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을 담임목사로 섬긴 주인 조덕삼장로

조덕삼 장로
이자익 목사

대한민국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과 순종이 이 땅을 덮고 있던 지독한 어둠을 몰아내고 동방의 찬란한 새벽을 열었다.

독일인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목사는 충청도 고대도에 1832년 7월 25일에 도착했다. 20일 동안 고대도에 머무는 동안, 그는 한글로 주기도문을 번역했고, 한문성경, 전도문서, 서적, 약품을 나눠주고, 감자를 심어주고, 감자와 포도주 재배법을 가르쳤다. 한글의 자음을 받아 적은 후에 이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영국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Thomas, Robert Jermain: 1840-1866)선교사이다. 27살 젊은 나이에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려다가 순교했다.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받은 사람들 중에 많은 분들이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인들이 되었다. 그를 죽였던 박춘권은 평양 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받은 성경을 뜯어 벽지로 사용했던 영문 주사 박영식은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아 널다리 교회를 세웠다.

1885년과 1886년, 조선을 밟은 개신교 선교사들인 아펜젤러, 언더우드, 메리 스크랜튼, 헐버트 등은 조선 근대 선교의 문을 연 드림팀과 같다. 이들이 조선 땅에 끼친 영향력은 선교의 역사에 길이 남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4).

기독교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심장의 고동 소리가 더욱 강하게 뛴다. 이것이 기독교의 유산이다. 영적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가장 큰 자랑이며 축복이다.

전북금산교회 이야기는 페북에 자주 등장한다. 그 많큼 역사적 가치와 신앙적 감동을 주고 때문이다. 역사의 흔적을 머금고 있는 교회를 가보고 싶었는데, 계기가 되어 금주에 전북 금산교회를 방문했다. 전라북도 모악산 일대는 예로부터 내세지향의 미륵신앙이 결집된 곳이며, 구한말 증산교를 비롯해 민족종교와 신흥종교가 발상하고 융성하였던 지역이다. 모악산 아래 금산사 입구마을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한 ㄱ자형 한옥교회가 있다.

금산교회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은 ㄱ형 초대교회이다. ㄱ자형으로 교회를 지은 것은 남녀가 따로 않기 위해서 였다. 조세형의원의 할아버지 되시는 조덕삼 장로와 1908년 미국 남장로회 전주 선교부의 데이트(Lews Boyd Tate) 선교사가 지은 금산교회(전북 문화재자료 136호)이다.

조덕삼 장로

조덕삼장로님은 한양과 평양, 중국 등지를 왕래하면서 신 문명에 접하게 되었고, 우리나가 살 깃은 기독교 복음화로 빨리 개화하여 스스로의 힘을 기르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 당시 전주에는 데이트 선교사가 있었고, 선교사는 금산리까지 말을 타고 왕래했으며 선교사가 제일 먼저 접촉한 사람은 조세형집사의 할아버지 조덕삼 장로님과 후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3번 역임한 바 있는 이자익 목사님이다. 두 사람은 같은 날 금산교회에서 학습과 세례를 받았다.

이자익 목사

초기 교회 건축 한국적 토착화

금산교회는 남자와 여자의 회중석을 분리하여 서로 볼 수 없도록 되었고, 가운데 설교자만 양쪽을 볼 수 있는 예배당 내부 구조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 성리학의 유산이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남녀가 일곱 살이 되면 한 자리에 같이 앉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당시 한국의 유교 문화와 충돌하지 않고 절충하여 예배당 구조를 ㄱ자 형태로 배치한 것은 선교사들의 토착화 노력의 결과로 볼 수있다.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서양식 교회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합시킨 이 교회는 초기 교회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조덕삼장로가 남긴 영적 유산

금산교회은 한국교회 역사의 귀중한 영적 자산을 물려주었다. 그것은 개척 공신 조덕삼 장로와 그의 마부였던 이자익 목사의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교회의 개척 공신이었던 조덕삼(나중에 장로가 됨)과 그의 마부였던 경상도 출신 이자익 목사의 이야기인데 두 사람은 주인과 하인 사이로 데이트 선교사에 의해 함께 세례를 받고, 함께 집사로 임명을 받았는데 교회를 건축하고 난 다음 해인 1909년에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때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뜻밖이었다. 마을의 지주였던 조덕삼 영수를 제치고 그의 마부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추천된 것이다.

반상의 신분을 철저히 따지던 시대에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 것은 뻔했다. 이에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고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조덕삼 영수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 집사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기보다 이 장로를 집사의 직분으로 잘 섬겼고, 신학교에 보내어 목사가 되도록 지원하여 그를 다시 자기 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하여 지역 복음화에 헌신함으로써 신분의 편견과 지방색의 편견의 벽을 보기 좋게 허물어 버린 이야기다.(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한 ㄱ자형 한옥교회 (문화유산 알아보기, 금산교회, 김정신, 문화재청헤리티지채널).

조덕삼 장로님의 유산을 물려받은 후손

금산교회를 세운 조덕삼장로님의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후손들이 이어가고 있다. 아들 조영호장로님은 간도로 망명, 일제에 항거하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교회당내에 [금산사립학교]를 세워 신앙에 입각한 교육으로 하나님 말씀을 몸소 행한 실천가였다.

3대째인 조세형의원은 어릴적 ㄱ자형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다녔으며, 또한 금산교회에서 세례도 받았다. 어려운 정치적 결단을 내릴 때, 믿음이 흔들릴 때, 고뇌가 있을 때 6백리 길을 달려 어머니 젖줄같은 금산 교회를 찾아가 기도하곤 했다고 간증했다. 조세형의원은 금산교회 창립 95주년(2001년)에 할아버지 조덕삼장로, 아버지 조영호 장로에 이어 3대째 한 가족 장로 되었다.

대를 이어 영적 유산의 감동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민족의 역사적 유산이며, 교회역사의 힘이며, 가문을 이어주는 영적 기쁨이다. 오늘날 신앙의 이야기들이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 감동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은 신앙적 헌신과 섬김의 모습이 얇아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헌신과 섬김은 깊어질 수 록 고귀한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세상을 다시 본다면, 복음에 대한 순종이 왜 중요한지를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금산교회역사적 유산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