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연재 묵상칼럼
【묵상 칼럼】 창조의 디자인을 따른 결혼은 아름답다[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0) 결혼(結婚)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게리 베커(Gary Becker, 시카고대 경제학과)교수의 ‘결혼이론’에 의하면 결혼을 선택하려는 결정은 만족감에서 찾는다. ‘결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이 혼자 살아갈 때 얻는 만족보다 클 것이다’. 문제는 독신생활에서 얻는 만족감과는 달리 결혼생활로부터 얻는 만족감은 언제 알 수 있는가. 결혼 후에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즉, 결혼생활로부터 얻는 효용수준은 미래에 대한 기대치일 뿐이다.

바울은 성에 탐닉하거나 제한하는 양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결혼을 과대하게 강조하는 유대 범주와 금욕주의를 이상화하는 헬라의 추세 사이에서 중재적인 입장을 취한다. 결혼의 음행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잠언 5:15, 18, 20을 반영한다. 독신을 옹호하는 금욕주의 무리들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조차도 금욕을 촉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결혼한 각각의 배우자들은 자신의 배우자와의 성적 관계를 지속해야 함을 서술한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첫 번째가 ‘사랑’이라면(갈 5:22) 육체의 일의 첫 번째는 음행이다. 성령이 아닌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가는 육체의 삶에 대표적인 열매가 음행이다. 성령의 영향을 받지 않는 육체의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이성에 따라 음란한 행위를 한다. 감정은 사람의 판단을 결정하는 원초적 힘이다. 이성은 감정이 내린 판단을 합리화하고 실행할 따름이다. 미국 작가 토니 핸드라(Tony Hendra)는 소설 ‘Father Joe’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죄 중 가장 달콤한 죄는 간통이다.” 그렇다고 간통을 찬양하는 건 아니다. 조 신부는 말한다. “섹스가 왜 나쁘니. 섹스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란다. 하지만 타인을 해치거나 이용하기 위해, 오직 자신의 쾌락을 위해 섹스를 한다면 그건 죄가 되는 거야.” 조 신부에게 “인간이 저지르는 단 하나의 죄는 이기주의”다.

고린도 교인들의 질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인데, 바울은 곧장 결혼을 할 것을 말한다. 특히 고린도에 성적 부도덕이 널리 펴져 있기 때문에 그런 유혹에 의해서 어느 한 쪽이 나쁜 영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남자마다 자기의 아내를,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가져야 한다고 자세히 말한다. 바울의 대답은 매우 실제적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 믿음의 절개를 지키기에 결코 녹녹치 않는 곳이다. 육체적인 구조와 자연적으로 주어진 건강한 본능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죄에 빠지기 쉬운 도시에 살고 있다. 믿는 자로서 죄에 빠지기보다 결혼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1. 결혼 관계의 상호성과 상호 즐거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두 사람에게 먼저 복을 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다스리라는 문화적인 명령이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모두 행복에 대한 장대한 탐구를 통해 결론 부분에 즐거움 혹은 기쁨에 대한 즐거움에 대한 사유로 마무리하고 있다. 두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고린도사람들이라면 또는 고린도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금욕에 영향을 받은 자라면 인간적인 노력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그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 또는 금욕을 찾았을 것이다. 이런 사상의 영향으로 결혼을 행복 추구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더 많은 행복이 있다면 그쪽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 헬라의 철학적 분위기이다.

그러나 성경은 복을 연구하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서 그로 인해 기쁘고 즐거운 삶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견유학파의 주장대로 금욕을 통해 자기 내면의 행복을 찾는 것도 아니다. 금욕주의는 고대 지중해 연안에 널리 퍼져 있었다. 스토아 철학과 견유학파 철학사상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철학자가 결혼을 해야 하는가’ 또는 ‘독신으로 있는 것이 지혜의 추구에 더 좋은 것이 아닌가’ 등의 이슈를 놓고 논쟁하였다. 반대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행복을 추구하느라 육체로 성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방종을 낳았다. 스토아학파와 견유학파의 영향으로 금욕으로 금욕주의를 낳았다. 이런 양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바울은 결혼을 과대하게 강조하는 헬라철학의 범주와 금욕주의를 이상화하는 견유학파 추세 사이에서 민감하고 중재적인 성경적인 입장을 취한다.

남자마다 여자를 두고 여자마다 남자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부부간의 성적인 금욕은 대체로 결혼한 부부들에게 부적절하다는 뜻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전체를 통하여 남자마다 그리고 여자마다, 즉 남편들과 아내들을 각자에게 완전히 동등한 존재로 간주하면서 정확하게 병행되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바울은 그 어느 구절에도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거나 여성을 비하하거나 부부 간의 성관계를 죄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의 가르침은 혼인관계가 남자 중심이 아닌 남녀 사이의 상호성이 있어야 한다는 놀라운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에 해당하는 ‘History’가 남성 중심의 역사라는 지적이 일면서 Herstory라는 대체어가 생겨났다. Stewardess, princess, waitress, actress도 기피어가 되고 있다.

이성을 ‘가까이 하다’는 ‘결혼하다’가 아닌 ‘성교를 하다’를 우회적 표현(euphemism)인 것처럼 자기 남편 혹 자기 아내를 두다는 것도 미혼자들에게 결혼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적으로 자기 배우자를 소유하여 즐기라는 뜻이다.

남자가 여자를 두고, 여자는 남자는 둔다는 것은 ‘가지다, 소유하다’는 뜻으로 배우자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성적인 관계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고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발로다. 사랑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움’과 ‘위험성’이라는 역설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사랑은 인간에게 살아있음의 전율과 기쁨을 경험하게 한다. 반면 사랑은 타자를 향한 폭력과 증오감 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기제로 사용되곤 한다. 바울은 남자만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자에게 사랑의 주도권을 주고자 하지 않는다. 고대 세계의 성관계와 다른 말을 한다. 고대는 결혼을 하는 까닭을 자녀 생산을 위한 의무로 취급하거나, 다른 경우에는 여성이 제공하고 남성이 즐기는 경험으로 간주되었다. 바울은 그런 즐거움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최초의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두 가지 사랑의 원리가 있다. 사랑이란 상호성과 자발성에 근거해야 한다. 사랑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순간, 그 행위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 이상 지닐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사랑의 이름으로 이성에게 성적관계를 강요할 때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닌 성폭력으로 전이된다. 바울은 남자마다 그리고 여자마다이다. 결혼관계의 상호성에 대한 강조나 특별히 성적 친밀함이 두 배우자 모두에게 즐거움이라는 전제는 바울만의 독특한 관점(viewpoint)으로 시대를 훨씬 앞서는 것이다. 미국 심리학 교수인 Robert Cialdini가 제시한 ‘설득의 여섯 가지 법칙’ 가운데 첫 번째가 상호성의 법칙이다. 이는 남의 호의나 선물이 결코 공짜가 아니라 훗날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2. 남자 또는 여자마다 자기 배우자를 두라

바울은 결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답변한다. ‘남자마다’와 ‘여자마다’는 각각 결혼한 사람을 가리킨다. 고린도 성도들은 고린도 도시가 매춘의 도시를 감안할 때 결혼하여 자기 아내 또는 자기 남편과 합법적인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창기와 창부와 관계했던 것과 반대되는 상황이다.

결혼으로 연애 때의 낭만적인 사랑은 성적인 연합으로 육체적이고 정상적인 차원에 둘러싸이게 되며 영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결혼으로 인한 성적인 연합은 배우자들이 서로를 향해서 갖는 의무이고 그것이 결혼관계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결혼이란 과연 행복의 지름길인가 아니면 지옥의 멍에를 메고 가는 미친 짓인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결혼의 비극성을 이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했다. “남자는 권태를 느끼기 때문에 결혼하고, 여자는 호기심 때문에 결혼한다. 그리고 양쪽이 모두 실망한다.” 결혼의 결과가 이처럼 모두의 실망으로 끝나는 이유를 게임 이론적으로 파악해 보면, 결혼하기 위해서 남녀 각 개인이 취하는 지배적 전략에 따른 행동이 상대방의 본능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즉, 남자와 여자는 결혼시장에서 전혀 다른 목적으로 각자의 이기적 동기에 의해서 행동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대개 상호 조화적인 결과를 도출하기보다는 상호 파국적인 결과로 귀결되기 쉽다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기에 우리가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당장 자식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여기 저기 아파도 이미 복을 받은 삶이기에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자여,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라’고 외칠 수 있다(마 5:3).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야 자녀의 복이 오고, 물질의 복이 오는 것이 아니다. 결혼은 남녀의 행복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 즉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함이다. 창조와 결혼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이 아닌 사람을 지으시고 이 땅을 다스리도록 통치권을 주신 하나님을 좋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이다. 방향이 남녀에게 있지 않고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풍성케 하신다. 만약 이것이 뒤틀리면 여기에서 불행이 시작되고 온갖 부패와 부정이 드러나게 된다.

이승희 목사  titeioslee1@hanmail.net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승희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