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마지막 심판이나 지옥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궤변이다. 세상의 죄성과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번성과 같은 불공평한 세상사가 심판을 요구한다. 심판이 없다면 만인에겐 희망일는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망이다. 바울의 논증대로 부활이 없고 세상의 삶으로 모든 것은 끝나거나, 세상의 삶에 대한 공정한 심판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일 것이다. 다행히 심판은 있다. 한 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해진 것처럼 죽은 뒤의 심판은 정해진 신의(神意)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는 추수의 심판이 없다면 가라지에 눌려 살던 곡식의 억울함이 어떻겠는가? 파종이 있기에 추수는 있다. 씨 뿌림과 거둠은 농작의 변함없는 법칙이다.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밝히고 심판하는 진노의 날은 불의한 자들을 위해 준비되었다(롬 2:5). 심판장은 행한 바를 심판하고(롬 2:6; 계 20:12) 내뱉은 말을 심판하고(마 12:36) 마음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롬 2:16). 지옥은 심판받은 자들을 위한 처소다. 둘째 사망으로서의 불못(계 20:14-15)은 악한 자들의 영원한 처소다. 지옥의 거주자는 영원히 죽지 않음으로 영원한 죽음을 경험한다. 심판 날이 기다려지는 것은 내 자신이 한없이 의로워서가 아니다. 악한 자들이 받을 재앙의 깊이와 멸망의 혹독함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며 오랜 세월 동안 꿋꿋이 견뎌온 자들에게는 일말의 희망이다. 두들겨 맞고 침 뱉음 당하며 모욕과 비난을 덮어쓰면서도 침묵했던 의인들의 세월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것들이 그 날에 거대한 함성이 되어 악한 자들의 머리 위로 쏟아질 때 의로우신 심판장께서 자신의 종들을 위무해주실 것이다.

 

예수를 배도(背道)한 <예수세미나>의 궤설(詭說)

1985년 125명의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자들이 “예수 세미나”를 시작했다. 3년 후인 1988년에 <예수의 비유들>(The Parables of Jesus)이란 책이 출판되었는데 빨강색, 분홍색, 회색, 검정색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들의 역사적 신빙성을 정도를 따라 표시했다. 10년 지난 1994년에 이르러 “예수 세미나”가 내린 결론은 스스로의 배교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학문적 가설이라면 그들의 변설을 막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고백이요 확신이며 교회를 호도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거짓 교사며 심판을 통한 지옥이 그들의 안식처로 준비되어야 마땅하다. “예수 세미나”는 재앙이다. 그들이 내린 결론이 그들의 운명을 가리킨다.

첫째, 예수의 말들 중 20%만 실제로 그의 말이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이 예수의 말이다. 둘째, 주기도는 예수의 말이 아니다. 셋째,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공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넷째,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고 느꼈지만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생각지 않았다. 다섯째,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 여섯째, 예수는 자신의 재림을 약속한 적이 없다. 일곱째, 성경의 지옥은 신화에 불과하다. 여덟째, 예수는 독신이 아니었으며 독신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기독교의 절대 진리를 외면하는 목사들

기독교의 진리는 모든 시대에 걸쳐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말씀의 해석과 적용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방법상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어도 그 본질적인 가치는 변치 않는다. 2004년 바나 연구기관(Barna Research Group)이 미국의 개신교 목사들 중 49%가 성경의 핵심적 신념들을 거부한다는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그들이 거부한 신념이란 (1) 성경에 기초한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가 있다, (2) 성경의 교훈은 정확하다, (3)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다, (4) 사탄은 실제로 존재한다, (5)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6)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다, (7)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해야 할 개인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내용이다.

조사에 응한 목사들 중에서 남침례교 목사들이 71%로 가장 높았고 감리교 목사들은 27%로 가장 낮았다. 보수적 성향의 교단에 속한 목사들과 진보적 색채의 교단에 속한 목사들의 신앙관이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떨까?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짧은 믿음생활을 통해 때로는 분노하고 질타하며 때로는 갈등하고 고뇌하면서 내린 씁쓸한 결론은 일반 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는 목사들이 흔치 않다’는 사실이다. 날이 갈수록 이에 대한 신념은 더욱 굳어만 간다.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감히 그렇게 행할 수 없고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없다. 영존하시는 하나님이 죽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하나님 신앙을 고백하던 그들의 믿음이 죽었고 그들의 영혼이 죽어버린 것이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신앙의 변질은 배도의 길을 걷게 하고 배교의 종점에 도착시킨다. 배도는 종말 현상에서 당연한 것이다(살후 2:2). 배도의 영향은 치명적이어서 교회의 신앙을 혼잡케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의 영과 귀신의 가르침으로 현혹시킬 것이다(딤전 4:1).

 

한국교회, 자기갱신의 가시밭길을 걸으라

한국교회의 위기 극복은 부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흥은 이 시대의 현안이 아니다. 부흥이 한 시대, 한 지역, 한 개인에게 임하기 전에 부흥을 가져오게 할 만한 정지작업이 반드시 있었다. 부흥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물이다. 반드시 정한 때, 정한 곳, 정한 사람에게 임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기 전에 눈물의 파종은 불가피하다. 파종하려면 한 때는 옥토였으나 길바닥처럼 단단해진 마음 밭을 일구어야 한다. 부흥이 있기 전에 원상회복이 있어야 함은 당연지사다. 원상회복에 이르는 길은 부단한 자기갱신의 가시밭길이다. 자기갱신의 증거가 회개다. 회개란 말이 주는 무게와 부정적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킨다. 회개는 당연하지만 회개의 대상으로 지적되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그렇다.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교회의 목회자일수록 그렇다. 한국경제의 중산층을 형성하던 허리가 절단 나듯 한국교회를 지탱하던 복음주의의 척추에 균열이 갔다.

이미 침체기를 지나 쇠퇴기로 들어선 한국교회의 뒷걸음질은 한참을 갈 것이다. 대형교회들의 비리만이 아니라 중형교회 목회자들의 보신주의적 침묵이 복음주의 진영의 견고한 기초를 허물고 있다. 한국기독교 개혁추진위원회는 개혁추진을 어떻게 해왔고 하고 있는지 새삼 궁금스럽다. 교회갱신협의회는 실질적 갱신을 위한 협의를 누구와 어느 정도까지 진행했는가? 교회개혁실천연대면 개혁을 실천하기 위해 연대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 탁상공론은 이제 지겹다. 솜방망이 수준의 비평은 역겹기까지 하다. 유명무실하다.

 

비평은 광속(光束) 갱신은 답보(踏步)

개혁과 갱신을 위한 결의문과 선언문이 나돌고 루터의 95개 조항을 본뜬 반박문도 내걸린다. 단지 그뿐이다. 후속조치가 따르지 않는다. 실천 없는 구호는 공허하다. 맛 잃은 소금이 되어 길가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면 더 이상 소금이 아니다. 제대로 된 소금으로 대체해야 한다. 빛이 사라진 등경이라면 갈아치워야 한다. 초가 녹아버렸으면 새로운 초를 마련해야 한다. 민주를 표방하는 교회정치는 가장 비민주적이다. 신정(神政)정치의 짝퉁으로서 주권재민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주권은 소수의 지도자들에게 몰려 있다. 그것도 비릿한 정치 감각으로 길들여진 정치목사, 정치장로들에게 쏠려 있다.

가톨릭의 교황권을 무색할 만큼 개신교의 당회장이나 교단장의 권력은 막강하다. 그것이 나중 심판의 잣대가 될 것임을 알고도 그러는지 모르겠다. 권력이 주는 야릇한 맛 때문에 편법과 탈법이 난무하고 초법과 비법이 활개 치는 이 세계는 그야말로 무법천지다. 복지를 추구하는 가나안의 후예들에게 군림하는 것은 다곤이다. 가난한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다곤이 아닌 야훼의 상징인 법궤를 섬긴다. 법궤 옆에 세워진 다곤은 부러지게 마련이다. 거룩함으로 치장된 세속 권력은 교회의 오예물(汚穢物)이다. 개혁과 갱신이 절실한 이유다. 헌데 세상의 비평은 광속인데 교회의 대처나 갱신 노력은 느림보 수준이다. 개혁의 거센 불길을 일으켜야 한다. 요즘은 웬 ‘사랑하는 모임’인 사모들이 그렇게 많은지 기가 막힌다. 특정인물로부터 단체에 이르기까지 뒤에다 붙이기만 하면 “O사모”가 된다. 변질되고 타락된 사탄적인 인물과 단체를 ‘미워하는 모임’인 “O미모”가 생겨나야 하지 않을까? 채찍을 들었으면 후려쳐야 하고 칼을 뺐으면 베어야 한다.

 

성공의 꼭짓점에서 추락하는 한국교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추락의 시점에는 비상의 옛 기억이 있다. 20세기 초엽 오스트리아의 재원이었던 잉게보르크 바흐만(Ingeborg Bachmann)은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란 시에서 날갯짓의 여운을 남겼다. 이문열의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1988>는 날개 없는 청년 주인공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렸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로스는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타고 높이 날다 태양의 열에 날개가 녹아 지상으로 추락했다. 이카로스는 높이 날수록 추락에 빨랐다. 그에게 있어 날개는 추락의 흉기였다. 주님은 가룟 유다를 향해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제게 좋을 뻔했다고 말씀하셨다. 그에게 주님의 제자, 그것도 공동체의 재정을 맡은 제자란 날개는 결국 추락의 흉기로 돌변했다. 차라리 장삼이사(張三李四)의 평범한 목회자였다면 더 좋을 뻔했던 목회자들이 있음을 본다. 그들은 실제로 날면서 영적으로는 추락을 경험한다. 본인들은 그것을 상승을 위한 순간적 하강 비행이라 여긴다. 강풍이 날개의 비상력을 앗아가면 영락없이 추락을 면치 못한다.

추락하는 한국교회에는 날개가 있다. 바닥에 있던 한국교회를 공중으로 치솟게 한 것은 말씀과 기도의 양 날개였다. 성장지향의 두 날개 양육시스템이 아니었다. 한 때는 말씀과 기도의 날개를 부지런히 퍼덕여 세계가 놀랄만한 비상을 이룬 한국교회였기에 모두의 긍지요 자존감이 되었다. 양질의 세미나를 위해 해외를 찾던 발길이 뚝 끊기고 오히려 전 세계의 목회자들이 한국을 찾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그들에게 전해준 것은 원색적인 복음의 능력이 아니라 목회 성공의 비술(秘術)이었다. 정상이라 여겼던 하나의 꼭짓점에서 더 높은 비상을 이룩하지 못한 한국교회는 견디기 힘든 추락의 비극에 처해졌다. 창공을 비상하면서 더 높은 비상을 동경하고 그 동경이 야망으로 변했을 때 한국교회는 추락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여 옛 비행의 능력을 회복하라

아직 완전히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기 전에 한국교회는 주님께 석고대죄하며 부러진 날갯죽지를 잘 보존하여 옛 비행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저공이긴 하지만 아직도 한국교회는 창공에 머문 상태에 있다. 말씀과 기도를 성장의 동력 삼아 초기의 비상과 동일한 비행술을 재현해야 한다. 성장 지향의 초고속 비행술을 접고 서툴러도 초기의 날갯짓을 회복해야 한다. 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상승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땅바닥에 내리꽂힌다. 충돌을 피하려면 비상의 날갯짓을 퍼덕여야 한다. 이전의 비행술을 익히려면 이전 수준의 기도와 말씀으로는 어림없다. 추락한 만큼 비상하려면 몇 배의 노고가 뒤따라야 한다. 뼈를 깎고 피를 몇 되씩 쏟아내면서라도 기도의 화살을 극히 날카롭게 하고 말씀의 검을 완벽히 벼려야 한다. 이는 각오와 다짐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접고 이 일에 매진해야 한다.

양적 성장이 죄인가? 아니다. 질적 성숙은 절대선인가? 아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신처럼 질적 성숙과 양적 성장은 교회부흥에서 궤를 같이 해야 한다. 수량이 외면적인 것이요 질은 내면적이라는 등식은 다분히 이원론적이다. 교회의 대형화 현상에 고민하며 자신이 저지른 대죄항목에 포함시킨 고 옥한흠 목사는 영적 거인이다. 교회 키운 것을 고민하고 회개했다는 사실은 그의 제자목회가 허구가 아닌 한국교회의 영적 버팀목이었음을 웅변적으로 증명한다. 그와 실질적인 대화를 나눠보진 않았지만 그가 오히려 은퇴 후에 자신의 전반적인 사역을 회고하며 주님 앞에서 고뇌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의 고백과 눈물이 값진 것은 자신의 성공적 사역을 실패로 규정지으며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는 사실이다.

 

말씀과 기도의 날갯짓만이 희망

우리 시대에 이런 영적 거인이 없음은 모두의 아픔이다. 대중에 친숙한 설교자는 있어도 심령을 뒤집어엎을 영적 거인이 없다. 조작된 거인, 거인인 체하는 난장이, 사울의 갑옷을 걸쳤던 다윗처럼 대인의 옷을 걸친 소인, 사역과 삶의 지평이 갑자기 커지다보니 거인인 양 처신하는 어릿광대는 적지 않은데 영적 비상을 사역과 삶으로 보여주는 주님의 신실한 종은 눈을 씻고 살펴보아도 없다. 이는 판단 기준이 혹독해서도 아니요 분별력이 흐려서 그런 것도 아니다. 기껏 자신의 실수나 허물을 변명하거나 지난 과오를 단지 ‘회개했노라!’며 당당해하는 모습에는 어떤 얘기도 섞을 여지가 없다. 값싼 회개는 그럴는지 모른다. 성경적 회개는 값비싸다. 주님의 보혈이 그 증거다. 회개했다면 회개자의 증표로 그에 합당한 삶을 내보여야 한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다. 대중의 상처는 그만큼 깊다. 개인의 사함 받은 은총을 모두에 대한 양해각서처럼 치부해버리는 것은 또 다른 오만이다.

그래서 추락한다. 지금 추락하지 않아도 결국 추락을 경험한다. 삶과 사역이 주저앉지 않으면 다른 측면에서 낭패를 본다. 날개 없이 추락하는 것보다 날개를 퍼덕이면서 추락하는 고통은 매우 크다. 날갯짓이 주는 것은 찬란했던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고 그럼에도 비상 없는 급전직하의 하강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추락하는 새에게 아직 남아있는 날개는 마지막 희망이다. 욕심과 교만, 반목과 배신으로 불어난 체지방을 제거하고 말씀과 기도, 기도와 말씀으로 담금질한 날렵한 영혼으로 새로워질 때 그나마 날개에 남아있던 비상력에 상승기류까지 더해지면 또 한 번 비상을 경험할 수 있다. 다시는 추락하지 않으리라는 결기와 함께 더 높은 창공, 대류권을 지나 성층권에서의 비행을 능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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