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는 안수 받은 사람들만의 받은 특정직임이 아냐

 

김태연 목사(한국전문인선교원 원장, 전 명지대교수)

자비량 선교 혹은 텐트메이커(tentmaker)에 대한 성경적 이해

먼저 전문인 선교사의 정의부터 살펴보아야 하는데 사실 현재 한국교회 내에서는 전문인 선교사의 정의에 대하여 약간의 혼동이 있다. 초기에 텐트메이커의 개념을 제시한 Christy Wilson Jr.에게 있어서 텐트메이커(tentmaker)의 의미는 자비량 평신도 단기 선교사로서 자비량이 그 강조점이었다. 그러나 최바울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현재 한국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는 텐트메이커의 개념 혹은 전략은 주로 정규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없는 지역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문직을 강조하는 것이고 오히려 대부분이 전임 선교사들을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는 테드 야마모리가 언급하는 passport skill(제한적인 선교지에 입국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전문직종을 이용하는 것이다. 만약 현재 한국교회가 텐트메이커의 개념을 이러한 Christy Wilson의 자비량, 평신도, 단기 선교사가 아니라 단지 passport skill로서 볼 경우는 이 전문인 선교사의 존재라는 것은 사실 신학적 조명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전략적 방법론 중의 하나일 뿐이다.

흔히 사도 바울을 텐트메이커 선교의 원조로 말하는 데 이는 위의 개념에 따라서 볼 경우 여러 가지 차이점들이 있다. 우선 바울의 텐트 메이킹은 창의적 접근지역에 접근하기 위한 전략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passport skill의 개념으로 텐트메이커 선교를 사용할 경우 성서의 바울 선교를 그 근원이나 성서적 원형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바울이 100% 자신의 직업에 매달렸던 전문인이었는가에 대하여서도 의문이 많다. 바울은 전임선교사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가 장막을 만드는 일에 절대적인 시간을 소모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그의 사역이 자비량의 원리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행 20:34) 그는 때로 후원금을 받기도 하였고 이런 후원제도를 원칙적으로 인정도 하고 있었다(고전 9:6-14). 그가 장막을 만든 이유는 전문인으로서 선교하려는 전략적인 이유였다고 보기는 성서적 근거가 약하고 오히려 그는 필요한 선교비를 벌고 또한 당시 돈을 탐내어 사역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 반감에 대하여서 반대되는 모델을 보이기 위한 그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유래된 재정정책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사역자가 급료나 생활비를 지급받는 것을 일반 사회가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오늘날에도 바울이 장막을 만들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전문인 선교는 목사 선교사와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를 모두 포함하는 제3의 길로서의 새로운 전문인 선교라는 것이다. 이러한 창의적 접근지역에 passport skill로서 사용되는 전문인 선교는 오늘날 상황에서 필요로 되어지는 전략적인 방법론의 하나가 아닌 총체적 선교로, 전천후 선교로 취급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선교사는 안수 받은 사람들의 전유물인가?

선교사는 특정한 안수 받은 사람들의 특정직임은 아니다. 전신자선교사주의에 근거하여서 모든 사람들이 선교사 직임을 가질 수 있다. 다만 선교사 직임은 교회의 인정된 파송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신도이든 단기 선교사이든 어떤 의미의 전문인 선교사이든 이들이 선교사 직임을 가지고 있는 선교사로 호칭되어지기 위해서는 교회의 인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의 인정을 받아 파송되어진 사람들은 안수 받은 자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선교사 직임을 가질 수 있다.

한국교회의 전통은 지금까지 평신도를 선교사로 부르기를 주저해 왔다. 초기 동아기독교도 안수 받은 자는 선교사로, 평신도는 전도인으로 구분하여 호칭하였다. 장로교측도 초기 이 기풍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할 때 동행한 사람들을 전도사, 권서인 등으로 구분하여 호칭하였다. 장로교는 지금도 목사 선교사와 평신도 선교사의 호칭을 구분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점차 서구 단체들이 평신도와 특히 여성들을 선교사로 부르기를 망설이지 않게 되고 단기 및 전문인 선교사가 늘어나면서 변화되어지고 있다. 현재도 선교인으로 부르는 것을 제안하는 목사가 있다. 문제는 선교의 주체자가 누구냐는 것보다는 선교의 기능을 어떻게 잘 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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