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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칼럼】 목사란 무엇인가?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무덤에 갈 때까지 목사는 목사

이번 여행에도 예전처럼 많은 목사와 성도들을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은 늘 반갑고 새롭다. 어제와 오늘의 만남이 별반 다르지 않은데 느낌은 같지 않다. 웃고 떠들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따스함과 정이 묻어나고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스며든다. 나라와 민족이 들먹여지고 대화와 표정 속에 스케치되는 삶과 사역의 언저리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사려 있다. 목사란 무엇이며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자리 매김을 하는 것일까? 목사는 나의 직업이다. 세속적인 직업이 아니라는 뜻에서 직업으로 분류되기를 싫어하는 분들이 있어 성직이라 하지만 역시 직업은 직업이다. 안수 받은 이후로 반평생을 이 일에 종사했으니 베테랑 중에 베테랑이다. 무도에 비긴다면 고수 중에 고수다. 허나 현실은 그러지 못해 늘 아쉬움과 답답함이다.

목사는 사역지에 머물거나 떠나거나를 막론하고 목사다. 현직에 머물거나 은퇴를 하거나 여전히 목사다.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주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며 하나님조차 목사라는 칭호를 거두어가시지 않는다. 사역은 끝나도 목사라 불리는 것은 목사가 평생직임을 의미한다. 목사의 정체성은 자의식을 넘어선다, 그것이 축복이든 형벌이든 목사직은 무덤까지 이어진다. 천복(天福)이든 천형(天刑)이든 이 길을 걷는 자는 끝까지 자신을 살필 일이다. 목숨줄이 붙어있는 한 목사가 마지막까지 놓지 말아야 할 끈은 기도와 말씀과 배움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것도 부족해서 꿈속에서까지 기도해야 하고 말씀에 파묻혀야 하며 배움을 이어가야 한다.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것도 부족해서 무덤속에서까지 기도로 금생과 내생의 삶을 잇고 말씀으로 땅과 하늘 사이에서 존재의 비상을 이루며 끝없는 배움의 완결을 이루어야 한다.

 

존경스런 이름 ‘목사’를 위하여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바른 목자상에 근접하기 위해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함같이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자극 받으며, 서로를 세우며 세움 받으며, 서로를 새롭게 하며 새로워지기 위해서 목사 됨을 감히 묵상해본다. 다시 태어나면 두 번 다시 목사만은 되지 않으리라는 각오와 함께 한 생 아니라 천생 만생을 다시 태어나도 목사의 길을 걸으리라는 다짐을 수없이 반복해온 나로서 이것은 당연한 생각이다. 이제는 현실 목회의 끈을 놓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도 듣고 좋아하는 여행을 하며 뜻 맞는 친구들과 살아있음을 노래하는 것도 정말 좋은 일이다. 결국 버켓 리스트를 다 이루지도 못하고 미완성의 상태로 부지런했던 삶을 마감해야 할 우리는 바람처럼 물처럼 살다 가기를 바랐던 현인의 읊조림처럼 그렇게 스러지리라. 그래서 더더욱 이 새벽에 목사이지만 여전히 목사답지 못한 자신을 지긋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며 음미해본다.

목사란 정치가 아니라 목회하는 직업이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에 성직이라 부른다. 세상이 목사를 존경하는 것은 그가 지닌 사회적 위치, 신학적 지식, 현란한 화술, 매력적 풍모,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세상이 목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에게 붙여진 목사라는 칭호 때문이다.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소명과 사명이 어우러져야 하고 학문적 성취와 더불어 최종 안수를 받기까지 거쳐야 할 관문도 수월치가 않다. 평생 목사로서 목사답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정치목사’라는 호칭은 성직의 수치

정치목사라는 호칭은 성직의 수치다. 목사가 소속된 교회에 정치제도가 있으니 정치를 안 할 수야 없겠지만 정치 목사가 되면 곤란하다. 정치를 하려면 정치계로 가는 편이 낫다. 싸우려면 바람의 파이터처럼 무도의 길을 무소의 뿔처럼 걸으라. 머리 깎고 투쟁하려면 산사로 파고들라! 삭발 투쟁은 한국인의 전매특허가 되다시피 했다. 목사들마저 삭발하며 투쟁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목사의 투쟁은 머리 깎는 식이 아닌 다른 방도로 표출되어야 한다. 싸우려면 피터지게 싸워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마땅하다. 싸우는 방법이 다르고 이기는 전략이 같지 않다. 목사는 투사가 아니다. 투사이기를 고집한다면 검투사의 일대기를 살펴보라! 안정적 생활을 원한다면 대기업 사원으로 들어가든지 재원이 충분하다면 사업을 시작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 머리와 지식에, 경륜과 통솔력에, 설득력과 고객 관리 능력이면 고속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요 사업상 성공도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일을 사랑하듯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면 목회는 불가능이다.

 

사랑으로 성도를 변화시키는 것이 목회

주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되 자기 사람을 특히 사랑하셨다. 반면에 주님은 사람을 믿지 않으셨다. 제자라 할지라도 믿지 않으셨다. 주님은 사람을 믿지 않았기에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셨다. 나는 주님의 종이기에 사람을 사랑하려 애쓴다. 하지만 사랑하기 어려운 부류가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충직한 장로는 하늘이 내린 보화요 교회의 기둥이다. 그러나 장롱처럼 쌓기만 하고 나눌 줄 모르는 장로는 싫다. 권면과 위로에 능한 권사(勸士)는 교회의 지붕이다. 그런데 말썽만 피우고 목사를 피곤(疲困)하게 하는 곤사(困士)는 피하고 싶다. 충성된 집사(執事)는 하늘의 상급이 크다. 허나 제 집-사는 일에만 관심 있지 하나님의 집 마련에는 끄떡하지 않는 집사는 곱지 않다. 그렇다 해도 목자로서의 사랑이 밑바닥에 고여 있다면 괜찮다.

목사가 교회의 중직자들을 싫어하고 피하고 얄미워하면 목회가 쉽지 않다. 나는 사랑하는데 미움의 메아리로 되돌아올 때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다윗은 이런 위기에서 그다운 길을 찾았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집단적 따돌림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께 무릎 꿇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모두의 것이 아니기에 거절된 사랑의 아픔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가 사방에 널려 있다. 회중의 고룬 사랑을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목회를 계속한다. 하나님이 시키셨으니 그만 하라 할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 된 자세다. 그런 장로를 하늘의 보화와 교회의 기둥감으로 바꾸고 그런 권사를 교회의 지붕감으로 바꾸며 그런 집사를 하늘의 상급자로 바꾸는 것이 목회이기 때문이다. 목회는 정치보다 어렵고 사업보다 힘들며 결혼생활보다 피곤하다. 그래서 목회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해볼 만한 일이다.

 

순종(順從)하는 순종(純種) 목사 변개(變改)하는 변종(變種) 목사

사람들이 좋아하는 목사와 하나님이 좋아하는 목사가 같으면 목사 노릇도 조금은 수월할 것이다. 하나의 표준에만 집중하면 되니 말이다. 문제는 아래와 위에서 요구하는 목사상이 다르기에 목사는 양쪽으로 눌린다. 하나님이 정하신 목사상과 사람들이 그려낸 목사상이 달라서 목사의 정체성은 늘 불안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사상은 분명하다. 변하지 않고 타협이 없다. 사람들이 원하는 목사상은 불분명하고 변하며 딜(deal)이 가능하다, 목사가 둘 중의 하나를 고를 수 있다면 차라리 편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사가 되든지 사람들에게 적합한 목사가 될 것이다.

목사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순종함으로 순종(純種)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 변종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원하는 쪽에 기울어지고 어떤 때는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구색을 갖춘다. 신성의 요소와 인성의 요소는 함유량에 따라 단순히 작용하지 않는다. 변종은 변종이어서 언제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른다. 바울은 이 미묘한 현안에 하나의 전범을 보였다. 바울의 어조는 솔직담백하며 서슬이 퍼럴 정도로 담대하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나님에 초점을 맞춘 ‘하바라기’, 예수에 집중된 ‘예바라기’는 전혀 타협 불가요 양보 사절이다.

 

성도를 사랑하는 목사와 목사를 사랑하는 성도

모든 성도들이여! 목사를 사랑하라! 그것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불러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다.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에 그에 합당하게 섬기고 대우하라는 으름장이 아니다. 모두는 아니어도 대개의 목사들은 성도들을 사랑한다. 목사가 성도를 사랑함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때로는 가족보다 성도를 아낀다.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무엇 하나 아까울 것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의 온갖 좋은 것을 함께 나눠주는 이런 목사를 위해 육신의 좋은 것을 나누는 것쯤은 어려울 이유가 없다. 목사는 교인들의 생일을 모두 기억하는데 목사 한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함은 신앙을 떠나 사람으로서의 예도 아니다.

목사의 수고를 알아주라! 목사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고백은 목사 자신에게서 나와야 할 말이지 성도들이 타박용으로 사용할 언사가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제 할 일을 했다 하여 그냥 지나치는가?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제정하여 기념하고 감사를 표하지 않는가? 미국에는 목회자의 날이 있다. 카드에 깨알 같은 글씨로 감사를 담아 정성스런 선물과 함께 건넨다. 성도의 선물은 받는 목사의 감격과 부딪혀 감사하는 자의 감사도 증대시킨다. 목사는 성도의 따스한 사랑으로 살아간다. 양젖은 목자만이 아니라 제 새끼도 먹고 자란다.

목사가 군림하면 성도의 아름다움이 망가진다. 목사가 욕심을 터뜨리면 성도의 영혼은 파리해진다. 목사가 농간을 부리면 성도의 간에서 농이 생긴다. 목사는 섬김으로 영적 보좌를 높인다. 목사는 비움으로 영혼의 충만을 얻는다. 목사는 진실함으로 영적 건강을 유지한다. 권위주의와 이기주의가 기만정신과 만나면 자신의 영혼도 죽이고 천국에 들어갈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무저갱의 사자가 된다. 교회는 강도의 굴혈로 변하고 거짓 가르침으로 많은 영혼들을 죽이는 사탄이 도살자의 전횡을 휘두른다. 우리 주변에 이런 패당이 난무함은 슬픔을 넘어 아픔이요 아픔을 건너 분노다. 그들에게 빌붙어 보호받고 작은 권세를 휘두르는 똘마니들이 들끓음도 꼴불견이다. 성령의 권능으로 패대기쳐야 한다.

 

하나님 없는 신학교와 주님

주님이 신학교에 입학하셨다. 수능 점수도 높고 성경 만점으로 수석합격이었다. 교수들의 수업을 번갈아 들으며 생소한 학문을 접한 주님은 꽤 놀란 표정이셨다. 학우들과의 학문적 토론은 없었지만 기도실이나 전도 현장에는 꼭 나타나셨다. 성경 원어와 영어 실력은 교수보다 월등했다. 그래서 교수들은 자주 주님에게 대신 강의를 맡겼다. 문제는 신학이었다. 조직신학, 성서신학, 역사신학, 현대신학을 다루면서 불편해졌다. 교수와 학생들 간에 기독론에서 논쟁이 가열되고 하나님 죽음을 전제한 신학 이론들이 봇물 터지듯 할 때는 거의 사색이셨다.

어느 날 성경을 근거로 제시하며 성경 신학의 관점에서 모든 신학들을 연계 설명하시자 학우들의 눈이 둥그레졌다. 구곡주(九曲珠)의 밀의사(蜜蟻絲)처럼 막힘이 없었다. 처음 듣는 설명에다 주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 강의실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교수가 주님의 설명을 중단시켰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고 출발한 주님의 접근 방법을 문제 삼았고, 신앙적 적용은 탁월하지만 학문적 근거가 약한 것을 흠으로 지적했다. ‘왜?’ 의 고민이 없고 ‘어떻게?’ 의 방법론도 약하다는 결론이었다. 학기말 고사에서 주님은 문제의 문제성을 알고 백지를 냈으며 결국 성적표는 모두 F였다.

 

주님이 만드시는 목사, 교회가 고대하는 목사

이런 목사가 되기 원한다. 말씀을 공교히 전하지는 못해도 진실하게 전하는 목사가 되기 원한다. 성경을 백독하지 못해도 한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는 목사가 되기 원한다. 기도를 끈질기게 하지는 못해도 무릎 꿇기를 좋아하는 목사가 되기 원한다. 심방을 자주 하지 못해도 성도의 가정을 살피는 목사가 되기 원한다. 박사 학위는 없어도 늘 배우기 좋아하는 목사가 되기 원한다. 친구에게 환영받지 못해도 친구를 목숨처럼 아끼는 목사가 되기 원한다. 외모의 풍채는 없어도 영적 풍모를 지닌 목사가 되기 원한다.

선배의 호의를 받지 못해도 후배를 돌보는 목사가 되기 원한다. 건강하면 죽어라 열심히 목회하고 병들면 완쾌되기까지 쉼을 즐기는 목사가 되기 원한다. 살아서 아멘이 충만하고 죽을 때 할렐루야를 외칠 목사가 되기 원한다. 가진 것은 적어도 나누기를 좋아하고 가방끈은 짧아도 긍휼끈이 긴 목사가 되기 원한다. 사례비가 많으면 선한 지출을 늘리고 사례비가 적으면 삶의 경비를 줄이는 목사가 되기 원한다. 총회장을 못해도 교단을 아끼고 교회가 작아도 행복한 목사가 되기 원한다. 교회가 이런 목사를 얻기 바라고 주님이 이런 목사를 만들어 주시기 바란다. 이 땅에 잠시 머물다 다시 삶의 처소로 돌아가는 나그네의 작디작은 진심이다.

윤홍식 기자  jesuspoin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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