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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칼럼】 순전하신 주님의 순전한 교회순전한 기독교 (1)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순전하신 하나님 순전한 교회

거룩하신 하나님은 온전히 순전하시기에 섞임을 싫어하신다. 좌로나 우로 기울어지는 것을 경계하심은 섞임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에 부합된다. 하나님의 기준은 언제나 공명정대하다.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다. 이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다. 길이에 짧거나 길면 정한 길이에 맞지 않음으로 죄가 된다. 빠르거나 늦으면 정한 때와 다름으로 죄가 된다. 우상의 본질은 혼합과 그로 인한 변질에 있다. 뿌리로서의 교회는 순결함에서 시작되었다.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하고 열매도 거룩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교회는 거룩함을 한시라도 잃어서는 아니 된다. 이는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그리스도를 닮은 본질적인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소 잃고 변한다 해도 거룩함만은 끝까지 지켜서 보존해야 할 교회다움의 마지노선이다.

천상교회의 거룩함은 지상교회의 거룩함을 보장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귀담아 들어야 할 음성이다. 거룩함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다. 거룩함에는 순결미와 엄숙미가 조화를 이루어 빼어난 아름다움을 보인다. 간혹 교회가 고리타분해서 욕을 먹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오히려 거룩함을 잃고 거룩함의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모습에 식상한 세상이 내린 비평임을 기억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 혹평의 화살을 겨누셨던 주님은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향해 시위를 당기시곤 하셨다. 그들에게는 지킬 만한 가치로서의 가르침 자체라도 있었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가르침마저 없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거룩함 곧 순전함을 잃으면 교회는 세상에 의해 타격 대상이 된다.

 

십자가로 만족 못해 변질되는 교회

오늘날 세상에게 지탄을 받는 것은 교회 고유의 거룩함이 아니라 변질된 모습이다. 순전한 복음 위에 뿌리를 내린 기독교는 오롯이 순전하다. 순전함이 사라진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니다.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온전케 하는 이인 그리스도는 순전하신 분이다. 하나님께 창조된 인간의 원판은 온전함이 그 특징이었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창조되지 않았다.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미와 지혜에 있어 완전했으나 죄가 인간이 지녔던 원래의 완결미를 망가뜨려버렸다. 죄는 영혼의 순전함에 불순물이 섞인 결과다. 죄가 빼앗아간 것은 인간 영혼의 순수함이다. 죄 안에서 영혼은 혼돈에 갇힌다. 정신도 혼미하고 생각도 혼란스럽고 말도 혼잡스럽다.

순전한 기독교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십자가와 부활이면 족했다. 사랑과 용서면 해결 못할 문제가 없었다. 주님의 이름 하나면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제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기본 사양에 소위 권장 사양이란 것을 덧붙인다. 다변화된 세상에서 의미 있는 접촉점들을 찾고 세계적 현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함이라면서 교리란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덧댄다. 사랑과 용서도 문제 해결에 거침돌이 되었다. 사랑도 사랑 나름이고 용서도 용서 나름이다. 기준이 복잡해지고 적용이 까다롭게 되었다. 사랑을 하지만 사랑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용서를 하지만 용서가 실제로 느껴지지 않는다. 순수 기독교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거룩한 교회 고결한 언어, 혼잡한 교회 불결한 언어

마음에 순수함이 사라지니 생각이 더러워지고 언어가 저질스럽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는 바울의 권면은 매우 실제적인(practical) 교훈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입술에서 구정물이 흐르게 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는 말은 선한 말이니 그런 말을 쓰기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은 주문이나 구호가 아니라 삶에 적용시킬 내용이다. 그렇게 계속 연습하다보면(practice) 실천이 몸에 배어 습득이 된다(praxis). 마음이 깨끗한데 생각이 더러울 수 없고 생각이 불결한데 말이 고상하게 흘러나올 수 없다. 모든 악한 것들은 생각이든 말이든 마음에 간직한 것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골프나 스키나 대부분의 운동은 실제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다보면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것을 넘어서서 근육 자체가 그 모든 동작을 기억하는 경지에 이른다. 몸에 밴 것이다. 언어는 습관이다. 거룩함의 연습은 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입에 자갈을 물리고 언어가 튀어나가기 전에 파수꾼에게 반드시 점검을 받도록 하라! 세 치 밖에 되지 않는 부드러운 혀 아래에 날 선 도끼가 들어 있음을 잊지 말라! 설참신도(舌斬身刀)란 말 그대로 혀야말로 제 몸을 베는 칼이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다. 거룩함에 온전함을 이룬 사람이 된다.

 

변질과 더러움에 물들어가는 교회

교회의 출발은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활력이 넘치고 사랑과 생명 능력에서 주변을 놀랠 만큼 탁월했다. 교회의 현실이 워낙 그런 삶에서 동떨어져서 그런지 사도행전에 묘사된 원시공동체의 삶은 신화의 한 토막으로 전해질뿐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는 변화무쌍한 세상에 자신을 맞추려다 적절한 변화를 지나쳐 변질의 수렁에 빠졌다. 변질은 맛사탕처럼 영적 미각을 바꾼다. 인간의 본성은 볼썽사납게 되고 영혼을 마비시키는 것들이 구미를 당긴다. 변질에 익숙한 사람들은 원색적인 복음을 새로운 율법주의라 정죄한다. 거룩한 원칙을 근본주의라 매도하며 복음에 뭔가를 적당히 뒤섞는다. 섞이지 않은 복음은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 거들떠보지 않는다. 아, 복음이 활기찼던 옛날이 그립다.

돈과 섹스와 명예! 검은 스캔들의 내용들이다.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워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현실이 무마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과 우리 각자는 지체로 연결되었다. 내가 원한다고 연결 되고 원치 않는다고 상관없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이미 연결되었다. 홀로 거룩함을 지킨다 해서 거룩한 지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체의 한 부분이 더러워지면 나머지 건강한 쪽도 해를 입는다. 지체이기 때문이다. 내 입에 더러운 말을 담지 않았다 해서 내 영성이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죄 앞에 침묵함은 부끄러운 일이다. 죄에 참예하지 않음이 아니라 침묵함으로 공범이 된다. 아간의 일은 내 일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도 내 일이다. 다윗의 넘어짐은 나의 실족이며 가룟 유다의 배신은 나의 반역이다.

 

악에 대해 일발 필살을 날리는 교회

형제의 악을 무마하려 말라! 덮으면 속으로 곪는다. 곪아 터질 때 미칠 파급을 생각한다면 썩은 환부는 빨리 도려낼수록 좋다. 홀로 울분을 토하고 말로 비분강개를 외쳐보았자 공염불에 불과하다.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다는 일이 쉽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한다. 복수심이나 원한에 사무친 결정이 아니라면 공의의 칼날은 예리할수록 좋다. 악은 단칼에 베어야 한다. 잽처럼 날리는 순간의 가격에 죄는 맷집이 강하다. 단 한방이면 족하다. 루터가 내리친 방망이질처럼 일발 필살의 한방이 필요하다. 기도와 말씀의 실제적인 강훈에 돌입한 자만이 이런 경지에 들어선다. 이 한 방의 일발 필살을 사탄은 두려워한다.

이 시대의 쌓인 죄가 가닿을 끝머리는 어디일까? 앞이 보이지를 않는다. 더러운 언사를 입에 담으면서 목자가 양을 유혹한다. 그것을 파격이니, 새로운 패러다임이니 하는 요설로 대중을 기만하는 소리꾼들을 추방해야 한다. 그런 그들을 목자라 부를 것도 없다. 이리가 목자 행세를 하면서 목자장의 거룩한 이름을 들먹인다. 원수의 앞잡이들은 양의 옷을 입고 분별력 잃은 목자에게 미끼를 던진다. 덥석 무는 순간 지옥의 문이 열린다. 사탄에게 코가 꿰인 지도자는 공공연하게 악을 저지르며 교회를 파괴한다. 이단의 영이, 탐욕의 영이, 분열의 영이, 음란의 영이 교회의 거룩함을 파괴하고 성도들의 영혼을 오염시킨다. 성령의 탄식하는 소리가 하늘 꼭대기에 닿았다. 심판은 이르지를 않고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마냥 더럽힌다.

 

마비된 양심은 거룩한 연대도 무너뜨려

마비된 양심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세상은 신나는 구경거리에 흥얼거린다. 주님의 마음을 읽는 소수자들은 말없이 눈물 흘리며 그들의 죄 짐을 지고 높은 산에 오른다.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워 인적 드문 심산유곡을 찾아 엎드려 구로한다. 아이를 낳는 고통을 삭이면서 대신 고통당한다. 그들이 토해내는 것은 지체를 위한 고통이며 동일시로 인한 통회 자복이다. 심판의 칼을 가는 소리가 들리지만 악행은 그치지를 않고 거룩한 교회는 세상의 입방아에 난도질을 당한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남겨줄 유산이란 것이 없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무엇을 위한 설교이며 누구를 위한 선교인가? 기도가 앞서는가? 돈이 앞서는가? 사명이 앞서는가? 의욕이 앞서는가? 비전이 꿈틀대는가? 야망이 불끈 치솟는가? 주린 영혼이 슬퍼 보이는가? 빈 지갑이 걱정스러운가? 천에도 만족 못하고 오천에도 오르막만 쳐다보는가? 사택의 평수가 신경 쓰이는가? 영적 전쟁에서의 점령지에 마음 머무는가? 신학생 시절에 정다웠던 친구가 섬이나 도시 빈민촌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대형교회를 담임하는 그대에게 여전히 친구요 형제로 절감되는가? 그대 스스로 큰 자라 여기는 한 그대는 한없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인간이다. 근본을 모르는 인간은 하나님도 외면하신다.

 

성령의 능력인가? 속이는 장치인가?

목회의 크기를 인격의 크기로 오해 말라! 무능력한 목회 현장을 두고 하나님의 임재 여부를 예단치 말라! 하나님은 망할 영혼에게 먼저 영광과 성공을 한 아름 안기심을 명심하라! 청중의 귀를 간질이는 그대의 설교에는 이미 하늘의 메시지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즐거운 소리를 듣고 기뻐한다. 눈물도 흘리고 기뻐한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속이는 장치들 덕분이다. 왜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공동체를 에워싼 것이 불기둥인가? 구름기둥인가? 아니면 욕구 충족에 맛들인 인간 사슬의 천 겹 만 겹 싸임인가? 기계처럼 움직이는 율동 사이로 지옥의 화염에서 고통스런 몸짓을 하는 잔영(殘影)이 보이지 않는가? 홀연히 세상을 떠나갈 수 있는 영혼들을 위한 절박한 호소가 그대의 메시지 어느 부분에 실렸는가?

최고 성능의 마이크 시스템, 현란한 조명 장치, 능숙한 찬양팀들, 절묘한 예배 순서와 박진감 넘치는 진행, 거울 앞에서 갈고 닦은 음의 고저강약과 표정과 제스쳐의 구사, 그런데 외치는 메시지에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인가? 열 구절이든 스무 구절이든 인용되는 성구를 암송해서 피가 되고 살이 되게 영혼에 삭힌 그런 내공, 그래서 청중의 눈과 눈을 마주치고 래포를 이루며 말씀의 종답게 스러져가는 그런 끝맺음이 어디 있는가? 무덤덤하게 살다 무덤에 묻혀버릴 영혼을 향해 하나님의 절절한 호소를 외치다 불말과 불병거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게 될지라도 침묵을 거절하는 당찬 열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대 첫사랑의 흔적이다. 이런 소명의 첫 걸음, 헌신의 첫 엎드림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그대의 영혼이 주님을 뵐 낯은 결코 없을 것이다.

 

주님이 머리신가? 사람이 머리인가?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머리 되신 주님께 순종하여 지체를 돌보며 몸을 이루는 것이다. 머리이신 그분은 우리의 왕이요 주님이시다. 그분께 합당한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 지금의 교회에는 머리가 없다. 엉뚱한 머리들이 우두머리가 되려 하니 머리 없음과 똑같다. 그야말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다. 예수 이름을 내걸지만 허울뿐 이글거리는 것은 인간의 탐욕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한다. 구약 시대라면 불벼락을 맞을 짓이다. 교회가 본질을 잊으면 스스로 왕 노릇 하려 한다. 주님은 뒷전이고 모든 것에 주님의 이름을 내세워 주무른다. 이를 비판하면 자중지란이라며 내부 고발을 죄악시한다.

정도를 넘어선 언론이 있긴 하지만 불의에 침묵하는 것보다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이 백 번 낫다. 기독 언론을 통한 자성의 목소리마저 없으면 기독교의 자정 능력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특종감에 눈이 멀어 폭로성 기사를 다루는 기자는 성토되어야 한다. 향응 액수에 따라 진위를 조작하는 사이비 글쟁이들은 퇴출시켜야 한다. 여론을 조작하고 돈 봉투의 굵기에 따라 인기의 서열을 만지작거리는 재간꾼들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텃밭이나 일구며 살게 해야 한다. 시대의 파수꾼이 되고 진리의 등대로 서리라 다짐하며 붓을 들었다면 초지일관 그 길을 가야 한다. 교회는 아픈 곳을 찔림 받았을 때 겸허히 고개 숙여야 한다. 거북이처럼 움츠려든 머리를 머리 되게 하고 갈 길을 가야 한다.

교회는 인간이 만든 조직 중에서 신선도가 가장 높아야 한다. 교회를 이 땅에 세우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교회도 죄에 물든 인간들이 모인 집단이다 보니 온전할 리가 없다. 한두 명이면 교회를 비평거리로 만들기에 충분한 숫자다. 교회는 선행이 부족하거나 선교에 열심이 식어 욕먹는 것은 아니다. 많은 선행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한두 가지 악행이다. 따지고 보면 억울한 일이지만 어쩌랴! 교회에 거는 기대감만큼 세상이 교회에 적용하는 도덕적 잣대는 세밀하기 짝이 없다. 어느 교회든 털면 먼지가 일어난다. 세상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사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가 그 순전함의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순전함이란 교회의 얼굴이요 영혼에 다름 아니다.

 

한명철 목사  jesuspoin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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