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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 비평적 읽기(33) “화해자로서 아들 하나님”은 기독교 신학에 없다

우리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 11 아들 하나님(Gott der Sohn)은 테제 문장을 독서하고 있다.

Der eine Gott offenbart sich nach der Schrift als Versöhner, d.h. als der Herr mitten in unserer Feindschaft gegen ihn. Er ist als solcher der zu uns gekommene Sohn oder das uns gesagte Wort Gottes, weil er es als der Sohn oder das Wort Gottes des Vaters zuvor in sich selber ist.

The one God reveals Himself according to Scripture as the Reconciler, i.e., as the Lord in the midst of our enmity towards Him. As such He is the Son of God who has come to us or the Word of God that has been spoken to us, because He is so antecedently in Himself as the Son or Word of God the Father.

한 분 하나님이 성서에 의하면 화해자로서, 즉 그에 대한 우리의 적대성 한 가운데서 주로서 스스로를 계시한다. 그는 그러한 자로서 우리에게로 온 아들 혹은 우리에게 말해진바 하나님의 말씀이니, 왜냐하면 그는 선행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 아들로서 혹은 말씀으로서 있기 때문이다(박순경 역).

성서를 따르면 화해자로서 한 하나님을 계시한다. 즉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적대감 가운데서 주(主)이다. 그는 우리에게 온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에게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안 앞에서 아들 혹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기 때문이다(고경태).

칼 바르트는 “한 하나님(one God)”을 주장한다. 우리는 칼 바르트가 세 위격(three person)을 부정한 것을 제시했다. 서철원 박사는 바르트가 구원협약(pactum salutis)을 거부하면서 아버지와 아들 간에 협정(pactum)했다는 것을 신(神)을 둘로 만드는 것(二神論, duotheismus)이어서 우상숭배로 규정했다(KD., IV/1, 69)고 제시했다(서철원, 『교의신학 기독론』, 42). 칼 바르트가 삼위일체(three person)을 거부하는 것은 『교회교의학 I/1』에서 『교회교의학 IV』에서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칼 바르트가 삼위일체(trinitas)를 부정하고,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을 주장하고 있다고 정리했다. 공교회가 고백하는 신학은 삼위일체 신관이고, 칼 바르트 개인이 정립한 체계는 삼중일신 신관이다. Gottes Dreieinigkeit는 영역(英譯)에서 Triunity로 일관성이 있게 번역했지만, 우리 번역에서는 삼위일체성, 삼위일체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Gottes Dreieinigkeit를 삼위일체로 번역하는 것은 심각한 오역(誤譯)이고, ‘삼위’가 포함된 것도 오해를 유발시킨다. 칼 바르트는 ‘삼위’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는 성경에서 화해자(Versöhner)를 계시한다고 주장했다. 화해자가 아들(Sohn)인데, 그 테제 문장에서 이름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뒤 이은 본문에서 바로 “나사렛 예수”로 이어 간다. 그러나 테제 문장에서는 제시하지 않았다.

바르트는 화해자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in unserer Feindschaft gegen ihn).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하는 위치를 주(主)라고 규정했다. 바르트는 체계적인 것을 규정하는 정교한 글쓰기를 하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의 원인을 명료하게 제시하지는 못 한다. 그러는 반면에 인간이 가진 적대감을 극복하고 교류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구축했다고 제시할 뿐이다(GG., 523).

창조자(der Schöpfer)로서 주(主, der Herr)와 화해자(Versöhner)로 주(主) 개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제시할 것이다. 바르트는 창조자와 화해자, 둘을 구별해야 하며, 종속관계를 통찰하고 승인하도록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고 제시했다(GG., 530).

바르트는 주(主)를 인간에게 온 하나님의 아들, 인간에게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주(主)는 자기 안 앞에서(zuvor in sich selber)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규정했다. zuvor를 영역(英譯)에서 antecedently로 번역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말씀은 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 안 바로 밖(앞)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바르트는 화해자로서 주(主)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말씀을 일치시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영역(英譯)에서 He, Himself가 God를 대신하지 않기 때문에, 대문자로 번역한 것은 명확한 이해를 지원하지 않는다. He, Himself는 God와 Lord를 대신한다. 주(主) 뒤에 있는 대명사(그, He)는 주(主)를 대신하고 있다. 박순경 번역에서도 대문자 ‘그’로 제시해서 빠르게 이해하기 어렵다. 바르트는 화해자와 주(主)를 분리하고 있다.

일련의 바르트 주장에 대해서 반틸 박사(Cornelius Van Til, 1895-1987)는 바르트의 전제(前提)라고 규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르트는 자기 전제를 진리를 이루는 근본 체계로 확립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자기 전제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반틸 박사는 현대신학과의 변호를 전제의 대결인 전제주의(the presuppositional apologetics, presuppositionalism)를 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르트는 매우 예리하고 웅장한 글쓰기를 하지만, 결국 자기 전제 위에 세운 한 개인의 논리 체계이다. 교리(바르트는 과정에 있는 교리, 즉 학문적 재검증을 받아야 할 dogmatic)는 공교회가 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확립한 고백 문장이다. 그래서 교리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이 된다. 교리를 이해한 문장이나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모두 틀렸다. 교리는 이해나 검증이 아닌 고백으로 한 교회를 이룸을 위한 문장이다. 자유주의는 교리를 부정하고 합리(이해)로 기독교를 구축하려고 했다. 바르트는 교리를 부정한 자유주의를 넘어, 교리를 해체하는 현대주의를 주도했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11 테제 문장은 기독교 중보자 교리 체계를 부정하는 중요한 문장이다. 우리는 바르트가 구속주(Redeemer)이신 성자 하나님을 화해자(Versöhner/Reconciler)로 전환시켰다고 밝히고 있다. 정통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구속과 화해(회복)가 이루어진 것으로 제시한다. 재건(restoration)은 원상태로 회복이지만, 회복(restitution)은 본래 의도한 상태로 회복이다. 바르트에게 화해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거나, 보다 나은 상태로 개선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상태로 가기 위해서, 반역한 백성들 중에서 구속주 하나님께서 구속하여 회복한다고 이해한다.

바르트는 현재에서 긍정적인 미래로 가기 위해서 과거를 해석하여 동력을 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밝은 미래에 암담한 가치를 주는 것을 제거하고 미래로 가려고 한다. 우리는 과거를 확립하여 합당한 현재 가치에서 미지의 미래로 나가고 있고, 그 미래는 더 암담한 미래 그러나 최종 시간을 향해서 가고 있다. 

고경태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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