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7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주도하는 의회파가 잉글랜드 내전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전후(戰後) 질서 확립에 일치를 갖기 못했다. 그것은 의회가 스코틀랜드 군대를 용병으로 하고 크롬웰의 군대에 해산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의회파를 다수 점유한 온건한 개혁파는 온건한 왕정 존속을 원했지만, 급진적 세력이 포진된 크롬웰의 진영에서는 왕정폐지와 공화제를 원했다. 잉글랜드 온건한 개혁파를 장로파로 분류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우리는 당시 잉글랜드 온건 개혁파는 에라스트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왕정을 유지하면서 개혁된 종교를 수립하는 것에는 스코틀랜드 언약도와 동일했지만, 교회와 국가 관계에서 국가주도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안상혁은 사무엘 러더포드와 토마스 후커의 논쟁으로 제시하지만(안상혁, 2015), 잉글랜드 의회파 내부에서 에라스투스주의와 독립파(비분리주의)가 나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내전에서 의회파가 승리했지만 찰스 1세는 생존했고,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의회파의 내부 분쟁 등 승리한 세력 내부에서도 큰 균열을 갖고 있었다.

김중락은 1645년 잉글랜드 총회를 개최하도록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로버트 베일리(Robert Baillie) 등의 활약으로 잉글랜드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고 평가했다. 1645년 8월 19일에 잉글랜드 의회는 전역에 장로회 설치를 명령했지만, 세속권력과 결탁되는 에라스투스주의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이다(김중락, 2001). 김중락은 앤드류 멜빌과 사무엘 러더포드는 에라스투스주의와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제시했다(김중락, 2001). 잉글랜드에 있는 장로파는 스코틀랜드 장로파의 압력에 의해서 형성되려고 했지만, 곧 에라스투스주의로 변형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베일리는 잉글랜드 장로제를 “절뚝발이의 에라스투스적 장로제”(a lame Erastian Presbytery)라고 비평했다(Cowan: 2018, 125, 김중락: 2001). 에라스투주의자들의 미숙함으로 크롬웰이 이끄는 독립파가 의회를 장악한 뒤에, 독립파 내부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수평파(水平派, levellers)를 제압했다.

1647년 크롬웰은 일단 찰스 1세를 구금시키며 향후 방안을 모색했다. 크롬웰은 왕을 존중하며 문제를 논의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의회의 수장이 크롬웰에게 군대 해산을 명령했고, 크롬웰이 거부했다. 1647년 수평파 지도자 존 릴번(John Liburne)의 주도 군 폭동 사태가 발생하고, 의회 내부에서는 온건파가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찰스 1세는 구금에서 탈출해서 스코틀랜드로 도주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왕당파와 스코틀랜드 협력 진영으로 군비를 정비했다. 찰스 1세는 크롬웰을 제거하기 위해서 좀 더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해야 했다. 1647년 12월 26일, 찰스 1세는 와이트(Wight) 섬을 비밀리에 방문한 라우던(Laudon), 라우더데일(Lauderdale), 라나크(Larnark) 등 세 명의 스코틀랜드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약정(Engagement)”을 체결했다(서요한: 1994, 249). 온건주의 의회파는 포로로 잡은 존 릴번을 석방하면서 독립파 내부를 교란하려고 했지만, 릴번이 의회파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1648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군대와 연합해서 런던으로 진격했지만, 크롬웰에게 패배했다. 1648년 크롬웰은 프라이드 대령으로 하원을 무력으로 장악하며(Pride's purse, 1648.12.6-7), 140여명의 온건파들을 추방시키고, 독립파 60여명으로 의회를 구성했다(잔부의회, Rump Parliament). 크롬웰이 무력으로 구성한 잔부의회는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에게 반역죄를 판결하여 처형시켰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크롬웰의 군대가 스코틀랜드와 던바 전투(1650년)에서, 찰스 2세와 우스터 전투(1651년)에서 승리한 후, 패배한 왕은 프랑스로 망명했고 스코틀랜드 진영은 둘로 나뉘었다. 1651년 9월 3일 우스터 전투에서 크롬웰의 군대는 스코틀랜드 군대를 섬멸하고 스코틀랜드를 정복했다. 그리고 잉글랜드 잔부의회는 스코틀랜드를 “자유 공화국 잉글랜드”에 포함시켜 병합시켜 버렸다. 크롬웰에 의해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가 병합되었고, 한 종교(독립파)로 세워지게 되었지만, 왕정은 파괴되었다. 장로파는 크롬웰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크롬웰은 1653년 잔부의회에서 140명으로 지명하여 의회를 구성했다. “지명의회(Nominated Parliament)”라고 불리기도 하고, “성자들의 총회(Assembly of saints)”라고 불리는데, 성자들은 독립파에게 인정된 위인이었을 것이다. 1653년 통치장전(統治章典, Instrument of Government)을 통해서 크롬웰이 세 왕국의 통치자,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 of the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이 된다. 참고로 Lord Protector을 섭정(攝政)과 호국경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왕이 아닌 절대권력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섭정은 왕을 옆에 둔 절대권력자이고, 호국경은 왕이 없는 기간에 절대권력자이다.

1650년 스코틀랜드 교회는 급진파와 대항파로 분열했다. 스튜어트 왕가와 타협을 거부한 항의파(Remonstrants) 혹은 저항파(Protesters)와 찰스 2세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맞아들일 것을 찬성한 결의파(General Resoulutioners)라는 약정파 가있다. 비록 분열했다하더라도 그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입장은 확고했다. 항의파는 사무엘 러더포드, 제임스 거스리, 아치발드 존슨이었고, 결의파는 로버트 더글러스, 로버트 베일리였다. 항의파는 찰스 2세가 엄숙 동맹과 언약에 서명했지만 서약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의파는 서약에 서명한 왕을 존중했다. 즉 두 진영은 모두 엄숙 동맹과 언약,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존중은 일치했다. 그러나 왕의 태도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달랐고, 시대의 격변 때문에 두 진영으로 분열했다. 즉 신학 사상은 동일했지만, 시대를 읽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분리된 한 예이다.

참고로 크롬웰은 스코틀랜드를 공략하기 위해서 스코틀랜드 명문 4 대학(글래스고, 애버딘, 에딘버러, 새인트 앤드류)을 장악했다. 스코틀랜드 대학은 잉글랜드 대학과 견줄 때에 부족함이 없었다. 크롬웰은 스코틀랜드 대학에 독립파의 주요 인물들을 정착시켜 교육계를 장악했다(마금영, 2000, 104-106). 크롬웰은 1654년 의회를 소집해서 80가지가 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그 법들은 청교도주의 교회 확립, 종교적 관용, 교육 진흥, 통치의 분권화 등이었다. 유대인들의 입국을 허가했고, 식민지를 확장시켰다. 크롬웰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영향이다. 칼라일은 크롬웰을 전제주의를 종료시킨 헌정개혁가로 평가한 것이다(마금영, 2000, 107-108). 칼라일은 『영웅 숭배론』(1841, 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에서 윌리엄 세익스피어, 존 낙스, 마틴 루터, 올리버 크롬웰, 루소, 나폴레옹 등을 인류의 영웅으로 꼽았다.

1660년 찰스 2세로 왕정이 복고된 이후에는 감독제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이 없었고 1661년 무효법(Act Rescissory)에 의해 장기의회와 엄숙 동맹과 언약,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작성된 모든 것이 무효화 되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3년 8월 17일에 체결된 “엄숙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근거해서 잉글랜드 의회가 1643년 9월 15일부터 1646년 12월 4일까지 개회시킨 종교회의이다. 1646년에 작성된 문서를 스코틀랜드 총회는 1647년 8월 27일 교단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대체한 신앙고백서로 채택했다. 1647년 가을 터크니가 대소요리문답 초안을 작성했고, 1648년 6월 20일 일부 수정을 거쳐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1648년 7월 20일 총회가 대요리문답을 승인했다. 그리고 7월 28일 소요리 문답을 채택했으며, 9월 15일 의회가 최종 승인했다. 1649년 8월 총회는 이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서, 그리고 예배모범과 정치편람을 채택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독립파로 결정권자인 크롬웰이 수용하지 않았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1648년 크롬웰과 관계를 시작하여, 1649년부터 크롬웰 군대의 종군목사로 사역했다.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에도 오웬은 참가했다. 오웬은 1658년에 크롬웰이 죽자 1659년에 사보이 선언을 작성했다. 현재 사보이 선언을 표준문서로 사용하는 교회는 없다. 그리고 당시 크롬웰과 오웬이 주도했던 독립파 교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로파 교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로 채택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국민 언약(National Covenant, 1638년), 엄숙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1643년)과 관련되어 있다. 1659년 독립파는 자체로 사보이선언(The Savoy Declaration)을 작성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정하려 했다는 의견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폐기한 것이다.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 예레미야 버로우(Jeremiah Burroughs, 1600-1646), 필립 나이(Philip Nye, 1595-1672), 시드락 심슨(Sydrach Simpson, 1600-1655), 윌리엄 브릿지(William Bridge, 1600-1670)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에 참여했고, 사보이 선언을 주도한 존 오웬과 분리파 회중주의 존 코튼(John Cotton, 1585-1652)은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세 왕국에 정착되지 못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왕좌에 앉은 찰스 2세 그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국교회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 스코틀랜드 언약도에 대한 무참한 박해를 진행했다. 이 기간을 Killing Times이라고 한다. 그 때에 독립파가 저항한 모습은 볼 수 없고 그 뒤에 독립파의 주도적인 주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1688년 명예혁명이 지난 뒤 1689년 2차 런던신앙고백서(The Second London Confession of Faith, 1차 1644년 1차 런던신앙고백서 작성)를 작성한 특수침례파(Particular Baptists)가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참고논문>

서요한, 『언약사상사』(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이승영, 『17세기 영국의 수평파 운동』(서울: 민연, 2001).

Martyn Calvin Cowan, John Owen and the Civil War Apocalypse(NY: Routledge, 2018)

마금영,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영국의 왕조”, 건국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0년.

김중락, “퓨리턴의 꿈과 언약국가”, 『영국연구』, 23권, 2010년.

김중락, “에라스투스주의 (Erastianism) 논쟁과 영국혁명 - The British Revolution”, 『서양사론』, 69권, 2001년.

안상혁, “정교분리의 관점에서 조명한 사무엘 루더포드 -토머스 후커의 17세기 교회론 (교회 정부) 논쟁”, 『한국개혁신학』, 47권, 2015년.

[참고]

1. 에라스투스주의(Erastianism)는 스위스 의사며 신학자 토마스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1583)에게서 나온 사상이다. 사상의 핵심은 혼란한 교회를 국가가 주도해서 안정시킬 수 있다는 개념이다. 라은성 박사는 감독정치(교황정치, 영국국교회)인데, 두 신학사상을 고올주의(Gallicanism)와 교황지상주의(Ultramontanism)로 분류했다. 고올주의는 다시금 셋으로 나뉘는데, 에라스투스주의(Erastianism), 페부르니우스주의(Febronianism, 주교주의와 국가주의 결합), 요셉주의(Josephinism, 오스트리아의 요셉2세가 제언한 것으로, 교회 세움과 성직자 교육을 국가가 담당하는 형태)이다. 고올주의에서 교황지상주의가 발생했고, 그것에 개혁파로 들어온 것이 에라스투스주의이다. 고올주의는 프랑스에서 발생한 국가교회의 형태로 교회재산, 교회법정, 성직 임명에서 교황의 권리를 제거했지만 왕을 그 자리에 세웠다.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1685)으로 낭트칙령을 폐기하고, 고올주의에 입각해서 위그노 교회와 학교에 철거명령을 내리고 고올주의에 벗어난 모든 의식과 신학을 금지시켰다.

2. 크롬웰에 대한 최철희(성공회 역사가)는 찰스 1세는 죽음으로 민중의 지지를 회복했고, 크롬웰은 죽음으로 쇠퇴했다고 대조를 제시했다. 크롬웰이 1658년에 죽은 뒤에 그의 아들이 계승했지만, 1660년 찰스 1세의 아들로 왕직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주교제도, 기도서, 국교회주의 성직자 1,000명 등도 모두 복구되었다(최철희, 『세계성공회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140-141). 영국 국교회에서는 찰스 1세가 크롬웰에 맞서 사회와 교회를 지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K. D. Holfelder, Factionalism in the Kirk during the Cromwellian Invasion and Occupation of Scotland, 1650 to 1660: The Protester-Resolutioner Controversy(Edinburgh: Univ of Edinburgh, 1998)

칼빈은 에드워드 6세에게 이사야서 주석을 헌정했고, 당시 섭정이었던 서머셋 공작에게 디모데전서 주석을 헌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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