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박신일 목사님을 만났을 때, 목사님은 교회성장비결을 묻는 나에게 자연스러운 목회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어느 누구도 팔을 잡아 댕겨서 예수를 믿게 할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하면 출석률을 높일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시대에 맞는 목회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였다.

이번 달 나는 그 갈증을 해결하고자 메일을 보내 목사님 교회에 방문을 요청했다. 첫 주일 예배를 드렸을 때만 해도 나는 이 교회에서 특별함을 찾지 못했다. 무언가를 많이 배워야 한다는, 시간을 잘 사용해야 된다는 생각에 나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새가족이 오면 어떻게 환영을 하는지, 어떤 질문으로 구성된 새신자등록카드를 작성해서 자료를 확보하고 이후 어떻게 조치하는지, 새가족 과정은 몇 주에 어떻게 이루어지며 관리되는지 따위의 질문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특별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딱 보기에 입이 벌어질만한 아이디어나, 사람이 정말로 교회를 오고 싶게 만드는 번뜩임이 없었다.

오후에 나는 박신일 목사님과 함께 셀 심방을 갔다. 부부셀 모임에 참석하여 식사를 나누고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 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간 가정은 막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온 상황이었다. 목사님은 시편 1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정직함에 대해 설교하셨다. 이 집에 수많은 것들을 들이고 채울 생각을 하기보다. 세상적인 가치들을 비우고 버릴 때 하나님이 이 집을 채우신다는 말씀이었다. 

물론 설교 내용에 큰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내가 정말로 놀란 것은 이후의 일이었다. 목사님은 무려 3시간 30분 동안 성도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8명의 성도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하며 궁금한 점들을 질문했다. 기억나는 질문 2가지는 하나님 안에서 3명의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내 뜻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어떻게 구분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목사님은 주일 설교 3번을 하시고 나서도, 저녁 6시부터 9시 반까지 이어지는 이 시간 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 대답해주셨다. 그리고 이 대답은 신학적으로도, 성서적으로도, 영성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답변이었다.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때, 목사님은 더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다. 나는 여기서 사랑을 느꼈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시고 싶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월요일부터 나는 이 교회의 모든 것을 보게 되었다. 놀랍게도 목사님은 교회의 100%를 나에게 공개해주셨다. 스텝회의, 심방위원회의, 사무권사님, 모든 시무장로님들, 평신도 지도자들(셀 리더), 부교역자들이다. 나는 하루에 한 사람의 부교역자와 동행하며 정해주신 스케쥴에 따라 교회를 탐방했다.

스텝회의와 심방위원회의는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두 회의는 아마도 한국 교회에 맞춰 대입한다면 목회자 회의, 심방보고회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회의이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하게 되었다. 진중한 얘기들 가운데에, 못한 부분은 혼나고 지적받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찬수 목사님도 설교 때에 옥한음 목사님께 회의시간에 혼난 얘기들을 많이 하곤 한다. 영혼사랑이라는 책임을 두고, 심방하지 않고, 챙기지 않고, 돌보지 않으면 그것은 혼나야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박신일 목사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순간 긴장했다. “사람들은 언제 일어서지?”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이어 나는 목사님의 첫 마디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목사님은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장례 예배가 있어 회의를 앞당긴 것이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옆 테이블에 준비된 케이크를 가리키며 나눔의 시간을 가지자고 했다. 이번 주에 부임한 목사님, 목사 안수를 받게 된 2분의 전도사님, 이제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교회를 떠나 한국으로 가는 스텝, 그리고 방문자인 나까지 정성을 다해 소개하시며 빵과 커피를 나누었다.

나눔이 끝나고, 우리는 성경을 펴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함께 읽었다. 목사님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좋은 땅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꼭 그것이 정답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좋은 땅의 모습만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길가에 있고, 바위 위에 있고, 가시 떨기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이어 앞의 3가지는 길에 있지만, 마지막 한 가지는 땅에 있음을 강조하시며 이야기 했다. 길과 땅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길은 자신의 이름이 있지만, 땅은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김대중 로는 있지만 김대중 땅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스텝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 무엇인가? 우리의 이름을 남기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남기는 사역을 하자는 것이다.

본격적인 회의는 언제 할까 생각하는 찰나에, 이제 각자 사역 팀으로 돌아가 15분 정도 회의를 나누고 다시 모이자고 하셨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어떤 고성도, 압박감도, 두려움도 이 안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남길지만 생각하는 것이다. 사역의 책임 가운데 죄책감을 가지거나, 왕창 깨지고 나서 한숨 쉬는 이는 한사람도 없었다.

혹시 내가 왔기에 이런 회의를 한 것인가 궁금한 나머지 부교역자들에게 원래 회의는 어떻느냐고 물었다. 부교역자들은 원래의 모습과 똑같으며, 이 회의는 모이는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를 하는 이유가 모이기 위함에 있는 것이다. 하나의 사역 팀이 되어 멤버십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며, 사역에 대한 비전을 세워 이들 스스로가 일어나 기쁘게 하나님의 일에 뛰어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자연스러움이 아닌가?

다음날 나는 심방위원 모임에 들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이 모임 만큼은 나는 숫자에 대한 언급이 있을 줄 알았다. 관리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발적으로 성도가 성도를 챙길 수 있단 말인가? 보험회사처럼 치열하게, 다른 교회나 다른 모임에 빼앗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살펴야 하지 않는가?

목사님은 놀랍게도 어제 했던 일들을 그대로 반복하셨다. 한 사람 한 사람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면서 환영하고, 박수치고, 칭찬해주셨다. 그리고는 말씀을 펴서 바디매오에 관한 성경을 함께 읽었다.

목사님은 예수님이 바디매오의 외침을 들으셨기에 그를 부르셨음을 말씀하시며, 심방 위원들에게 가서 우리가 말을 삼가고 들어야 함을 말씀하셨다. 새가족이던 입교인이건, 우리가 심방을 가서 해야 할 일은 조언을 해주는 일이 아니라 듣는 일이라는 것이다. 

“들으면서, 이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세요. 그 영혼의 소리를 듣게 되면 우리가 심방을 가고 싶지 않아도 이들의 영혼을 알기에, 아픔을 알기에 아마 자연스럽게 그 곳에 가도록 주님이 인도해주실 겁니다.”

목사님은 하루에, 일주일에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심방횟수를 정해주시지 않으셨다. 책임감을 부여하고 치열함을 부여해서 서로가 경쟁하게 만들지 않으셨다. 그저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들려주고, 우리가 그 마음에 감동하여 그대로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이것이 바로 자연스러움이 아니겠는가?

일주일 동안 나를 만나러 3분의 시무장로님이 약속을 잡고, 많은 평신도 리더들, 사역자들이 매일 찾아왔다. 그 누구도 의무적으로 온 사람은 없었다. 모두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나를 찾아서 사역에 대한 나눔을 들려주고 용기를 주며, 하나님을 고백했다. 여기에 있는 어느 누구도 나를 가르치지 않았다. 나에게 어떤 것이 목회라고, 젊은 목회자이기에 이런 길을 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공동체 안에서 나는 그 누구에게서 보다도 많이 배웠다. 삶이 변하는 것을 느꼈으며, 내 오만함과 죄악, 내재되어있는 분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내가 앞으로 가야 할 사역의 길이 무엇인지를 확신하게 되었고, 구원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은혜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그 무엇도 인위적인 것은 없었다.

아무도 내 팔을 잡아당기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새 보니 난 예수님 앞에 가게 되었다. 그 때 깨달았다. “아! 이것이 은혜로구나. 자연스러운 목회란 이런 것이구나.” 박신일 목사님을 비롯해 그 어떤 목사님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힘내란 말을 하지 않았다. 기도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주님 안에서 나는 변화된 것이다.

만 나이 28세, 이 젊은 나이에 이 교회를 보게 하시고, 새로운 목회의 모델을 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나는 더 이상 미래가 두렵지 않다. 어떤 자리와 직위가 중요치 않다. 자연스럽게 내가 하나님을 따라가면, 그 안에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해주신 감신대학교 임성모 교수님과 박신일 목사님, 그리고 나를 정말로 사랑으로 환영해주신 그레이스 한인교회 모든 교인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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