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혜(에반겔리아 대학교 교수)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장이들과 같다. 우리가 좀 더 멀리 그리고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시력이 뛰어나거나 키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거인의 거대한 몸집이 우리를 높은 곳에 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더 멀리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에 서있기 때문이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76)이 인용한 이 유명한 문구는 12세기 버나드 샤르트르 (Bernard Chartres, d. 1124)란 사람에게 소급된다. 뉴턴이 자신이 이룬 과학적 업적이 앞서간 많은 사람들의 성취 위에 세워진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는 이 말은  눈부신 과학과 기술 문명의 혜택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대도 역사 속에 먼저 살다간 위대한 인물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기억하게 한다.

교회사의 인물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가 서있는 오늘 날의 교회의 모습을 이해하고 교회의 앞날을 좀 더 잘 보려면  이천년 교회역사의 물줄기 가운데 우뚝 솟은 신앙의 스승들의 어께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절박함에서다.  그들을 만나보기 위해 고서더미 속을 더듬으며 시간을 거슬러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출발점은 사도행전이 적절한 것 같다. 신약교회가 태어나고  빠르게 확산되는 초기 교회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믿을만한 사료를 검증하는 역사가의 뛰어난 면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헬라인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하고, 바울의 가까운 동역자로 복음의 여정에 함께했다. 사도들을 비롯해서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과 신뢰할만한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여 예수님의 생애와 초대 교회의 탄생을 자세히 기록한다.

강순혜(에반겔리아 대학교 교수)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복음서에서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였던 시대에  유대라는 한 변방에서 태어난 예수란 분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역사의 세계에 사람의 아들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이야기다. 이어지는 사도행전에서 열두 사도들과 바울을 비롯한 초기 제자들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지중해 연안의 로마제국으로 전파되면서,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는 모습을 전해준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비록 영어의 몸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 가운데 셋집을 얻어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로(사도행전28:16, 30) 사도행전의 막을 내린다. 사도행전은 배반자 가룟인 유다의 죽음과 첫 순교자 스데반 그리고 사도 야고보의 순교를 기록하고 있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선교의 불꽃이 확산되면서 소아시아,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에 교회가 세워진다. 그 이후에 사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여러 사도들의 뒷이야기는 더 이상 전해주지 않는다.이제 사도들 중에 첫 순교자가 된 사도 야고보로부터 시작해서 전해 오는 기록의 조각들을 살펴 교회사에 우뚝서 빛을 발하는 교회의 스승들을 만나보려한다.

성경에는 적어도 세 명의 야고보가 등장한다. 예수님의 형제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그리고 오늘 살펴볼 사도 야고보이다. 교회사에서는 대 야고보 (James the Great)이라고도 부른다. 사도 야고보는 세배대와 살로메의 아들이면서 사도 요한과는 형제였다. 예수님의 최측근 삼인방 제자 중에 하나로 늘 베드로 다음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이 세 제자들만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는 현장이나 변화산 등 특별한 사역현장에 데리고 가실 정도로 그들을 가까이 하셨다.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는 자식의 출세를 위해  열성을 다하는 치마바람이 센 여인이었던 것 같다. 하루는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을 하면서 주의 나라의 우편과 좌편의 자리를 아들들에게 주도록 청탁하였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한다(마가복음10:39). 이것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이 두 형제에 대해 분노하는 것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은 모르긴 해도 평소에  제자들 사이에서는 좀 우쭐거렸을 거라 생각이 든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별명은 “보아너게” 곧 “우레(천둥)의 아들”이었다, 예수님이 직접 붙여 주셨다. (마가복음 3:15).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 길에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곳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는 것을 보고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호기를 부리다가 얻게 된 이름일 것이다(누가복음 9:54).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보게된 직후여서 그럴만도 했겠지만 주님으로부터는 호된 꾸지람을 듣는다. 이 형제는 주님을 향한 열정도 뜨거웠고, 성격이 급하고 과격했던 것 같다.

누가는 야고보가 헤롯 아그립바 왕에 의해 칼로 목베임을 당해 순교했다고  전해준다. 주후 44년 경이다.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자신있게 대답하던 야고보는 결국 제자들 중에서 가장 먼저 순교의 잔을 마셨다. 만일 주의 나라에 좌의정과 우의정 자리가 있다면 혹 야고보가 거기 앉아있는 것을 보게될지도 모를 일이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 야고보가 헤롯의 칼날에 죽임을 당하고 신실한 성도들이 박해를 받을 당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하셨다. 이 일로 위기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된다. 야고보의 순교는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시간이 꽤 지난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야고보(예수님의 형제)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가 흘린 순교의 피 위에 더 든든히 세워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교부 터툴리안 (Tertullian of Carthage, 160-220경)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of Caesarea, 260-340경)는 “교회사”에서 클레멘트 (Clement of Alexandria)의 저서 “하이포타이포세스”(Hypotyposes)를 인용하여 야고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클레멘트는 연세가 높은 노인들로부터 듣게된 이야기라고 한다.

“야고보를 재판석으로 호송해 가던 간수는 야고보가 증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감동을 받은 그 사람은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끌려가게 됩니다. 도중에 그는 야고보에게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야고보는 잠시 생각하더니, ‘당신에게 평강이 있을지라’고 말하고 입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목베임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야고보는 40년경 스페인에 가서 전도하였고, 유대로 돌아 갔다가 예루살렘에서 헤롯 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의 제자들은 야고보의 시신을 배에 실어 스페인으로 보내 콤포스텔라에 장사했다고 한다. 이 전설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에피파니우스 (Epiphanius of Salamis, 약 310-403))는 야고보가 결혼하지 않고, 나실인으로 살았다고 전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역사에서는 전설이 신화가 되어 역사적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중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  

9세기 초 스페인 콤포스텔라 지역의 한 감독이 야고보의 유골을 발견했다면서 기념 성당을 짓고 순례의 길을 만들어 “야고보의 길” (El Camino de Santiago)이라고 이름지었다.  성지가 된 이 곳은 중세에는 로마와 예루살렘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순례객들이 찾던 곳이었다. 지금도 한해에 이십만명 정도가 이 길을 걷는다고 한다. 그를 기념하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은 오랜 세월 동안 증측되고 꾸며지며 고풍스럽고 웅장한 건물로 변모되고 번쩍이는 교회당의 내부의 유골함과 번쩍이는 기괴한 형상들의 금장식으로 많은 순례객들과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명소가 되었다. 야고보의 전설도 순례길에 얽히고 섥힌 이야기들까지 더해져 터무니 없이 화려하고 과장된 신화가 되어버렸다.

켜켜히 덧입혀진 신화를 벗겨내면, 지난 세월 동안 거짓 유골과 화려한 외향에 현혹되어 땅끝이라 생각되던 그곳을 찾왔던 순례객들에게, 그 길에서 삶의 의미와 진리를 찾아 헤매이는 현대의 순례자들에게 사도가 죽음으로 전했던 복음의 소리가 귀에 들릴까? 온갖 세상의 우상을 마음에 가득 품고 있으면서도 신앙의 순례길을 가고 있는 중이라고 착각하는 현대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참 신앙의 길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지 들려주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주님은 야고보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는 “할 수 있나이다”고 대답했다. 사도들 중에 첫번째 순교자가 된 야고보는 교회의 앞날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길임을 보여주었다.  사도는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를 향해서도 웅변적으로 외치고 있다. 말로 하는 고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며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제자들의 삶이 교회라는 것이다.    

야고보사도를 이어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던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 이렇게 경고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서 1:1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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