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자살 예방 센타로 세우는 기획 칼럼(2)

 

최종인 목사, 평화교회담임, 성결대, 중앙대석사, 서울신대박사, 미국 United Thological Seminary 선교학 박사, 공군군목, 성결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외래교수

1. 역사적으로 본 자살 이해

역사적으로 기독교회의 자살에 관한 입장을 보는 것은 기독교적 자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헬라 철학자 플라톤은 죽음이란 감옥과 같은 육체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지만 혼은 신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인간이 임의로 생명을 끊어 혼을 벗어나게 하는 것은 신의 분노를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역시 삶이 견딜 수 없는 수치나 병으로 극도의 고통에 직면할 경우에 자살하는 것은 강력한 강박감 아래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것은 “나태하고 인간답지 못한 비겁한” 행동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만 인간다운 덕목을 갖추며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살한다는 것은 이런 공동체를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시민들이 조화롭고 통합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혜, 절제, 정의와 아울러 용기라는 덕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용기란 비겁과 만용을 피하고 중용을 지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가난이나 다양한 번민을 피하기 위해 생명을 끊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고 보았고, 용기있는 사람은 이와 같은 고통을 정면으로 대면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덕을 갖추거나 그것을 추구하며 사는 자는 자살할 수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 후 약 40년 동안 고대 헬라와 로마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스토아 사상은 자살에 유연하고 관용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스토아 사상은 우주는 소멸하면서 다시 생성되고 그 이전 존재로 반복된다는 순환론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영혼의 불멸과 같은 것은 믿지 않고 이것은 죽음으로 해체되어 우주의 영과 연합해 버린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생명에 대해 크게 집착할 필요도 없고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생과 죽음에 무정념의 상태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자연에 따라 사는 삶인데, 어느 순간 더 이상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지점에 이를 경우, 그런 삶을 사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이성적인 본성에 맞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시대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태동하지만, 교회는 유대교 전통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도리어 자살을 강하게 정죄했고, 자살에 관용적인 로마 스토아 사상을 비판하면서 자살에 관한 엄격한 신학을 세워나갔습니다. 4세기의 어거스틴은 자살을 신학 주제로 삼아 다룬 최초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살에 대해 깊이 있게 검토하고 분명한 입장을 천명합니다. 그의 신학은 중세 교회와 그 이후의 교회의 입장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세 교회는 자살에 대한 주요한 결정을 세 차례 내렸습니다. 첫째로, 53년 오르앙(Orleans)에서 열린 2차 오르앙 공의회에서는 사제는 사형당해 죽은 자들을 위해서는 미사를 드려도 되지만, 자살한 자들을 위해서는 진혼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를 드리지 못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자살을 사형죄보다 더 악한 것으로 취한 것입니다. 둘째로, 이후 약 30년이 지난 561년, 1차 브라가 공의회(Council of Braga)는 교회가 미사를 할 때 자살한 자들을 위해 추념과 같은 어떠한 의식을 하는 것도 금지했고, 성시교독과 성가를 부르는 장례식은 허락될 수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셋째로, 693년 톨레도(Toledo) 공의회에서는 자살 미수자들이라도 그 죄책을 물어 2개월 동안 성도의 교제에서 단절시키고 성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결정을 내렸습니다. 교회가 교회법으로 이것을 명시한 것은 하나의 흐름이 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내용은 교회법학자이며 교황이었던 니콜라스 1세(Nocholas 1)의 서신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86년에 니콜라스 1세는 불가리아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서신을 통해 자살자들에게 결코 교회가 장례의식을 허용하거나, 그 시신을 경내 묘지에 장사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답했습니다. 이런 결정에 따라 자살자에 대해 교회장을 허락하지 않는 관습이 교회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그 흐름은 오늘까지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살에 관한 견해는 교회 공의회의 결정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퀴나스는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랐습니다. 그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면서 자살을 자기살인에 해당하는 죄라고 규정했는데, 첫째, “모든 존재들은 본능으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를 지키려고 하며, 자기를 무너뜨리려는 것에 대해 어떻게든 저항한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은 본성(혹은 자연)의 성향과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해야 하는 자비를 거스르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유는 자살은 “자연법과 사랑에 역행하는” 행동으로 그 어떠한 경우에도 죄(a mortal sin)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각 부분들은 전체에 속해 있듯이 모든 사람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서 공동체에 속해 있다. 그러기에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해를 가하는 잘못이다”고 했습니다. 셋째, “생명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로서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속해 있다(신32:39). 인간은 오직 그것을 받을 뿐이지 스스로 그것을 종식시킬 권리는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자살은 하나님께 속한 권리를 자신이 행사하는 것이기에 자살은 하나님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아퀴나스는 자살이란 본인, 공동체,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유기하고 악을 행한 죄로 보았습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어거스틴 신학과 성경의 관점에서 종합한 그의 신학은 자살을 죄로 본 중세 교회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는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만큼 자살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내 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신자들도 자살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고 있었고 우울함이 자살의 한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루터는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방화범이 많은 인명을 죽게 하고 그 불타는 건물 안에서 죽은 사건을 언급하는 가운데 그 일은 사탄이 그 사람에게 선동하고 조종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루터가 자살을 다분히 개인의 죄악이라는 시각보다 자살을 마귀의 선동 작용과 연결시켜 이해한 것은 이미 693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만든 교회법에 나와 있습니다. 자살을 시도한 자들에 대한 교회의 처방과 조처를 제시하는 과정에서 이것은 마귀의 선동과 연결시켜 놓고 있습니다. 루터가 이것을 참고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자살이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보다는 외부의 힘 즉 사탄에 사로잡혀 자살을 행한 것이라고 보았기에 루터는 이것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로 단정 짓기를 거부했습니다. “나는 자살한 사람들은 확실히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살한 것은 죽기를 강력히 바랬기 때문이 아니라 마귀의 힘에 장악되어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나무가 우거진 숲의 으슥한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살해당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 루터의 이 같은 견해는 오늘날 자살자의 구원문제를 다룰 때 중요한 지침이 될 것입니다.

요한 칼빈은 그의 방대한 양의 주석, 교리문답, 십계명 강해, 그리고 기독교 강요 등의 작품과 문서에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서도 자살을 주요 주제로 삼아 다루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강해하는 가운데 사울의 죽음과 아히도벨의 자살의 한 부분을 설교하면서 자살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칼빈은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의 자살에 관한 견해를 수용하면서, 인간이 늘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만,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날 때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군인이 언제나 자기 자리를 지켜 파수를 서야 하듯이, 인간도 하나님이 보내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 자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살하는 것은 그 소명의 자리를 이탈하는 교만에서 나오는 죄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자살을 어거스틴처럼 자기 살해로 보면서 이에 단호한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그는 고난의 순간에 있어서도 신자는 끝까지 하나님이 지키시고 결국 구원하여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살은 이 믿음에 역행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어거스틴처럼 그도 소위 영웅의 죽음조차도 결코 합리화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수치, 고문, 불행을 피하기 위한 자살도 정당화될 수 없기에, 사울이 칼에 엎드려져 죽은 것도 다른 죄를 첨가한 행동이라고 간주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자살에 대해 신학으로 깊이 사유하기 보다는 이것을 사회 기강과 관련해서 격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자살을 자기를 살해(self-murder)하는 죄로 정죄하면서 교회는 이 사실을 성도에게 엄히 가르치고 제재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당시(18세기 말) 영국에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자살이 공공연히 일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경건하지 않고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살이 더 많이 일어난다고 생각했고, 아울러 그레고리안(Gregorian) 왕조 때부터 우울증이나 비정상인 정신 상태에서 한 자살은 처벌하지 않았던 느슨한 영국법률이 자살 증가에 일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대 스파르타 사회가 자살한 자들의 시체를 벌거벗겨 거리에 실제로 매달고 난 이후 자살 수가 줄어들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영국도 좀 더 엄격하게 자살자들을 다루고 처형하도록 법제화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들을 사슬에 묶어 거리에 매달게 되면 자살은 훨씬 줄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