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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칼럼】친구를 사랑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는 아름답다[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2) 친구(親舊)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라틴어 ‘Et tu, Brute’를 직역하면 ‘그런데,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뜻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에 등장하는 대사다. 시저 자신이 친구들에게 암살당하는 순간에 외친 말이다. 시저는 브루투스와의 신뢰인 ‘우정’을 로마제국 건설을 위한 가장 중요한 가치의 하나로 여겼다. 우정이 없다면 로마는 혼돈으로 빠져들고 자신이 정치하려는 의미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구약에서 우정을 귀한 가치로 여겼다. 하나님의 벗이 있다. 아브라함이다(대하 20:7). 야고보서 2:23에서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벗이 되었는지 설명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고 이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심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기에 모세는 암시적으로 하나님의 친구로 일컬어진다(출 33:11). 유대인의 자녀교육법을 ‘하브루타(havruta)’라고 한다. 히브리어로 친구 또는 짝이라는 뜻이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서신의 독자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를 8회 사용한다. ‘친애하는 친구들아’ 또는 ‘사랑하는 친구들아’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예수님이 자신을 친구라고 불러주었는데 이제 요한은 독자들을 ‘사랑하는 자들’ 즉 ‘사랑하는 친구들’이라고 부른다.

1.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 희생을 하고(레 19:18, 34), 확고한 충성을 하게 한다(삼상 20:17-4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큰 사랑은 무엇인가. 사람이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 무엇과 비교하여도 이보다 더 큰 사랑일 수는 없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의 증거다. 누가 친구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의사자’(義死者)가 있다. 일본 지하철역에서 사람을 구하다 숨진 이수현 씨의 경우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 많은 사람을 구한 것은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러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시고 그 친구들에게 말씀하신다. 바로 그 친구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려 하신다.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참된 ‘나의 친구들’임을 천명하신다. 그들이 죽기까지 사랑할 대상자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비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이 갖고 놀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준 데 분노한다. 인간적인 사랑으로는 제자도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극적인 성격을 목격한 삶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즉 친구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런 사랑은 우리 역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신 6:5). Greco-Roman 이야기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죽기까지 우정을 나누는 것은 고귀한 도덕적 미덕으로 여겨졌다. 우정에 대한 헬라의 전통적인 개념은 친구들간의 평등함을 강조했다. 에피쿠로스파와 같은 몇몇 철학 학파는 특별히 그러한 우정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율법에 제시된 바와 같이(레 19:18), 하나님은 사랑을 전형적이며 이상적인 인간관계라고 규정하신다. 친구에 해당하는 필로스는 ‘친구, 연인, 고객’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를 의미한다. ‘친구들’에 해당하는 필론은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번역한다. 누가복음 12:4에서 유일하게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지칭하면서 ‘호 필로스 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너희는 나의 친구라’는 ‘너희가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와 뜻이 같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친구였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예수님의 친구다. 예수님은 친히 나사로를 ‘우리 친구’라고 불렀다(요 11:11). 사랑하는 자, 즉 친구가 죽었을 때 나흘만에 구원했다. 즉 소생시켰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나의 벗’를 의미한다는 다른 예가 된다. 유대 전승은 그 두 사람이 하나님과 나눈 우정과 친밀함을 상세히 부연 설명하고 있다.

2. 누가 예수님의 친구인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는(눅 10:36) 질문을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하신 것처럼 ‘누가 예수님의 친구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의 친구’가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이다. 예수님의 친구는 곧 우리의 친구이다. 예수님께서는 친구의 의미를 사랑이라는 개념에서 순종이란 용어로 정의해 주신다. 요한복음 21:15-17의 주석은 대부분 베드로의 고백인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에 해당하는 ‘필로 세’를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르켜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신다. 친구의 관계란 공통적인 목적과 비전을 지녀야 하므로 예수님께서는 친구에 대해 이렇게 규정을 짓는다.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다.’ 한번 더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 즉 친구 같은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누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인가. 누가 예수님의 친구인가. 예수님의 제자들, 즉 친구란 항상 예수님의 명하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친구 관계의 동일한 특권을 자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모든 믿는 자에게 확장시킨다. 누가 예수님의 친구들인가. 예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좋은 친구는 브래지어 같다고 한다. 편안한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힘을 보태준다. 단단히 잡아준다. 언제나 가슴 가까이에 있어주는 존재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벗’, 신약에서 ‘예수님의 친구’라는 명칭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최고의 관계를 말해준다. 얼마나 친밀하냐보다 얼마나 사랑하냐이다.

예수님의 친구는 누구인가. 예수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예수님의 친구다. 종들은 주인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복종한다. 예수님의 친구는 다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의 계명을 안다. 그리고 순종한다. 친구라는 뜻의 영어 단어는 앵글로 색슨어인 freond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뜻은 ‘사랑받는 자 또는 자유케 된 자’를 뜻한다. 친구는 사랑받는 자요 자유자다. 오늘의 친구, 즉 friend는 ‘사랑하다’라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동사뿐만 아니라 색슨어의 의미까지 잃어버렸다. 친구를 friend라고 할 때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 미국 코넬대 교수인 Robert. J. Sternberg가 주장한 ‘사랑의 삼각형 이론’(Triangular theory of love)이 사랑 이론의 고전이다. 그에 따르면 헌신, 친밀감, 열정, 이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완전한 사랑이다. 친밀감과 열정은 있으나 헌신이 없는 사랑이 낭만적 사랑이다. 친밀감과 헌신은 있으나 열정이 없는 사랑은 우애적 사랑이다. 열정과 헌신은 있으나 친밀감이 없는 사랑은 얼빠진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의 삼각형>, YTN사이언스 이미지 캡쳐

3. 종은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알고 행한다

예수님은 친구를 종과 구분한다. 종은 충성될 수는 있지만 은밀한 비밀을 나누지 않는다. 고대 문헌에서 우정에 대한 주요 이상들에 충절, 평등과 모든 재산을 공유하는 것 그리고 모든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밀함 등을 포함했다. 친구가 그랬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제자들을 ‘종들’(servants)이라 부르지 않는다. 즉 다시 말하자면 ‘노예’(slaves)라 부르지 않겠다는 이야기이다. ‘자유’를 뜻하는 free는 ‘무료’라는 의미도 있다. 선사 인도유럽어로 ‘사랑하다’인 pri가 어원이다. 노예는 가족을 이루거나 친구를 사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자유인의 특권이라는 의미에서 ‘사랑’의 pri에서 ‘자유’를 뜻하는 free가 나왔다.

예수님께서 ‘종’에 해당하는 ‘둘로스’를 사용하시기는 했으나 전에 이 단어를 사용하시지 아니하셨다. 진정한 우정이 있는 곳에 진정한 앎이 있다. 혹은 계시가 나란히 존재한다. 예수님의 친구들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다. 성령의 도우심이다(요14:25-26).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계속적인 계시를 받게 될 것이다. 이것 역시 성령에 의해 주어진다(요 16:12-13). 그러므로 제자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기도할 때 그들의 소원과 하나님의 뜻은 조화를 이룬다(요 15:16; 비교 15:7).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종들’과 구별된 ‘친구들’라고 부르신다. 종이나 친구는 다같이 순종를 기대한다. 차이점은 소통의 변화에 있다. 전자는 맹목적인 순종, 후자는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 정보를 공유한다. 성령은 해석자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의 특징을 무엇인가. 종은 주인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노예는 주인의 도구에 불과하다. 주인이 시키는 일에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 즉 친구는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나의 친구’라고 불렀다. 그는 제자들에게 숨기시는 일이 없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나타내어 알게 한 모든 것을 또한 제자들에게 다 나타내었다.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를 먼저 선택한 것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안도감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친구로서 제자들의 지위는 특권과 함께 책임이 동반된다. 선택의 구약 개념은 우선적으로 왕과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당대의 관습을 깨뜨리신 것이다.

이승희 목사  titeiosl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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