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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 기자가 묻고 이대희 목사가 답하다(20)“나는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

 

 “하나님 궁금해요”의 목록 중에 궁금한 내용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나는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입니다

 

예.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는 내용이어요. 대답하기 조금 어려운 질문이기도 한데요.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으로 들리기 쉽기에 조심스럽습니다만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죠.

 

 각 나라에 마다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요. 그러다 보니 서로 간에 자기 종교가 제일 좋다고 하면서 선전을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종교가 참된 것인지 모를 때가 많거든요?.

 

사람에게는 모두가 종교성이 있어요.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을 믿고 있지요. 사람들이 자연, 하늘, 죽음, 저주 등을 두려워하는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것을 어떤 구체적인 종교에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갑자기 위급한 일을 당하면 신을 찾아요. 신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사람에게는 주어진 환경과 만남이 각자 달라요. 그런 배경 속에서 전해 내려오는 것에 그대로 영향을 받게 되죠.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면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종교를 자연스럽게 믿는 거죠. 알고 있는 종교가 하나밖에 없다면 자연히 인간의 종교성이 그것으로 기울어지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 종교를 갖게 돼요. 지금도 아프리카에는 토속적인 미신 종교가 많이 있는데 그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죠.

우리나라에도 예전에는 불교나 유교, 샤머니즘(무속) 종교가 주를 이뤘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자연스럽게 불교와 무속 종교를 믿는 인구가 많아요. 또 사주나 점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심지어 정치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데에 의존하는 것을 심심찮게 보게 돼요. 무언가 의지하고픈 인간의 나약함을 나타내 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정말 참된 종교인가 하는 점이어요.

가끔 사이비나 이단에 심취되어 가산을 탕진하고 가정과 인생을 망치며 심지어 집단 자살하는 예를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자주 보게 되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종교를 잘 구분하여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좋은 예이죠. 언제나 진리가 있는 곳에는 위장된 가짜가 있어요. 진리라고 외치는 곳일수록 가짜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말 참 진리인가를 한번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해요.

 

종교는 다 같은 것이고 결국 다 같은 길로 가는 것이지 않나요? 그렇게 보면 어느 종교를 믿는지 상관없을 수도 있는데...진실하게만 믿으면 말입니다. 굳이 기독교만 믿어야 한다고 하는 것에 이해가 잘 안 된다고 말해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중의 하나가 우상 종교죠. 원래 우상은 사람이 만든 종교의 대표적 예여요. 정치가나 잘못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 아니면 사람들을 자기의 휘하에 두기 위해 신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만든 것이 우상이죠. 언뜻 보면 신 같은데, 알고 보면 그것은 신이 없는 가짜 신상이어요. 인간의 약한 점을 이용하여 우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들이죠. 그들은 가짜로 능력을 행하고 마술 등으로 사람을 속이면서 신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처럼 사람들을 미혹해요. 우리는 이런 것들을 아주 잘 구별해야 하죠. 그렇지 못하면 완전히 속임수에 빠져 인생을 허비할 수 있어요. 중세의 로마는 모든 백성을 정치적으로 순종하도록 황제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제사를 드리고 춤을 추는 등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정치적 영역을 다지려 했어요. 일본의 경우도 그와 비슷한 예여요. 신사를 만들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그것에 절하게 하죠. 그것은 그들이 만든 정치적 종교여요. 권력을 위하여 임의적으로 만든 그럴듯한 우상화 작업이죠.

우리나라에 있는 무속 종교는 다 이런 경로에 따라 생겨났어요. 금 대신 돌이나 나무 등을 이용하여 신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면서 신을 찾죠. 다시 말하면 우상 종교여요. 우리나라에 많이 있는 불교의 경우도 원래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었는데 나중에 변질되어 그것이 종교가 되고 우상이 되었으며 석가모니가 신으로 둔갑하게 된 것이죠. 자기를 깨닫고 정화하는 철학적 수도 행위가 점차 무속적인 것과 연결되어 종교가 되어 버렸어요.

 

그러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불교는 자기가 곧 신이 되는 진리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신을 믿는 종교라 할 수 없어요. 그러나 기독교는 달라요. 기독교에서 믿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 아니어요. 그분은 원래 하나님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보이는 하나님이죠. 그러다 보니 일반 사람과 같게 취급하여 세계 4대 성인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정의여요. 그분은 태어난 것부터가 인간과 다르게 태어났고 죽은 후에는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어요. 그런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책도 없고 무덤도 없고 집도 없죠. 굳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래요. 다만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고 믿게끔 세상에 오신 것이죠.

성경은 그의 제자와 여러 선지자들이 그의 행적과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를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기록한 증언의 책이어요.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어떤 형상이 없어요. 그것은 사람이 만든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람의 종교로 변해지므로 성경에서 엄격하게 금했어요. 오직 하나님이 주신 성경과 하나님이 보내주신 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죠. 다른 종교는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만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요. 이런 면에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확연히 구별돼요. 기독교가 우상을 반대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어요.

 

종교마다 모두 자기의 것이 진리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여럿이 될 수도 있다는 말도 되는데 그러면 진리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요?

 

중요한 것은 진리는 오직 하나여요. 만일 진리가 여럿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있어요.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참이 아니라면 과감히 버려야 해요. 왜냐하면 종교가 거짓되거나 그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면 그것은 나에게 진정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죠. 나를 죄에서 구원하지 못하는 종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요. 나를 천국으로 이끌 수 없다면 그 종교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해요.

감히 내가 곧 길이요 나만이 참되다고 말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고, 그렇게 단언하여 이야기한 책은 오직 성경밖에 없어요. 그런 이유로 인해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유달리 핍박과 고난이 많았어요. 그러나 다른 종교는 모두 다 신이요, 모두 다 진리라고 말하죠. 어디로 가든지 다 통한다는 이치여요.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모순을 발견하죠. 진리는 아무리 다른 사람이 핍박을 하고 거짓이라 해도 당당하게 진리라고 외칠 수 있는 자신이 있어야 하고 힘이 있어야 해요. 이것을 지킨 종교는 오직 기독교밖에 없어요. 수천 년 동안 수많은 박해와 죽음과 고난이 있었어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 한 분이신 구원자를 외친 것은 기독교여요. 그렇게 변질되지 않고 지탱되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것을 외치다가 죽어간 수많은 순교자들이 좋은 증거여요. 사실 기독교처럼 순교자가 많은 종교는 없어요. 수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요.

우리나라만 해도 순교자가 가장 많은 종교가 기독교여요. 그들은 모두 하나인 진리를 외치고 다른 것과 타협하지 않는 이유로 스스로 죽음을 택했어요. 진리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하기 어려운 일이죠. 지금도 이런 순교자는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 진리가 변하지 않고 이어져 온 종교는 오직 기독교밖에 없지요.

 

오히려 절대성을 말하는 그것이 참 종교라는 역설적 의미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진정한 종교는 절대성이 있어야 해요. 시대가 변하면서 수시로 변하고 유행과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을 자꾸 바꾸는 것은 스스로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죠.

물론 종교에 대한 판단은 각자 자유롭게 해야죠. 그러나 그 판단의 책임 역시 자기 스스로 져야 해요. 가정이나 조상, 부모가 나를 책임져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결정에 따라 나의 삶이 달라지므로 보다 잘 살펴보고 신중하게 결정하여야 하죠. 그저 맹목적으로, 아니면 전통이나 체면으로 하지 말고 먼저 종교의 특성을 잘 살펴보고 확실하게 연구해 보는 것이 순서여요. 만일 내가 붙잡고 올라가는 동아줄이 썩은 밧줄이라면 어떻게 하죠? 어차피 누가 뭐라 해도 마지막은, 진리는 오직 하나여요. 가짜일수록 종교는 모두 다 같다고 말하지만 현명한 여러분은 올바른 판단을 하리라 믿어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장 12절)."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종교를 쉽게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특히 우리나라 같이 정에 익숙한 민족에게는 더 할 것 같거든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 맞아요. 우리나라는 체면이나 정에 약해요. 옳다고 믿어도 그것을 정 때문에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회적인 부조리가 알고 보면 이런 정 문화가 만들어낸 것이 의외로 많이 있어요. 어쩔 수 없이 아는 사람이니까 친척이니까. 선배이니까 등등의 이유로 불의에 가담하고 그것에 동조하는 경우가 많죠. 사실보다는 감정이 앞선다는 이야기이죠. 그런데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어요. 진실은 감정보다 앞서야 해요. 종교도 마찬가지죠. 이것은 단순히 세상에서 편리함을 위하여 배우는 지식이나 취미생활이 아니어요. 그런 문제라면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죠.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관련이 있어요.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 있다는 말이죠. 감정적인 것이나 체면이나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여 결부시킬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사람이 죽어간다면 그때도 체면과 배경과 혈연과 의리를 따질까요? 일단 사람이 살고 보아야 하잖아요. 죽고 사는 문제보다 급한 것이 없어요.

그것보다 우선이 될 것이 없죠.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생활을 여유 있게 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차원이 아녀요. 고귀한 삶을 살아가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생활을 하면서 생활을 고귀하게 가꾸어 가는 것이 아니죠.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그렇게 생각하며 선택해요. 다른 종교는 그럴 수 없어요. 그러나 기독교는 아녀요. 기독교는 사람이 살고 죽느냐 하는 생과 사의 문제죠.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생과 사가 아니고 영원한 세상에서 생과 사이죠. 너무나 중요한 문제여요. 영원히 사느냐 아니면 영원히 죽느냐 하는 것이 달려 있어요. 기독교는 여기에 핵심이 있어요. 정말 시급하고 우선 적인 일이요 절대적인 일이죠. 정말 예수를 믿는 것이 사는 길이요 천국 가는 길이라고 믿으면 종교를 바꾸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는 것은 아녀요. 그것보다도 더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어떤 사람은 국적까지 바꾸죠.

 

그러니까 본질이 무엇이며 과연 진실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군요.

 

 

성경에 보면 이런 사람이 나와요. 참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을 결단한 사람이 나와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라합이어요. 룻도 같은 경우죠. 자기의 동족 나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신을 찾는 것이죠. 그것에 자기를 바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죠. 비록 동족에게 배반자라고 낙인을 찍힌다 할지라도 라합같은 경우는 과감히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 행동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도와줘요. 언 듯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지만 좀더 깊게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어요.

더 쉽게 이야기 하면 내 가족이 나의 생명을 살려주는 것은 아니어요. 한국 민족이라는 것이 나를 천국가게 하는 것은 아니죠. 오랫동안 믿어온 종교가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고 믿으면 그것은 과감하게 결정을 해야죠. 이것은 부모도 마찬가지죠. 이 세상에서 나를 도와주는 부모이지만 그 부모가 나를 살려주고 나를 구원해주지는 못해요. 우리는 보다 중요한 것을 생각해야 해요. 그렇다고 쉽게 민족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녀요. 중요한 것은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그것에 따라 선택을 하고 행동을 결정하죠.

모든 책임은 내가 져야 하고 그 책임에 대한 결과도 내가 받아야 해요.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지요. 누구를 탓할 수 없어요. 그것은 나중에 핑계일 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죠. 그렇게 보면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여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결정에는 아주 어리석어요. 다른 것에는 아주 지혜로우면서 계산을 하고 그것에 과감한 결정을 하는데 자기 생명에 대해서는 왜 이런 결정에 핑계와 우유부단 하며 망설이는 사람이 이외로 많이 있어요. 참 서글픈 일이죠.

 

한번 깊게 생각해 볼 이야기입니다. 다음에도 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이대희 목사  smd6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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