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모리슨 목사의 설교, 번역 송광택 목사

십자가와 자연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조지 모리슨 목사(송광택 옮김)

 

여름철이 시작 될 때 나는 자연계의 신앙적 측면에 관하여 이야기하곤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 다시 6월을 맞이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이러한 쪽으로 생각이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남부의 경우, 그 곳에서는 태양이 성탄절 시기에도 따뜻하기 때문에 여름을 맞이하는 일이 전혀 놀라운 일도 아니고 기쁜 일도 아니다. 날씨가 겨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인데, 단지 약간 더 덥고 일반적으로 약간 더 불편하다. 그러나 북부의 경우는 그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극과 극의 세계가 11월과 6월 사이에 존재한다. 겨울은 불모와 황량함과 얼음과 헝클어짐의 계절이다. 반면에 여름은 신선하고 아름답고 푸른 잎이 무성하고 잔디가 길게 자라는 계절이다. 아마도 이 변화는 가장 둔한 사람이 보기에도 엄청나고 충격적이어서 북부에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게 된다. 그들은 죽음의 효과 중 하나가 생명의 가치를 지극히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는 그것은 사람의 죽음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여름철의 죽음에도 해당된다. 한 해 내내 여름철인 나라들이 있는데, 그런 나라에서는 여름이 눈길을 끌지 못한다. 겨울의 무덤이 예고되는 이곳에서 우리는 다가오는 봄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이 계절의 관례에 따라 오늘밤 나는 여름이라는 주제로 우리의 생각을 모으려고 한다. 특별히 나는 자연계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하여 말하고 싶다.

 

첫 눈에는 갈보리의 십자가와 여름철은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십자가가 유월의 푸른 들과 무관해 보이는 것 이상으로 밤은 낮과 무관하지 않으며 바다는 육지와 무관하지 않다. 십자가에는 슬픔과 이별이 있다. 반면에 푸른 들에는 풍성한 생명의 기쁨이 있다. 한쪽에서 우리는 가시관을 보게 되고, 다른 쪽에서 우리는 수천 송이의 꽃으로 이루어진 화관(花冠)을 본다. 한쪽에서 당신은 고통의 장면을 보고 다른 쪽에서는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다. 한쪽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외침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고동치는 세계가 있다. 이보다 더 날카롭거나 격렬한 대조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십자가를 들고서 여름으로 들어서는 것은 마치 축제의 자리에 임종의 분위기를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유월의 긴 시간 중에는 그들이 그 계절의 색깔과 풍요함과 음악 소리에 묻혀있으므로 갈보리로부터는 떨어져 있다고 느끼기 쉬운 이들이 있다.

 

과학이 기여하는 한 가지 봉사가 있다, 즉 과학은 이 둘 사이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준다는 점이다. 과학은 밤과 낮처럼 다르게 보이는 사물들을 하나로 모아 밀접한 연합이 이루지게 한다. 한 아이가 들로 나가 미나리아재비(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을 모은 다음에, 정원에서 한 다발의 참매발톱꽃을 딴다. 그 소녀에게 이 둘은 색깔과 모양과 배열 그리고 모든 면에서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식물학자에게 물어 보라, 그는 즉시 그 소녀가 오해하도록 만든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미나리아재비와 참매발톱꽃이 모두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라는 것을 당신에게 말해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주 사소한 일과 관련하여 과학이 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더 큰 영역에서 과학이 이루어놓은 일이다. 과학은 종교의 적대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신실한 노력을 통해 큰 공헌을 했다. 아이의 눈이 빛과 자유와 그리고 노래만을 발견한 바로 그 자연의 중심부에서 과학은 십자가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십자가와 자연계의 유사성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억할 때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나는 주목하고자 한다. 우리 주님은 자연을 사랑하셨다. 주님은 자연 가운데 자주 머물렀다. 주님은 산과 들에 있을 때 언제나 편안함을 느끼셨다. 주님께서 첫 번째 설교를 파란 하늘 아래서 그리고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전하셨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주님은 사람들의 가정과 거처를 피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떠들썩하고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 회당을 피하지 않으셨다. 주님에게는 완벽한 균형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생애의 아름다운 사실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동터오는 새벽의 신선함을 사랑하시고 인적 드문 산기슭에서 잠시 쉬기를 즐기시는 주님보다 더 여름과 교감하면서 이 푸르고 즐거운 대지 위를 걸어 다닌 분은 결코 없었다. 왜 주님은 이곳에 계셨는가? 단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이 땅에 계셨다. 그것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죽으시려고 하셨다. 십자가의 그림자가 주님의 마음 위에 있었다.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려고 오셨다. 만일 풍요와 노래가 넘치는 자연이 갈보리와 전혀 교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연을 사랑하시고 자연의 평화로운 침묵 속에서 감동을 받으셨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생애의 지배적인 열정이 자연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자연과 생생한 교감을 나누지 못한다. 만일 사람이 추구하는 목적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면(unnatural) 어떤 구름이나 일몰도 그에게는 무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목표였던 십자가가 꽃과 새들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것이었다면 예수님께서 자연과 나누신 우정은 나에게 주님의 생애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가 된다. 물론 당신은 예수님께서 자연과 교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피하시려고 자연을 가까이하셨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에게 겁쟁이라는 오명을 씌우는 것이다. 그의 적들조차도 그 점에 있어서는 주님을 비난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도 큰일을 계획한 후에 그것을 잊어버리려고 매일 가장 소중한 시간들을 낭비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처신은 영웅답지 못한 행동이다. 따라서 그런 억측은 그리스도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주님은 십자가를 잊기 위해 자연을 가까이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십자가가 여름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셨고 여름 들판의 모든 백합들이 갈보리와 밀접하게 가까운 사이라고 느끼셨다.

 

그러나 당신은 당연히 내게 물을 것이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십자가를 깨닫는 것에 대해 내가 말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냐고. 이에 대한 답으로 나는 당신을 몇 가지 사실로 인도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자연에서 강력하고 끊임없는 구원의 능력을 깨달아왔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고자 하는 정신 같은 것이 자연에 존재한다. 지극히 작은 잡초들 가운데 숨겨진 특징을 위해서도 백만 년의 세월이 쓰였을 것이다. 그 잡초가 발아래 짓밟히는 것과 같은 일들이 죽음과의 전투에서 더 좋은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자연이 아낌없이 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그것의 의미를 진지하게 자문해 본 적이 있는가? 한 그루의 너도밤나무에서 수백 개의 거리를 채울 수 있는 만큼의 씨들이 나온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여름에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정신은 병든 아이를 죽게 내버려두기보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써버리려고 하는 정신이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 거기에는 꽃도 없고 양치류도 없고 이끼도 없다. 그러나 들을 귀 있는 자에게 메시지는 전해진다. 가장 연약한 생명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지불하려는 정신, 바로 그 정신이 십자가의 정신이다. 십자가는 무한히 아낌없이 주는 마음을 보여준다. 십자가는 그 어떤 희생이라도 치르려고 하는 사랑의 마음을 보여준다. 십자가는 하나님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모든 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는 당신과 내가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려는 이 뜨거운 열심을 보여주는 빛이다. 여름철의 이야기는 그 빛으로 충만하고 갈보리와 하나를 이루게 된다.

 

이제 다시 우리는 세계의 아름다움의 배후에 놓여있는 분투를 보게 되었다. 자연계는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자연계는 여러 세대의 고투를 통과하여 아름다움을 얻었다. 바람이 잠잠해지고 모든 잎이 조용해질 때 어떤 것이 여름 밤 보다 더 평화로울 수 있는가? 그 어떤 것이 더 감동적인 안식이 될 수 있으며, 더 충만한 아름다움(그것은 영원한 기쁨이다)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제

 

황혼을 감싸는 망토 같은 침묵의 배후에는 인류를 위해 기록된 적이 있는 전쟁과 죽음의 냉혹한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가 있다. 평화, 완벽한 평화가 있는가? 그렇다. 자연 가운데는 평화가 있다. 하지만 그 평화를 만드는 중에는 전쟁이 있었다. 여름철의 품속에는 안식이 있다. 그러나 그 안식의 배후에는 산고의 진통이 있다. 우리가 일단 여름의 비밀을 배운다면 우리는 언덕 위의 십자가에서 멀지 않다. 오늘밤 구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우리는 이미 그 안식을 누리는 사람들과 동행하고 있고, 그들의 소망 중에는 평화의 행복이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 여름 저녁 같은 고요함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라. 그들은 당신에게 피 흘림과 가시관과 그리고 나무 위에서 창에 찔린 적이 있는 가슴에 대해 말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자연이 자기희생의 그림자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름의 가장 심오한 특징은 황량한 광경이 아니다. 여름의 가장 심오한 특징은 자기희생이다. 시드는 모든 꽃들은 살아나기 위해 죽어간다. 새끼를 돌보는 모든 새들은 갈보리의 정신 위에 서 있다. 참새는 무너진 제단이 아니라 살아있는 십자가 위에서 신비스럽게 자신의 둥지를 발견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누가 씨앗 위에 그 법을 새겨 넣었으며 시드는 모든 꽃들의 아름다움 위에 그 법을 기록했는가? 분명히 이 모든 것의 의미는 이것이다. 이 세계는 구속의 노정(路程) 위에 세워졌고, 수난 중에 영광에 이르는 정신은 금실처럼 우주를 관통하여 이어진다. 만일 개인의 자아가 여름의 음악에서 마지막 코드(chord)라면, 그 자아는 갈보리와 결코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와 자연 사이에 불화가 존재하게 될 것이고, 오직 사탄만이 이러한 불일치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해마다 유월의 잎이 우거진 풍요로움을 통해 내가 생명의 거리를 죽음 안에서 볼 때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에게로 향하며 그 분을 송축한다. 그의 십자가는 여름을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름에 면류관을 씌어준다.

 

이제 끝맺으면서 나는 한 마디를 하려고 한다. 여름철에 우리가 느끼는 기쁨에 관한 것이다.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자연의 투쟁의 이야기를 배웠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자연을 즐거워할 수 없다.” “나는 세상에서 행복하다. 세상은 아주 아름답고 매우 평온하고 순진무구하다. 그러나 그 평화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자연은 결코 다시 내게 기쁨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기분에 깊이 공감한다. 내게도 구름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때가 있었다. 나는 고약한 생각들의 방해 없이 노래하는 새에게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자연의 중심부에 드리워진 그림자 안에서 그 눈이 십자가의 그림자를 보았다면 그 사람은 그 즐거움을 기억할 수 있고 더 충분히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배웠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당신은 주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덜 기뻐하는가?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뿌리가 갈보리이기 때문에 그 기쁨이 다함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 되지 못하는가? 따라서 나는 어린 시절보다 더 잘 보기 위해 유월의 신비와 그 슬픔을 향해 눈을 크게 뜨고서 유월의 달콤한 세계로 다가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비밀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롬 8:38)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흐리게 하는 것들에 대한 목록 중에서, 사도 바울이 현재의 일을 언급한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나는 사도 바울이 말한 현재의 일이란 지금 당하고 있는 사건이나 시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생긴 일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만드는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내일 일에 대한 근심과 불길한 예감은 종종 오늘의 햇빛에 구름을 드리운다. 그러나 사도직을 행하면서 똑같은 일을 당하여 우리만큼 모든 일을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현재의 일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일들, 일상 생활에서 쏟아지는 의무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처리해야 할 수많은 일들은 우리가 끊임없이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 눈을 멀게 하여 거대한 현실을 잘못 보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기 쉽다.

부분적으로, 이렇게 분리시키는 힘은 현재의 일이 극도로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너무 가까이 있는 일들은 우리의 통찰력을 지배하고 종종 잘못된 관점으로 이끌어 간다.

내 조용한 서재에 전등을 켜면, 달빛이 하늘을 떠다니고 별들이 밝게 빛을 발하면서, 그것들을 만드신 손의 신성하심을 선포할 것이다. 그러나 전등불을 나에게 가까이 대고 그 불빛으로 글을 읽고 편지를 쓴다면 별들은 아주 쉽게 잊혀질 것이다. 현재의 일들은 가까이 있는 일이고, 가까이 있는 일은 눈을 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작은 동전이라도 그것을 눈 가까이에 대고 있으면 태양을 가릴 수 있다. 태양은 위대한 창조물로서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보존해 주는 반면, 그것은 낡고 별 값어치 없는 동전에 불과하다.

매일 아침이 되면 그날 해야 될 일들이 줄을 선다. 그 일들에 사로잡혀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그러다 보면 때때로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가까이 있는 일들이 우리를 재빠르게 압제해 버리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뒤로 물러나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순간 멈추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말하라. 순간 정지하여 “하나님께서 여기 계신다.”라고 말하라. 눈에서 동전을 치우면 태양의 경이로움을 보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매우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것이 성자가 되는 비결이며 현재 일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 가는 힘을 막을 수 있는 길이다.

현재 일의 분리시키는 능력은 일어난 그 당시에는 현재 일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서 발생하기도 한다. 오늘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보다 어제를 이해하는 것이 항상 더 쉽다. 산악지대에 오르면 종종 발 밑의 길을 보기 어려울 때가 있다. 월귤나무 덤불이 길을 가리고 있을 수도 있고 혹은 길게 늘어뜨려진 히스 관목 덤불이 길을 안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면 그 길은 황무지를 가로질러 구불구불 나 있기 때문에 대개 길 찾기는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과거, 즉 과거의 시련과 실망, 질병에 대해서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던 그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현재 일의 어두운 면 속에서 사랑을 읽기는 어렵다. 현재의 일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성인들은 하나님이 어린 시절에 자신을 훈련시키신 것을 감사한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그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을 뿐더러,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하는 건지 의심하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나 결코 훈련시키는 사랑을 사모하지 않는다. 이 틈새에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현재 일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의 분리시키는 능력은, “인생이란 큰 일 속에 있는 작은 꾸러미가 아니고, 작은 일 속에 있는 큰 꾸러미야” 라는 식으로 현재의 일을 혼동하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나는 어디선가 등대가 불을 밝히지 않았다고 보고했던 한 선장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의 보고에 따라 조사가 이루어졌고 밤중 내내 등댓불이 훤히 빛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불빛을 희미하게 만들고 긴장하고 있는 그 선장으로 하여금 불빛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은 바로 들끓고 있는 작은 파리 떼(사기꾼, 모략가)들이었다.

무엇이 우리를 끊임없는 이 분주함 속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평화와 기쁨, 자기 통제 능력 그리고 차분함이 그리스도인의 표시가 되어야 한다. 가끔 그런 것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비극 중에 비극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 사랑의 확실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일에 사로잡혀 살다 보면 우리의 하늘이 희미해진다. 안락함과 평온함이 사라진다. 불빛은 거기에 ‘영원히 빛나고 있지만,’ 파리 떼가 불빛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다. 현재의 일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시키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근심 속에서 지냈던 바울 사도보다 더 잘 깨달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재의 일을 이기고 영적으로 승리한 완벽한 예는 우리 주님이다. 주님은 끈기 있는 노동과 조용한 평온을 다 갖춘 완벽한 모습을 얻으셨다. 갈보리가 다가오고 있어도 즐거움을 누리셨다. 참혹한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당신의 머리를 끊임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두셨다. 미래에 있을 모든 일을 넘어서서 승리를 갖는 것도 놀랄 만하지만, 더욱 경이로운 것이 있다. 자신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가장 어두운 시간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깨어져 버린 낙담의 날들을 넘고 끊임없는 초청을 넘어서, 밥 먹을 여유도 없었던 그때에 주어진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완성하셨고 그보다 더 어려운 일도 완수하셨다. 현재 일들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시키는 능력을 발할 수 없도록 그것을 정복하신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잊지 말자. 그분의 승리는 모두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신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의 승리를 이룰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하심을 우리 것으로 삼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 말한다.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2-23)

조지 모리슨 목사의 설교 / 번역. 송광택 목사 

조지 허버트 모리슨 박사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말하지 못했던 것을 제대로 표현하는 재능이 있다. 게다가 그 평이한 말을 우리는 하지 못할 방식으로, 즉 시의 심장을 지닌 영어 산문으로 한다. 제임스 데니의 이 표현에야말로, 1902년부터 1928년까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웰링턴 교회 강단에서 한 모리슨 박사의 고전적 설교의 ‘비결’이 잘 압축되어 있다.

사역 기간 내내 그는 집중적인 연구, 1년에 천 번이 넘는 꾸준한 심방, 끊임없는 집필로 유명했다. 그는 장신이 아니었으니 그의 매력은 큰 키에 있지 않았다. 겉만 번지르르한 설교를 한 적이 없으니 말재주나 웅변술에 있지도 않았다. 그의 매력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에 말하는 조용한 흡인력에 있었다. ‘청중을 주님의 마음에 더 가깝게 이끌어 주는 최선의 길이 무엇일까’, 그것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자신의 일차 관심사여야 함을 그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조지 모리슨의 설교는 필체와 정신이 현대적이며, 말투와 성향은 현재의 시대적 상황에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깊이 있는 묵상에서 나온 표현의 단순성은 열성을 다하던 저자의 준비 작업에서 온 것이었다. 또한 문체는 사람을 닮아 조용하고 온화하다. 그게 그의 설교다. 모리슨은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필요를 채워 주려 한 목회자요 설교자였다.

무슨 일을 하든지 준비성과 완성도는 그의 특징이었다. 공중의 새처럼 쉽게 나온 설교도 있지만, 머리와 가슴으로 해산하는 수고 끝에 나온 설교도 있다. 그가 예술가의 무의식과 한없는 여유로 본문을 깊이 묵상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설교자로서 그가 가진 힘의 한 요소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의 속이 내비칠 때까지 묵상했다. 그리스도께 대한 충정과 한적한 곳에서의 개인적 묵상이 매일의 연구와 집필과 잘 조화를 이루었다.

젊은 설교자들에게 들려준 그의 조언에 그 자신의 성공 비결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이 말밖에 생각나는 게 없다. 젊은 설교자들은 현대 생활의 독인 서두르는 성향을 경계하는 게 좋다. 쓸데없이 부산떨며 서두르는 버릇, 사소한 일에까지 끼어들고 집착하는 작금의 풍조, 그것이 우리에게서 많은 좋은 것들을 앗아 가고 있다. 내 경우, 사색하고 묵상하는 여유는 필수다.”

저자의 많은 설교집에서 엄선한 글들로 엮어진 이 책을 읽으면 진리의 새로운 전망이 열릴 것이다. 익숙한 옛 진리들이 어떻게 참신하고 살아 있는 표현을 입어 뜻밖의 새로운 의미로 빛날 수 있는지 배우게 될 것이다.
                           - 랠프 G. 턴불(Ralph G. Turnb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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