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관점’으로 읽는 성경이야기⑤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말다툼 속에서 발견한 감사이야기(창 25장)

지난 1월의 마지막 주일의 감사세미나. 행정교회는 필자가 책을 출간하고, 첫 번으로 수십 권의 책을 주문했던 교회다. 시골마을 50~60대 성도들에게 책을 읽도록 했다. 거의가 다 책을 소화했다. 담임목사의 목회가 결실을 맺은 터, 17년을 한곳에서 목회하며 섬겼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저기 교회들에서 잡음이 들리지만 그곳은 조용했다. 목회자와 성도가 잘 소통하는 모습이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시골 성도들이 책을 모두 읽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목회자의 지도에 순종하는 모습이 선하다.

저녁예배 감사세미나를 앞두고 조금 일찍 도착했다. 간암에 걸려 얼굴에 노란 황달기가 극에 달한 어느 남자 권사의 식사초대. 담임목사와 10여명이 강사와 함께 초대를 받았다. <아구요리> 집이다. 노년에 고향에 내려와 살면서 병마에 걸려 씨름하고 있지만, 아내 권사는 해맑은 얼굴에 웃음 짓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강사목사님, 책을 읽고 저도 얼마 안 되는 인생, 감사로만 살겠습니다. 제게 아이가 셋 있는데 그 애들이 모두 하나님을 잘 믿고 감사를 알면 좋겠어요. 그게 제 소원이지요.” 고개를 들어 바로 앞에서 얼굴을 대면하고 보니 간암의 병마가 깊어진 탓일까. 어둠의 그림자가 보이는듯하다.

말씀감사세미나가 끝나고 사인을 해주다가 늦게 현관에 나갔더니, 그 황권사님 서서 날 기다렸단다. “강사목사님, 남은여생, 감사만 하다가 하나님 맞이하겠습니다.” 적어도 그에게는 다투는 마음, 분열된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한주일 뒤, 담임목사는 사망소식을 전하며 ‘그의 마지막 말은 감사...’였다고 말한다. 다툼과 대립이 극에 달한 우리들의 시대를 보며, 황권사가 남기고 간 의젓함은 나를 반추하게 한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40세가 되어 늦장가를 가는 데는 성공했으나 또 한 가지 고민거리가 생겼다. 아버지에게 손주를 낳아 안겨드려야 하는데 아이가 없었다. 20년 동안 말이다. 아내 리브가에게 임신 징조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이삭이 살던 고대에 무슨 조치와 처방이 가능했을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래서 태어난 아들이 에서였고 쌍둥이 동생 야곱이었다. 에서는 선천적으로 활달했으며 그래서 들로 산으로(山野)로 뛰기를 좋아했다. 결국 사냥꾼이 되었다. 반면에 야곱은 말수가 적고 집에 있기를 좋아했다. 그들의 아버지 ‘이삭은 고기를 좋아하여 에서를 사랑했다’고 하고, 리브가는 당연히 편이 없는 연약한 아들 야곱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 25:27,28).

어느 날 에서는 사냥터에 나가 온 종일 뛰어다녔으나 들 노루는커녕 비둘기 한 마리 잡지를 못했다. 사냥에 실패하는 날이면 왠지 배가 더 고픈 법이다. 또한 심하게 피곤이 몰려오는 법이다. 시장기만 해결되면 곧 잠을 청할 요량이다. 집에 다다른 때에 코끝을 자극하는 팥죽 냄새가 진동했다. 이는 평소에 나던 냄새가 아니다. 귀한 음식이란 의미다. 빨리 먹고 자고 싶었다. 죽을 끊이며 젓고 있는 사람은 분명 어머니일 것이라 생각했다. 컴컴한 부엌으로 고갤 숙이면서 들어가 보니 야곱이었다. 평소 같으면 어머니의 일일 터, 어머니는 급한 일을 보러 나가신 모양이다. 에서는 ‘빨리 달라’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팔라’ 서로 간에 입씨름이 벌어졌다. 부엌에서 이런 말다툼이 벌어진 것을 보면 평소에도 두어 번 입씨름을 한 흔적을 읽게 된다. 성질 급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아우에게 넘기고 말았다.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창 25:30).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넘기기로 맹세하고는 팥죽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훌훌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사실 에서가 먹은 것은 야곱의 것이 아니다. 어머니가 계셨으면 그날 가족들이 함께 먹을 음식이다. 그러니까 에서의 몫도 있는 것이다. 성질 급한 에서는 배가 고픈 것을 참지 못하여 떡과 죽(粥)을 야곱의 것으로 착각하고는 그에게 대가(장자권)를 지불하고 말았다.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창 25:31).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창 25:33)

에서는 참지 못하는 성미 때문에 그만 판단력이 흐려졌다. 에서는 대범한 데가 있지만 꼼꼼함에서는 실수가 많았다. 정당하지 않은 대가를 지불하고 만 것이다. 대가는 늘 정당해야 한다. 판단이 정확해야 한다. 에서가 실은 속은 것이다. 감사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감사에 문제가 생기면 속아 넘어가기 일쑤다. 최초에 감사란 쉽지 않다. 눈사람을 만들 때 첫눈덩이가 잘 뭉쳐지지 않는 것처럼 감사점이 발아되기가 꼭 그와 같다. 감사는 매일감사로 눈을 질끈 감아야 한다. 입을 앙다물어야 한다. 3일을 넘기고 일주일을 넘기고 두 주일을 잘 넘기면 성공으로 달려갈 수 있다. 결국 21일에 성공할 수 있고 그러면 꾸준히 써나가는 힘, 감사점이 생겨난다.

‘형님 계십니까?’, ‘형님 계십니까?’

어린 시절 육씨 성을 가진 사냥꾼이 우리 동네에 오면 꼭 큰아버지의 집엘 들렀다. 우리는 그 아저씨를 그저 ‘육포수’라고 불렀다. 육포수는 차림새로 보면 서부영화에 출연하는 총잡이 모양이다. 그는 늘 검붉은 가죽 재킷 복장에 사냥을 잘 돕는 날렵한 포인터종 사냥개를 앞세우고는 허리춤에 꿩을 서너 마리 차고 나타난다. 그러면 동네 아이들이 줄줄 그의 뒤를 따른다. ‘형님 계십니까?’라면서 백부댁 사립을 들어선다. 큰아버지보다 서너 살 아래였던 육포수는 사냥을 하고 나면 늘 백부를 만나 쉬어 가곤 했다. 백부는 늘 손님을 잘 대접했다. 특히 육포수가 오는 것을 반겼다. 귀한 안주 감을 가지고 나타나는 날이면 하던 일을 멈추고 하루 종일이라도 사랑채에서 꿩고기를 안주삼아 덕담을 나누면서 주거니 받거니 정종을 드시곤 했다. 시골마을에서 꿩고기를 먹기도 어렵거니와 워낙 백부 어르신은 고기 맛을 좋아하는지라 둘이 인연이 맞았는가 보다. 육포수로서는 사냥을 하고난 시간이면 늘 시장기가 돈다. 끼니도 에울 겸 꿩고기를 안주삼아 늘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떠나간다. 주안상을 보고 요리를 만드는 수고는 늘 큰어머님 몫이므로, 큰댁 부엌에 진치고 앉아 아궁이 불이라도 지피고 있으면 꿩고기 한 점 맛보는 것은 보너스였다.

육포수 아저씨는 예수를 알지 못하는 분이다. 하지만 그는 감사는 알았다. 그의 입엔 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란 말이 떠나질 않았고, 인사는 늘 허리가 굽혀진다. 그는 떠돌이다. 가정이 있는지, 어디에 사는지 우리 동리에서 그를 자세히 아는 이는 하나도 없다. 다만 사냥총과 사냥개를 데리고 팔도 유람(遊覽), 문전걸식(門前乞食)하며 멋지게 즐기고 사는 이였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이어간다. 그가 몇 끼 얻어먹고 잠자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60년대 그 어려운 시절에 말이다. 감사가 숙식(宿食)을 해결하는 능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에서는 자기 몫의 떡과 죽 마저도 야곱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먹어야 했다. 어머니가 그 자리에 계셨다면 그냥 먹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 길러지고 차려지고 요리되어지는 모든 것은 부모님의 것이며 또한 내 것이 아닌가. 야곱과 맞닥뜨린 자리, 그와는 별로 대화하고 싶지도 않다. 말이 길어지면 늘 야곱에게 당하고 만다. 에서는 배고픔을 참지 못했고, 정서와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으며, 때문에 감사는커녕 분이 탱천(撑天)하는 사람이었다. 얼른 팥죽 한 그릇 얻어먹고 미루나무 아래에 드러누워 쉴 요량이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이가 뭐! 장자권을 넘기라는 것이다.

배고픈데, 빨리 먹어야 하는데, 피곤이 몰려오는데..., 참지 못하면 감사할 수 없다. 제어하지 못하면 감사할 수 없다. 분이 올라와도 감사할 수 없다. 하지만 에서가 감사할 길은 단연코 없었단 말인가. 정말? 아니 있었다. 생각을 조금만 비틀면 감사할 이유가 있다. 감사할 수 있는 길이 분명 보인다. 사냥을 하고 시장하여 들어온 때가 점심때가 지난 오후 시간이라고 생각된다.

어머니께서 그해의 햇곡식 팥을 거두어 털었다. 오늘 마침 에서가 사냥터에서 돌아온 날, 처음으로 팥죽을 쑤고 있는 게 아닌가. 에서로서는 배고픔을 해결할 좋은 기회다. 그것도 별미 팥죽을 맛보는 날이다. 너무나도 감사한 순간이다. 어머니가 야곱에게 잠시 팥죽을 짓도록 해놓고는 자리를 비웠을 뿐이다. 이는 분명 먼 길을 떠난 게 아니다. 급한 볼일이라도 있었던 게다. ‘어머니가 배탈이라도 나셨는가?’ ‘조금만 기다리면 어머니는 돌아오실 게야.’ 야곱이 ‘장자권을 팔라.’ ‘팥죽을 내 줄 수 없다.’는 둥 별 소리를 다해도 .... 야! 이렇게도 배고플 때 맛있는 팥죽을 어머니께서 준비해 놓으시다니, 이렇게 감사할 수가 있는가. 어머니가 자리를 뜬 것은 아직 팥죽이 익지 않았다는 말 아닌가? 아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 팥죽은 어머니께서 만드시는 음식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도 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야곱이 아무리 안 된다 해도 말이다. 그가 조금만 사려 깊었다면 참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을 묵상했다면 하늘은 청명하고, 부엌에선 팥죽이 끓기 시작했으며, 조금만 기다리면 어머니의 쟁반에 팥죽 한 그릇이 담겨져 나올 것이다. 시원한 동치미김치까지 곁 드려져서 말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자꾸 군침이 돌지만... 조금만 기다려야지? 맛있는 팥죽요리가 준비되고 있으니 말야”

“햐? 진짜 난 운이 좋은 가비여! 이리도 행운아여. 감사한 일이구먼? 감사한 일이구 말구.”

“잠시 낮잠이나 자지 뭐!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이구먼?”

“어머니 오시는 시간이 길어지면 내가 떠먹지 뭐, 그것도 감사하잖아?”

그러면서 잠시 짬을 내어 나무그늘 아래에서 다리 펴고 쉬면 될 일이었다. 잠시의 여유와 느긋함, 잠시의 넉넉함, 잠시 짬을 내보는 게으름이, 느림의 미학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한 에서였다.

그래, 에서는 감사에 실패하였다. 감사할 수가 없었다. 사냥꾼이라도 다 같은 게 아닌가보다. 에서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쏟아졌다. ‘이때 하필이면 어머니가 안계시담?’ ‘야곱이 저자식이 팥죽 솥 단지 꿰차고 저리도 꾀돌이 흥정을 하고 자빠졌어! 응?’ ‘에이 난 저 자식 얼굴도 보기 싫은데’

“가져가져, 야곱아! 장자권 가져다가 죽 끊이고 누룽지 만들어 너 혼자 실컷 쳐 먹어라”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 25:32). 하지만 야곱은 귀를 의심했다. 자신에게 들려온 에서의 ‘죽게 된 마당에 장자 명분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부분에서 확실하게 대못을 치고 싶었다. 오늘 내게 맹세하라(창 25:33). 야곱은 에서에게 맹세하라고 다짐을 놓았다. 에서는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넘겨버렸다.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의 권리를 날려버린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장자권이란 매우 중(重)한 권리임은 말하여 무엇 하랴! 장자권은 족장(族長)의 권리이다. 하나님은 고대 족장들에게 특별한 축복을 하셨다. 그러므로 에서는 축복의 자리에서 멀어져갔다. 차츰차츰 말이다.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마저도 멀어지게 되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 25:34).” 에서는 장자의 명분 뿐 만아니라, 리더십의 명분도, 부를 누릴 명분도, 그리고 감사의 명분도 모두모두 잃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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