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의 여전한 인기에 대하여

영화 <기생충>, 이제 흥행 막바지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상당한 관객들이 관람하고 있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 기생충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미 영화를 본 어떤 관객은 공부를 많이 하고 볼 영화라고 했다. 그만큼 영화를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래도 많은 관객이 관람했다는 것은 관객의 수준을 볼 수 있다. 

기생(寄生)과 공생(共生)의 차이는 무엇일까? 공생의 관계와 기생의 관계는 전혀 다르다. 공생은 공생 관계이고, 기생은 숙주와 관계이다. 어떤 사람은 숙주는 기생없이 살 수 있다고 하지만, 실재로 숙주는 기생 없이 살 수 없다. 그것은 영화 기생충에서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숙주가 기생충을 죽일 수 있지만, 기생충은 숙주를 죽일 수 있다. 기생충이 숙주를 죽이면 다른 숙주를 찾아 옮길 수 있다. 영화 “기생충”은 숙주보다 기생충이 더 생존력이 강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영화 기생충은 두 종류의 기생충을 보여 준다. 그러나 기생충의 공통점은 불법과 거짓으로 공간을 점유하여, 숙주의 양분을 빨아 먹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은 몸 안에 있는 기생충이 아니라 몸 밖에 있는 바퀴벌레이다. 그래서 주인과 빛을 만나면 빛의 속도로 숨고 사라진다. 어둔 거실에서 주인공의 검은 발바닥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의 어둠에 있는 발바닥이 바퀴벌레를 연상시켰다. 생각하는 기생충, 생각하는 바퀴벌레는 생존을 위한 기생충과 바퀴벌레와 동일한 행동을 한다. 다른 것은 숙주와 대면할 때에는 온화한 모습이지만, 숙주와 분리되면 본래의 모습이 나온다.

숙주는 어떠한가? 숙주는 어떻게 숙주가 되었을까? 영화를 보면 이해할 수 없다. 화려하지만 섬세함이 없는 어설픈 모습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생충에게 어떤 탁월한 능력이 있고, 숙주의 능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숙주라는 이유로 기생충을 부리며 먹이며 공존했다.

기생충과 숙주의 만남은 탐욕에 의한 것이었다. 숙주는 선(線)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신뢰는 매개를 통해서 진행하는 것인데, 탐욕스러운 매개에 의해서 들어온 더 탐욕스러운 매개로 신뢰가 구축되었다. 매개의 원리는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이다. 매개를 통해서 진행하는 것에 신뢰를 두고, 선을 넘지 않으면 상관없는 것이 숙주의 세계이다. 무능한 숙주와 부패한 매개로 인해서 숙주는 집을 잃게 되고, 기생충이 그 집 심연에 생존한다. 기생충과 기생충은 공존할 수 없지만, 기생충과 숙주는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첮러한 사회이다. 기생충과 기생충이 공생할 수 없고, 기생충과 숙주도 공생할 수 없는 것도 슬픈 현실이다.

영화 기생충은 인간의 탐욕과 무능을 그대로 폭로하는 내용이다. 영황에서는 기생충이 숙주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잠시 숙주처럼 되었다가 바퀴벌레 그리고 기생충 소굴(?)로 전락한다. 홍수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과장시킨 것은 비참함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영화 제목을 "데칼코마니"라고 하려고 했다고 한다. 기생충과 숙주가 데칼코마니라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절대로 한쪽만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기생충"이라는 제목이 더 자극적인 제목으로 성공한 작업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돌, 선(線), 냄세, 물(비), 빛 등 다양한 소재로 의미를 연계시켰다. 

영화의 한계는 생명력이 있는 대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현실을 폭로하는 기능 자체가 영화의 멋진 기능일 수 있다. 대안은 스스로, 학문하는 사람이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무책임한 폭로가 어떤 유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가 아니라, 부자와 빈자의 공생 관계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위로의 욕망이 아닌, 아래로의 폐쇄가 아닌 공생 관계를 위해 기생충과 숙주는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과도하게 선과 신뢰를 주장하지 않아야 하고, 거짓과 불법을 하지 않아야 한다. 기생충이 자기 능력 범위에서 최선을 다한 인생이라면, 안전선 안에 있는 숙주보다 더 좋은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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