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9일째, 프랑크푸르트에서

어제 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Achat호텔에서, 여행 마지막 밤 여장을 풀고 8박9일간의 유럽여행 피날레 새 아침을 맞이 하였다. 이 여행 첫 날 인천공항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경유하여, 곧장 영국 런던에서 여행 첫 밤을 지내는데, 숙소가 너무 추워서 새우잠으로 날밤을 새우던게 엇그젠데, 오메 벌써 오늘이 오메가 날이라니!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침 7시에 조반을 마치고, 8시 10분 독일 투어버스를 타고 대학의 도시이자 교육의 도시인 하이델베르크를 향하여 가고 있다. 라인강의 가장 큰 지류인 네카강이 하이델베르크 심장을 흘러 하이델베르크 도시가 동서로 나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 교수였던 임마누엘 칸트가 이 칼테오도르강 다리를 건너 강건너 야산까지 매일 거닐었다 하여 지금도 이 산책 길을 '철학자의 길'이라 부르고 있단다.

하이델 베르크 시내와 네카강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하이데 베르크 고성'은 13세기경에 처음 세워 지고, 그후 점차 확장했기 때문에 고딕과 르네상스, 바로크 등 각 시대의 양식이 뒤섞여 현재의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냈다. 이 성(省)은 독일 낭만주의의 상징이며 하이델베르크 관광의 하이라이트란다. 이 고성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마르크트 광장 옆에 있는 코른광장(Korn markt)에서 케이블카인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 갔다. 이 고성 안에 남아 있는 현재의 건물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벌어진 30년 전쟁 때에 파괴된 이후의 모습 그대로란다.

14~17세기에 palatinate 제후가 사용한 이성은 고딕과 르네상스가 조화된 건물이다. 신ᆞ구교와의 싸움의 신앙전쟁은 참 아이러니하다. 이 성은 이름 자체에서 풍겨나오는 이미지와 더불어 하이델베르크를 더욱 고풍스럽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만들어 진지 700년이나 된 지금도 고풍스런 자태를 잃지 않고 있다. 구 시가지를 흐르고 있는 네카강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아름답고 고풍스런 자태의 적색 사암의 하이델 베르크 성! 그 성위에서 바라보는 하이델베르크 시내는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을 보는양 싶다.

하이델베르크 시청은 중세기 부유한 귀족이 지은 건물인데 후에 하이델베르크 시에서 이 건물을 사들여 현재 시청사로 쓰고 있다. 이 시청 앞엔 넓은 광장이 있고 그 맞은 편엔 중세기에 지은 하이델베르크교회(현재는 성당)가 있는데 하이델베르크의 중심이라고 한다.

시청 광장을 지나 작은 능선위에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있다. 하이델베르크는 교육의 도시이자 독일 고유의 문화를 품고 있는 문화의 도시이다. 하이델베르크에 대한 견문이 부족한 나에겐 처음엔 심드렁 했었는데 이 잘못된 선입관이 사라지고 그 진수에 매료되자 탄성이 절로 났다. 독일어로 '베르크'는 '산' 이고, '슈타트'는 '도시'이고 '라이히'는 '나라'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한때 독일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가문으로 로마 교황까지도 좌지우지 할 정도로 권럭이 막강 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칼이 아닌 정략결혼을 통하여 전 유렵을 쥐고 흔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앙느'가 열넷, 프랑스 루이 16세가 열일곱의 왕세자일 때 정락적으로 결혼을 하였으나 프랑스 대혁명때 루이 16세와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호엔쫄로르 가문, 막시밀리안 가문 모두 유명한 명문가의 가문이다. 결혼동맹이란 이름으로 이사벨은 딸 넷을 두어, 보헤미아 왕국과 결혼하여 동맹국으로 만들고, 스페인을 결혼동맹으로 꿀꺽 하였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뿌리는 하나이나 나중엔 앙숙관계가 된다. 그래서 모짜르트를 놓고는 서로 자기나라 인물이라고 우기지만, 세계 제2차대전의 주범 히틀러를 놓고는 서로 자기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우긴단다.

유렵의 강들의 바닥은 대개가 붉은 뻘이다. 그것은 오랜 옛날 수억만년 전에 바다가 융기되어 오늘의 유렵대륙이 되었기 때문에 대지는 석회와 사암이어서 강물은 마치 홍수물 처럼 뻘물이 된단다. 그리고 이때 쯤이면 알프스의 눈이 녹아 비가 내리지 않아도 강물은 삽시간에 범람 한다더니, 내가 잠시 머문 동안에도 마치 황룡이 용트림을 하듯 강뚝을 넘실거리며 흐른다.

하이델베르크 고성! 당시 이곳 하이델베르크를 통치하던 왕이 젊은 날 뛰어난 미모를 지닌 왕비를 너무 사랑하여 당대 최고의 건축가를 불러 하룻밤 동안 허니문을 짓게하여 엘리자베스왕비에게 바쳤다는 깜짝일화를 가이드로부터 듣고, 우리 내외도 바로 그 허니문에서 러브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하룻밤 동안에 지은 이 문을 엘리자베스 따문(허니문)이라 부른단다.

이곳 웅장하게 지은 궁전문을 따라 궁안으로 들어가니, 마치 썸머타임을 타고 중세의 세계로 들어온 듯한 환상에 젖었다. 당시 일하는 이들이 생활하는 생활관과 궁안의 음식을 만드는 주방관이 서로 마주 보고 있고, 뜰을 따라 뜰 안으로 들어가니 성안의 지하에는 1751년에 만든 높이가 8m, 용랑이 22만1700리터 들이의 세계 최대의 술통인 Grosses Fass가 있다. 이 술통은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 술통은 지금도 술에 취해 있는 광대 페르기오가 지키고 있다. 원래는 전쟁 중에 성 안에 물이 부족할 때를 대비하여, 물대신 와인을 저장할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성 내부의 지하에는 독일 역사박물관이 있어서 18~19세기의 의료기관 물품들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의 구석구석에서 도시의 역사를 읽을 수 있으며, 하이델베르크 고성의 정원은 항상 개방되어 있다. 여기에 봉건시대 말기에 건축된 약제사의 탑, 시계 탑, 게스프랭터 탑과 고딕, 르네상스의 과도기에 건축된 도서관, 여성건물, 오토 하인리히 건물 등을 볼 수 있다. 이곳 하이델베르크가 종교 전쟁의 격전지로 이 전쟁에서 주민 3분의1이 죽었단다.

참고로 '프리마돈나'에서 '프리마'는 첫번째(첫번째 여인 마리아)란뜻이다. 독일의 남부는 가톨릭이 49%, 북부는 기독교가 51% 분포되어 있다. '칼 테오도르 넥카강 다리'는 칼 테오도르백작이 세운 다리 란다. 네카강 다리 위를 나도 걸어 칸트의 산책길을 잠시 따라 걸어 보았다.

하이델 베르크 성당은 하이델 베르크의 심장이고 중심부란다. 이 성당밖에 구멍가게가 즐비한데, 이는 지체장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성당에서 배려한 것이란다. 그말을 듣고 나도 13유로를 주고 색 안경을 하나 샀다. 그래도 독일제 아닌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1368년에 교황 우르바누스6세의 인가를 받아 설립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설립자인 선제후 루프레히트1세(문맹)와 이 대학을 바덴 주립대학으로 만든 캐롤 프리드리히의 이름을 따서, '루프레히트 카롤대학' 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1803년에 바덴의 카알 프리드리히 대공에 의해 국립대학이 되었다. 휠더린, 괴테, 헤겔, 헷세, 베버, 야스퍼스 등 기라성 같은 이들을 배출한 명문이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는 문화와 종교개혁의 물꼬를 텃으며, 세계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드는 명문이지만 맥주와 사랑과 노래가 있는 젊은 대학이다. 무기고를 개조해 만든 학생식당(Mensa)은 음식값이 싸고 맛있기로 소문나 있다. 220만권의 장서를 소장한 대학 도서관엔 우리나라 한겨레신문도 비치돼 있단다. 또 이곳에 노천주점 겸 노천까페에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언제나 북새통 이라고 한다. 맞은편에는 하이델 베르크 시청사가 있다. 한인 늙은부부가 운영하는 '한국관식당'에서 한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투어버스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프랑크푸르트는, 유럽을 대표하는 증권도시이자 유럽은행의 중심 도시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풍비박산이된 페허의 잿더미 위에서 흔히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킨 독일 경제의 산실 프랑크푸르트! 그래서 도시 곳곳에 현대식 고층빌딩이 즐비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크푸르트 도시 전체가 다 잿더미가 되어 버렸지만, 유일 무이하게 원래 모습그대로 보존된 '황제 대성당'이 라인강변에 있다. 이 곳에서 독일황제 대관식을 거행하였고, 후에는 신성 로마황제 대관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한다.

프랑크푸르트는 '요한 볼프강 괴테'의 고향이다. 라인강의 가장 큰 지류인 마인강이 흐르는 프랑크푸르트엔 '뢰머 시청사'가 있는 광장을 '뢰머광장'이라 부른다. 기원전 50년 경에 진출한 로마군이 당시의 게르만 민족에 대한 방비를 한 곳이어서 '뢰머부르크"라 부르기 시작한 이 지역은, 프랑크 푸르트에서 옛 건물이 가장 많이 자리잡고 있는 성당의 서쪽에 있다. 1405년 프랑크푸르트 참의회가 뢰머 부르크에 있던 귀족 저택 3채를 사들여 시청사로 개조 했는데, 이 이름을 따서 시청을 '뢰머'라 불렀단다.

따라서 뢰머는 시청사의 중심이며, 푸랑크 푸르트역사의 상징이다. 3개의 뾰족한 건물중에 중앙에 있는 것이 뢰머의 중심 건물인데, 이 뢰머 2층의 크고 넓은 홀에서 1562년 프랑크 푸르트에서 황제 대관식이 거행된 이래, '황제의 방'이라 부른단다. 신성로마제국 새 황제의 대관식 후에 축하연이 베풀어 졌던 황제의 방 카이저자르에는 정의의 분수가 있고, 그 남쪽에는 하루 세번(아침,점심,저녁)씩 종이 울리는 니콜라이 교회가 있다. 또한 황제의 방 벽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52명 실물 크기의 초상화가 있다고 한다.

이 뢰머 부르크 광장에서는 해마다 5,1노동절 행사, 마인강 축제 등 각종 행사와 대중 집회의 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1537년에 세운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아상'의 오른 손엔 검, 왼 손엔 저울을 들고서 있다. 그리고 매년 이곳에서 박람회(Messe)가 열리는데 이때 로마인들의 숙소와 전시장으로 사용된데서 시청사를 '뢰머' 라고 부른단다.

황제 대성당 앞 광장에서 다양한 건축물들을 보았다. 시내 곳곳에 성당과 예배당 건물은 즐비한데 주일 성수는 얼마나 할까? 이제 모든 여행이 끝나고 독일 최고의 아니 유럽 최고의 공항 1931년에 문을 연 직원 6만명이 근무하고 있는 유럽의 허브인 프랑크 푸르트공항으로 간다. 그럼 인천공항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은 얼마일까?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알아보니 대충 7천명 정도란다.

유럽에서는 담배를 태우고 꽁초를 휴지통에 버리지 않고 길에다 버린단다. 미화원이 직장을 잃으면 안되기 때문이란다. 독일 땅을 밟고도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밟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인구는 360만 명이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독일은 하나가 되었는데 우리의 조국 통일은 언제 쯤 일까나!

여행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이 여행의 시작이고 다시 여행가방을 메고 내집 현관을 들어설 때가 여행의 끝이다. 그러나 여행의 시작은 여행을 계획할 때다. 말이 씨가 되어 전혀 예정에 없던 유럽여행을 하게 됐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준비한 것이라곤 이발한 것이 전부다. 그래서 여행하는 동안 내 호주머니는 '노머니'였다. 돈줄을 쥐고 있는 마누라님을 잃지 않으려고 한눈은 항상 마누라에게 고정시켰었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다리가 떨릴 때 가는 게 아니란다. 8박 9일동안 나는 내 눈이 멈추는곳, 내 손이 닿는 곳, 내발이 갈 수 있는 곳에서 두번 다시 오기 어려운 이 시간의 소중함을 알기에, 한 순간도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워낙 천학비재한 나의 한계를 절감하였다. 이 여행일지를 휴대폰 노트로 정리하면서 손가락을 대고 졸다가 누차에 글씨가 지워지기를 여러차례나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안착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고마운 것은 이번 여행에 너무나 큰 도움을 준 '조은실가이드'이다. 해박한 식견에 탄복할 때가 많았고, 이 일지를 쓰는데 더할나위 없는 도움을 주었기에 마음으로 부터 깊은 감사를 드린다. '늦 바람이 용두쇠를 벋긴다'고 했던가? 늦게나마 눈에 낀 백태를 몽땅 벋겨낸듯 싶다. 푸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현지시간 오후 6시30분에 인천행 여객기가 기수를 인천공항으로 돌려 비상하다.

옛 시인이 인간의 무상을 이렇게 노래했다. '산천은 옛 그대로인데 인걸은 간데 없구나!' 내가 밟고 있는 이 유럽의 대지는 년년세세 그대로 이겠지만, 나는 언제가 무대뒤로 사라지리라! 아듀! 유럽!

◆유럽 여행중 8일째, 로마에서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 할 날이고 오늘은 바티칸과 로마의 유적지 투어가 끝나면, 내일 독일 투어 한 곳만 남는다. 오늘은 오전 5시에 기상 7시에 로마 바티칸으로 가면서 조은실 가이드에게 물었다. 조은실 자매가 혼자 유럽투어 가이드 전체를 맡아도 능히 혼자 다 소화할수 있겠는데 왜 굳이 지역 가이드가 있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지역에 거주하는 지역 가이드가 있어야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그 사고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여행을 마치고 귀국한지 며칠이 못되어 유럽 헝가리 부다페스트 부근 다뉴브강에서 그곳을 지나는 크루즈와 유람선이 충돌하여 한국인 30여 명이 사고를 당했다는 비보를 듣고 문득 조은실 가이드의 말이 생각났다.

오늘 오전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바티칸 씨티'(총면적 0.44제곱km?)를 투어하고 오후엔 로마시의 고대 유적지를 돌아본다. 바티칸시티는 1929년에 이탈리아로 부터 독립되었다. 이탈리아 반도는 면적이 약 30만 제곱km로 한반도 면적보다 3배정도 크다고 한다. 인구는 약 6,200만 명이란다.

압삐아 도로는 주전 300년 전에 건설을 시작하여 476년까지 고속도로 85,000km를 완공하였다고 한다.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활용하고 있을 만큼 로마의 건축, 교량, 토목공사는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만큼 대단히 뛰어났다. 그후 쇠퇴해 가는 로마를 대신한 세력이 바로 '로마 카토릭'이다. 세계 최소 독립국 바티칸시티 카토릭의 총본산지인 성 베드로 대성당 내의 로마 최대의 명소로는 바티칸 박물관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로 유명한 씨스티나 예배당을 들 것이다.

바티칸 박물관은 단연 세계 제일의 박물관으로 몇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이루어져 1,400여개의 방이 있으며 역대 교황들이 심혈을 기울여 모은 수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바티칸 박물관의 수집품들은 고대 시리아, 그리이스, 로마, 이집트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적인 유물과 조각, 그림, 태피스트리, 지도 등으로 역사적 예술적으로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바티칸 시티의 정식 명칭은 'Sutato della citta del Vaticano'이다.

성페트로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당으로 단순히 규모뿐 아니라 그 예술적 아름다움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또한 유럽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곳 이기도 하다. 거대한 반구형 돔인 대 성당은 로마 르네상스 건축의 정점이다. 15세기에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카토릭 총 본산의 대성당을 계획한 후 대대로 교황과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총력을 쏟아 건립한 르네상스의 기념비적인 상징물이다.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장장 120년의 공사로 완성되었다. 동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미켈란젤로의 걸작 '피에타 상'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돔의 바로 옆에 있는 것이 청동제의 '성 베드로상'이다. '이 동상의 발을 만지거나 키스를 하면서 기도를 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전승 때문에 유난히 이곳이 닳아졌단다. 왼쪽의 제2 제3의 예배당쪽 벽에는 '포라이 워로'가 만든 노이첸시오 8세의 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제1, 제2의 예배당 사이에는 옥상인 '대쿠포라'(천계 하늘이 열리는 곳)로 오르는 계단으로 올라 간다.

로마는 기원전 750년에 전설적 인물 로물로스 형제가 처음 도시 국가로 건국했는데 전 유럽을 호령하는 '팍스 로마나 시대'가 되면서 로마 이전의 유럽의 모든 역사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다. 수천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로마시의 작금의 큰 문제점은 도시 현대화인데, 이 현대화 작업이 어렵단다. 왜냐하면 고대 유물들이 파는 곳마다 발굴되기 때문이란다.

토스카나 지방(이탈리아)을 비롯해서 움브리아, 낫쏘오, 버넷토, 깜빠디아 등 대부분이 언덕 위의 도시이어서 더그러하리라! 그리이스는 외지의 문물을 흡수하여 자기에게로만 향하여 있지만 대 로마의 중심 이탈리아는 그리스 문명과 그리스 문명을 흡수 재현한 헬라제국의 문명을 흡수하여 모든 나라에 유익을 주었다.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2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로마를 보려고 지금도 수많은 세계인들이 로마로 오고 있다. 역사가들이 로마를 말하길 '세계는 로마로 통한다'거나 '세계의 모든 문물이 로마로 들어와서 또 로마를 통하여 나간다'라고 말한다.

로마시 곳곳에 있는 성당에서도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소매치기들이 들끓고 있는데, 이 소매치기들도 도둑질을 하고는 성당에서 고해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또 소매치기를 하고 있단다. 오전 7시30분쯤 바티칸시티에 도착하여 중국 등 각처에서 온 관광객들도 끝도없는 줄을 서고 있는데 가히 인산인해이다. 손바닥만한 시티에 이 어마어마한 인파가 매일같이 인산인해를 이룬단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는 예약이 되어 있어서 그나마 덜 고생하고 입장 했다. 페트로 광장 외에는 바티칸씨티 거의 전부가 건물이다. 오전 9시쯤 입장 했지만 거의 떠밀려서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난다. 매일 같이 들어 오는 이 엄청난 관광수입들은 어디로 흘러 갈까? 가이드가 우리 앞장서서 여기가 어디라고 말하지만 인파에 밀려 귀에 들어 오는건 거의 없다. 문득 생각컨대 웬만하면 외관만 보게 하고, 꼭 보고 싶은 이에게만 개방하면 어떨까? 건물도 촘촘하고 내부에 전시된 미술과 조각품들도 좁은공간에 그 많은 작품들을 다 촘촘하게 채워져 있어 눈이 어지럽다.

페트로 성당을 세운 르네상스 최대의 건축가이자 조각가요 화가였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ti)가 교회 천장에 붙박이처럼 붙어서 그린 '천지창조'를 비롯해서, 수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시간도 여백도 없다. 숨막힐 정도로 갑갑해서 두시간 여 남짓동안 차라리 어서 나갔으면 하는생각 뿐, 작품들을 보고 느끼고 감상할 겨를도 성화나 성상을 보아도 감동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잠시 한눈팔다 일행을 잃으면 어디서 찾나? 안간힘을 써서 들어와 놓고 지금은 머리가 어지럽다.

인류문화의 고적 유물들을 다 끌어다 빼곡히 채워놓은 곳으로만 보일 뿐이다. 2000년의 장구한 기간 동안 고대 희랍에서 부터 동서 문물을 모두 역대 교황들이 그 막대한 힘으로 수집해 놓은 것이다.

가히 세계박물관 중에 단연 압권이다. 한바퀴를 인파에 떼밀려 페트로 광장으로 나오니 내가 뭘 보려고 새벽잠을 설치고 여길 왔는지 감동이 아니라 도무지 머리 속에 들어온 것이 없다. 그동안 바티칸에 대한 이미지가 다 흐려져 버렸다. 이것은 전체가 박물관이지 도무지 하나님이 어디 계실곳이 없다?

이곳이 대 사제 교황이 몸담고 있는 곳이란 말인가? 차라리 대 박물관 관장이라야 맞다 싶다. 역대 교황들의 눈에 사람이 사람으로 보였을까? 사람보다 인류가 만들어 낸 골동품들을 수집하고 보관하기 위하여 종교개혁 등 그 엄청난 역작용을 감수하면서 역대 교황들이 열을 올려 만들어 낸 보화가 그래 이것인가! 구라파에 교회는 많은데 그 숱한 교회들이, 지금은 신구교 할 것 없이 대부분 천덕구리가 되어 버렸다. 바티칸 씨티가 신앙 메카가 되고, 교황이 신앙의 멘토가 되고, 이 둘이 신앙의 본산 말씀의 산실이길 바랬는데, 세속의 눈엔 경이로울지 모르겠으나, 성과 속이 혼재하고 있는 카도릭의 심장을 보고서야 왜 사제(혹은 사도)가 아닌 교황이라 했는지 이제야 짐작이 간다.

그 수많은 인류 문화유산을 끌어 모아서 교회의 산실, 신앙의 메카가 아닌 박물관의 수집품을 보러 온 세계 각처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을 상대로 돈이 강수처럼 흘러 들고 있다. 아! 그래서 바티칸 시티가 되었는가!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럽다. 아! 이게 아닌데!

싼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신앙의 멘토로 삼고자, 본명을 프란치스코라 명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여! 페트로 성당만이라도 박물관으로 만들지 말고 그리고 베드로를 이처럼 신격화 하지 말고, 베드로를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친 사도로 순교자로만 남게하십시요!

소 성당은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을 선출하는 곳이란다. 이곳에 지옥으로 가는 문과 천당으로 가는 문이 있단다. 베드로 대성당은 하늘에서 보면 정방형 십자가로 보인단다. 부활의 해가 떠오르는 말다끼노 위에 최초 교황(베드로)의 청동상이 있다. 천개(하늘이 열리는 곳) 그 아래에는 베드로 유해가 있다. 베드로 대성당은 1750년에 건축, 아우렐리우스황제에 의해 세워졌다.

지금 바티칸시티 안에 들어와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성녀)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유해가 담긴 관을 보았는데 성당 안에 있는 이 것은 모자이크란다. 대리석 조각으로 만든 삐에따상이 있다.

페트로 광장으로 나오니 살것 같다. 교황청 주변에는 천년 이상된 건물에서 수백 년된 건물들이 즐비하다. 대부분 세계 각지의 대사관 건물들이라고 한다. 바티칸 시티 주변에도 역시 천년에서 5~6백년 이상된 건물들이 즐비하다. 로마 바티칸의 성벽을 쌓은 유래는 해적들의 도적을 막기위해 쌓았단다. 오늘 보니 그럴만도 하다.

성스러운 성당안에 정금보다 더 빛난 생명의 말씀이 비칠 때 해적이 성도가 되지 않겠는가! 시스티나 성당은 1400년경의 성당 건물이고 천지창조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주후1500년경에 그린 것이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첫번째 교황은 레오 십세이고 사실주의 문화시대의 복고주의자 클레멘트7세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두 번째 교황이다. 부패한 교황 클레멘트 7세 때의 작품 천지창조를 그린 미켈란젤로가 1564년에 사망한다.

내 일생에 단 한번 뿐일 프란치스코 대사제가 있을 때 와 보고 싶었던 곳! 많은 숙제를 안고 이제 로마의 젖줄 떼베레강의 다리를 건넌다. 이강을 중심으로 바티칸시티가 있는 곳이 강남이고 다리를거너면 강북 구시가지란다. 당시 로마의 항구 나폴리를 사라센 침략이 7세기에 있었다는 것은 로마의 모든 유물이 로마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에 유명한 처녀샘물터(샘물광장)가 있는데, 로마 제1대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오른팔 장군 트라팔가가 만든 샘이란다.

로마거리에 '비아(via)'라는 글이 곳곳에 있는데 '길'을 뜻하고, '삐짜(piza)란 글도 눈에띄는데 이는 '넓다' 또는 '광장'이란 뜻이고, 젊은이들이 즐겨먹는 '피자'도 같은 뜻이다. 스페인 대사관 앞에 성모 마리아가 승천(?)했다는 마리아 상이 있고, 그 옆 스페인 계단 위에 옛 성당이 있다. 로마 중심가는 모든 건물 전체가 고적이고 유물이다. 주전 1,000년경에 이방인들이 세운 건물 들도 많다. 판테온신전(만신전 범신전)은 그리이스의 신전 파르테논 신전과 비견되는 건물이다. 미네르바 신전은 그리이스 때엔 정의의 신이었으나 지금은 성당으로 쓰여 지고 있단다.

'빠르띠논 궁전'은 로마의 건국자 로물로스가 자란 곳에 세운 궁전이란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하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 궁전 앞에는 벤허를 촬영한 경기장이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캄피돌리 언덕 위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다. 현재 로마시 인구는 300만 고대 로마 때엔 150만이었다니 실로 놀랍다. 포로 로마노의 터의 언덕위에 문화재급 건물이 있고, 이 언덕위 광장 안에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들이 즐비하다. 미켈란젤로는 고인이 되었지만 이처럼 그의 손길은 곳곳에 이렇게 살아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로마의 명장 안토니우스) 말탄 동상 앞에는 로마의 수호 신상, 그 아래로 내려오니 까라라 대리석으로 지은 로마 통일을 이룬 '비또리오 임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 있다. 당신은 '로마의 명장이자 모든 명리를 초월하여 로마통일의 실질적인 건국자 가리발디'를 아시는가?

콜로세움 광장(Colosseum)은 원래 네로가 수영장으로 쓰던것을 네로가 죽자 다음 황제가 네로의 흔적을 지워 버리려고, 주후 72년에 원형경기장 건축을 시작하여 다음 황제 티투스가 80년에 황제가 되자 82년에 완공하였으나, 경기장에서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서로 싸워 죽이고 죽는 경기, 사자와 인간이 싸우게 하는 또는 초대 기독교인들을 굶주린 사자의 먹이가 되게하는 잔인한 경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일백년 후 경기장은 페쇄 되었다고 한다.

그 옆에있는 개선문은 콘스탄틴이 정적들을 물리치고 황제가 된 후 세운 건물이란다. 로마는 목욕문화가 발달했다. 목욕문화는 곧 벗는 문화다. 실질 강건한 정복자 로마인들이 이제 싸울 적이 사라지자 경기장을 대신해서 퇴페문화가 스며들게 된다.

이제 오후 4시30분에 로마 투어를 모두 마치고 독일로 가기 위해 피오비치노 국제공항(레오나르도다빈치공항)으로 가고 있다. 1시간30분 소요되는데 조은실 가이드가 우리에게 쿨한 서비스를 주었다. 로마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길이 알프스를 넘어 가는데, 알프스 몽블랑을 하늘에서 보라고 비행기 창문쪽으로 좌석을 예매했단다. 저녁은 이탈리아 공항에 도착하면 도시락을 준단다. 이탈리아 공항에 도착하니 공항 근로자들이 오늘과 내일 이틀동안 파업중이란다.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으로 가는데 가까스로 예정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천만다행이다. 오늘 밤은 독일 푸랑크푸르트에 있는 Achat Hotel에서 자고, 내일 하루 동안 독일 투어를 마친후 밤 비행기로 귀국한다. 아듀 로마!.

◆유럽여행 7일째, 잿더미가 된 폼페이를 바라보며

오늘은 나폴리를 거쳐 폼페이, 소렌토, 카프리섬,으로 가는 날이다! 오늘 하루 코스로 이를 다 소화 해야 하니, 가히 수박겉핥기 관광이 되겠다. 꼴라이야꼬 호텔에서 이틀밤을 잤는데, 알고보니 로마의 축구선수 '호날두'도 이틀을 이 호텔에서 유숙했단다.

이제 꿈에 그리던 '나폴리'로 오전 8시에 투어버스를 타고 출발 하였다. 지금 차창밖에는 궂은 비가 짖궂게 내리고 있다.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인 나폴리(Napoli)를 싼타 루치아(Santa- Lucia)라고도 하는데, 이는 나폴리(특히 맹인들과 뱃사람들)를 수호하는 '성녀 루치아' 에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투어 버스로 두시간 여 동안 아피아 가도를 달려 유명한 스파르타 쿠스역을 지나 도착한 나폴리항에서 다시 고도(古都) 유적지 폼페이로 가고 있다. 폼페이는 나폴리만 연안에서 남서쪽으로 23km 정도 떨어진 베스비우스산을 끼고 있으며, 사르노강 어귀 북쪽으로 흘러든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돌출부 위에 건설된 도시다. 지금은 내륙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스비우스 화산의 남동쪽 사루누스강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 였다고 한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과 상업의 중심 도시로 번창하였으나 제정 로마 초기부터는 곳곳에 로마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서면서부터 피서와 피한의 휴양지이자 환락의 도시로 성황, 불야성을 이루었다.

폼페이의 베스비오산화산재에 묻혀 석고가된 모습

로마는 목욕문화로 망하였다고 할 만큼 팍스 로마나 시대 이후엔, 5~6천명이 동시에 목욕을 할수있는 시설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어찌 목욕만 했겠는가? 사교장도 있고 연회와 유흥장도 있고, 그 안에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퇴페 시설들이 몽땅 다 있었으리라! 그래서 폼페이 곳곳에는 목욕시설이 많고 사창가도 즐비하였다. 역사는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붕어빵처럼 옛것 그것도 닮지 말아야 할 것들만 닮아가고 있다. 소돔성이 이러했으리라 상상이 된다.

폼페이의 베스비오산화산재에 묻혀 석고가된 모습

오늘 나는 이 폼페이가 베르비우스 화산재에 오랜 세월동안 묻혀있다가 그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 고대 로마의 웅장했던 환락의 도시 폼페이의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실로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마차가 다니던 시내 중앙로는 모두 네모난 돌로 길을 만들었으니 천년이가도 끄떡없다. 그 길 좌우엔 상가들이 주욱 들어서 있다. 폼페이 땅을 처음 밞는 순간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들이 한 눈에 확 들어 온다. 엄청난 분화구에서 쏟아져 나온 화산재가 삽시간에 온 시가지를 덮어버렸을 것이다.

그 순간 길을 가거나 밭을 매다가 또는 목욕을 하거나 잠을 자다가 아니 성행위를 하다가 그대로 화산재를 뒤집어 쓰고 석고가 되어 벼렸을 것이다. 폼페이에는 '스타비아 목욕탕'이 있고 거대한 수영장도 있고 또 포럼 목욕탕도 있었다. 발굴된 폼페이 시가지 전체가 다 그 참상을 보여 주고있지만, 인간은 조금도 변화된 것이 없이 오늘도 세계 각처에 있는 폼페이 소돔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점심 식사를 폼페이에서 이름난 음식 '파스타'를 먹었다.

폼페이의 베스비오산화산재에 묻혀 석고가된 모습

'나폴리'는 그리스어로 '신도시'라는 뜻이다. 기원 전 7세기경부터 천혜의 자연과 온화한기후에 매료된 고대 그리이스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수많은 문인 예술가들이 들어와 정열과 감동이 서린곳으로 '로마' '밀라노'와 더불어 이탈리아 3대 천혜의 명승지다. 나폴리만 안쪽에 위치한 천연의 양항으로, 토양은 비옥한 화산재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끝도없이 연속되는 모래해안은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옛부터 "나폴리를 보고죽어라'고 할만큼 명소중의 명소다. 그러나 지금의 나폴리항은 이름 값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수천년에 걸친 유구한 고대 유적을 잘 보존하지 못하고 대부분 파손되고, 큰 도로를 한 블록 벗어나기만 하면 대부분 빈민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수많은 문화 유산의 건물들이 국가로부터도 천덕꾸리로 외면을 당하고 있는 듯하다.

나폴리, 산타루치아! 그 이름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그런데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낭인들이나 노숙자들의 슬림가처럼 페허가 되어있다. 나폴리에 무엇으로 유명한가? 세계의 암흑가를 쥐고있는 마피아의 메카다.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나폴리는 그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다. 나폴리(메아폴리스)엔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인 로마시대에 건설된 '아피아 가도'가 있다. 총길이 550키로나 된단다. 로마가 1900년전(주후1세기경)에 이 길을 닦았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가 이 길을 따라 그리이스를 정복하였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나폴리는, 기독교의 전초기지 역할도 톡톡히 하였다. 바울도 이 길을 따라 로마로 가서 거기서 순교를 당하였다. 나폴리 옆에 있는 밀라노와 롬바르디아도 고대 그리스를 시작으로 사라센,노르만디족을 비롯해서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기독교가 들어온 후엔 기독교 교리에 위반 되거나 로마 황제에게 저촉 되는 것은 그 것이 아무리 문화적 가치가 클지라도 그리스 시대 전후로 만들어진 인간 문명의 유산들은 가차없이 모두 없애버렸다.

종교는 그것이 독선이 되고 여기에 세속의 힘이 가해지면 엄청난 유린을 불러올수 있다. 마치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운 진시황에 의해 저질러진 '분서갱유'가 있었듯이 말이다. 이슬람권의 사라센족들을 비롯하여 이탈리아 반도내의 힘이 약해지면 영락없이 외세의 침입이 있었다.

이처럼 이탈리아 반도는 바다를 장장 1200키로를 가르는 천혜의 땅으로 나폴리를 사이에 두고 여러 민족들과 나라들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다. 현대의 20세기땐 독일, 일본과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으로 온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었으나, 전쟁이 추축국의 패전으로 끝나자 이탈리아 국민들은 무소리니를 처형하고 만다. 세계대전의 주범 왜국 군국주의자들에 대한 것과는 아주 대조된다.

아침 로마에서 이곳에 올때까지 계속 비가 내리더니 나폴리에 도착하는 순간 비가 멈추었다. 기차로 소렌토까지는 30분정도 소요 된단다. 나폴리 소렌토는 배우 소피아 로렌의 고향이란다. 지금 내리는 역이 소렌토이다. 소렌토는 나폴리만을 사이에 두고 나폴리와 마주하면서, 소렌토의 배후에 오렌지 레몬 올리브등의 과수원 산지를 등지고 있는 수려한 천혜의 관광지요, 포도주와 올리브의 생산지이다.

'돌아오라 소렌토로'로 유명한 나폴리 민요를 떠올리며, 첨 길이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소렌토의 거리를 걷는다. 시내에는 15세기에 재건되었다는 성당과 박물관이 있다. 거리 주위에는 로마시대의 유물들이 여기저기눈에 띈다. 1500년 중반에 문인으로 활약한 따스오의 이름을 붙인 '따스오광장'이 있고, 그 광장 옆에 있는 소렌토 전통 골목시장을 30여분 동안 시장구경을 하다가 소렌토항구에서 카프리섬으로 가는 오후1시 25분 배를 타고 20여분을 가니, 저멀리 카프리섬이 보인다.

마침내 오후 두시경에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지나, 오늘날까지 세계인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세계적인 휴양지 카프리항에 도착하다. 카프리섬은 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의 휴양궁전이 있고, 다음 황제 티베리우스는 아예 이곳에 둥지를 틀고. 죽을 때까지 머물만큼 천혜의 명소이다.

카프리섬의 하늘정원이라 불리는 카프리산이 병풍처럼 둘러있는 가파른 산을 케이불카로 오르니 그 산마루에도 온통 시가지다. 카프리 이름은 '염소'라는 뜻인데 까마득한 옛날부터 염소가 살았단다. 염소가 살기에는 아주딱이다. 산양이나 염소가 살야할 곳에 염소를 몰아내고 자연의 진풍경을 누리기 위해 천야만야한 산꼭대기 벼랑위에 집을 짓고 하늘정원이라 명명하고 살고있다. 이곳에서 선박왕으로 소문난 오나시스와 케네디의 미망인 재클린이 처음 만나 허니문을 속삭였던 곳이라는데 이젠 둘 다 옛사람이 되었다. 이곳 산마루 부근에 있는 '황제정원'의 경관은 가히 천혜의 명소다. 대 로마를 호령하던 로마 황제들도 지상의 낙원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겠지.

근데 지금 어디로 갔나? 문득 고려 말기 길재 야은의 시가 떠오른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달렸더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카프리섬 관광이 끝나갈 무렵 소낙비가 우두두둑 내렸다.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이제 카프리섬을 떠나 싼타루치아로 갈땐 미니 버스를 타고, 카프리 선착장으로 오니 오후 3시45분이다. 카프리섬에서 바다 가운데에 떠있는 듯 고즈넉이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카프리의 하늘 정원을 올려다 보며 아이스크림을 한입 가득 빨다.

이제 나폴리 산타루치아로 가는 여객선을 타고, 오후5시에 출발하다. 깐 초네라도 들었으면 싶다. 나(뉴)폴리(마을,도시)에서 5시20분경 중국식당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폴리 누오보성(나폴리에 남아있는 국왕의성)은 나폴리의 상징적인 건물로 1282년에 프랑스왕 샤를이 세웠단다. 도로 위에서 흘기듯 언듯 보고 식당에들러 저녁을 먹고나서 6시 50분에 타워버스를 타고 나폴리를 타고 로마 숙소로 출발하다. 오늘 숨가쁘게 다닌 여정 들이 하나하나 살아서 마치 주마등 처럼 품안에 왔다가 이내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간다!

◆유럽여행 6일째, 이태리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외곽에있는 파도바의 숙소에서 자고 새 아침을 맞이한다.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 우리 내외 둘이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바라기는 춘천 여섯식구가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면 좋은 걸 알면서도 단체로 움직이는 여행일정이라 세 가정이 각자 주일 예배를 드렸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2시간 30분이 소요되는 오늘의 목적지 피렌체를 향하여 오전 일찍 투어버스를 타고 달리고 있다.

이탈리아는 유럽을 대표하는 농업국가다. 피렌체로 가는 길 좌우로 기름진 평야지대가 끝도없이 펄쳐진다. 바로 여기가 이탈리아 최대의 곡창지대 란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포강이 대평원을 흐르는데, 포강의 총길이가 680km란다. 역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포강다리를 지금 지나가고 있다. 또한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고속도로가 1967년 한국 최초로 건설된 경부고속도로의 모델이 된 도로란다.

볼로니아를 지나 1100m고지인 우리나라 백두대간에 비견 되는 임뻬르노 산맥을 지나가고 있다. 바로 다음이 토스카나 이고 그 옆에 피사가 있고 다음이 우리의 목적지 피렌체다. 토스카나에서 생산되는 가죽이 명품(진품)가죽이란다. 피렌체 외곽에 있는 토스카나에는 중국인을 비롯한 여러 나라 외지인들이 들어와서 가죽 제품을 생산하는데, 물론 이들이 만든 것도 '메이드인 피렌체'란다. 하지만 이 제품은 가죽도 제품도 다 모방품이다. 피렌체의 '페루치 길드 조직체'가 만든 제품이라야 진품이란다. 마침내 우리의 목적지 피렌체에 도착 했다. 이탈리아 북동부의 중부에 위치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원지이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분위기있고 새동감이 넘치는 곳이다.

피렌체에 도착하니 우리를 피렌체에서 로마까지 안내할 로마에 거주한지 20년이 되었다는 중년남자 가이드를 만났다. 유럽에 4대 시성이 있는데 고대 그리스에 호메로스, 독일의 괴테, 영국의 톨스토이, 이탈리아 피렌체의 단테이다. 단테(1265~1321)가 쓴 '알리기리의 신곡'(神曲, 이것은 사람이 쓴것이 아닌 신의 음성이란 뜻)은 단테가 짝 사랑한 베아뜨리체를 시로쓴 사모곡인데, 단테가 8살 때 성당에서 나오는 처녀 베아뜨리체를 보고, 첫눈에 사랑했단다. 그러나 정작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 그녀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 단테의 신곡은, 바로 이 슬픔을 서사시로 쏟아낸 것이다. 토스카니아어로 쓴 이 언어가 후에 이탈리아어의 표준어가 되었단다.

단테는 피렌체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고 피렌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즉, 그는 중세의 캄캄했던 시대에 실로 르네상스의 여명을 연 인물이지만, 지금 프렌치의 포카치오 성당안에는 단테의 가묘만 있고, 정작 그의 유해는, 프랑스의 라벤에 있단다. 알다시피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마치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와 같다. 단테(주후 1265년 생)의 생가가 피렌체에 있어 집 외관만 보았다.

베스트셀러 '냉정과 열정사이'의 배경이 되었던 '두오모 성당' 그리고 피렌체 최초의 거장 조오토가 만든 '조오토 종탑'과 당시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들의 중심이되었던 '시뇨리아 광장'을 걸었다. 그리고 피렌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미켈란젤로의 언덕' 길을 돌로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걸으며 피렌체의 역사 속을 산보하였다.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두오모 성당은 '꽃의 산타마리아대성당'(Santa Maria del Flore)으로도 불린다는데, 건물안은 모르겠으나 외관은 붉은 대리석이다. 피렌체 공화국과 길드의 합작품으로, 주후1292년에 착공하여 1446년에 완공한 관중 3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진짜 허벌나게 큰 대성당이다. 성당 왼쪽 입구로 463개의 계단을 올라, '대원개'의 옥상에서 피렌체의 전경을 한눈에 볼수 있다.수많은 관광객들이 줄지어 오르고 있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두오모 성당 맞은 편에 위치한 '산조반니 세례당'은 로마네크 양식의 수려한 8각형 건물로 2~5세기경 로마 때에 지은 교회터 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세례당엔 3개의 청동문(남문 북문 동문)의 부조가 유명하다. 남문은 세례 요한의 생애를 주제로 하여 피사노가 조각했다.(13330년 완공). 북문은 1403년부터 21년동안 '신약성경을 배경'으로 만들었다. 동문은 천국문으로 1425년부터 28년동안 지은 것으로 구약성경을 배경으로 만들었다.

시뇨리아 광장은 피렌체 시내에서는 보기드문 넓은 공간으로, 당시 시민들의 토론장이고, 수도사 '사보니롤라'가 화형당한 곳이기도 하다. 베기오 궁궐 옆에는 '렙룬의 분수'와 미켈란젤로의 작품 다비드상(모조품)이 있다. 미켈란젤로 광장은 피렌체 시내를 흐르는 강(?) 다리를 건너 바로 100m정도의 나즈막한 동산 위에 있는데, 피렌체의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와 전 시가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고금이 잘 조화된 참 아름다운 도시다. 비가 오락가락하지만 옛과 현대가 어우러져 있는 낭만의 도시 피렌체체를 두발로 걸으면서 나는 시방 르네상스의 향수에 물씬 젖어 있다.

피렌체 시내의 수백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이름모를 문화재 건물의 지하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나는 지금 수많은 인재들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천년의 도시 피렌체의 낭만에 푹 빠져 본다.

오후에는 자유의 시간이 주어져서 전통시장에서 피렌체 특산품인 가죽 제품들과 다양한 상품들을 아이 샤핑 하였다. 서기 1200년경 부터 약 300년 동안 당시의 도시 공화국 피렌체를, 로마의 최강국으로 이끌었던 메디치 가문은 비오7세등 두명의 교황이 나올 만큼 힘이 막강 하였다. 또 재능 있는 인재 들을 길러내 중세 암흑기에인간을 새롭게 조명하는 르네상스 문명의 서막을 활짝 연 피런체!당대를 풍미한 기라성같은 명인들과 고금을 넘어 그들의 숨결을 걸으며 듣는다! 무득 이황의 시 한구절이 떠오른다.

'고인이 나 못보고 나도 고인 못 보되~~‘

바로 이곳에서 르네상스를 꽃피운 옛 명인들을 만나고 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와 자웅을 겨루며 르네상스 문화의 요람지였던 이곳 피렌체에서 나는 지금 '옛과 지금'을 마주하고 있다!

암울했던 중세시대의 사슬을 끊고 근대 문명의 단초를 연 피렌체에서 오감으로 이를 체휼하고 있다니! 생각만해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또한 피렌체는 마르코 폴로가 주후1271년 21년간의 중국 여행을 마치고 기록한 걸작품 '동방견문록'의 산실이기도 하다. 또 우리가 다녀온 베네치아 에는 마르코 폴로의 이름을 딴 마르코 폴로 공항이 있다.

피사에서 태어나 피렌체가 양성한 갈릴레오가 당시의 정설인 천동설(티초주의)을 뒤집고 지동설을 주장 하다가 그의 나이 칠십세에 로마 카토릭 종교재판에 회부되자 그는 담담히 자기 주장을 철회 하고 '롱사 법정'을 나오면서, 그는 속엣 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이탈리아 파도바대학교 재직시 만원경을 구입해서 이것으로 대우주를 들여다 보는 천체 만원경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볼로니아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당시 금지시된 인체를 해부하여 인체해부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지동설 또한 물론 갈릴레오가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다. 폴란드의 과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처음 주장했지만, 다만 설(說)에 그친 것을 갈릴레오가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그는 이집트의 천체 문명의 발달에 눈을 떠 이를 연구하다가 천문학의 대 이론가가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는 시골 마을의 평민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만약 메디치가문이 없었다면 아마 그 보석은 빛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동서를 불문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그는 동서와 시공을 뛰어넘은 거장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국제 공항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이라고 한다. 그만큼 로마의 전 영역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그는 말년에 모나리자를 싸들고 프랑스로 왔다. 그의 시신도 모나리자도 르부르 박물관에 있다.

다시 투어 버스를타고 로마 로가고 있다. 피렌체여! 안녕! 로마로 들어오다가 한식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로마의 외곽에있는 콜라이아코 호텔(COLAIACO HOTEL)에서 여장을 풀었다. 내일은 로마의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카프리섬으로 투어 한단다.

베네치아

◆유럽여행 5일째, 이태리

벌써 여행 중반에 접어들었다. 어제밤 알프스 융 프라우에서 여러 시간을 달려 이탈리아 밀라노에 도착했다. 알리그히에리 호텔(ALLIGHIERI HOTEI)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여느때와 같이 아침 예배를 드리고 아침 식사를 마친후, 베니스의 상인으로 유명한 베네치아로 향했다.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안에 있는 이탈리아의 진주라고 불린다. 베네치아 지근거리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러브스토리가 있는 고르곤 졸라와 구두로 유명한 비제바노 인근을 지났다. 이탈리아는 세계 문화유산의 70프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관광국으로는 세계4위로 처져 있단다. 그 이유는 여행객들에 의해 들어오는 관광수입보다 관광지의 주민들에게 끼치는 부정적인 측면, 즉 교통혼잡, 환경파괴 등으로 주민들이 격는 고통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 경제회복이 어려운 처지에 있어 우리가 머문 동안에도 이탈리아 국제공항에서는 노조파업으로 어려움을 격고있었다. 타워 버스로 수 시간을 달려 예약된 베네치아 근처 네스토랑에서 이탈리아 막국수인 스파케티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베네치아로 가는데 어제부터 내린 비가 오고 그치기를 반복하고 있다. "주님! 현지 농부들에게는 단비일지 모르오나, 74년 만에 처음 오는 저에게는 궂은 비일 뿐이오니 통촉하시 옵소서!“

이탈리아의 유명 커피 생산지라는 곳에서 커피라떼 한잔을 음미 하고 다시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 뭇소리니가 건설한 '뭇소리니 다리'를 지나 오후 2시경에 베네치아 섬에 도착하였다. 베네치아섬은 아드리아 해안에 위치한 조그마한 섬인데, 로마가 동서 로마로 쪼개진 후, 주후 4세기에 기마 민족인 훈족(흉노족)이 중국 후한(後漢)에 쫓겨 줄곧 서주(西走)하여, 서로마에 침입하였다. 훈족의 침입은 서로마를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도시로 만들어 로마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이로 인하여 로마민족 대이동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훈족을 보기만해도 얼이 빠져 오금을 저릴만큼 로마의 기상은 사라지고 전의를 잃어버린 필부가 되자 서구 전체가 전전긍긍 벌집처럼 발칵 뒤집혀졌다.

한 여름이면 저 멀리 남 태평양에서 나비바람 만큼이나 작은 바람이 모여 모여 엄청난 태풍을 일으키듯 훈족이 태풍처럼 칼바람을 불고 와 난공불락의 천년의 나라 로마를 초토화시켜, 인류사에 유례가 없는 민족 대이동의 단초가 된 것이다. 훈족들이 말을 타고 달릴 때는 흡사 말과 일체가 되어 머리는 사람인데 몸은 말로 보였다고 할 만큼 흉노족들은 달리는 말과 한몸이 되어 무풍지대처럼 내 달리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노략질을 자행했다고 한다. 훈족에 쫓긴 서양 세계는 목불인견의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삽시간에 생존의 터를 잃은 난민신세가 되었는데, 이 난민들 일부가 아드리아해의 조그만 베네치아섬으로 숨어 들어왔단다.

그런데 섬이 워낙 작아 궁여지책으로 인근 육지에서 나무를 잘라다가 바다 뻘에 말뚝을 박고 돌로 채워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훈족들은 육지에서는 맹수처럼 날랬지만 바다에서는 잼뱅이였다. 베네치아섬 사면은 뻘로 둘러 있는데, 자기들의 배만 드나들수 있는 비밀 수로를 만들고, 훈족들이나 외적이 처들어 올땐, 바다뻘로 유인하여 물리쳤단다. 지금의 베네치아를 완성하기 까지는 무려 8백여년의 세월이 소요 되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S자형 대운하의 좌우로 늘어서 있는 시가지를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유람선을 타고 성당과 공공 건물등 관광 명소들에 대한 해설을 들었지만, 바다를 가르며 달리는 유람선에서는 말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대부분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주마간산 격으로 밖에서 외관만 휘둘러 보고 걸어서도 둘러 보았다. 하지만 마르코성당 내부를 보려면 몇시간이고 줄을 서야 했다.

비가 쏟아지는 빗속을 10명이 합승하는 수상택시로 대운하를 한바퀴 돌아도 보았다. '곤돌라'는 이탈아어로 '흔들리다'란 뜻이라는데, 뱃머리와 선미가 휘어져있어, 약간 삐딱해서 곧잘 흔들거린데서 생긴 이름같다. 난 비오는 날 바다에 빠질까봐 안탔다. 근데 우리 일행중 넷이 곤돌라를 타고 오다 길을 잃어 한동안 애를 태우기도 했지만 무사히돌아와서 천만다행 이었다.

비는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여 비 내리는 빗속을 우비를 입고 나는 점차 바다에 침몰해 가는 수백년에 걸쳐 이룬 베네치아의 고풍스럽고 우아한 인류의 유산을 바라보며 끝없는 상념에 젖어 들었다. 그래서 생애 마지막과 같은 길을 발을 절뚝이며 자유시간에 광장과 골목길을 헤집고 다녔다.

수백년 전통의 커피샾도 있고 수많은 여행객들의 눈길을 끌여들이는 고풍의 명소들이 상점들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대운하(Canal Grande)는 S자형으로 길이 3,8km로 베네치아의 심장을 흐르고 있다. 이 대운하 좌우에 12~18세기에 걸쳐세워진 여러 대리석 궁궐과 산 시모네피클로교회(성당) 등이 병풍처럼 들어서 있다. 이중 레초니코궁은 17~18세기에 지은 바로크건물로 안에는 18세기의 베네치아박물관이 있단다. 두칼레 궁전(Palazzo Rezznico)은 싼 마르코성당과 싼 마르코광장이 신앙의 메카라면 두칼레궁은 바다위의 공화국 베네치아의 군사,정치,예술,경제의 중심이었다. 주후 825년에 지은 건물을 14~16세기 즉 300년에 걸쳐 개축한 고딕 양식의 대표적 상징이란다. 실내는 황금계단, 안티클레지오, 접견실, 투표실 등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이 궁의 현관에는 '포고문'이 게시 되었기 때문에 '게시의 문'이라 불렀단다.

8백년에 걸쳐 지었다는 싼 마르코 성당 내엔, 베네치아 상인들이 이슬람의 메카로 가서 사도 마가의 유해를 훔쳐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마르코성당 종탑 위엔 황금 등대가 있는데, 이 등대가 바다와 시가지를 비추었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로마의 시민행정관으로 시민의 대표로 호민관을 귀족의 대표로 집정관을 세워 통치했다고 한다. 귀족이라도 범죄하면 평민으로 신분을 낮추고 평민이라도 공헌이 있으면 귀족으로 신분이 올랐다고 한다.

베네치아를 다스리는 두칼레궁이 있고, 그 바로 옆에 국무위원이나 원로원 의원이라도 범죄하면 바로 투옥되는 감옥이 바로 소운하10m 옆 건물에 있는데, 이 감옥엔 한번 들어가면 살아 생전엔 나오지 못하는 감옥이란다. 특이한 것은 위원회당에서 종신형 선고를 받고 감옥으로 들어 갈 때 앞과 뒤만 열려있고 좌우가 꽉 막힌 다리위에서 세상밖을 볼수있는 오직 한곳 남쪽에만 구멍이 뚫려 있어 그곳을 통하여 생애 마지막의 세상을 보며 통곡을한다 해서 '통곡(탄식)의 다리'라 부른단다.

이때 비상한 재주와 능수능난한 사교술을 가진 '카사노바'라는 맹랑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범죄하여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감옥 안에서 종사하는 모든 여인을 꼬셔서 탈출에 성공했다 한다. 그는 감옥문을 열고 나오면서 나를 감옥에 수감할 때 내 의견은 묻지도 않았듯이 나도 감옥을 나갈 때 저들의 의견을 듣지않겠다며 당당하게 탈출했다고 한다.

성 베드로성당 안에는 베로니카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닦은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난 수건이 보관되어 있단다. 해마다 이곳에서 카니발(사순절기 전에 고기를 실컷먹는기념행사) 행사가 열리는데 이 행사 후에는 사생아들이 부지기수로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카니발의 최초 시발지가 베네치아라고 한다.

이때에 디발디 신부(음악가이기도함)는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이자 신부로서 버려진 아이를 길러낸 헌신의 신부로 유명하였다. 베네치아에 뭇소리니가 놓은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옆에 나무말뚝이 박혀있는데 그곳이 바로 옛날 베네치아인들이 다니던 비밀 뱃길이란다.

드디어 베네치아 항구 유람선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수상택시도 타 봤다. 산 마르코 예배당 앞 산 마르코 광장은 베니스 관광의 진수로 나폴레옹은 산 마르코광장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극찬했다고 할만큼 종교 정치의 중심지로 길이175m 폭80m의 '거대한 살롱'이다,

베네치아인들이 상업으로 부(富)를 축적하여 부강한 도시국가를 만들었다. 흔히 우리는 베니스의 상인을 '수전노'라고 명명하듯 그들은 물건을 사고판게 아니고 입술을 상품으로 포장해서 이득을 취했다. 그렇게 해서 돌로 세운 천년의 도시가 지금 바다에 잠겨가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분의 역사(History)요. 그분의 스토리이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도 나의 남은 인생의 여정도 '그분의 역사하심' 이다. 나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소변을 두번 보았는데, 한번은 커피 사먹고 보고 한번은 소변값으로 1유로를 주고 해우(解憂)하였다. 뽄떼리베리따(자유의다리)를 건너 비 속에서 오늘 여행을 마쳤다. 내일은 피렌체로 간단다.

베네치아의 성 마르꼬성당

◆ 유럽여행, 4일째

지난 밤을 꿀맛처럼 단잠을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 오늘의 투어 준비를 마치고, 새벽 4시에 샤라셀호텔 레스토랑으로 나와서 아침을 서둘러 먹었다. 스위스 알프스로 오전 5시15분에 출발하기 위해 우리는 로비로 내려왔다.

이번 유럽여행 길은 나로서는 한 번도 밟아 본적이 없는 처음 길이지만,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스위스 '알프스'로 가는 지금 만큼, 맘이 설렌 일이 있었을까 싶다. 이제 우리 일행은 알프스로 가기 위해, 프랑스 리용역에 아침 6시5분에 도착했다. 리용역은 떼제베 모든 역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역이라고 한다. 조은실 가이드가 소개한 리용역 앞에, 1889년에 오픈한 빠리의 전통 수제빵 가게에서 빵을 사서, 떼제베 열차 안에서 춘천 여섯식구들이 맛을 보았다.

6시30분에 리용역을 출발한지 30분 정도 지나자, 산이 없는 대평원에 끝없는 밀밭과 푸른 초장 목장지대가 펄쳐지는데 가히 장관이다. 밀밭과 목초지뿐 아니라 자작나무숲도 있고 이름 모를 울창한 나무숲들도 있다. 출발한지 40여분이 지나니 나즈막한 야산과 구릉도 나타났다. 달리는 차창너머로 눈 안에 들어왔다 금방 멀어져가는 광활한 벌판에 군데군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촌락들도, 지방도시들도, 크로즈업되어 다가왔다가 이내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이방인의 눈으로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다 신비로울 뿐이다.

중세기(주후 492년 서로마가 멸망하고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까지1000년), 독일 영국 프랑스등 구라파는 대지주 귀족들에 의한 장원제도가 발달해 있었다. 이 당시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이상향)에 보면, 견직물 공업이 발달하자, 지주들은 너나없이 농사보다 양을 기르자, '양이 사람을 몰아 낸다'고 풍자 했다. "아담이 밭 갈고 이브가 씨 뿌릴 때 지주는 누구였나"라고 당시의 시대상을 그렸다.

오늘 대평원을 보니 갑자기 당시의 굴곡진 모습들이, 상상의 나래를 펴고 아스라이 떠오른다. 달리는 떼제베 차창밖에 평원도 함께 달려 곳곳에 풍력을 일으키는 바람개비가 장관이다. 한 시간 쯤 지나자 메탈발리(Metalvalley)라는 소도시에서 처음으로 정차했다.

곳곳에 목장들이 눈에 띄는데, 대개 처음 보는 하얀 소들이 많고 검정소 누렁소도 눈에 들어왔다. 두 번째 역인 디죤벨리(Dijon)역에 도착했는데 도시가 꽤 커보인다. 광활한 벌판에 노오랗게 핀 유채꽃들이 장관을 이룬다. 세 번째 역을 지나면서 우리일행도 한동안 히히낙낙 시끄럽더, 지금은 모두 잠들어 조용하다.

이젠 해발 100m미만의 야산들도, 광야를 누비는 야생마들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프랑스는 전 국토의 70프로가 들이고 그 중 50프로가 농경지란다. 스위스가 가까울수록 산들이 많아지고 활엽수 보다 침엽수들이 울창하다. 네번째역 벨포드 몽벨리아드(Belford Monbeliard)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리용역에서 출발한지 세 시간여 만에 떼제베의 종착역 '밀리지르'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한식으로 식사를 하는데 남자 종업원들의 입에서 한국어가 술술 나온다. 밀리지르의 뜻은 물레방아란 뜻이란다. 스위스 바젤은, 라인강(1235km)을끼고 발달한 도시이다. 이젠 종착지인 1638m에 자리잡은 스위스 뮈렌 산꼭지 마을을 향하여 이탈리아에서 달려 온 투어버스로 가고 있다. 달리는 차창밖에 펄쳐지는 목가적인 풍경은 가히 패러다이스가 따로 없는, 환상적인 진풍경이다. 스위스 국경지 까지 약 40분 거리, 스위스의 바젤은,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단다.

스위스의 전체 국민이 820만, 국민 소득은 14만달러 이상, 나라는 작지만 유럽 제일의 경제 강국이다. 전체 면적의 60프로가 알프스란다. 제일 큰도시 바젤, 두번째 쮜리히, 세번째 니스, 네번째 베른(스위스의 수도), 다섯번째 로잔(올림픽의 수도)이다.

유럽의 지붕 알프스 산맥을, 스위스가 차지 하고 있는 비율은 12%라고 한다. 칸 영화제로 유명한 '니스 도시'가 있는 스위스는 목축업이 발달하여 목초지가 많다. 알프스를 품고 있는 알프스의 최고봉의 이름은, 이탈리아어로 몬테비얀코(몽블랑4807m)이다. 몽은 산 블랑은 '하얗다'는 뜻이란다. '몽블랑'은 서울 면적의 6분의 1의 빙하를 품고 있단다. 몽블랑 다음으로 높은 산이 '융프라우'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바로 '융프라우'다. 바젤을 10여분 지나니, 멀리 아스라이 만년설과 구름으로 덮인, 융프라우의 위용이, 눈앞에 나타난다. 차 안이 탄성으로 가득하다.

조금 더 지나가자 4157m의 우뚝 솟은, 융프라우의 위용을 본다. 알프스가 병풍처럼 산맥을 이루어, 대 장관을 이룬다. 대만에서 가장 큰 호수인 '춘 호수'를 보는데, 그 호수의 크기가 엄청나고, 물은 영롱한 보석처럼 맑다. 이러한 크고 작은 호수가 스위스에 네개나 된단다. 인트라첸 아래의 곰마을을 지나, 융프라우의 웅장한 산 자락 아래에, 큰 마을이 한 폭의 그림처럼 나타난다.

스포츠의 천국 '인트라첸'은,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길수 있는, 겨울스포츠의 명소란다. 뮈렌 마을로 가기 위해 인트라첸을 지나, 라우터 부라우닝(산악을 달리는 열차마을)에서, 1891년에 개통된 케이블카로 고공행진을 하고, 다시 높고 웅장한 알프스의 가파른 산 언덕배기를, 수백년을 자랐을 울창한 침엽수들과, 눈이 하얗게 쌓인 흰 눈 사이로, 산악 열차를 타고 달린다. 바라보는 진풍경의 찰라의 한순간은 내 일생일대에 이런 순간을 다시는 갖지 못하리라!

알프스의 1634m의 깍아지른 절벽 위에 자리한 뮈렌마을! 날이 청청한 날,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묀히봉, 아이거봉, 융프라우주봉을 한눈에 볼수 있었다. 당초 오늘 비가 예보돼 있었는데 우리가 머문 한시간여 동안 참 신기하게도 날이 맑았다. 가이드도 일곱번 정도 와야 한번 볼까 말까한 이 진풍경을 하나님의 은혜로 융 프라우 눈부신 설봉을 가슴 설레게 보았다. 보고 느낀 감회를 어떻게 비천한 글로 다 표현하랴!

계곡에서 피어 오르는 뭉게 구름이 산기슭을 휘감으며 올라오는 모습이 마치 구름위에 마을이 자리잡은양 싶다. 뮈렌 마을엔 현재 약450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단다. 뮈렌 마을을 도보로 거닐며 아! 세상에 이런 곳도 다 있구나! 절로 탄성이 터진다. 뮈렌 마을 마트에서 신승남 목사가 그곳에서 수확한 청포도를 사서 먹으니, 뮈렌 마을 전체가 청포도처럼 싱그럽다. 이 소름끼치도록 아스라한 절벽위에 호텔도 있다니!

오늘 일기 예보는 오후 2시부터 비가 오고 기후도 급강하 한다고 했다는데 날씨는 청명하고 선선했다.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심이다! 이탈리아로 가는 여정길, 온통 그림같은 알프스의 자연 경관이 펼쳐 진다. 지금 우리는 투어버스로 이탈리아를 향해 가면서 룽게호수가에 있는 룽게 마을을 지나가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목적지 알프스 관광을 마치기까지 비가 오지 아니하다가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는 도중에 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하고 있다. 알프스 웅 프라우의 품을 벗어 나면서, 비 구름으로 띠띠우고 있는 알프스의 운치 또한 일품이다. 내가 알프스를 첫 눈에 짝 사랑이 됐는가?

갑자기 조선 김상헌의 시가 떠오르며, 입에서 넋두리가 새 나온다.

"잘 있거라 알프스야, 다시보자 융 프라우야, 내 너를 두고 어찌 떠나고자 하랴마는, 세월이 멈춰 주지 않으니, 다시보기 어려워(올똥 말똥 하여)라."

지금 '루가노 호수'의 다리 위를 지나 가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밀로 만든 모든 음식을 '빠따'라고 한단다. 지금 이탈리아를 밤 9시에 도착하여, 지정 식당에서 피자와 콜라를 곁들여 먹고, 오후10시에 밀라노에 도착, 폴로 호텔(Polo Hotel)에서 여장을 풀었다. 눈을 감으니 알프스가 눈가에 어린다.

 

◆유럽여행 사흘째, 프랑스

5월16일 아침을 프랑스 파리에서 맞는다. 오전 7시 30분 투숙한 호텔에서 빵과 우유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전 9시에 투어 버스로 지금 에펠탑을 향하여 가고 있다.

인천 공항에서 부터 우리의 이번 여행 일체의 총 책을 맡고 있는 조은실(자매) 가이드는 함께한 시간이 지날수록 진국이다. 투어버스 안에서 우리 일행에게 관광지에 대해 소개 할때 유럽 문물에 관한 모든 분야에서 단연 압권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드러내려 거나 사족을 다는 것도 없다. 오늘도 투어버스로 프랑스 빠리 관광을 시작하면서 프랑스어로 봉쥬ㅡ와, 맥시ㅡ로 인사를 많이하란다.

에펠탑을 향하여 가다가 오늘 빠리 관광지를 안내 할 한국인 현지 가이드 아줌씨를 만났다. 성도 이름도 밝히지 않은 가이드의 빠리관광 첫 코스는 에펠탑 관광이다.

에펠탑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유명한 건축물에 속한단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 백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 때에 구스타프 에펠이 에펠탑을 설계하여 세운 건축물로 높이가 300m나 된다고 한다. 1986년 에펠탑에 조명시설이 갖춰지자 빠리는 '빛의도시 빠리'로 다시 태어나, 2층과 3층의 전망대에서 해가 진 저녁에 에펠탑에서 보는 빠리는 온통 보석처럼 빛이 난다고한다. 

에펠탑 앞쪽엔 '사요나 궁'이 있고 뒷쪽엔 '상드 마르스 광장'이 있다. 에펠탑 근처에 오니 숲이 길 좌우로 잘 어우러져 있어 마로니에 흰꽃과 붉은 꽃이 활짝피었다. 

프랑스의 수도 빠리는 행정구역상 넓이는 서울의 6분의1정도 이지만 빠리를 에워싸고 있는 위성도시가 사면으로 둘러있어 광활한 대지위에 거대한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파리시내의 주택지 마을은 영국 런던과 달리 나무숲 보다 집들이 돋 보인다.

에펠탑으로 가는 길목에는 '몽 마르트언덕' 위에 순교자 샌드니 신부의 기념 성당과 함께 일천년의 역사가 배어 있고, 지근 거리의 800백년 역사의 애환을 품고있는 '노틀담 성당'(얼마 전 화재로 일부가 불탄곳)은 화마를 입어서인지 고통의 가뿐 숨결이 들리는 듯 하다. 

오늘 가이드의 멘트가 파리 관광중 조심해야 될 3가지가 있단다. 강아지 똥, 새 똥, 루이비 똥. 루이비 똥이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강아지 똥은 빠리 시민들이 
애완견과 광장내의 잔디공원을 산책 하면서 개가 싼 똥을 주인이 치우는게 아니고 빠리 청소과의 소관으로 돌린단다. 

이곳 에펠탑 부근의 건축양식은 대부분 '오스만 양식'으로 1850년 나폴레옹2세(나폴레옹조카)가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상젤리제'의 거리끝엔 '콩고드광장'이 있고 그 반대편에 '개선문'이있다. 특히 이 거리엔 일류 브랜드 상점이 즐비하여 빠리에서 가장 우아한 귀족풍의 거리다. '콩고드 광장'은 빠리의 심장에 있으며, 처음 '루이15세 광장'이라 부르다가, 1790년 '프랑스대혁명'에 의해 '대혁명광장'으로 명칭을 바꾸자마자 혁명군은 '루이15세의 기마상'을 부숴 버린 그 곳에 단두대를 설치하여, 루이16세와 왕비 '마리 앙뜨네와뜨'를 처형하고,  그리고는 '로베스 삐에르'등과 함께 반 혁명자로 낙인된 일천일백여명이 단두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처형된 곳 이기도 하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1805년 영국의 해군 제독 '넬슨'에게 트라팔카(Trafalgar)해전에서 패했지만 그러나 유럽대륙에서는, 1806년 아우스테를리츠(Austerlitz)
전투에서 대승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를 프랑스에 복속시키고 '신성로마제국'을 해체 시켰다. 이를 기념하여 개선문을 '샤를 드골 에투알 광장(Charles degalle)'에 건축가 살드랭에의해 1836년에 세운 것이다. 

유럽을 풍미한 풍운아 나폴레옹은 '라이프찌히 대회전'에서 패배 엘바섬에 유배되었다가 루이18세의 실정을 빌미로 엘바섬을 탈출, 1815년 '워터루(Waterloo)전투'에서 회심의 한판을 꾀했으나 영국의 웰링턴, 프로이센의 불뤼허의 연합군에게 고배, 결국 쎄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되어 1821년 이 섬에서 외로은 생애를 마쳤다. 그는 죽은 후에야 그의 유골이 이곳 개선문을 지나 앵발리드에 묻혔다.

바로 어제가 에펠탑 130년 생일이었단다. 철로만든 에펠탑이 숱한 우여곡절을 격으면서 파리를 상징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에펠탑을 보러 세계 여행객들이 몰려 에펠탑 3층위에서 바라다 본 전 파리시내는 물론이고, 파리를 에워싸고있는 외곽도시까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전경은 사면이 탁트여있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에펠탑에 머무는동안 내내 빠리지역 가이드는 '집시와 소매치기를 조심하고 친절을 가장한 이들을 조심'하란다. 하긴 엇그제 결혼한 조카딸 방희가 빠리의 거리에서 새 핸드폰을 소매치기 당했단다. 

오후 1시경에 에펠탑 관광을 마치고 시내로 들어와서 달팽이 요리로 점심을 마치고,  세느강변을 끼고 가고 있다. 빠리를 가로지르는 그 유명한 세느강은 우리나라 한강처럼 생각했다가 정작 보니 샛강처럼 강폭이 좁다.

참 신기한 것은 유렵전체가 하꼬방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지형인데 영국에도 독일에도 이곳 프랑스에도 미세먼지 하나 없다. 근데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있는데도 굴뚝속처럼 미세먼지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영국도 프랑스도 전유럽이 수억만년전엔 바다였던 곳이 지각변동으로 융기되어 오늘의 대륙이 형성되면서 지질이 석회암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샹제리제의 4거리위에 세워진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정벌하고 돌아와 그의 명에의해 세워진 건물로 헌재 프랑스의 자존심이다. 

샹제리제 거리 2키로가 끝나면 바로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콩코드 광장이 있다. 콩코드광장 앞에서 마들란드성당을지나가면  빠리의 배꼽이라 할수있는 시내의 심장이다. 서울로 말하면 명동거리다. 바로 여기에 빠리의 자존심인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이 있다. 지금 우리는 이 루브르 박물관 앞에 와 있다. 루브르 박물관 실무자(여성)가 우리를 안내했다. 루브르 박물관! 언뜻 봐도 석조로 지어진 건물이 족히 300미터 이상돼 보인다. 압권이다.

루브르박물관은 첨엔 이민족의 치입을막는요새였는데, 12세기에 궁전으로 개축되고, 그후16세기에 프랑수아1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티치아노,라파엘로등의 작품을 계기로 고대 오리엔트 미술, 고대 애굽 미술, 로마 미술, 중세 및 르네상스미술, 조각, 회화, 판화, 그리고 루브르의 역사 등 8개의 컬렉션으로 어우러져있는 이곳을 짧은 시간에 다 볼수는없고, 쭈욱 수많은 역사를 품고있는 걸작품들을 휘 둘러본 중에, 니케아의 농부가 밭을 갈다 발견한 밀로의 비너스 조각상은, '니케아 승리의 여신상'으로 비록 누구의 작품인지도 알수없고, 안타깝게도 양팔이 떨어져나갔음에도, 주전(기원전)에 이러한 균형잡힌 작품은 가히 세기의 걸작품이란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를 보았다. 여자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은해도 설명하고있는 그가 그 그림을 얼마나 알까? 물론 이곳에도 로제타석도 있다. 르부르 박물관 주변 앞뒤 좌우로 고색 창연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제 루브르 박물관을 뒤로하고 콩코드 광장으로 다시 가고 있다.

세느강 유람선을 타려고 부두에와 있다. 약 한시간 동안 세느강 유람선을 타고 
빠리의 중심을 동맥처럼 흐르고 있는 세느강에서 빠리의 고금을 담고 있는 시가지를 둘러 보았다. 루브르박물관에서 진액을 뺀 나는 살랑 살랑 부는 세느강바람에 나는 조는 눈으로 세느강을 끼고 프랑스 명소들이 강 좌우로 벌쳐져 있는 고색 창연한 선진들의 손때 묻은 문화유산들을 비몽사몽으로 보았다. 유람선을 타고도 루우브박물관과 에펠탑 도 눈가에 펼쳐 진다.

저녁은 한인여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한식으로 때우고, 숙소 샤라셀 (Ibis nord sarcelles) 호텔로 돌아왔다. 만물의 영장 인류가 만들어낸 문화유산들을 눈이시려 눈물이 흐르도록 보았다. 인류가 손으로 만든 문화 고금(古今)을 보았으니 유럽에 머문 3일 동안, 너는
무엇을 찾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터득했는가!

◆유럽여행 이틀째, 영국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여행 첫날인 어제 극동에서 해지는 곳까지 수수만리 먼길을 오면서 쌓인 피로를 여장을 푼 호텔에서 말끔히 씻었더면 좋았을 걸. 첫 밤을 지낸 숙소가 우릴 넘 차겁게 대해줘서 내 짝궁은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서야 잠이 들었다. 날이 밝은 아침까지 약간 몽롱한 증세가 보이긴 했지만, 정말 어렵사리 만든 금쪽 같은 시간을 하루 밤 설쳤다고 땡칠 순순는 없잖아요?

아침 7시30분에 방문을 열고 어제밤을 지낸 Heathrow호텔 라운지로 내려와 보니, 규모가 꽤 큰 호텔이었다.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얼굴이 하얗고 코 큰 서양객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오는 거의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낯이 익은 코리언들이었다는 것이 내심 반갑고 놀라웠다.

몇년 전 중국 하얼빈에 갔을 때 중국인들이 한국을 '녹두국가'(팓알처럼 생긴 작은나라) 라고 비아냥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또한 그런 중국(中國)인을 중화인(中華人)이라거나 대인(大人)이라 부르지 않고, '때국놈(大國人)'이란 비어를 쓰지요. 간혹 문제아(問題兒)들이 없는건 아니지만, 그러나 동서 어디를 가도 극동의 한반도, 그것도 둘로 쪼개져 녹두처럼 쬐만한 나라 대한민국의 한국인들의 활보는 가히 놀랍고 한없이 자랑스럽다.

영국 관광은 오늘 낮 하루 동안만이란다. 그러니 자연 마음이 바빠질 수 밖에 없다. 런던의 구 시가지 거리의 명소를 주마간산처럼 잰 걸음으로 쭈욱 둘러 본후 저녁무렵에 프랑스 빠리로 가서 투숙한다고 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 마자 투어버스로 런던 시내를 둘러 보는데, 나무 사이사이에 들어서 있는 주택들은 활엽수 나무숲들에 가리워져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지나가다가 런던 중심가의 구 시가지에 있는 노마 포스터의 작품이라는 '노아의 방주'라 부르는 건물을 얼핏 보았다.

영국 런던지역을 맡고 있는 사십대의 여성 가이드가 관광 투어버스 안에서든  
노상에서든 관광의 장소마다 노련한 입술로 해설을 한다. 그리고 간간히 사족을 달기도 한다. 여인네가 거리 혹은 식당에서 껌을씹는 것은 남자를 유혹하는 행위로 보이므로 거리에서든 식당에서든 껌을씹지 말라 라든지, 또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후 식당이나 길거리의공공의 장소 등에서 얼굴 화장을 하는 것도 이곳에서는 이상하게 보이므로 하지말라는 것이었다. 

지난날 한국 아줌마들이 가난을 벗어날 즈음, 계를 들어 해외여행 붐을 일으켜 비행기안에서부터 수많은 일화로 입방아에 회자된 때가 있었는데 아마 그 얘길 에둘러하는거 같다. 

런던 주택지역에 아파트보다 주택건물이 많은 것은 '사람은 땅을밟고 살아야한다'는 마음이 배어있기 때문이란다. 지금 시각이 오전10시 인데 나이트 브릿지 혹은 킹스브릿지라 부르는 거리를 지나 가고 있다. 이 거리의 주택 건물은 최소한 우리돈으로 10억부터 시작된단다. 구시가의 시가지가 교통이 혼잡한 이유는
옛날 수백년전엔 오늘 처럼 교통수단이 많지 않은 시절이라 협소한 도로로도 
충분히 감당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도시 전체의 덩치가 나날이 커지면서 중앙 시가지로  밀려오는 수요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리라. 빅토리아 박물관 등 유명건물들을 주마등처럼 투어버스로 눈으로만 흘깃보고 지나간다. 

나이트 브릿지를 지나 가는가 싶더니 곧장 케싱턴 브릿지 부유촌을 지나가고 있다. 또 이어 세인트 제임스공원을 지나간다. 그리고 곧 이어 탑이 두개가 있는 타워브릿지를 본다. 이제 허리 펼 사이도 없이 버킹검 궁전을 보러가고 있다. 칠십 중반의 뱁새다리가 황새다리들을 따라가려니 가랭이가 찢어질 지경이다. 이건 분명 고즈넉이 옛날 고대와 중세기 그리고 근세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여다 보는 그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아니다.

런던은 템즈가 낳은 도시다. 왜냐하면 템즈가 있었기에 런던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템즈강 관광이 옵션으로 되어 있어 우리 일행은 포기했다. 왜냐면 템즈강을 관광 할 때 남은 일행들은 또 다른 관광지를 거닐기 때문이다. 런던은 2천년전에 로마인들이 세웠다고 한다. 서양문명의 발원지는 두말할 것도없이 그리이스라 할 것이다. 불세출의 영웅 '알렉산더'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그리스문명의 세계화' 즉 세계 곳곳에 수많은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고 그리스의 소 폴리스들을 불과 십년동안에 '코스모폴리스탄'으로 건설한 바탕위에 로마가 세워진 것이다. 

현재의 런던은 화마로 전 시가지가 불타버린 것을 17세기에 항구 도시로 다시 재건된 도시란다. 템즈강은 런던 시가지를 가로질러 북해로 흐른다. 아주 옛날엔 목조건물들이 대부분이어서 불이 일어나면 소멸되고 다시 짓기를 수없이 거듭하면서 석조건물들이 자리를 잡았을터이다. 18세기 초반에 죠오지 3세가 지은 석조건물을 19세기 초반에 오늘의 '버킹검 궁전'으로 쓰여지고 있단다. 버깅검궁전 지붕위에 빨간깃발이 날리고 있으면 영국 여왕이 현재 건물안에 있다는 표시란다.

런던에 세워진 개선문은 영국의 앙숙인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69~1821)가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를 정복하고 이어 이집트 카이로에 입성하였으나 영국 넬슨제독과의 아부키르만해전에서 참패를 당하자 나폴레옹이 카이로에서 발견한 로제타석도 이때 넬슨을 통하여 영국에게 넘어갔다. 다시 1805년 나폴레옹이 회심의 결단으로 영국본토를 병탄하고자 칼을 뽑았으나 영국의 영웅 넬슨 제독이 트라팔카해전에서 온 몸으로 프랑스함대를격파하고 넬슨은 이 때에 운명했다. 이 해전의 승리로 영국은 향후 일세기 동안 해상의 패권국이 되었다. 개선문은 이 때에 세워진 것이다.

템즈강을 눈으로만 보고 그 대신 개신교의 성지이자 지금 영국여왕이 수장으로 있는 영국 국교 성공회의 메카인 웨스터민스터 대사원 외곽 건물만을 물끄러미 밖에서만 바라보았다. 건물의 역사적 유래야 어찌됐던 소위 기독교의 메카인 웨스터 민스터 교회의 산실인 내부는 들여다 보지도 못한것이 못내 아쉬워 
왜 구라파에 왔는지 본 말이 전도되어 가슴이 시리다. 특히 웬스터민스터 교회당은 천년의 역사의 애환을 고스란히 품고있는 역사의 산실이고 또 이곳에 저명한 신앙의 선진들이 묻혀있는 기독교의 메카이기 때문이다.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영국 국회의사당 앞에 지팡이를 짚고 서있는 처칠의 동상이 인상적이다. 생전에 처칠은 국회의사당 앞에 자기 동상 세우는걸 반대했단다. 이유는 광장에 살고 있는 비둘기들이 동상 머리에 똥을싸는걸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칠의 동상 머리에는 유일하게 전류가 흐르고있다고 한다. 물론 이곳엔 처칠 동상만 있는게 아니다. 처칠보다 훨씬 이전의 기라성같은 역사 인물들도 즐비하다. 그 중 눈에 띄는 인물이 영제국의 눈에가시같은 존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광장 모퉁이에 있었다.

유럽인들 대부분은 대체로 피부색이 하얗다. 그리고 피부색으로 인간을 백인 황인 흑인으로 분류하기도한다.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때 지나치게 구어진 것이 흑인종, 노릇 노릇하게 잘 구어진 것이 황금 색깔의 황인종, 덜 구어진 것이 백인종이라는 에피소드도 있지만, 하지만 구라파는 햇빛비치는 날이 드물어서 대부분 유렵인들의 피부색이 하얗다. 이렇게 하얀 피부색을 햇빛에 빨갛게 굽는 것이 이들의 소원이란다.

'세계 3대 박물관'중 하나인 '그레이트 잉그리쉬 뮤지엄'은 '대영 박물관'의 공식명칭이다. 대영 박물관을 유일무이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2400년전에 세운 파르테논 신전내에 소장된 조각품과 모형을 보았다. 또 여기서 마야문명의 조각품과 이즈텍문명의 유산을 보았다. 나폴레옹이 가져온 유명한 '로제타석'도 보았다. 

이제 영국 관광을 마치고 세인트 팡크로스역에서 프랑스로 간다. 세계 제일의 프랑스 떼뻬제 고속열차의 차창 너머에 펄쳐진 파리로 가는 초원의 풍경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시속 340km고속(최고속도 550km) 으로 두시간 여를 달려 현지 시간 9시 30에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역사 뒷길에서 어스름한 밤에 우리를 숙소로 안내할 타워버스를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는 길가에서 30여분을 기다리는데 마치 1분이 하루 같았다.

파리는 서울의 6분의1밖에 안된단다. 파리엔 맛도보슈라하는 세느강이 흐른다. 유럽 봄날의 석양은 오후 9시까지 보름 달 빛보다 밝았다. 숙소 호텔에 들어오니 영국 숙소보다 싸이즈는 작았지만 방이 따뜻해서 좋았다. 오늘밤엔 단잠을 잘것 같다. 오늘 하루 동안 그동안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수많은 인류문화유산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 만이 일궈낼 수 있는 세계를 보며 큰 울림을 받았다.

고려대, 총신대학원 졸업, 광운대 정보복지대학원 졸업, 서울 용산소망교회 경남 하동교회 부산 영도교회 시무. 현재, 행복이 가득한 교회(예장합동) 행복이 가득한 집(요양원) 시무

 

◆ 성체가 너무 고풉니다.

요한복음 6장 52절~59절,  아모스 8장 11절,

기독교에서는 성찬예배가 예배시마다 있는게 아니고 교회절기나 특별한 교회행사가 있을때에나 한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미사때마다 성찬식이 있다.
아니 미사 자체가 성찬예배이고,
성찬 그 자체가 예배의 중심이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형식주의자들이니 율법주의자들이라고 치부하고있다.
그에 빗대어 카토릭을 그렇게 비판한다.
그렇다면 소위 구교를 새롭게 개혁했다해서 명명되어진 
개신교(改新敎)라는 기독교엔 지금 구교(舊敎)인 카토릭과 다름이 무엇이며 종교개혁당시의 부르짖었던 그 개혁이 지금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세리와 같은 가슴을 져미며 
통회하는 기도 
살아있는 기도가 있는가?
성찬식앞서 드리는 참회의 기도는 선사시대의 유물처럼  
모양새만 남아있을 뿐
진실로 성체에 대한 주림이나 목마름이 있는가?

"주님, 내게 주님을 찬양하는 글을 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어느 늦은 오후, 
누군가가 성당 감실 앞에서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마침 이를 본 주의 종이 
그가 기도를 마치기를 한 참을 기다린 후 
그 에게 다가 가자,
그가 주이 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체가 너무 고픕니다!”

그가 바로 한국 문단의 자랑이요 보배였던 최인호 작가였다.
그의 유고집 ‘눈물’(여백)에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신앙에서 
우러난 기도가 잘 소개되어 있다.

“주님, 당신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의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주님, 내게 당신만 계시오면 
나는 절망에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만 나와 함께 계시오면 
나는 그 어떤 불행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 나의 삶의 전부이신 당신만 
내안에 계시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 내게 힘을 주십시오.
당신이 지니신 그 생명의 힘을 
지금 내게 주시옵소서
결코 주리지 않고 
결코 목마름이 없는 
주님의 그 생명의 빵을 
나에게 주옵소서
나는 세상에있는 것들은 먹어도 배고프고
마시고 또 마셔도 목이 마릅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절대로 나를 세상 가운데에 
홀로 두거나 버리지 마옵소서.”

최인호작가는 암투병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눈물로
주님에게 자신의 진솔한 신앙고백을 털어 놓으셨는데,
깊은 나락의 고통 가운데서 길어 올린
그의 주옥같은 글들은 
당시 수많은 환우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최인호 작가는(카토릭 본명은 베드로) 혹독한 암투병 기간 중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온 몸으로 생생하게 
잘 보여주었다.

당시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었던 
정진석 신부가 
그를위한 마지막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를 마친 후 최인호 작가는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온 힘을 다해 남긴 
그의 마지막 유언은 
"주님 감사합니다!”였다

최인호 작가의 병상에서의 모습은, 조금만 몸이 아파도
티를 내어 제껴버리는
환경에 민감한 나하고는 
삶을 관조하는 자세가 달랐다.

2008년 여름 암선고
그리고 수술을 받은 후
5년이 지난 2013년 10월 7일 
주님의 부름을 입기 전까지 
그가 보인 모습은
참 신앙인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항암 치료의 후유증으로 인해 
손톱과 발톱이 빠져나가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최인호 작가는 
생명이 머물러 있는 동안
집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손톱의 통증을 참기 위해 
고무 골무를 손가락에 끼우고,
빠진 발톱에는 테이프로 칭칭 감고, 구역질을 이기기 위해 얼음조각을 씹으면서
매일 원고를 써내려 갔다.
그 결과물이 바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으로 인해 서있기도 앉아있기도 힘들었던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상태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 내게 주님을 찬양하는 글을 
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성체(聖體)가 너무 고픕니다.”

우리가 평생토록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믿어왔고,
생명의 빵인 
성체를 모셔온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최인호 작가는 
우리에게 잔잔히 보여주고 
주님의 곁으로 갔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평소 우리에게 주어진 종으로서의 삶과 맡은 본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
주님의 부르심을 입는 그 순간까지 사명의 끈을 놓지 않는 것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그리워하며  
그 를 닮아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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