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 간동교회 담임목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필요한 것은 공감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사람에게 공감대를 느끼고, 그에게 같은 크기의 관심을 기울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성난 군중들은 “우리에게 빵을 달라”고 외쳐댔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뜨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왜 이 난리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처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관심도 없었단 말이지요.

공감대를 가지는 것은 겉으로는 쉬워 보입니다. ‘그까짓 거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상대방의 처지를 나의 일로 받아들이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의 경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모두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의 일처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본다면 많은 부분에서 공감대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 앙투아네뜨 왕비의 시녀는 그녀의 처지에서 너무나 잘 알아듣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왕비가 시녀에게 “혁명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 시녀는 “혁명은, 제가 왕비가 되고 왕비 마마가 제 시녀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먼지 나는 사막 길을 지나는 동안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 만나고 사명을 받았는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전혀 이방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으로 변화되어 있었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십자가를 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방인들을 대했고, 사랑하고 품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풍부한 지식을 가졌지만, 지식을 자랑하려고 앞장서서 훈계한 것이 아니라, 무식한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기 위해 겸손한 자세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의 모든 서신들은 그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보여줍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단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 관심이 그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처지를 알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우리의 처지를 공감하신 사건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처지를 공감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죄의 짐을 대신하시고,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변의 사람들을 공감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닐까요? 관심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공감은 사랑과 희생을 낳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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