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십계명인가? 구약시대에 십계명이 전부인가?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기술된 뒤에 다른 법례들이 수 없이 계시로 제정되었고, 레위기에서는 의식법, 사회법, 재판법 등이 제정되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 외에도 선지자들이 받은 계시도 율법에 포함된다.

율법(Law)이란 무엇일까?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번역하면서 Law 번역이 쉽지 않음을 느꼈다. “범죄 이전의 법”, “범죄 이후의 법(율법)”, “오순절 성령 이후의 각 국가법”이 현격하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Law를 어떻게 이해하며 사용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Law는 크게 세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Law를 한 단어 ‘율법’으로 통일해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서양은 아직도 기독교 문화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우리는 기독교 문화권이 전혀 아니다. 서양이 비기독교 사회가 되었지만 1,000년 기독교 세월이 있다. 우리는 기독교가 강성하다고 하지만 2,000년의 불교 문화가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Law를 번역할 때에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서양이 아무리 적은 분포가 기독교일지라도 너무나도 명확한 기독교 문화이다. 우리 교회에서 탁월하게 믿음이 좋은 신자보다, 서양의 불신자가 훨씬 기독교적이고 윤리적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런데도 서양 교회는 몰락하고 있고, 우리의 교회도 침체되고 있다. 침체하는 교회가 세우지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 복음을 힘써 모두에게 땅끝까지(교회 안과 밖에서) 전하는 것이다. 선한 행실이 아닌 오직 신자의 입으로 나온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착한 행실과 공의를 실현해서 교회를 바르게 세운다는 개념을 버려야 한다. 교회 세움과 유지는 복음선포 외에 다른 방편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사는 족속이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 구약 시대에 율법은 국가법과 동일했다.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고, 신성한 왕국(Sacrum Regnum)이었다. 그러나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 유대 사람들은 다윗 왕국 회복을 갈망했다. 그런데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께서는 다윗 왕국을 지상 왕국(Regnum Terrarum)이 아닌 하늘 왕국(Regnum Caelorum)을 설립하셨다. 예수 이후에 땅 위에 제국(帝國)은 있어도 신국(神國)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중세시대에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이 있었고, 기독교 사회에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이 있었다. 이러한 부당한 이해는 사람이 만든 천부인권설(天賦人權說, theory of natural rights)이라는 견해로 무참하게 제거되었다. 천부인권의 창안자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이고, 그의 아버지는 크롬웰 군대(신기군)의 장교였다. 존 로크는 정신을 해체했고, 1806년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이 사회 구조를 해체시켰다. 나폴레옹은 전근대 유럽정신을 새시대로 유입시킨 영웅(Eroica)이다. 나폴레옹이 로마 정신과 사회 질서를 해체시켰기 때문이다. 근대 유럽 정신은 나폴레옹 정신으로 보아야 한다.

로마는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347/379년즉위-395)에 의해서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하면서 기독교 국가(Christendom)가 되었다. 기독교를 압제하던 제국이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확립했다. 그 시대에 로마법을 제정했다. 대표적인 황제는 유스티아누스 황제이다(482/527년즉위-565, Codex Justinianus). 믿음을 가진 탁월한 황제들이 있었지만, 로마는 바울의 자세가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로마는 부패와 불법이 만연한 유다 왕국과 같았다. 그들은 410년 반달족이 신성한 기독교 왕국의 도성을 도략하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거부했고, 결국 476년이 왕국은 사라지고 말았다. 로마는 대부분 부패한 기독교 왕국이었다. 그럼에도 생활 모든 부분은 기독교와 연관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일주일 단위로 사회를 구성한 것이다. 나폴레옹이 정복한 사회에서는 10일 단위로 사회를 구성하려고 했었다.

1646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작성될 무렵에도 완전한 기독교 사회였다. 신교와 구교가 대립해도, 모두 한 종교에서 나온 두 세력으로 보았을 뿐이다. 만약 로마가 사도 바울처럼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고 실천했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모습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칼빈은 경건을 겸손과 온유로 제시했다. 겸손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평가하는 것이다.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백인이나 백인을 우월하게 보는 유색인은 모두 교만하다. 노예정신은 교만이다.

세계정신은 나폴레옹과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의해서 개벽(開闢)을 맞이했다. 유럽정신은 흑사병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1755년 만성절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에서 변혁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리스본 대지진이었다. 세계정신은 제정일치에서 제정분리로 확정되었다. 2차대전 이후로 제정일치를 견지하는 공동체는 이단과 사교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을 섬긴다는 종교단체에서도 제정(祭政)을 분리시켜야 한다. 제정분리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법은 국가법, 사회법이 되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법으로 사는데, 그 법은 성경의 법이 아니고, 국가법이다. 국가법은 절대 율법이 될 수 없고 병용될 수도 없다.

성경에서 율법은 사회법과 종교법이었는데, 나폴레옹 이후 기독교 사회에서 국가법은 종교법의 위치를 상실했다. 현상에서 형식적인 법은 모두 국가법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슬람처럼 샤리아(Sharia Law)을 운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제정(祭政)이 일치된 기독교 사회에서는 종교법과 사회법을 구분할 수 없었다. 오히려 종교법에 부합되는 사회법이 더 충성되게 판단되었다. 그러나 제정 분리된 사회에서 종교법은 사회법에서 완전 박리되었다. 현재 그리스도인의 생활 행동규범은 국가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종교편향’이라는 사회통념이 발생해서 사회단체에서 종교적 의도를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제정분리된 사회는 성경 해석에서 상당히 어려운 선물을 주었다. 그래서 진리의 가변성, 준용(mutatis mundi) 원리를 적용시켰다. 관점에 따라 사고가 바뀔 수 있다는 진리의 상대성이 보편 지식이 되었다. 불교는 처음부터 진리의 가변성(諸行無常)과 상대성(諸法無我)을 견지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규례”(레위기)라고 말씀했다. 안식일교, 하나님의교회 등은 “영원한 규례”를 강조하면서 지금도 안식일과 절기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레위기의 음식법(비교 유대교 코셔Kosher, 안식교 육식금지, 이슬람 할랄halal, 천주교 사순절(사육제)), 절기법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한 행동(음식법과 절기법)이 없기 때문에 영원한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완전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율법의 제정자께서 준수하여 완성하셨다. 그 율법의 제정자를 믿으면, 율법을 사랑하며 율법에 부합되도록 정진한다.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해서 음식을 절제할 수 있으며, 거룩한 주일 준수를 위해서 타인을 부당하게 혹은 교묘하게 이용하지 않는다. 김세윤은 로마서 13장에 “권세에 대한 복종” 부분에서 영원한 율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시대상황적 변이가 있지만, 그 원리는 그리스도의 완전과 위대하심을 고백하고 전파하기 위한 것이다. 기독교는 사회 정의실현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 땅 위에 어떤 하나님 나라를 설립하려 시도하거나 도래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온 땅에 주 예수의 이름과 영광이 가득하길 원하며 복음을 전할 뿐이다.

통상 신학에서 율법을 3 용도(triplex usus legis)로 구분한다. 첫째, 정치적 또는 시민적 용도(usus politicus seu civilis legis)이다. 둘째, 신학적 또는 영적인 용도(legis usus Theologicus seu Spritualis)이다. 셋째, 규범적 용도(normativus, tertius usus legis)이다(권호덕: 2003, 54-80). 문병호는 칼빈이 제시한 율법의 3 용도를 첫째, 정죄(定罪) 기능, 둘째, 죄 억제 기능, 셋째,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 작용하는 용법’(usus in renatis)으로 제시했다. 신학적 용법, 정치적 용법, 성도를 위한 용법으로 제시했다(문병호: 2013). Berkhof는 1. A usus politicus or civilis, 2. A usus elenchticus or pedagogicus, 3. A usus didacticus or normativus로 제시했다(L. Berkhof, Systematic Theology, 614-615). J. V. Fesko는 political(죄 억제), pedagogical(그리스도께 인도함), normative(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정리했다. 율법의 3 용도는 아퀴나스에서 시작해서 의견은 다양하다. 루터의 율법과 복음 관계를 명료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발생한 혼돈의 이유는 루터의 사상을 너무나 단편적으로 판정한 것(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단절시켰다 혹은 율법은 정죄 기능이다(갈 3:19) 등등)이 주효하다. 그러나 칼빈의 사상은 체계적이고 명료하다.

칼빈에게 “율법”이란 첫째, 모세의 전체 종교형식(Inst., II, 7, 1) 둘째,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계시된 도덕법(주로 십계명) 및 예수께서 요약하신 것(Inst., II, 8) 셋째 여러 가지 민법과 재판법과 의식법이다(Inst., IV, 20). 이 가운데 “도덕법”은 “의의 진정하고 영원한 원칙”으로 매우 중요하다. 도덕법은 칼빈의 기독교강요(Inst., II, 7, 9-12)에서 다시 3가지 용법으로 설명된다. 칼빈이 제시하는 율법의 3 용도 중, ‘율법의 정죄 기능’을 율법의 진정한 목적에 대하여 “부수적(附髓的)”인 것으로 이해한다(Comm II Cor. 3:7; Comm Rom. 7:10-11). 율법은 그리스도와 관련될 때에 한해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 칼빈의 지론이다(Comm John. 5:38; Comm Acts. 13:39; Comm Rom. 10:5, 유정우: 2001).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율법(법)을 성경적 율법(율법과 복음 관계, 기독교강요 2권)과 국가 법 체계(기독교강요 4권)로 제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적 율법은 복음과 관계에서 판단해야 한다. 즉 “복음 이전의 율법”과 “복음 이후의 율법” 기능이 다름을 나타내야 한다. 17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아담이 받은 언약을 법으로 이해해서 시내산에서 받은 법과 연관성 문제를 토론했다. 장헌민은 모세 언약에 대해서 WCF와 오웬의 다른 개념을 연구했다. WCF는 구원협약-행위언약-은혜언약 구도인데, 오웬은 구원협약-행위언약-은혜언약-모세언약의 구도로 제시했다. 그런데 필자는 장헌민이 모세언약 뒤에 새언약까지 구도화시킨 것(5장, 모세 언약과 새언약의 관계)으로 이해했다. 언약 이해가 명료하게 한 이해로 규정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논쟁이 발생한다면 난상 토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혼돈에서는 자기 이해를 명료하게 말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타인의 주장을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법은 아담이 무죄한 상태에서 받은 법, 시내산에서 받은 법,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법이 있다. 그리고 국가의 법이 있다. 전자는 특별계시이고 후자는 일반계시이다. 아담이 무죄한 상태에서 받은 법도 법을 받을 상태는 자연이었다. 그래서 자연 혹은 창조라는 어휘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독자가 주의를 가져야 한다. 타락 이전의 자연(창조)과 타락 후의 자연(창조)는 상상할 수 없는 차이를 갖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담이 무죄한 상태에서 받은 언약(법)은 범죄함으로 소멸되었다고 생각한다. 타락 전 아담의 상태는 회복될 수 없으며 회복할 필요도 없다. 에덴의 풍요와 완전은 돌아갈 이상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계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유토피아(utopia)는 말 자체로 이 땅에 존재할 수 없는 구조이다. 어떤 사람은 아담이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가령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무죄한 상태로 영생하기 때문에 영생할 수 있었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최종 목표는 창조된 상태로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갖게 될 부활한 상태 이룸이 영생이고 최종 목표이다. 무죄한 아담이 받은 법은 범죄함(반역)으로 폐지되어 중단되었다. 아담의 후손은 반드시 죽으며,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다(히 9:27). 제2아담이신 주께서 조성하신 새인류는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생하게 된다. 그 일을 위해서 구세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이 성경 계시 기록 목적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사도행전에서 믿기로 작정된 자는 믿는다(행 13:44-48).

창세기 12장에서부터 한 사람, 아브람을 부르면서 한 구주를 세우기 위한 구속사가 시작된다. 2아담은 아담의 후손 중(창 3:15),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태어나신다(창 22장). 이삭 그리고 이스라엘(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에게서 나올 메시아가 탄생했다. 메시아, 주 하나님을 위해서 레위 지파 모세는 종으로 충성을 다했다. 그가 이룬 충성은 홍해로 인도하여,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음이고 광야에서 요단까지 인도함이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죄를 고소하고 폭로하는 기능이 있다. 그것은 백성이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하나님의 법을 범법한 죄인임을 아는 것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임을 처절하게 인지해야 했다. 수 없는 제사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이르지 못한 자기 상태를 처절하게 인식해야 했다. 그래서 죄인, 자신을 구원할 구주, 메시아를 대망하도록 훈련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잠재시키고 제사주의(성전주의)로 여호와의 이름과 성전을 더럽히며 가난한 자를 압제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과 유다는 멸망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은 율법주의를 창안했다. 탈무드 권위본은 바벨론 탈무드이다. 제사주의(성전주의)와 율법주의는 율법이 아니며 율법을 억압하는 배역 행위이다.

1세기 유대의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 새관점학파는 언약적 신율주의를 주창했는데, 예수의 죽음을 성경과 다르게 설명해야 한다. 예수의 죽음 해석은 독특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새관점학파의 예수 죽음 이해는 칼 바르트의 이해를 반복한다고 생각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가 온 맘과 몸으로 실행할 사명을 인지하여,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으로 주장했다. 이러한 구도에서 죄는 제거시켜야 할 주체와 죄와 함께하는 구도를 제언한다. 율법주의는 끊임없이 죄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으로 진행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본래 율법은 죄를 인식하는 구도였다. 죄의 제거는 제사 행위로 죄를 제거시켰다. 성전이 없는 시대에 창안된 율법주의는 율법으로 인식하고 율법의 정죄로 죄를 제거하려고 한다. 계시가 완료된 이후 율법이 죄를 인식하는 기능까지 중지시켰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다른 복음은 복음에 율법(할례)를 첨가하는 것이었다. 복음에 율법을 첨가하면, 예수의 피로 허문 담을 다시 세우는 반역이 된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에 저주를 선언했다. 그런데 루터에게는 율법이 죄를 지적하는 듯한 모습이 등장한 것이다. 그 때 율법을 선포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데 그러한 기능(율법의 기능)이 나타나는 것으로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복음이 율법적 기능(죄를 지적함)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계시가 완료된 이후에는,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은 율법이 아닌 성령의 탄식과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성령과 율법이 대조된다. 성령의 법으로는(롬 8:1-17) 율법이 신자의 내외에서 더욱 강화된다(예 산상수훈). 율법에 정죄 기능이 없음에도 신자가 더욱 율법을 지키는 것은 신비이고 은혜이고 자유이다. 복음 선포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정죄 기능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닫게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은혜이다. 신자는 성령으로 거룩을 정진한다. 신자의 각성이나 의지나 노력은 성령의 사역에 후행(後行)하며 어떤 가치를 부여받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은혜이다. 신자의 놀라운 업적이 주님께 요구할 상(償)이 될 수 없는데,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상(賞)을 주신다.

신약 이후 시대에도 교회 강단에서 율법이 교훈적으로 제시될 수 있다. 그 때 율법은 구원이 아닌 문화와 사회질서와 관련된 부분(일반계시)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율법과 함께, 현대 상황에서 발생하는 가치와 연결해서 교육할 수 있다. 한국 교회와 사회는 금연(禁煙), 중독(中毒) 등이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된 사안을 접근할 때 교육적, 율법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위급한 사안이기 때문에 복음사역자가 응급수단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반율법주의는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아도 자체로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있다는 자유를 획득했다고 강조한다. 율법주의는 칭의의 조건으로 순종(의인의 삶)을 주장한다. 율법주의는 신율법주의, 언약적-신율주의 등으로 분화되었다. 율법주의는 칭의를 희생시키면서 성화를 강조한다. 그래서 혹자는 성화를 강조하기 때문에 유익이 있다고 절반정도 동조하기도 한다.

유정우는 “복음에 반대 명제인 율법은 전체 율법(tota lex)이 아니고, 단순한 율법 (the bare law; nuda lex)이다”라고 제시하며,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단순한 문자로서 율법을 복음의 반대 명제로 제시했다. 원리적으로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이 존재한다.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 율법주의(갈라디아의 다른복음)를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을 세워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따르지 말도록 강조했다(갈 1:6-12, 갈 4:20).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갈 3:1)와 그들이 받은 성령(갈 3:2)에 호소한다. 십자가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칠 수 없다는 것이다(갈 3:3).

율법이란 무엇일까? 성경적 의미에서 율법은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두 돌판과 규례들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제사를 성취하신 뒤로는 1 세기 유대인에게 몽학선생이었다(갈 3:25). 몽학선생은 노예 신분으로 주인의 아들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주인의 아들을 훈련시킬 때는 엄격한 훈육선생이지만, 아들이 주인이 되면 노예의 위치에 서게 된다. 주인이 된 아들에게 몽학선생이 선생 노릇을 하려한다면 반드시 반역죄로 처단될 것이다. 1세기 이방인들은 양심의 법을 따랐다(롬 2장). 이 때 율법과 양심의 법은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함을 보여주는 표지가 되었다. 성경계시가 완료된 후에는 율법(양심의 법)에서 중보자,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전환되었다.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은 믿지 않는 자에게 대한 심판이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 곳, 예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양한 사변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배당이 있는 지역에서도 예수 이름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예배당이 없는 지역에서 예수 이름을 들어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고, 구원됨도 하나님의 섭리로 진행된다. 인간은 자기 범위 안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면 된다. 한정된 자기 인생의 분깃이 자기의 우주이고 전체이다. 칸트의 가르침을 따라 나의 인식 밖에 있는 우주는 나의 우주가 아니다.

법치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생활에서 국가법 지배를 일차적으로 받는다. 그리스도의 법은 영적인 법으로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5계명이기 때문에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국가법에 명시되어 있다. 부모부양의무(민법 974조), 기초생활보장법 등이다. 성경의 법은 외적이나 형식적인 법이 아니라 내적이고 영적인 법이다. 산상수훈은 외적인 성문법이 아니라 내적인 법, 의와 평강과 희락의 법이다(롬 14:17). 성경에서 율법은 행위가 아니라 성령으로 연결되어야 합당하다. 국가는 성경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구속(拘束)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속(救贖)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힘써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구속받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인을 시기하는 것은 오직 하나, 명예의 자리에 서지 못하기 때문에, 탐심과 이기심 때문이기에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하시다.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보다 연약한 세상 나라의 법을 지키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5:20).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수여자를 믿으며,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법을 사랑하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 의를 얻거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율법은 조건이 아니라 신자 자체이다. 율법을 주신 분이 믿음을 주신 분이다(합 2:2-4, 마 16:17, 행 1:8). 신자는 자기에게 구원을 주신 구주를 믿으며 고백한다. 율법을 주신 분과 구원을 주신 분은 같다. 자기 구원에 만족하지 않고, 구원을 주신 분을 고백하며 찬양하며 전도한다.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딤후 4:2).

<참고문헌>

권호덕,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그 사회적 적용』 (서울: 그리심, 2003),

문병호, 『30주제로 풀어 쓴 기독교강요』 (서울: 생명의말씀사, 2013),

김세윤, 『그리스도와 가이사』 (서울: 두란노, 2009),

유정우, “칼빈의 율법과 복음 이해”, 『사회과학연구』, Vol 5, 평택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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