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비판의 견지에서 이성을 활용하는 믿음 』


기독교에서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 대한 상반 된 주장들이 줄기차게 계속되어 왔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생을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일에 바쳤습니다. 그는 원칙적으로 신앙과 이성은 둘 다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모순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신학과 철학은 서로 다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진리를 추구하지만 방법에서 다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물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고, 신학은 하나님에게서 출발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중세 기독교를 지배한 대표적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입니다. 그는 죽은 지 49년이 되는 1323년에 성인으로 추증(追贈)되었고, 1568년에는 공식적으로 교회박사(doctor ecclesiae)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교회박사는 교의상 교회에 큰 기여를 한 학자에게 주는 영예로운 칭호로 학문만 깊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경건의 덕을 인정받는 자에게 주는 것이기에 그의 주장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14세기 화가 프란체스코 트라이니가 그린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하는 “성 토마스의 승리”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토마스가 가운데 서 있는데, 책을 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양 옆에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고, 그의 발밑에는 한 이교도가 엎드려 누워 있습니다. 이는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도움을 받아 이교도를 발아래 쓰러뜨린 신학의 승리자로 묘사된 그림입니다. 그의 기독교 교리에 대한 철학적 논증은 교회를 해치는 이단들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자들은 그의 논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어서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였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복음이 지중해 연안 국가들로 전파 된 이래 철학과 복음과의 관계 즉 이성과 신앙과의 관계에 대하여 교회는 많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칼타고의 터툴리아누스의 갈등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갈등은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클레멘트는 철학을 복음에 이르는 준비 단계로 생각하였지만 터툴리아누스는 철학을 이단의 어머니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서 복음을 받은 안디옥에서는 복음의 역사성과 에수님의 인간성을 강조했습니다. 안디옥 학파의 선구자인 사모사타의 바울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강조하면서 “나사렛 사람 인간 예수는 기름 부음을 받아서 우리 주가 되시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로부터의 인간이시다.”라고 하였습니다. 네스토리우스도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인간적인 순종을 강조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에 형성된 복음과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주장들을 종합하고 평가하여 포괄적인 입장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이성과 신앙과의 관계에서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32세가 되기까지 신플라톤주의를 비롯하여 고전 이성과 철학의 방식으로 신앙에 이르기를 힘썼으나 자신의 노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그가 고뇌에 빠져 있을 때 동내 아이들이 부르는 “톨레 레게”(tolle lege)라는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톨레 레게란 책을 집어 들어 읽으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어거스틴은 어린아이들의 그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집어 들어 펴서 읽다가 로마서 13장 13, 14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깊은 감동을 체험하였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그는 이 체험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 후 줄곧 이성보다는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서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하였지만, 그 다음 강조한 것은 신앙의 이해성이었습니다. 터툴리아누스가 믿음 후에는 탐구가 필요 없다고 극단적인 주장을 했지만 어거스틴은 개종 후 처음 저술한 “고백록”을 통하여 믿음의 내용들을 이해하기를 갈망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을 부르고 나서 진리, 지혜, 생명, 선, 미, 행복, 빛, 왕, 아버지, 원인, 소망, 부, 영예, 고향, 조국, 건강 등 온갖 명사를 나열하고 자기는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을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께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나는 당신께로 가기만을 소원합니다. 나는 당신께로 갑니다. 어떻게 가는지 가르쳐 주시기를 다시 간구합니다.”, “내가 기도에서 말한 모든 것들을 알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이런 것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었습니까? 내가 마음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말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곳에서 모은 것들, 그래서 나의 기억에 저장한 것들, 그래서 내가 그저 믿게 된 것들을 말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거스틴은 자기가 믿는 내용을 알기를 간절하게 소원하였습니다. 그가“Credo ut intelligam”(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한 말은, 그가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도 또한 이해성을 강조하므로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성의 필요를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함에 있어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Trinity is beyond human understanding).”라고 하여, 인간이 자신 즉 이성을 부정할 수 있는 용단은 지극히 진솔한 참된 신앙인의 용단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수많은 저술들은 신앙과 이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토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은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르고 발전시킨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믿음의 내용에 대한 이성적 이해 뿐 아니라 신앙의 신비를 알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의 신비를 알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하고 붙잡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한 그의 소원은 그의 “신국론”마지막 부분에서 “거기서 우리는 쉬고 보며, 보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라고 진술한 말 가운데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고백은 사도 바울이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고 한 말씀으로부터 배운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도 바울이나 어거스틴이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성비판적 견지에서 이성을 수용하고 활용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이성비판의 견지에서 이성을 수용하지만 왜곡된 신앙은 신앙비판적 견지에서 이성의 판단과 설명과 이해를 따릅니다. 어거스틴이 이성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것은 이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이성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성과 신앙의 관계가 줄기차게 갈등을 계속해 온 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이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전통 기독교는 언제나 “오직 믿음”으로 믿음의 우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마치 이성을 무시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지만 신앙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이성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신앙과 이성을 구분하여 이해하고 설명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이성과 신앙은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을 하나님 형상의 일부라고 생각할 때 이성 없는 신앙은 상상할 수 없고 신앙 없이 이성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성경은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 이성은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이성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는 것은 이성의 한계 때문입니다. 이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은사이지만 이성비판적 견지에서, 즉 이성의 한계를 알고 잘 활용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더욱 풍성하고 깊게 누릴 수 있습니다.

이성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성 없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고 이성의 능력 즉 인간의 능력으로 구원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할 때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을 낙관적이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이성비판적 견지에서는 비관주의가 되고 믿음 안에서는 낙관주의가 되기 때문에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은 비관주의적 낙관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문화 일반에 대해서 역설적이게도 양면적이고 역설적이며 포괄적 입장과 자세를 갖게 됩니다. 터툴리아누스는 세상과 문화 일반이 죄악의 세력에 지배를 받아 타락하고 부패되었기에 부정적으로만 보았지만 어거스틴은 정치, 사회, 문화 활동이나 인생 자체에 대해 비관주의적 낙관주의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현세의 복이란 장차 누릴 복과 비교할 때는 불행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믿음 안에서 그 복은 장차 누릴 복을 선취하여 누리는 것이기에 이방종교나 이원론이나 반문화적 입장이 설명하는 복과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은 인간과 자연과 세상 문화 일반의 회복까지를 포괄합니다.

기독교 안에서의 이성과 신앙의 갈등은 아마도 주님 다시 오실 때가지 계속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념과 철학과 사상과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도 이러한 갈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성과 신앙의 갈등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지금은 온 세계가 진보와 보수의 갈등으로 심각한 분열의 폐해를 겪고 있습니다. 진보나 보수가 다 이성의 산물이기에 그 가치는 상대적이지만 진보는 사악한 면이 심각하고 보수는 어리석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성비판적 견지에서, 그리고 신앙 우위성의 튼튼한 토대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이성을 잘 활용한다면 상대적 가치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 이성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모든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한 이들이 이 땅에서 풍성한 하나님 나라의 복과 은총을 날마다 더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것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입니다. 이성비판적 견지에서 성실하게 이성을 활용하여 상대적 가치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가치를 노래하고 감사하는, 세상의 불신자들이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차원의 행복을 누리는 빛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점점 늘어났으면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5-17)

 

◆ 『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임과 아담의 소명 』 

예수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은 인류에게 크나큰 영예입니다. 왜냐하면 성육신을 통하여 절대 권력자이신 하나님께서 비천한 죄인과 관계를 갖게 되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죄인과 가지신 관계의 밀접성은 살과 피를 함께 나눈 것과  그들과 같은 영혼과 몸, 머리와 심장, 이성과 의지, 생각과 감성을 취하심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실 수 있는 것은 이런 관계의 밀접한 실현의 토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 우리 모두의 형제가 되셨고, 우리의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 육체적 관계의 밀접성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여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영적이고 도덕적인 교제의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관계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피를 나눈 가족 관계가 아무리 밀접하여도 영적 관계에서 날카롭게 상호 대립할 수 있듯이 자연적 혈통 관계는 영적 관계와 대립하거나 무관할 수 있습니다. 혈연적 관계의 교제와 영적 관계의 교제는 필연적 동일성을 갖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성육신은 그 자체로 하나님과의 화목과 구원을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육신은 구원의 시작이고 준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것에 있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지만 죄는 없다고 할 뿐 아니라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셔서 율법의 의를 이루시고 스스로 고난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받으실 뿐 아니라 또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로 하여금 이러한 사역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보내셨고, 또한 아들에게 생명을 버릴 권세와 다시 취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그 사역을 다 이루셨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복음 증거에서 예수님의 잉태와 생애는 비교적 짧게 언급되고 메시지의 포인트는 십자가와 부활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성육신으로 된 것이라고 하지 않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전 생애가 모든 것을 뛰어넘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으심이 바로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사역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성육신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일부입니다. 잉태로부터 십자가에 죽기까지의 생애가 십자가로 집약되어 하나의 완성된 사역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은 그가 승귀의 신분으로 계속하시고 계십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역사적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진 사역이지만, 그 일은 영원에 뿌리를 내리고 영원을 향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이 구속의 사역을 세 가지 직, 즉 선지자 직, 제사장 직, 왕의 직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세 직임은 독립된 것이 아니고 구속 사역의 흐름에 합류되어 흐르는 한 직임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하신 가르침이나 설교는 선지자 직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고, 마지막 고난과 죽음은 제사장 직의 수행이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왕의 직임을 상기시키지만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언제나 그의 세 가지 직임을 동시적으로 수행하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선지자로서 말씀을 선포하셨고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긍휼과 왕권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그가 말씀을 통하여 병자를 고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행하신 이적은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표이고 그분의 말씀이 진리라는 표징이지만 동시에 곤고한 자들에 대한 자비의 계시이며 질병과 죽음과 사탄을 지배하시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말씀 사역과 동시적으로 언제나 선지자 직과 제사장 직과 왕 직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세 가지 직임으로 설명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은 성경이 계시하려고 하는 중요한 유익들을 놓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익들은 첫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생애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직임 수행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둘째, 그리스도에게 맡겨진 세 가지 직임은 인간의 본래적 소명과 목적과 관련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임은 구약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합리주의자들 중에는 그리스도를 선지자로만 이해하고 설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 중에는 그리스도를 제사장 직의 신비로운 고난으로 설명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천년설 주의자들 중에는 그리스도를 왕으로만 설명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 가지 직임을 담당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선포하는 선지자,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키는 제사장,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보호할 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인 지식과 거룩함과 의를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당신의 형상 안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소명과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는 인간 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을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내어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보다 하나님을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어 보여 줄 수 있는 존재를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상징하거나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 것을 두 번째 계명으로 엄히 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상징하거나 보여 줄 다른 어떤 존재를 만드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짓일 뿐 아니라 교만한 짓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다른 어떤 상징물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근원적인 소명을 유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존재보다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어 보여줄 존재를 인간은 결코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 들어 있는 인간의 근원적인 소명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뜻을 드러내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직은 이 소명 실현을 위해 도입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소명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는 왕의 직임입니다. 다스리라는 왕 직의 소명은 통치 뿐 아니라 지키고 돌보는 역할이 강조된 소명입니다. 인간은 모든 창조물, 이를테면 자연을 다스리고 지키고 돌아보아야 하되 특별히 다른 사람을 지키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인이 동생을 살해하고 난 다음 하나님으로부터 추궁을 당하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한 것은 바로 왕 직 소명에 대하여 하나님께 반항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 가운데 모든 인간은 서로를 지키고 돌보라는 소명을 넣어 두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도록 소명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를 지키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은 하나님께서 은폐의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가면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로부터 깨닫게 되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 된 또 다른 소명은 인간이 그 자신과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뿐 아니라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로서 인간이 누릴 최고의 복입니다. 제사장 직도 첫 사람 아담이 받은 이 소명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아담이 받은 이 세 가지 직임은 하나님의 형상인 의와 지식과 거룩함으로 수행되도록 주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머리를 받았고 만물을 다스리고 보살필 사랑과 마음과 손을 받았습니다. 인간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모든 재능을 조화 있게 발달시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책을 잘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이 소명은 무시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셔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하게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임은 자연과 은총, 창조와 재창조,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어 가르쳐 줍니다. 아담의 범죄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임을 통하여 근원적인 인간의 소명을 밝혀주는 성경 계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분의 세 직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나 소명을 수행하는 것도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머리와 마음과 손발 그리고 전인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영혼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전인이 구원을 받아야 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원 목적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능히 감당하실 메시야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가 그 사역을 감당하여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선지자요 제사장이며 왕이십니다.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근본적 소명과 목적은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세 가지 직임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직임이 세 가지로 설명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직임은 인류와 인간 본성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실패한 소명 수행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 가지 직임을 통해 완성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인간의 근본적인 소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소명 수행은 인간의 의무임과 동시에 구원 받은 천국 백성이 누릴 복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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