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8) 충성(忠誠)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맡겨진 일을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 청지기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니라 주인이 맡겨 주신 은사를 활용하며 일하는 자다. 병원에서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생계를 위해 밑바닥을 청소하는 그야 말로 미화원이다. 또 하나는 병원의 환자와 가족에게 위로와 행복을 주는 healer로 여긴 미화원이 있다. 후자는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와 직원이 하는 일에 비하면 단순노동직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내노라 할 만큼 의미 있는 직업적인 성공을 못했다 할지라도 그는 의미의 성공을 크게 거둔 사람이다. 위대한 사람, Great이라 할 수 없을지라도 자랑스러운 관리인이 아닌가. 하나님의 비밀, 즉 복음을 맡은 청지기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복음의 청지기로 삼아 주신 것에 의미를 두고 사는 자다. 의리를 외치는 박보성이 말하는 의리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논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겠노라는 다짐이다. 의미는 자기 정체성과 삶의 목적에 기초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다.

‘맡은 자’는 오늘날로 말하면 최측근이요, 가신(家臣)에 해당한다. 그가 맡은 일은 집안에서 주인의 자산을 집안 구성원들의 필요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다.

‘맡은 자’에 해당하는 ‘oijkonovmo"’(오이코노모스)는 종이었지만 자유민이기도 했다. 이 종이나 자유민은 주인의 재산, 특히 재정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고 상당한 권위와 영예를 누렸다. 가정을 관리하는 자를 오이코노모스 혹 ‘에피트로포스’, 즉 감독관이라고 불린다. 이 말의 개념은 노예제도에서 유래했다. 즉 주인은 노예를 지명하여 관리하도록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보디발의 요셉은 노예 신분이지만 가정 총무로서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였다(창 39:4-6). 주인의 집을 맡은 책임 노예다. 가족들과 특히 다른 노예들과 자녀들을 가르치며 훈육하게 하였다. 오이코노모스는 교회 내에서나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섬기는 일 혹은 맡은 자로서 관리하는 역할이 포함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1세기 당시의 상황이라면 ‘맡은 자’ 즉 관리인은 물건을 사고 재정을 관리하고 빚을 받아내고 재정을 운용하는 등의 일까지 포함되었을 것이다. 청지기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와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종들은 오이코노모스다. 주인에게 각각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즉시 나가 장사하는 것은 좋아하는 일인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인가. 주인과 종의 관계를 보면 자발적으로 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주인이 자신들의 재능을 알아주고 장사를 할 수 있을 경영자로 인정하여 주었을 때 자신의 재량을 힘껏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긴다면 즐겁고 신나는 일임에 틀림없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신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음으로 인해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책망을 들었다.

바울에게 맡겨진 임무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천상의 비밀을 맡은 자는 하늘의 사람이다. 땅의 사람의 명령이나 일을 하는 자가 아니다. 하늘의 창고를 열고 닫으면서 하늘의 온갖 좋은 것을 땅에 가져 오는 자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다. 그들은 오직 한 분 주군(主君)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 순종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고대 로마 당시 종이나 노예들은 가사의 모든 것에 책임을 지고 있는 주요 관리자로서 상당한 정도의 위임 권한을 누리는 위치에 있었다. 바울이 ‘맡은 자’라는 이미지를 사용할 때 이러한 관리 노예(slave-in-charge)의 이미지를 연상하였을 것이다.

 

1. 맡은 자들에게 충성

바울은 교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묘사하기 위해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한다. 첫째는 ‘일꾼’에 해당하는 ‘휘페레테스’이다. 둘째는 ‘맡은 자’에 해당하는 ‘오이코노모스’이다. 전자는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고용되어 직접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사람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허드렛일을 하는 비교적 신분이 낮은 종을 나타낸다. 후자는 집안의 종이 주인을 대신하여 그 집안이나 재산 혹은 사업체를 관리하는 청지기를 가리킨다. 청지기의 삶의 목표는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는 것이 되어야 한다. 고려시대 문인 이달충이 쓴 책, 즉 평판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잠언인 ‘애오잠(愛惡箴)’에서 청지기의 삶을 찾을 수 있다. 그 서문에 등장하는 무시옹(無是翁)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사람이라 해도 나는 기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해도 나는 근심스럽지 않소.” 그리스도의 일꾼과 복음의 청지기 또한 오직 하나님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는 자다.

주인의 것을 맡은 자들, 즉 청지기들은 노예나 물품을 사거나 지혜로운 투자를 하는 등, 주인의 재정을 관리했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혹은 ‘충성된’ 자들이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세속의 청지기들에게 일정한 자질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pistov"’(피스토스)이다. 하나님이 주신 자원 또는 은사를 가지고 ‘활용하는’ 자로서 갖추어야 할 핵심적인 자질이 있다. 충성은 신뢰성(trustworthy) 혹은 신실함(faithfulness)이다. 믿음직스러워야 한다. 우리 인체의 항온 시스템, 즉 몸의 항상성은 생명 유지의 근간이다. 항심은 우리가 애써서 구해야 할 마음의 항상성(恒常性)이다. 주인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자는 사이클의 오르내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마음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어야 성과도 낼 수 있는 것이다. 제(濟)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정치를 잘 하는 방법을 물었다. 맹자는 일반 백성은 군자와 달리 항산(恒産·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일정한 재산과 생업)이 없으면 항심(恒心·언제나 변치 않는 올바른 마음)도 없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일정한 경제 수준을 보장해 주어야만 일반 백성이 생업에 전념하며 '인과 의'를 실천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의 보상과 복지가 확보되어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생계의 문제는 주인이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우리가 구할 것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가 아니라 충성이다. 변치 않는 마음과 태도로 섬기는 것이다. 즉 항상심(恒常心)이다.

 

2. 맡은 자들이 구할 것은 신실한 삶이다

'충(忠)'은 공자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덕목이다. 마음을 뜻하는 심(心)과 가운데를 뜻하는 중(中)이 합해진 충은 곧 '마음의 중심'을 뜻한다. 우리가 마음의 중심을 잡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꿋꿋하게 해낼 수 있는데 이때의 마음가짐을 충이라고 한다. 공자가 말한 충성이란 맹목적인 충성이 아닌 진실한 마음의 중심이다. 그리스 철학자들도 충성을 중요한 덕목으로 손꼽았다. 그래서 때때로 충성스러운 자신들이 신성한 진리를 맡은 청지기나 관리인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고 복음의 청지기가 된 것은 충성이라는 자질이 있고 그런 인품이 되었는가. 정호승은 ‘햇살에게’라는 시에서 세 가지 감사를 한다.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어 감사하고, 자신이 먼지임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그래도 먼지 된 자신을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한다고 노래했다. 우리가 충성된 사람이라는 자격이 있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고 복음의 청지가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지 같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주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겼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먼지 같은 우리에게 은사와 능력을 주시기에 충성할 수 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관심을 가질 것은 사람들에게 인기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충성스러운 자라는 칭찬을 듣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고 존경을 받는가에 목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 있느냐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일꾼’과 복음의 청지기라는 명예라는 주제와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필요한 충성이라는 주제, 책임감과 신뢰성을 함께 결합한다. 이는 스스로 자신을 명성을 얻고자 함이나 자신의 영역을 만드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신실한 태도를 요구한다. 김동윤은 ‘선한 청지기의 가정 경제 회복 이야기’에서 청지기는 전지전능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과 원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청지기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이 모든 물질세계의 주인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위임받아 잘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이목에 집중하고 칭찬에 널빤지처럼 놀아나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충성을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사람들에게 인정과 호감을 사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 2006년 교회표어를 ‘너나 잘 해라’고 정한 서울 어느 장로교회가 있었다. ‘친절한 금자씨’ 영화의 명대사를 교회의 표어로 정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교회에서 직분자로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할 것이지 남의 일에 오지랖을 떨지 말라는 뉘앙스를 떨칠 수 없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는 남의 일에 감내라 배내라며 간섭하고 비판할 시간이 없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이요 맡은 자인 직분자들이 구할 것은 충성이다. 즉 신실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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