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자살 예방 센타로 세우는 기획 칼럼(4)

 

최종인 목사, 평화교회담임, 성결대, 중앙대석사, 서울신대박사, 미국 United Thological Seminary 선교학 박사, 공군군목, 성결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외래교수

3. 자살자의 구원

자살한 이의 구원문제에 관하여는 그동안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앞으로도 논쟁 주제가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살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해치는 것이기에 사형에 처하도록 엄히 명하고 있지만(창9:6), 모든 살인을 다 사형에 처하도록 한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직접적으로 사람을 쳐 죽였고, 다윗은 살인을 교사해서 간접적으로 살인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 행위로 상당한 값을 치루지만 결국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자기 살인이라 불리는 자살은 결단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살은 다른 행위와는 달리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용서받지 못하게 되는 죄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생각의 무게 있는 단초를 제공한 최초의 신학자는 어거스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 목숨을 끊은 행위는 오히려 죄를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의 기회를 기다리지 않고, 파괴적 가책이 발동하여 스스로 생명을 끊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의 기회(chance of a saving repentance)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회개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는 죄를 범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의 기회를 남겨놓지 않는 악한 행위[자살]를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Judas' regret(유다의 후회), José Ferraz de Almeida Júnior, 1880

이런 인식은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만만치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단지 ‘사제를 통한’이라는 구원이 없어지고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기에 자살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지 못한 죄이기에 용서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과연 신학으로 타당한가? 기독교회는 회개가 구원에 필수라고 가르치지만 모든 범죄에 관한 회개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원한 작정 가운데 택한 자라고 하면 아무리 큰 죄를 짓고 회개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택함 받은 바는 변할 수 없습니다. 만약 지은 모든 죄에 대해 회개해야만 용서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면 이것은 자칫 행위 구원 내지 공로 사상으로 미끄러질 위험을 안게 됩니다. 이것은 심각한 신학 문제를 낳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자기가 지은 죄를 낱낱이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특정한 죄의 회개 여부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로마서 8장 29-30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바울 사도는 “그런즉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하리요”(롬8:31)라고 말하면서 이 세상의 어떤 것이나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8-39)”고 말한 것은 성도의 구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비록 자유의지로 자살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성도를 구원하시는 것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자살이 하나님의 자비와 주권에서 나오는 구원하시려는 뜻을 변경할 수도 없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혹 ‘정말 하나님이 택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자살할 수 없고 하나님이 그를 자살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라는 식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 근거가 충분한 주장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7장 3항은 이 주장에 대해서도 답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사탄과 세상의 유혹과 그들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의 세력과 자신들을 견인하게 하는 방편을 소홀히 함으로 죄에 빠지며 한동안 그 죄에 머물기도 한다” 즉, 신자들도 사탄의 유혹과 육신의 약함 때문에 때로는 심각한 죄들을 범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자들이 늘 의의 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구원받은 성도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그것 때문에 일시적 심판을 받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언약 백성들도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렸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를 촉발시킨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비록 언약백성이 율법을 일시적으로 범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효화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의 유효성이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에 전적으로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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