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연재 묵상칼럼
[묵상 칼럼] 시험을 당할 때 기도로 응대하는 자가 아름답다[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3) 시험(試驗)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시험관(試驗官)이신 하나님의 훈련 ‘시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 소비자일 때 그 결정은 상대적으로 쉽다.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있다. 가족이나 국가다. 선택지는 오히려 단순할 수 있다. 침묵한 채 참거나 저항하거나. 세계적인 경제학자 앨버트 O.허시먼(Albert O. Hirschman)의 책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Exit, Voice and Loyalty)는 이 문제를 천착한 역작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이 이른바 ‘탈출 옵션(Exit Option)’과 ‘저항 옵션(Voice Option)’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가셨는데 그들은 시험을 당할 때도 ‘탈출 옵션’을 시도하였다. 욥이 시험을 받을 때 아내는 탈출 옵션을 제안한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극단적인 선택이다(욥 2:9). 주기도문은 다르다. 우리에게 저항 옵션을 요구한다. 하나님께 voice를 내라고 요구하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한다. ‘아버지, 우리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시험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시험관(試驗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시험이 없는 삶이 아닌 시험을 당했을 때 시험에 들지 말도록 기도해야 한다. 출애굽 배경 속에서든 그 밖에서든 하나님은 흔히 자기 백성을 시험하는 분으로 말해진다.

최근 교황청은 이탈리아어판 주기도문에서는 ‘lead us not into’를 ‘Do not let us fall into’로 문구를 변경하였다. ‘우리를 유혹으로 이끌지 마시고’를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로 변경한 것이다. 이탈리아로 말하면 ‘Non abbandonarci alla tentazione’이다. 기본 구절에서 ‘lead’와 이탈리아어 indurre는 ‘하나님이 인간을 유혹으로 이끌 수 있다’는 해석을 낳을 수 있기에 이를 막기 위해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의미가 없다. 천주교의 번역이나 몇몇 영역본의 번역처럼 주기도문의 시험을 유혹으로 번역하면 ‘아버지, 우리를 유혹하지 마세요’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1. 시험은 trial이냐 temptation이냐

‘시험’에 해당하는 ‘peirasmov"’(페이라스모스)는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 ‘죄의 유혹(enticement to sin)’과 ‘시험을 하는 것(putting to the test)’이다. 주기도문에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시험은 시험인가? 유혹인가? 시험은 시험인데 유혹은 아니다(참조. 약 1:13-14). 죄를 범하게 하고 유혹에 빠지게 하므로 패망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가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눅 4:2).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시험은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가하는 것, 즉 시련을 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스트레스 속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삶 속에서 주기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산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바위 위에 씨앗이 떨어졌을 때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 즉 시험에 해당하는 페이라스모스를 당할 때에 배반하게 된다.

시험이라는 용어가 인간을 범죄하도록 유혹하는 행위에 대해서 적용되는 예는 혹 나온다고 할지라도 아주 희귀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인간의 타락에 관한 기사와 욥의 고난에 있어서 사탄의 역할에 관한 기사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야고보 선생은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라고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약 1:13). 여기서 시험하다에 해당하는 ‘페이라조’는 시험에 들게 하다, 또는 유혹하다는 양가적인 뜻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로 시험에 들게 하여, 즉 유혹하여 범죄하게 하지 않으신다.

사탄의 시험의 특징은 무엇인가. 에덴동산의 아담과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기사를 종합해볼 때, 사탄은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이나 그 위협적인 형벌들에 대해서 직접적인 정면 공격을 회피한다. 그 대신에 그는 의심과 불신앙과 반역의 씨앗을 뿌린다. 아담과 하와에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합법적이고 실제적인 행복을 주지 않고 어리석고 부당하게 보류시켜 놓았다고 느끼게 하였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향한 그의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배고프게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능력을 행하여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지 않느냐이다.

The Temptation of Christ , Juan de Flandes(1450-1519), oil on panel

 

한 신학생이 첫 학기에 조직신학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서술형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정행위를 할 수 없었다. 백지에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채점지를 받아 보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하나님=100점, 너=〇점.” 학교 시험은 test이다. 부정행위는 temptation이다. 시험에 대한 압박은 trial이다. 그 학생은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시험에 대한 압박에서 실패했고, 성적도 실패했다. 사람이 압박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배교다.

돌밭에 떨어진 말씀이 시련에 해당하는 페이라스모스를 당하는 것은 압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울 때 ‘시험에 들지 말도록’ 기도하는 일차적인 의미는 압도하고자 위협하는 스트레스를 견뎌낸다는 것이지 옳음을 입증한다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에서 페이라스모스의 용법이 바로 이와 동일한 압박의 의미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아버지께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하는 것은 이런 압박을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겨내기가 너무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광야에서 시험, 사람으로부터 받는 시험, 환경과 업무 속에서 받는 각종 시험을 이기고 견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바울은 조직신학 시험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시험을 치루었다. 문제는 자기 육체에 있는 가시였다. 그는 그 문제가 사탄의 사자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었다(고후 12:8,9). 바울은 두 가지 답안을 제출한다. 첫째, 사탄의 가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유혹이 아니라 신앙의 시련, 즉 시험이다. 둘째 시험은 목적이 있다. 영적 계시를 너무 많이 알고 있기에 너무 자만하지 않고자 함이다. 바울은 두 가지 답을 제출한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인정할뿐 죄를 짓게 만드는 주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사탄의 가시로 인해 고통과 불편, 그리고 아픔을 겪는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면 기뻐할 수 있다(약 1:2-4; 12). 자만하여 넘어질까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

 

2.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시험에 들게 마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모든 시험들’과 함께 한 자들이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시면서 겪은 모든 시험들과 관련하여 앞으로 제자들에게 동일한 시험에서 구해 주시라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신다(22:28). 주기도문은 이런 기도, 즉 아버지, 저희로 시험들에 들지 말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님께서 첫 발걸음을 내딘 광야에서부터 마지막 십자까지 시험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그의 전 사역을 통해서 시험을 당하셨다. 가장 큰 시험은 인간들에게 받는 시험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들이며 메시야임을 증명해 보이는 시험이었다. 고소할 거리를 만들기 위함 시험이었다. 가장 큰 시험은 십자가의 시험이다(마 4:1). 이로써 시험당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 즉 구원하기 위함이다(히 2:18).

Martin C. Scorsese 감독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휴먼드라마 ‘Silence’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한 17세기 일본. 실종된 스승 Pereira는 끔찍한 고문과 취조 끝에 죽어가는 선교사들과 신도들을 지켜보면서 “주여 어디에 계시나이까”라고 외친다. “이 악을 보시지 않습니까. 왜 침묵하십니까”. 그러나 그 핏빛 절규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침묵 앞에서 그는 절망하고 좌절한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성화 위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런 그를 찾아 일본에 이른 로드리게스(가필드)는 선교 활동을 하다 막부 정권에 붙잡힌다. 예수님의 얼굴을 동판에 새겨 나무판에 끼워 넣은 것, 즉 후미에(踏み繪)를 밟고 배교(背敎)하라는 강요를 받지만,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앤도 슈사쿠 작, 영화 침묵(沈默)

‘아버지, 우리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마지막 간청은 해당 문맥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의 재확증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펼쳐지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막 14:38).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한 제자들을 고려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기도 하지 않고 졸다가 세 번이나 시험에 빠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통해 ‘근신하라 깨어라’고 편지한다.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고 당부한다.

시험을 받을 때 또는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의 태도는 기쁘게 환영한다(약 1:2).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크게 기뻐한다(벧전 1:6). 왜 이런 일이 가능한가.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땅에 사는 자녀들에 시험을 하시되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심을 믿기 때문이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도 준비하시고 그리고 능히 우리로 감당하게 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믿는다(고전 10:13). 이것을 한 마디로 주기도문에서 ‘우리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이다. 물론 이러한 환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만 그러한 환경들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명백하게 밝힌 구절들은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이승희 목사  titeioslee1@hanmail.net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승희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