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우리를 통해 향기로운 예수의 냄새를 그리워한다

최원영목사. 본헤렐드 대표, 본푸른교회담임.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변화산기도원협력목사, 등

두 부류의 신앙인을 만났다.  A목사는 상가 교회를 월세로 임대했다. 건물주와 상가를 계약할 때 건물주는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2년이 지난 후에 자신은 서울의 대형교회 권사라고 했다. 그리고, 평당 관리비를 요구했다. 교회는 보통 수요일, 금요일, 주일에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일반 상가는 매일 상업용으로 하기에 평당 관리비가 적절하겠지만, 교회는 사용빈도가 적다. 내가 쓴 만큼 내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런데 건물주는 평당 관리비를 요구했다. 건물주는 관리비를 통해서 조금 더 이익을 얻기 위해서이다. 작은 교회 목사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요구하는 대로 다 주었다. 건물주인 권사와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목사와 권사가 작은 이익 앞에서 서로 다투다보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잃어버릴 것 같아 알면서도 참았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B신앙인을 만났다. 이분은 상가를 보증금 2천만원에 월세 50만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십일조 개념으로 임차인에게 1년에 한번 월세를 안 받는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세입자들은 열심히 살고 있다. 어쩌면 삶의 경계선에서 고통과 갈등의 나날을 보낼 수 도 있다. 일년에 월세 한번 안내면 온 식구가 한 달 생활할 수 있는 단비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세입자 입장에서는 잊을 수 없는 단비와 같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B신앙인은 자신의 행동을 “은혜의 가성비”라고 했다. 내가 베푸는 작은 선의가 상대방에게는 평생 잊지 못하는 기쁨이 될 것이다. 이것처럼 큰 가성비가 어디 있는가를 되물었다. 구약에 안식년 제도가 있다. 7년 주기의 마다, 땅을 갈지 않고 묵혀두며 가난한 자와 짐승들을 먹이고 빚을 면제해 주며 이스라엘 종들을 해방시키던 제도이다. B신앙인은 성경의 안식년 제도를 현대 삶속에서 재해석하여 세입자들에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월세 받는 사람이 일년에 한 번 안 받는다고 해서 굶어 죽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두 종교인 중에서 누가 신앙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B신앙인이다. B신앙인은 삶속에서 자신이 믿는 종교의 신념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진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신앙인은 신앙인의 냄새가 있어야 한다. 신앙인은 삶으로 말해야 한다. 그래야 복음이, 예수가 싸구려로 취급받지 않는다.

참으로 아름답다. 아름다운 꽃에서 향기도 좋다면.....

누구나 자기것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오직 나의 필요, 내 것, 내 요구사항, 내 꿈, 내 조직, 내 돈, 내 것에 관심이 많다. 끊임없이 욕심 많은 놀부처럼 세상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웅켜 잡으려고 한다. 기독교의 정신은 웅켜잡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웅켜잡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내 손의 패를 다 보여주는 것이다.

신앙인들 중에서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성경대로 살려고 했더니 손해만 보게 된다. 당연히 '자발적 손해'를 보고 사는 것이 신앙인의 길이다. 손해를 당할 때 기쁨으로 여기고 산다면, 그 사람은 팔복의 사람이요, 성결한 제자요, 부유한 신앙인이다.

신앙인들이 더 지독하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지독하게 내 것을 손해보지 않고 산다는 말이다. 내 이익 앞에서는 신앙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오직 내 것을 지키고, 더 많이 가지려고 몸부림치는 동물 근성만이 판치고 있다. 이래서 교회가 이땅에 희망이 될 수 있겠는가? 다수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소수의 그리스도인으로 인해서 한국교회가 평가절하받고 있다.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 교회를 다니지면 영적으로 변화를 받지 못한 육의 사람들로 인해 전체 공동체가 늘 푸대접을 받는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서 내 교회만 교회이고, 다른 교회는 교회로 보지 않고, 함부로 말하고, 떠들고, 비웃고, 조롱하고, 하대하는 못된 신앙인들이 많다. 교인들 중에서 내 교회 바깥에서 신앙의 냄새가 전혀 없다. 싸구려 장사치만도 못한 행동을 한다. 기독교 윤리가 완전히 실종된 모습이 너절하게 펼쳐져 있다.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신앙이 바로 구원받은 천국백성의 모습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면, 이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독일의 목사 본훼퍼는 자신의 신앙을 생명으로 지켜냈다. 당시 독일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은혜를 값싸게 보는 견해였다. 값싼 은혜는 “회개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교회의 기율을 무시한 세례요, 죄의 고백없이 베푸는 성만찬, 은밀한 참회없는 면죄의 확신”이다. 즉 순종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가 값싼 은혜인 것이다. 우리가 받고 누려야 할 참된 은혜는 반드시 올바른 순종이 있어야 한다. 은혜를 통해서 순종을 면제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서 더욱 말씀앞에 올바른 순종을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이후 성령충만한 삶을 유지해야 한다. 성령충만은 말씀앞에 가감없이 순종할 때 계속 유지되고 부어지는 은혜 위에 은혜이다. 성령충만은 삶이 동반될 때 더욱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오늘날 성령충만을 바울의 삼층천 체험과 같은 영적 현상의 차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성령충만이란 삶의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들의 신앙의 이야기를 듣고 "아멘"하는 것도 소중하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는 내 신앙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허하지 않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낼 때 성령충만은 계속 유지된다.

초대교회는 성령충만했다. 성령충만한 결과 그들은 자신의 필요를 서로 나누었고, 땅을 팔아 받쳤다. 기독교실천운동이 자연스럽게 공동체에 스며들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정신이다. 온전한 기독교 신앙이란 영육이 실재하는 것이다. 영으로 믿고, 육을 부정하려고 하면 헬라철학의 이론에 빠진다. 헬라철학의 이론이 어쩌면 현대 한국교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바울 서신은 한결같이 이론과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앞부분은 신학을 말하고 뒷 부분은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앞부분 신학과 이론은 열심히 가르친다. 그러나 뒷부분인 실천 부분을 등한시 하고 있다. 왜 그럴까? 목회자 스스로 말씀을 살지 않기에 강하게 강조하지 못하고 어물쩡 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냄새가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지, 아니면 꾸정물 냄새가 나는지 자신을 점검하라. 온전한 구원을 받으라. 생명으로 세상을 구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값싼 싸구리 은혜로 전락시키지 말라. 한국인들의 신학적 이해가 너무도 협소하다. 복음이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만으로 한정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성도의 영광스러운 삶을 통해서 온전한 구원은 이루어진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삶의 실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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