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바라본 한일 관계와 상생 모드 (3)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편집자 주】 아래의 내용은 저자(한명철 목사)가 지난 5월 20일 서울신학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에서 행한 특강 내용을 일부 편집한 것이며, 저자의 특강 "미국에서 바라 본 한일 관계와 상생 모드" 마지막 부분입니다.

 

4. 두 개의 질문

A. 고르디우스의 매듭인가? 뫼비우스의 띠인가?

정복 길에 나선 알렉산더가 한 지역을 지날 때 아시아의 정복자만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수 있다는 전설을 전해 듣고 단칼에 매듭을 내리쳤다. 사람들은 그 매듭 풀 생각만 했지 두 조각으로 자를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않은 어떤 일을 한 사람이 해낼 때 우리는 그를 선각자라, 개척자라 칭한다. 모두가 힘든 문제를 힘들게 풀 것을 고심하고 있을 때 알렉산더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찾아냈다. 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해답이 있다. 해답이 없는 문제는 문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푼 것은 칼이 아니라 알렉산더의 안목과 대담한 실행력에 있었다.

뫼비우스는 독일의 수학자요 천문학자로서 한 번 생각을 비틀어 곡면의 띠를 만들어냈다. 직사각형의 기다란 종이를 한 번 비틀어 연결하면 곡면 띠가 된다. 무한의 상징인 눕힌 “8”자의 모습과 같다. 뫼비우스의 띠는 출발해서 한 바퀴 돌면 처음의 반대편에 도달한다. 두 번 돌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시계를 보면 늘 뫼비우스의 개념이 생각난다. 0시는 시작점이면서 도착점인 24시와 똑같은 지점이다. 그리스도가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임은 뫼비우스적 관점에서도 옳다, 시작과 끝이 없는 듯 있고 좌우의 상대적 분별이 사라져 모두가 하나로 통합된다. 여기에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IMAGO DEI를 보며 완전한 인간이신 IMAGO HUMANI를 본다.

 

B. 가깝고도 먼 나라인가? 아니면 멀고도 가까운 나라인가?

하나님의 존재를 그렇게 느껴본 적은 없는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리 느껴지고 멀리 하기엔 너무 가까운 것이 하나님 존재 경험이다. 멀어도 가깝다고 인정하면 얼마든지 가까워질 수 있다. 이질성을 극복하고 동질성을 추구하다 보면 타원의 두 중심점처럼 얼마든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 번 돌아도 되지만 일본인을 제대로 상대하려면 두 번 도는 수고도 아까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까탈스러운 이웃의 마음을 얻는 길이다. 다테마에(建前)를 넘어 혼네(本音)에까지 접근하려면 열 번이면 어떻고 백 번이면 어떻겠는가! 한국과 일본이 상생하려면 서로 거듭된 노력이 나라간, 국민 간 반복되는 중에 두 나라는 대항마가 아닌 쌍마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미래의 수레를 함께 끌기엔 너무 먼 존재인 동시에 멀리 하기엔 너무도 가까운 존재가 바로 일본이라면 일본에게도 그런 한국이 그렇게 비칠 것이다.

5. 큰 틀의 상생 모드

A. 일본의 변화-레이와

2019년 5월 1일 아키히토 천황이 물러나고 나루히토 황세자가 126대 천황으로 즉위하여 연호를 레이와(令和)라 하였다. “좋게 합침”의 뜻이라면 질서와 조화를 표방한 연호의 의미는 일단 긍정적이다. 일본의 연호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뜻하는 것으로서 사용된 지 이번이 248번째에 해당한다. 혹자는 이 연호의 출처를 고대 일본의 노래집인 만엽집(萬葉集) 제5권으로 본다. 730년 한 가인(歌人)의 집에서 열린 매화잔치에서 읊은 와카(和歌)에 매화를 노래한 32수(首) 서두에 이런 표현이 있다. “초봄의 길한 달, 기운은 상서롭고 바람은 평온하네. 매화는 거울 앞 가루를 날리고 난초는 살결 같은 향을 풍기네.”(初春令月、氣淑風和、梅披鏡前之粉、蘭薰珮後之香) 어떤 이는 그보다 중국의 귀전부(歸田賦)까지 소급해서 적용하나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다.

영(令)에는 “좋다,” “길하다”라는 뜻만 아니라 “우두머리”란 의미도 있다. 우리 식의 발음인 영화(令和)가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모임”이나 “우두머리의 조화나 질서”라면 동북아만 아니라 온 세계는 주시해야 한다. 이미 도처에서 보통 국가로의 환원이라는 그럴듯한 주장 하에 강대국을 향한 일본의 거보는 시작되었다. 군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의 우려는 단지 기우에 그쳤으면 좋겠다. 서구에서 공부한 그의 전력이 과연 서방 세계와의 화해를 유지하며 세계 평화에 기여하게 될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 역시 서구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는가! 그는 여전히 미국의 골칫덩이며 한국인에게는 가장 실질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다.

일본의 체제 변화는 일단 한국이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군중의 머리 숫자는 많아도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몇 사람의 힘이다. 경기장에서 응원단장이 펼치는 선창과 기본 동작은 관중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다. 여론 조작이나 얄팍한 감정 건들기로 대중의 정신을 흐트러지게 만드는 사이비 논객들은 추방되어야 마땅하다. 껄끄러운 상대와의 관계를 건설적으로 세우기 위해선 불량한 사이비 논객들이 가라앉고 건전한 지성인들이 환영 받는 분위기가 조성될 필요가 있다. 조작된 인조 영웅처럼 군중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자칭 논객들이 기세등등한 이상 이 나라는 국론이 천 조각 만 조각으로 나뉜 지금의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기란 힘들다.

 

B. 트럼프의 트럼프와 트럼펫

트럼프(Trump) 대통령은 대북관계에서도, 대중관계나 대일관계에서도 ‘으뜸가는 패’인 트럼프(trump)를 갖고 있다. 금관악기의 트럼펫처럼 그는 국제무대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의 힘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를 표방한 그의 저돌적인 정치 행보 앞에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트럼프는 현 한국의 집권층에 불만이 높다. 어떡해서든 북한의 핵 의지를 무산시키고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트럼프의 의지에 반하여 한국의 현 정부는 사사건건 북한을 옹호하려는 듯한 인상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익우선주의는 공화, 민주 할 것 없이 유지되어온 일괄된 정책이다. 트럼프의 개인적인 성향에 힘입어 미국우선주의는 각국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다.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우위를 점한 미국은 만족할 수준이 아니라면 끝까지 갈 것이다.

한국의 방위비 분담은 갈수록 늘어갈 것이다. 미군의 한국 주둔은 미국의 세계 경영에 중요한 한 축이 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국의 현실적 필요가 더 강하다. 전작권 환수가 민족의 자주성 회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봇물 터지듯 들끓었을 때 미국의 입장은 분명했다. 미국은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 군대를 철수시키겠다는 것이다. 한국 방위를 위해 미국이 부담해야 하는 경제적 비용은 한국이 담당한 방위비보다 몇 배나 상회한다. 경제적으로 손실이요 미국 내의 한국에 대한 여론도 좋지 않은데 실리에 밝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처리할 리가 없다. 한미 관계에서 혈맹이란 말은 한 때 서로에게 통했다. 하지만 격렬한 반미의 흐름을 직접 목격한 미국인들의 시각은 매우 차디차다. 혈맹이란 말은 옛 표현일 뿐 이제 미국에게 있어 한국은 믿을 수 없는 우방의 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체적으로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피를 흘린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의 문화에 매료되고 한국적인 것에 찬사를 보낸다. 정작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우향우에서 좌향좌로 급선회하는 세력들이 현재 한국의 정국을 틀어쥐었다는 현재 상황이다. 만일의 경우에 전시작전권이 한국에 넘어오는 순간 그것이 한국 방위에 미칠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제대로 북한 상공을 초계 비행할 수 없는 한국의 정보력은 대단히 열악하다. 미국이 제공하지 않으면 한국은 대북 정보력 수집에 캄캄하다. 일본에 비해서도 한참 열세다. 한국은 중국에 호되게 당하고 일본의 끈덕진 항의에 직면하고 미국의 각종 경고에 휩싸여 있다.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것이 아니라 3개의 강국이 둘러쌌고 러시아까지 가세하는 날이면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C. 공멸을 피하면 상생이 보인다.

서로 물고 찢으면 모두 망한다. 한 쪽이 이기려고 드는 한 둘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삼손 콤플렉스(Samson Complex)라는 것이 있다. 아랍국들에게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늘 불안 속에 삶을 영위한다. 이스라엘이 죽기 살기로 핵을 개발하고 주변국들이 핵무기를 제조할 기미가 보이면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원점 타격을 가해 핵 능력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나라를 잃은 설움을 그들은 2천 년이나 당했다. 더 이상 이스라엘이 지구에서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작지만 매우 강하다. 전쟁 상황이 되면 핵을 장착한 이스라엘의 폭격기 편대가 반드시 뜬다. 일단 유사시에는 삼손의 비극적 최후처럼 공멸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를 알기에 위기의 순간마다 이스라엘을 달래고 천문학적인 군사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미국 조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계들의 애국심 때문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의 생존 의지는 강철 같다.

지금은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같은 전쟁 상황이 아니다. 일본이 우격다짐 식으로 한국을 농락할 만큼 일본이 전능하지 않고 한국도 만만치가 않다. 한국인의 저력은 실로 놀랍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핵무기 몇 개 제조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조선 건조 능력과 기술력은 세계1위다, 근래 들어 선박 수주에서 중국과 수위 다툼을 벌이지만 기술력에 바탕을 둔 건조 능력은 초절정이다. 재정적 뒷받침만 된다면 이지스함을 수십 척 제조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강하면 상대도 강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대중 관계에서 늘 밀리고 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도 일본과의 공조는 불가피하다. 이는 반중친일의 관점이 아니다. 한미일의 삼각 구도는 한국 자체의 존립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이다. 이런 현실적인 고려 없이 민족 감정을 앞세워 나라를 세워가기란 실로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함께 사는 길은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추구함이요, 이것이 공멸을 막아준다. 친구의 친구는 친구라는 중국의 격언처럼 미국의 맹방인 일본은 우리의 맹방일 수 있다. 적의 적도 적은 아니다.

 

D. 미래인의 출현

한국으로 수렴되는 일종의 문화현상은 아주 기이할 정도다. 세계의 젊은이들은 소위 한류에 열광한다. 이런 광기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었다.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우리로서는 천만다행이다. 유사 이래 파도처럼 밀려든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미래인은 충돌과 다툼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거나 다수 위에 군림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더불어 살며 함께 전진함으로 상생과 공생을 추구하는 평화의 사람이다. 전쟁의 후유증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란 오명으로 지니고 있는 한국인은 누구보다 평화에 대한 갈망이 크다. 그 염원만큼 스스로의 분쟁 상태를 종식시키고 평화를 정착시킴으로서 세계의 분쟁 지역에 평화의 사자로 파송되는 그런 일이 앞으로 일어나야 한다.

 

6. 에필로그

한반도에 전쟁의 가능성은 과연 있는 것인가? 외부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어떤 정치적 판단 착오나 판세 읽기에서 오작동이라도 생기면 금방이라도 전쟁이 발발할 확률은 매우 높다. 양측이 지닌 가공할 전쟁 수행 능력은 전쟁을 단지 한반도에만 국한시키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전쟁을 확대시키기 위해 일본이나 미국의 인구 밀집 지역에 한두 발 신형 미사일을 쏠 수 있고 이로 인해 당장 전쟁의 흐름을 자신들 쪽으로 몰아갈 수 있다. 한반도에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었을 떼 미국과 일본의 태도는 거의 절대적이다. 그들과 선린 관계를 넘어선 맹방 차원의 관계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라의 운영은 감정이나 일시적 결기로 이끌 것이 아니다. 은인자중하기도 하고 절묘한 밀고 당기기를 통해 살벌한 국제 경쟁사회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미국은 과연 한국을 지켜줄 것인가? 한미방위조약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은 자동 개입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쟁을 수행하는 의지나 전쟁의 결말을 주도해갈 미군 지휘부의 결정권은 결국 펜타곤을 넘어 백악관, 그것도 트럼프 한 사람에게 있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선 미국의 한국 방위 의지는 반반이다. 맹방의 역사와 한국에 호의적인 인사들이 압력을 행사하면 이를 70~80%까지도 끌어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100%는 아니다. 그만큼 반미 운동이 미국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는 말이다.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 밀약은 없었을까? 싱가포르와 하노이 회담에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참모진들이나 통역사가 배석하지 않은 자리에서 영어 소통이 가능한 두 사람 간에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관련된 모종의 깊은 얘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상상은 역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둘은 우선 언어 장벽이 없다. 해프닝이긴 했지만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휴전선을 넘은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마주잡고 잠깐 동반 월북하지 않았던가! 그 장면이 계속 나의 뇌리에 남아 있음은 그것이 지닌 상징적 의미가 커서였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지도자들이 수차례 북한을 공식 방문했다. 그래서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전 세계가 주시하는 일대 사건이다. 한국에는 김정은 서울방문을 열렬히 환영하는 백두칭송위원회까지 결성되었다니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두 정상이 만난 이후에 작성될 선언문에 어떤 내용이 들어갈지 정말 모를 일이다. 그래서 걱정이다.

한국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또 다시 한국인의 운명이 강대국들의 농단이나 한두 지도자의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여기에 한국교회가 고질적인 정치싸움이나 욕심 부풀리기를 접고 나라 지킴이로 나설 소이가 있다. 민족복음화가 과연 허울 좋은 구호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존재 의의에 해당한다면 두 눈을 부릅뜨고 권력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한다.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한국의 최종 운명은 비관적이다. 한국이 전대미문의 위기에 처할 때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국익 앞에 장사 없고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 앞에서 나라마다 자기 입장에서 이득을 챙길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결국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이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길 밖에 없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움켜쥐시고 각 나라의 운명을 의지적으로 조종하실 수 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민족적 회심에 앞선 교회의 절절한 회개야 말로 이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이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