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7) 일꾼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신스틸러(scene stealer)냐? 휘페레테스(ὑπηρετης)냐?

사람들은 누구나 높은 지위와 명성에 대한 열망이 있다. 명성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개인에게 부여하는 가치다. 가끔은 주목받고 싶고 인정받으며 살고자 한다. 화려한 무대에서 관객의 박수를 한 몸에 받는 주연이 못되어도 괜찮다. 투명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역사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조연이지만 scene stealer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다.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발군(拔群)의 연기력이나 독특한 캐릭터로 주연 이상의 주목을 받은 조연(助演), 즉 ‘신스틸러(scene stealer)’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은 역사의 무대에서 주연이신 그리스도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뛰어난 연기력을 앞세워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신 스틸러’, 즉 주연 못지않은 조연 연기자가 아니다. 사실 아담은 신스털러 1호였다. 유발 하라리가 쓴 책 제목처럼 신이 된 인간, 즉 호모데오스가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에덴동산의 청지기요 조연 주제에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다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오는 죄를 범하였다.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가 있는 것이다. David Zweig(데이비드 즈와그, 언론인이자 작가)는 그의 책 'Invisibles'에서 딴지를 건다. "타인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 가치보다 훨씬 과장되어 있다. 외부의 인정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매우 뛰어난 능력이다. 묵묵히 맡은 일에 몰입하는 것이 나를 위대하게 만든다.

일꾼에 해당하는 ‘ὑπηρετης’(휘페레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사자인 Hermes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을 말하는 신으로 여기고 헤르메스라 부르는 일이 있었다(행 14:12). 휘페레테스는 제우스의 뜻을 행하는 자, 그래서 자기 배후에 제우스의 권위를 지닌 자를 뜻하는 것이다. 사자가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우스가 권위자이기에 사자도 또한 권위가 있는 것이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을 평가할 때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사람과 비교에 의해 내려졌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1에서 ‘사람이 마땅히 여길지라’는 호소를 통해 독자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인식하길 원한다. 여기에 사족을 달 필요가 없다. 굳이 사도, 선교사, 목회자, 박사라는 군더더기를 달지 않아도 된다. 일꾼이 강조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높아져야하기 때문이다. 교회지도자를 비교하는 배경에는 더 훌륭하다, 더 좋다는 비교의식이 빼어있다. 바울은 이런 높은 자리와 높은 지위 그리고 선호하는 호칭과 대조적으로 일꾼과 맡은 자라는 실질적인 지위와 호칭을 제시한다. ‘일꾼’은 종 또는 하수인(subordinates)이다. ‘맡은 자’는 관리인(estate-manager) 혹은 청지기(steward)다. 과거 조직 리더에게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소통은 매우 효율적인 것이었다. 선배 리더는 ‘답’을 알고 있거나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됐다. 이때 후배는 ‘선배의 명령’에 큰 신뢰를 보내고 상황 판단에 대한 권한을 선배에게 위임한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선배 리더가 아니라 주인이요 왕이다. 우리는 후배 정도가 아니라 일꾼이요 종이다. 주인의 권위와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휘페레테스의 자세다. 휘페레테스는 종교에서 제사를 돕는 사람을 나타낼 때 쓴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이 용어는 친구를 위해서 무엇인가 안정되도록 이타적인 마음을 갖고 도와주는 사람을 말한다. 복종을 받아들이고 봉사한다는 뜻이 언제나 초점이다. 영화 ‘친구’의 명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늘 한수 위인 친구 유오성에게 장동건이 불쑥 던진 말은 ‘내가 니 시다바리가’이다. 일본말 시다바리는 ‘아랫사람, 부하, 조수’가 ‘일꾼’에 해당하는 ‘휘페레테스’이다.

1. 우리는 왕의 일꾼이다

일꾼에 해당하는 ‘휘페레테스’는 사역자에 해당하는 ‘디아코노스’와 다르다. 휘페르테스는 ‘공적인 자리에 있는 어떤 이를 돕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주군이 왕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철저하게 왕이신 그리스도의 사람이면 족하다. 수식어가 필요 없다. 그리스도의 총애를 받는 일꾼, 선임 일꾼, 수석 일꾼 같은 사족이 불필요하다. 사람들이 화려한 수식어에 매료되고 호감을 가질 것이라는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냥 왕의 사람이면 된다. keyman, 즉 중심인물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요 인사, 핵심 인물, 특정인, 오른팔, 좌청룡과 우백호가 아니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좌청룡 우백호가 있었으니, 바로 마에케나스와 아그리파였다.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일꾼들이 모세에게 아론과 훌과 같이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단언한다. 이것이 일꾼의 자세이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남들이 알아주면 한편으로는 고맙지만 알아주느냐 아니냐에 목숨을 거는 자가 아니다. David Zweig는 'Invisibles'에서 남들이 알아주는 것이 일꾼의 가치를 측정하는 수단이나 기준이 아니라고 말한다. 누구의 눈에 띄지 않아도 좋다. 그리스도께서 알아주시면 오케이다. 사명을 감당하는 자체에 성취감과 기쁨을 얻으면 만족스러운 것이다. 일꾼이 세상에서 박수 받고 상을 다 받으면 하늘에서 상이 없다(마 6:1-2).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는 백배의 복을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으면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다(막 10:30).

일꾼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자들이다. 영화 ‘다이하드’를 보면 주인공 John McClane은 땀과 피로 얼룩진 런닝만 걸치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부단히 악당들과 맞서 싸운다. 그 이유를 묻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중심적이어서 고생스럽고 힘든 일은 가급적 남에게 넘기고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담도 그랬다. 맡겨진 일에 만족하고 충성하였다면 선악과에 먹지 않았을 것이다. 마귀의 제안대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면 힘든 노동을 하지 않고도 영생불멸할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찾아 하고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사람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엔 '신사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면 족하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를 최측권(最側權)에서 보좌한 자를 말하지 않는다. 일꾼은 과거에 불법과 편법으로 주군을 모시다가 증언 혹은 배신을 때리는 가신, 최측권, 집사와 다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최고의 지도자로 손꼽는 바울, 아볼로,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문고리 3인방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일꾼인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일꾼인 자신은 무익한 종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인비저블이다. '인비저블(Invisibles)'은 자기 일에 조용히 매진하면서 깊은 성취감을 얻는 이들이다. 허황된 인정 욕구와 질투의 감정에 주목하면서 이런 흐름을 거스르는 자들이다. 대부분 사람은 일에 성공할 때 주목을 받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선지자 요한은 한참 인기가 절정에 이를 때 자신은 쇠하고 역사의 무대에 서게 될 그리스도는 흥하게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 쇠하는 존재로 선언한다.

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다. 둘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일꾼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일군은 해야 하는 일을 즐기는 자들이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죽기 살기로 감당하는 자다. 자신이 좋아하고 열정을 가진 분야에서 일하라는 조언은 독이 될 수 있다고 William MacAskill가 ‘냉정한 이타주의’에서 말한다. 이는 좋아하고 관심을 가진 일은 생각보다 자주 바뀌기 까닭이다. 심리학자 Daniel Gilbert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생각보다 훨씬 자주 변하기 때문에 절대 과대평가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일, 즉 해야 할 일을 즐겁게 감당하는 종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을 보라. 해야 할 일이지만 익숙지 않고 어색하고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처음 하는 사업이라 힘들고 짜증스럽고 종이라고 무시 받고 어려움이 많아도 이 일은 주인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기에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경영인으로 인정하고 알아 준 것을 생각할 때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게 될 때 100%의 성과를 거두지 않았는가.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변명을 할 때는 좋아하지 않은 일이라, 즉 주인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구차한 변명을 하므로 악하고 게으르다는 책망과 함께 형벌을 받는다. '용비어천가' 제1장에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라는 말이 나온다. 일은 ‘하늘이 주신 복된 노동’이다. 또 ‘이루다(成)’의 어근 ‘일’은 명사로서 ‘일(事)’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일의 목적은 이룸에 있고, 이룸이란 뜻하던 일의 완성에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는 것과 일꾼으로서 일을 잘하는 것은 다르다. 누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고 제자가 될 수 있다. 야구선수들의 특징을 줄줄 외우고 있는 야구광이 스포스용품 가게를 내는 것과 성공하는 것은 다르다. 본인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것은 다른 영역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일꾼이 되는 것과 일을 잘할 능력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잘한다는 것도 다른 문제다. 명성과 능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일꾼은 자질과 함께 훈련이 필요하다. 기술이 아니라 자세가 중요하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실적보다 적은 일에 충성하는, 즉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목숨을 걸고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하지만 즐거움과 기쁨으로 감당하는 일꾼에게 칭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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