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은혜와 동떨어진 자의 교회 비판

2007년 서울의 한 상가 건물에 세든 은혜공동체교회에서 도올 김용옥이 설교했다. 설교라기보다 강연이 옳다. 도올은 신심 깊었던 어머니를 언급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의 설교를 빙자한 강연 내용은 쟁론의 여지가 많았다. 예배 직전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에 어릴 적의 기억이 떠올라 감동에 겨워 눈물이 쏟아졌다는 언급은 은혜와는 동떨어진 감상에 불과했다. 주님 품에 안긴 어머니의 심기를 불편케 하는 언동은 살아있는 자식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의 학문적 접근의 다양함과 채집된 지성을 나누려는 노력은 치하하고 싶지만 더도 덜도 아니다.

교회를 비판하고 성경을 해석하려면 깊은 신앙을 먼저 회복하고 고민하며 신학의 과정을 밟아라! 조국교회를 비평하려면 많은 시간을 기도와 말씀에 자신의 생애를 바쳐라! 그는 “내 어린 시절엔 철저히 역사를 성찰하고, 우리 민족이 어떻게 가야 하는지 고민하며 깨워주는 분들이 있어 교회에 가는 게 감격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런 성찰과 고민이 없었던 내 어린 시절은 소박한 은혜에 대한 목마름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서 설교를 듣기보다 등산하며 자연을 접하는 게 참 예배라 여긴 그는 누구인가? “나는 좋은 말만 하는데 입만 열면 깐다.”며 비판적인 이들을 마구잡이식으로 몰아붙이는데 내가 듣기에는 좋은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비판은 겸허히 수용하는 것이 현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자고해지지 않길 바란 바울과 자고한 자

비판자에겐 나이를 들먹이며 예의를 따진다. 도올의 언어는 나이 뿐 아니라 산 자, 죽은 자도 따지지 않는다. 예의가 아예 실종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다. 이제는 아예 ‘도올 투’라 여기기 때문이다. 신앙의 정통성 부분에 있어 ‘기독교는 나와 긍정적인 토론을 해야 한다’는 언급에 대해선 할 말을 잃는다. 자신을 기독교와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의도는 지나친 자긍심이다. 자만이 하늘꼭대기에 닿았다. 관절염의 고통을 안고 ‘큰 일’을 할 수 있음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자고하지 않도록 주신 가시라 하는 표현에서 도올은 서슴없이 스스로를 바울 급에 올려놓는다. 예수님의 말씀만 오리지널이고 복음서는 기자들이 쓴 드라마에 불과한 내러티브 정도로 간주하는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할 만한 말씀이 성경 안에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왜 내가 반기독교냐? 나야말로 정통 기독교 신앙인이다. 모태신앙이고 유아세례를 받았다. 우리 집안이 예수교장로회에 헌신한 집안이다. 헌금한 액수만 해도 최고의 정통 기독교 집안이다.” 가문이 기독교 집안이면 본인의 신앙이 어떠하든 정통 기독교인이 되는 것인가? 모태신앙이고 유아세례를 받음이 그렇게 주장할 만한 근거인가? 절대 아니다. 집안이 특정 교단에 헌신했다고 정통 신앙이라 주장할 수 있는가? 물론 없다. 헌금한 액수 타령은 왜 갑자기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바친 헌금의 수백 배를 헌금했던들 본인 신앙의 정통성을 티끌만치도 보장해주지 못한다. 아버지가 포도를 먹었다 해서 아들의 이가 시리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지식을 갖고 자신에게 덤빌 자 없다는 식의 일갈은 지식 자체를 백안시하는 언행이다.

 

그릇된 그릇에 담긴 독성(毒性)과 독선(獨善) 오만(傲慢)과 아집(我執)

“대한민국에서 성경 지식을 가지고 나한테 까불면 안 된다.”는 호언장담에는 기가 막혀 할 말조차 잃는다. 도올의 마구잡이식 강의가 환영받는 만큼 조국의 풍세는 암울하다. <요한복음 강해>에 대한 비평을 보수 기독교 세력으로 몰아 부친 그의 해석학적 능력 역시 당연히 검증되어야 한다. 그의 말에 부수고 뒤집고 비틀어 쾌도난마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주는 일면이 있지만 강변으로 한국 지성을 논단하려는 그의 외침에는 억지가 많다. 독성과 오만, 편견과 아집이 지성의 호흡을 흐트러지게 하면 여러 사람을 병들게 한다. 미세먼지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전파를 타고 번지는 그릇된 지성의 초미세먼지가 재앙이다. 그를 보면 니고데모의 반신상이 떠오른다.

도올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구약폐기론을 제기해 평지풍파를 일으킨 적이 있다.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야기된 오류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된다 하여 율법폐기론을 주장함은 억지다. 바로 그 주님께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애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율법폐기론은 은혜의 은혜 됨을 강화시키지 않고 잘못된 구원관을 만든다. “마침”(텔로스)은 목적과 성취의 뜻도 담고 있다. 다른 병행구절들과 연관하여 바른 해석을 취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목적이 되시거나 율법을 성취한 것이 된다.

 

도올의 칼은 활검이 아니라 살검

도올은 “한국 기독교가 편협성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 민족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 발언 동기에 선입견이 없다면 수긍할 만한 탄핵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약을 폐기하지 못하는 한국교회를 향한 공격이라면 온당치 않다. 신약의 출처는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구약이 폐기되면 신약도 죽는다. 구약과 연관되지 않고 순수한 신약의 말씀만 추려낸다면 그것은 성경이 아니라 고대 문헌의 희귀한 걸레조각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무차별적인 도올의 공격은 비논리적이고 무리다. 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힘과 권력에 기대 살려는 악바리들에게 급소를 찌르는 일침이다. 한 마디 말 내뱉기 전에 열 번 생각하는 십사일언(十思一言)은 말과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울림이다.

도올은 여전히 이 시대의 인기 강사다. 그의 강연에는 어린 학생에서부터 촌로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학자 할 것 없이 일단 모인다. 방송이 그의 연출 효과를 알기에 때마다 출연시켜 시청률을 올린다. 대중들은 어려운 노자를 유쾌하게 듣고 민족의 암울했던 역사의 뒤안길을 그와 함께 걸으면서 박장대소하고 비분강개한다. 약간 쇳소리가 섞인 그는 논객이다. 그가 휘두르는 언어의 칼날은 활검(活劍)보다 살검(殺劍)에 가깝다. 거친 표현은 그의 논지를 맛깔스럽게 하기보다 격을 떨어뜨린다. 그가 한반도의 비좁은 공간을 벗어나 세계적인 논객으로 우뚝 서려면 언어 순화를 통해 자신이 이끄는 강의의 격을 높여야 한다. 강변하면 논전에 휘말리고 감정싸움으로 번져 원래의 반짝이던 지성이 빛을 잃는다. 누구도 그와 싸우려 들지 않는다. 섣부른 논전은 그의 기운을 돋우고 승수의 전적을 올려줄 뿐 조금도 득이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도올의 돌팔매는 골리앗을 향하는가? 다윗을 향하는가?

돌팔매질을 하더라도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내리치려는 동작은 잘못이다. 그 흡혈귀 같던 군중들도 주님이 보이신 무언의 행동에 돌을 거두고 흩어졌다. 돌팔매질을 하려면 다윗처럼 골리앗을 향해 날려야 한다. 도올이 조국교회를 사랑하고 진정 한민족의 안위를 위해 돌을 들었다면 한국교회를 향해 던질 만하다. 조국교회가 처한 현실이 돌 맞을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골리앗으로 보인다면 그 한국교회에 날카로운 매스를 가하려는 도올은 누구인가? 그는 누가 보아도 다윗이 아니다. 다윗이 아니라면 골리앗을 향해 돌을 날릴 수 없다. 돌이 아니라 견착식 미사일을 갖고 나가도 골리앗의 밥이 되고 만다.

도올의 비판이 예리하고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상력이 약함은 그의 무기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 자신에게 있다. 나는 그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 있다. 젊은 시절에 신학을 공부한 바 있고 내가 믿기로는 누구보다 한민족에 대한 긍지와 한국 역사에 대한 민족정기가 대단하다(지금은 갈수록 이 믿음이 빛깔을 잃는다). 그가 다윗만 될 수 있다면 한국교회를 갱신시키는 주력으로서 루터를 능가하는 인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돌을 내려놓아야 군중의 한 선생으로라도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도올에 필적할 사람이 없는 한국교회

도올이 신학 담론을 펼치거나 성경을 들고 저글링해도 필적할 목회자나 신학자가 없음은 아쉬움이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라 변명치 말라! 그와 넉넉히 견줄 내공 강화는 누구에게나 절실하다. 어쨌든 그의 학문 의지는 무시할 수 없다. 실사구시의 효용성 또한 현대인들의 기호에 딱 들어맞는다. 그는 부지런히 연구한다. 말솜씨야 한국에서 열 손가락에 꼽을 목사들도 있다. 문제는 그들 속에 든 것이 별로 없다는 현실이다. 예전에는 배웠지만 새롭게 배우지 않는다. 당장 도올과 맞장 뜰만한 지식과 지성으로 무장한 목회자나 신학자가 거의 없다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나 신학자가 그와 성경 토론을 해도 득 될게 없음을 알기에 나서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기면 당연하고 지면 거의 보따리 싸야 하는 지경에 놓일지도 모른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지성의 너른 바다에서 아직도 발꿈치나 적시고 무릎까지 찬 물을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물놀이만 즐긴다면 문제다. 세상의 많은 전문가들은 이미 무한한 열정으로 지성의 깊은 바다 위를 유영하고 있는데 뒤쳐져도 한참을 뒤쳐졌다. 속에 든 게 없으니 겉치장에 공을 들인다. 그런데도 책읽기를 싫어한다. 성경과 신문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칼 바르트의 제자는 어디에 있으며 한 책의 사람이기에 만독의 경지를 일군 웨슬리의 후예는 지금 어디 있는가! 박사 학위를 몇 개씩 보유해서 당회장실에 금테 액자의 학위증을 걸어놓고 학위 가운의 색이 잘 드러나지 않으면 화려한 색깔로 갈아치운 가운을 예배 때마다 걸치고 나타난다. 꼴불견이다. 예배에 웬 박사 학위 가운을 걸치는가? 목사 가운이면 족하다. 속이 차면 겉꾸미기에 별반 신경 쓰지 않는다.

 

설교학을 배우기 전에 인문학을 배우라

신학 교수들은 가르침과 잡무 처리에 학자로서 연구할 시간과 재정적 뒷받침도 넉넉지 않다. 교회는 돈이 많아도 정작 돈이 필요한 곳에는 지원이 적다. 천만, 이천 만이 대수며, 일억 이억이 아까우랴! 중형 교회 이상의 담임목사들은 신학교만이 아니라 교수 개인을 위한 제도적인 지원책을 강구해야 한다. 엉터리 교수가 아니라 학문과 영성을 겸비하여 내일의 목회자들을 가르칠 스승이라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교수 개인을 도움이 아니라 조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의미 있는 투자다. 미래의 학자를 키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어려운 과정을 거쳐 학자가 된 이들을 적극 지원하는 일은 더욱 귀하다. 한 마디 던지는 문장이나 서로 나누는 짧은 대화에도 무언가 깊은 울림이 있는 사상은 부지런히 배우는 학자에게서 나오지 않겠는가!

신학도들은 신학 자체에 입문하기 전에 기본적인 인문학에 눈을 떠야 한다. 철학은 신학의 유용한 섭렵을 위해 반드시 필수 과목에 포함시켜야 한다. 말하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학교의 커리큘럼이 그러지 못하면 별 수 없이 스스로 학문의 지경을 넓혀가야 한다. 기본적인 한자도 외면치 말아야 하고 글쓰기의 요령이 아니라 기본기를 익혀야 한다. 어디 신학도만이겠는가! 모든 학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채찍질하여 저마다의 지성으로 자신의 경내에서 맑은 샘물을 길어내도록 해야 한다. 학문의 지경을 넓혀가는 만큼 인간됨에 공을 또한 들여야 한다.

 

현학적(衒學的) 유머만 가득한 유랑 논객

우리에게는 탁월한 지성도 필요하지만 모두에게 유익한 존재는 차라리 탁월한 영성을 바탕으로 한 평범한 지성인일 수 있다. 당신이 탁월하다면 모든 면에서 탁월함을 이루어 너그러움과 유익함을 두루 사방에 펼치기를 바란다. 당신이 세상의 한 줄기 빛으로 광명을 뿜어낼 때면 많은 사람들이 그 작은 그림자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당신은 학자의 영혼(soul)이 있어 탁월한 유일(sole) 존재가 되리라! 한민족의 일원이라면 누구든지 뛰어난 재질을 타고 태어났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 어떤 분야나 영역에서 전문가의 입지를 다졌으면 좀 더 갈고 닦아 입신의 경지를 지향하려는 무리가 반드시 형성되어야 한다. 당신이 내일 이 민족의 희망이 되고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우는 지성의 메신저가 되려면 오늘 배우고 익히는 일에 전력투구해야 옳다.

도올 김용옥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을 언급하며 “북한의 소행 가능성은 0.0001% 확률도 없다”고 단언했다. 40명의 꽃 같은 생명이 수중고혼이 되었고 6명이 실종된 피눈물로 얼룩진 참상 앞에서 내뱉은 그의 무책임한 망언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북한 정권을 옹호하는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 일침을 놓고 중국의 시주석을 친근한 아저씨 같다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힘을 가진 자, 좌향좌의 보행을 앞서가는 이들을 향한 그의 용비어천가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최근에 방송된 KBS 1TV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이니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비판과 옹호 기사가 줄을 이었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자신의 생각만을 가지고 망언을 쏟아내고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될 것임을 경고하는 바이다. 그를 석좌교수로 세운 모 신학교의 처사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도올의 소리가 전파를 타고 방송 섭외 순위에서 상위에 랭크되는 것은 그 자신에 어떤 강점도 있겠지만 역시 시대적 산물이다. 이제는 어느 특정 강좌에 반짝 인기몰이를 할 것이 아니라 나이와 경륜에 걸맞은 지성의 알참으로 큰 스승이 될 의향은 없는가? 천안의 집 근처에서 한 손에 헬라어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에 호미를 들었던 함석헌 선생을 회상하는 그가 그런 민족의 큰 선생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저 재기발랄했던 시대의 한 유랑 지성인이 대중을 울리고 웃겼던 일상의 토막에 묻혀버릴 것이다. 목소리를 내야 할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정곡을 찌르는 말을 아끼니 자신의 전공을 뛰어넘어 논객을 자처하는 이들이 일어나 다방면에서 여러 소리를 낸다.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니 일단 시원하다. 조국의 현실에서 민중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시대의 아픔을 진단하고 도움말을 베풀 만한 지성인이 왜 없겠는가? 그들을 공원과 광장으로 모시고, 또는 강의실과 TV프로에 출연시켜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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