편을 차지하기 위하여 레아에게 시기한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미디안 상인들에게 판다(창 37:19-20). 대표적인 인물은 다윗을 시기한 사울은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시기와 질투의 무서운 파괴력을 경고한다. ‘투기 앞에 설 자가 아무도 없다’(잠 27:4). 또 시기는 뼈를 썩게 하고(잠 14:30),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고(아 8:6),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한다(갈 5:19-21). 한국인이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인들은 일찍부터 사교육과 입시 경쟁에 내몰리면서 경쟁을 먼저 배우고,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항상 자신과 남을 비교하고, 그 과정에서 시기·질투심에 사로잡힌다. 베스트셀러였던 Eric Weiner의 ‘행복의 지도’를 보면 스위스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시기심이 행복의 커다란 적이란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비교 경쟁 지향이 다른 나라에 비해 강하다. 이런 높은 사회적 경계심, 즉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걱정하는 성향은 불필요한 시기와 질투심, 스트레스, 불평을 유발할 수 있다. 시기심을 내려놓을 때 행복할 수 있다. 아름다운 인생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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