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기독교 (2)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타협의 먼지조차 거부하는 순전한 교회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는 기독교에 문외한이거나 표면적 앎에 그친 이들을 위해 난해한 내용을 깔끔하게 풀어준 일종의 해설로 기독교 변증서에 해당한다. 학문적 변증이 아니라 방송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지만 기독교의 중심 되는 주제들을 포근하게 설명한다. 어렵지 않으면서 대충 넘길 수 없고 독자를 생각으로 이끄는 것은 빛나는 지성과 통찰력 덕분이다. 한 마디로 기독교의 가르침은 순전하다. 순전함은 순결하기에 잡티가 없다. 타협을 모른다. 타협이라는 미세한 먼지조차 제거한다. 불순물은 늘 순수의 주변을 맴돌며 침투를 꾀한다. 가장자리가 뚫리면 머지않아 중앙은 쑥대밭이다. 부분이 뚫리면 전체가 뚫린다.

순전함은 일체의 타협을 거부한다. 새빨간 거짓말, 새카만 거짓말만 아니라 노란 거짓말, 하얀 거짓말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죄와 허물에 색깔을 입혀 큰 죄, 작은 죄, 용납 불가의 허물, 용납 가능한 허물로 나누지만 죄와 허물의 내용이 짙고 옅음을 떠나 죄는 역시 죄이고 허물은 역시 허물이다. 순전함을 추구하는 자는 일상의 삶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자신의 영혼을 지키려는 자세를 고수한다. 고리타분하게 여겨져도 상관없고 지나치다 혹평을 들어도 괘념치 않는다. 거룩과 상통되는 순전함은 일체의 흠과 티를 배격한다. 악과 더러움에 대해서는 늘 “전혀”(never)의 자세를 고수한다. 삶의 순전함은 영혼의 순수함에서 비롯되고 자연히 언행의 순결함으로 증명한다.

 

표면의 순전함인가 영혼의 순전함인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표면의 순전함으로 똘똘 뭉쳤지만 영혼의 순전함에서 멀었기에 순전하신 주님께 불결한 집단으로 매도되었다. 겉은 깨끗해도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겉으로는 아름다우나 안에는 뼈와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 같았다. 마음의 불결은 그들의 외식하는 삶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안이 불결한데 순결하게 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외식이 나온다. 순결한 삶을 원하면 먼저 속을 깨끗케 해야 한다. 마음과 생각을 정결히 하려면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자신의 영혼을 거룩히 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에 대비되는 “순전하고 진실하여 누룩 없는 떡”을 언급했다. 여기에서 누룩은 더러운 행실로서 음행을 지칭했다. 혹은 영적 음행인 우상숭배로 적용해도 무리는 없다.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경계시켰는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으로서의 우상숭배로 인해 그들은 영적 음행자였고 그들의 그런 생활 패턴은 제자들이 반드시 피해야 할 부류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누룩인 공동체는 온 덩이에 퍼지는 누룩의 성격상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내 변질되어버린다.

 

순전함으로 뭉친 목사의 긍지와 기품

‘목사도 사람’이라는 말은 옳지만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릴 표현은 아니다. 언제부터 술꾼들의 안주감처럼 잘근잘근 씹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못해 마냥 슬프다. 이제는 목사와 관련된 웬만한 기사가 떠도 별로 놀라지 않는다. 일상적인 현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상전벽해(桑田碧海)라면 오래 살아감이 두렵다.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세상을 등진들 누가 알아주기라도 할까? 호랑이 무서워 피한 곳에 곰이 나타났다면 피함이 해결책은 아니다. 목사도 사람이지만 모든 면에서 구별이 되어 귀감이 될 만한 구석이 몇 자락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신학교에 입학할 당시의 신학생들은 세상을 구원할 웅지와 포부로 가슴이 식을 날이 없었다. 몇 끼니 굶는 것은 일도 아니었고 한 달 식비로 원하는 책 몇 권을 사고 난 뒤 허기진 창자를 부둥켜안고 괜스레 주전자의 물로 배를 채웠던 적이 얼마였던가? 그래도 강당에 엎드려 부르짖을 때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산간벽지나 도서 지방으로 임지가 결정되어도 걱정 대신 뜨거운 마음이 앞섰다. 그렇게 평생을 헌신적으로 목회했는데 은퇴 이후의 삶이 현역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목사가 아닌 것인가? 신자들의 눈치를 살필 이유도 없으니 이제는 편안히 살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되지만 목사로서의 긍지와 기품만은 견지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도 평범하게, 아니 보통 사람보다 못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한다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을 것 같다.

 

세상과 다른 유별함이 당연한 순전한 목사

일출의 빛이 온 누리를 뒤덮는다면 일몰의 낙조 또한 그에 못지않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며 해병대 출신은 나름대로의 자부심으로 사는데 “한 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일 수는 없을까? 그런 마음과 기개로 인생 후반기를 엮어가고 싶다. 그래서 이 나이에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리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익숙하기에 열을 올린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삶은 배움의 연속이어야 한다. 아직도 배우는 것이 즐겁다. 아파도 배우고 외로워도 배운다. 요즈음은 잠자리에서도 일상의 배움을 이어가는 꿈을 꾼다. 하나님이 주신 두뇌의 기능을 제대로 쓰지 않고 죽는 것은 한 달란트 맡았던 일군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과 다르지 않다. 아인슈타인도 겨우 2% 정도 활용하고 죽었다면 보통 사람들은 어떨 것인가? 난 그래서 두뇌의 기능이 어디까지 이를지를 확인 중이다. 1,3%에서 1,4%를 향해 맹진군 중이다.

군인과 평민이 함께 가면 두 사람이 걷는다는 표현 대신에 “군인하고 사람이 걸어간다.”고 말한다. 목사는 평범한 사람 이전에 그렇게 불리는 직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이면서 사람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존재가 목사다. 이것이 부담스러우면 목사직을 반납해야 옳다. 어떤 기준에 맞춰 살아가야 함이 불공평하게 느껴지면 공평한 삶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목사에 대한 기대감은 높아야 정상이다. 목사는 신선도가 높아야 한다. 별종으로 여김 받고 박물관의 유물처럼 취급당한다 해도 어떤 별스러움을 지녀야 한다. ‘요즘도 성경을 믿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반문하는 사람들 틈바귀에서 “그렇다” 말할 수 있는 목사가 왜 흔치 않은가! 삯군은 선한 목자와 대조되는 그런 존재였는데 이제는 삯을 받고도 그 삯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이 많으니 기막힐 노릇이다. 제대로 밥값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예수를 본받아야 순전한 목사

목사더러 초인이 되라 말함이 아니다. 사람이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라는 주문이다. 사람이 죄를 지어 본래의 인간성을 잃어버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 되어 세상을 찾아오셨다. 인간성 회복을 위해서다. 목사답게 살려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면 된다. 어떻게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 수 있느냐고 말할 참인가? 본 받아 살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아주 사악한 인간이었다. 그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난 이후에 보인 삶은 이전과는 영판 다른 삶이었다.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신자들을 향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당당히 선언했다. 놀랍지 아니한가?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으면서 그렇게 말했다면 그는 천하의 사기꾼이다. 그러나 그의 당당한 주문에 태클 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보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았기 때문이다. 목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면, 아니 바울만이라도 본받아 살면 세상이 감동할 것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목사의 명칭을 그들이 바로 세워줄 것이다. 어디 목사뿐인가? 평신도들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은 입술의 외침이 아니라 실천으로 증명하는 삶에 의해 존재하며 평가받는다.

 

교회의 대적(大敵)을 대적(對敵)하는 순전한 파수꾼

안티 기독교의 핵심 세력은 타 종교인이 아니며 불신 집단도 아니다. 기독교에 치명상을 입히는 대적은 교회 내에서 암약하는 사탄의 첩자들이다.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탄처럼 그들은 기독교의 명망 있는 인사로 가장하고 산다. 그들은 권력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명예를 사랑한다. 황금갑옷을 걸친 그들에게 맘몬은 평생의 수호신이다. 진리 전달에는 눌변이나 거짓으로 대중을 호도함에는 능변이다. 그들은 잘 죽지도 않는다. 도마뱀처럼 꼬리가 잘려나가도 이내 복원된다. 서바이벌의 명수다.

악인 중에 장수자가 많음은 희한한 일이다. 그들에게 회유당하는 영혼들이 늘어간다. 어떤 교회도 사탄의 침투공격에서 안전하지 못하다. 교회공동체가 진리로 안팎이 싸이지 않으면 언제라도 당한다. 누구나 바른 진리에 서지 못하면 분별력이 약해져서 사탄의 올가미에 조이고 덫에 걸린다. 교회는 영적 분별력이 뛰어난 진리의 파수꾼이 곳곳에 포진해야 한다. 진지한 말씀 연구를 통해 진리의 깊이를 지닌 통달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안티 기독교의 호적수를 기르는 일은 교회의 결속을 위해 절실하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의 말씀에 집중, 몰입하여 말씀을 터득하게 해야 한다.

 

교회의 변질은 순전한 신부의 정절을 더럽혀

주님의 신부로서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누구도 순결한 교회가 지닌 이 영적 특권을 대치하지 못했다. 주님의 사랑은 완전했고 뜨거우며 변함이 없으셨다. 교회도 주님을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했다. 다만 지속적이지 못했다. 교회는 욥처럼 하나의 눈길을 갖지 못하고 자주 곁눈질을 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너무 자주 정절을 더럽혔다. 다섯 남편을 갈아치웠던 여인보다 교회가 품에 안았던 기둥서방들이 더 많았다. 지금 동거중인 대상은 분명히 주님이 아니다. 주님이라면 교회의 모습은 지금과 완연히 달랐을 것이다.

주님과 교회의 사랑에 이상 전선이 형성되었다. 주님의 애정이 식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변질된 사랑이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지게 만들었다. 호세아의 품을 떠나 옛길로 돌이켰던 고멜처럼 교회는 번번이 감싸주시는 주님을 밀쳐냈다. 이제 주님의 사랑은 미움으로 변했다. 증오의 의미가 아니라 거절당한 사랑에 대한 아픔에서다. 애증의 대상이 된 교회는 오늘도 주님의 눈에 눈물을 고이게 한다. 이 부끄럽고 상스러운 죄를 어이 할 것인가? 교회는 돌이켜야 한다. 소시의 애호자이신 그분(렘 3:4), 남편 되신 그분(렘 3:14)께 말없이 돌이켜야 한다.

 

호세아의 긍휼로 조국 교회를 품으소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배역한 이스라엘을 향해 줄기차게 외쳤다. 그의 전체 메시지는 “남편 되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이 돌이키기를 그토록 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심은 자신이 겪은 불행한 결혼의 광야에서 터득한 바다. 고멜은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나 고멜을 찾아간 것은 호세아의 긍휼이었다. 이스라엘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난 역사의 거울이 내비쳐주는 것은 목이 곧고 뻣뻣한 그 백성이었다. 이전에도 애굽과 앗수르, 앗수르와 바벨론의 품을 번갈아 가며 눈웃음을 지었던 이스라엘이다.

그 어느 민족보다 창기 기질이 강했던 이스라엘이 본 남편인 여호와께로 돌이키지 않을 것임은 호세아도 알았고 하나님은 먼저 아셨다. 그래도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이 예언자 된 호세아의 소임이요, 그렇게 메시지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이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가실 것이다.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슬로 임하실 때에 그들은 레바논 백항목 같이 피어날 것이다. 긍휼의 주님! 손수 사랑해 안으셨던 조국교회를 외면치 마시고 찾아 주옵소서! 이슬처럼 내려 덮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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