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본 오끼나와 소재 슈리성이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몇 해 전 방문했던 곳이라 기분이 아련합니다. 그곳은 류큐왕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을 엿 볼 수 있는 세계문화유산 등록지입니다. 그곳이 건립된 지 500년이 되었다는 소식에 루터의 종교개혁 시점이 어느 때였는지 동서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502년 전 1517년 오늘 시작되었습니다. 그 계기는 로마교회의 전횡에 항거한 『95개조 반박문(Dusputatio)』을 라틴어로 비텐베르크 대학 궁정 교회(Schloss Kirche) 정문에 게제하므로 촉발되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게제된 반항문 제목은 ‘면죄부 능력 천명에대한 반박’(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이었습니다. 

「95개조 반박문」은 교황 레오 10세(Leo X)의 성(聖) 베드로 성당 건축비 충당과 막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 von Mainz)의 사욕이 빚은 ‘완전 면죄부’ 남발에 대한 토론을 요구하는 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루터는 7세기부터 통용되어 오던 세속적 처벌의 ‘사면’(indulgentia)이 교회와 성직자의 축재(蓄財)를 위해 남용됨으로써 ‘면죄부(免罪符)’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하고, ‘고백성사’(penitentia sacramentali)와 같은 교회의 권위를 통한 참회가 아니라 진정한 영적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저는 오늘 종교개혁 502주년을 맞아 저 자신과 제가 속한 한국교회를 향하여 95개조 반박문 대신 세 가지 질문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살피고자 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언약에서 이탈한 아담을 향하여,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그의 위치를 물었습니다. 우리도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시공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질문에 답할 때가 이미 이르렀습니다.

그 세 가지 질문은 주일학생 정도면 이해할 수 있는 예수님의 광야시험 이야기입니다(마4:1-11 ).

이 이야기는 종교개혁으로부터 362년이 지난 1879년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또예프스키에 의하여 소설 형식으로 소개됩니다.

그의 마지막 장편이자 명저인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제2부 제5편 5장에 '대심문관 이야기'로 소개됩니다. 내용은 16세기의 부패한 카톨릭을 통하여 당시의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이야기는 16세기 스페인 세빌리아 성당 광장을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이교도들이 국왕을 비롯한 신하, 기사, 추기경, 그리고 아름다운 궁녀와 세빌리아의 전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심문관인 추기경의 지휘 하에 한꺼번에 화형에 처해진 이튿날, 그리스도가 눈에 띄지 않게 살그머니 나타나심으로 비롯됩니다.

현현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군중 속의 한 장님이 '주여, 나를 고쳐 주옵소서!'라고 외치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일곱 살 난 소녀의 어머니가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만약에 당신이 예수님이시라면 우리 아이를 다시 살려 주시옵소서 '라고 외치자, 주님의 '탈리타 쿰'의 선포로 관속에서 일어납니다.

군중 사이에서 대혼란과 환성과 통곡소리가 일어났을 때, 광장을 지나가고 있던 대심문관 추기경이 이를 목격합니다. 그는 모든 과정을 본 후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호위병에게 그리스도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밤에 홀로 예수님께 찾아가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을 교황에게 넘겨주지 않았소. 제발 나타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소. 당신이 가르쳐 준 기적(빵)과 신비와 권위(명예)에 대한 거부의 모범은 세상 교회를 위하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소. 그래서 우리는 지혜로운 악마의 방법에 순종하여 이렇게 큰 교회를 세워 놓았소.

나는 단언하지만, 인간이란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고 비열하게 만들어져 있단 말이오! 이것이 인간을 자기 자신보다 더욱 사랑한 당신이 해야 할 일이었을까요?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제 우리를 방해하러 나타났소? 

우리는 당신과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악마와 손을 잡고 있소. 이것이 우리의 비밀이요!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신을 버리고 그와 손을 잡아 왔소. 벌써 8세기 전의 일이요. 옛날에 당신이 분연히 거부한 것을, 8세기 전에 그로부터 받았던 거요.

대심문관의 거친 질타에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신 후, 아흔이나 되어 핏기 잃은 대심문관의 입술에 조용히 입맞춤으로 모든 질문에 응하십니다.

노인은 부르르 몸을 떨면서 죄수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자, 어서 나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시오... 두 번 다시 오지 마시오... 절대로!' 죄수된 예수님은 '도시의 어두운 광장'으로 향하셨습니다.

도스또예프시키는 예수님이 사탄으로부터 거절하셨던 빵과 기적과 명예를 그대로 수용한 16세기 스페인 카톨릭 종교를 루터와 같이 부패한 종교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으로부터 362년이 지나 그가 속한 러시아 정교회를 루터와 같은 눈으로 고발합니다.

저도 502(1517)년 전 루터와 240(1879)년 전 도스또예프스키가 바라 본 같은 말씀과 같은 눈으로 저와 제가 속한 한국교회를 캐논(canon)으로 서 있는 위치를 가늠해 봅니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창3:9 )"

말씀을 예리한 칼날처럼 단도직입적으로 적용한 예레미야 등 선지자들의 선례를 따라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신 광야 가르침인 부와 권위와 명예를 거절하지 못한 교회는 '컬트'(광신적인 종교집단)는 될 수 있어도, 16세기 세빌리아 성당처럼 예수님의 교회는 될 수 없습니다.

검증결과 저 자신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 심호흡 중임을 발견하습니다. 더불어 매우 거친 심호흡을 하는 자로서 세 가지 질문에 완연한 교회와 목자가 계신지 궁금함이 절로 생깁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광나루로 이주 하기 전 장로회신학대학이 있었던 남산 기슭에서.

남산자락, 베드로 마을(두터운 바위 마을, 厚岩洞), 양선교회(Goodness Church), 이맹영목사.

[ 해당 본문 ] 
마태복음 4장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베른하르트 로제의 <루터 입문>

<루터 입문>과 역자이신 박일영 전 루터 대학 총장님의 특강 정리

루터대학교 전 총장이셨고 루터 아카데미 원장으로 계시는 박일영교수가 번역한 복있는 사람 출판사 베른하르트 로제의 <루터 입문>과 그의 특강을 참고로 복습하는 마음으로 정리해 보았다. 

루터와 중세신학자들과의 차이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거스틴을 넘어서서 "오직 성경"에 근거한 새로운 구원론적 틀을 만든 것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돌파'(breakthrough)인 '칭의론'이다.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로 관점을 전환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신학자들의 사고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바꾸었다.

베른하르트 로제의 <루터 입문> 요지

어거스틴의 신플라톤주의 극복, 오직성경! 종교개혁의 돌파론, 코페루니쿠스적 전환 "인간이 무엇을 해야하나?"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구원사역과 복음의 중요성).

베른하르트 로제의 <루터 입문> 내용

루터의 칭의론은 복음의 회복이라는 과제를 오직 성경 말씀에 근거해 주창하였다. 동시에 그 자체를 구원론적으로 조명하는 새로운 신학적 관점의 틀을 제시하였다.

루터는 독창적인 신학을 주창하지 않았고, 고대 교회의 참 복음이 중세 교회를 통해 왜곡되었다고 판단하고 고대 교회의 복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루터는 동서교회가 함께 참여한 1차-7차 공의회만 인정하고, 중세 가톨릭 시대의 공의회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라틴어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고 히브리 구약 성경과 희랍어 신약 성경을 의존하였다. 중세 말기 오컴의 유명론과 어거스틴과 독일 특유의 영성인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루터는 위대한 사상가도 성인도 아니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개혁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의 의도는 독창적인 신학을 세우는 것도,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도 아니었다. 죄론과 은혜론의 논쟁인 펠라기우스 논쟁, 교회론의 논쟁인 도나투스 논쟁, 어거스틴에 와서 칭의의 논의 즉 의인의 의화가 아닌 죄인의 칭의 논의 등을 통하여 그의 신학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였다. 

그의 신학은 목회자, 성서학자, 시대적인 통찰자로서 소명에 충실한 사람으로서의 결과물이었다. 즉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과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위한 "언약의 전사"이자 "성언운반일념"의 설교자요, 목회자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논쟁 준비에 철저하여 중세 교부 신학 등에 철저한 신학자였다.

그는 평생 '안페히퉁(영적 불안)'에 시달렸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믿음을 강조하였고, 실존주의자로서 개인의 깊은 경건을 형성하였다.

루터는 63세의 생을 마감하기까지 우울증 불면증 귓병 변비 설사 등으로 시달렸지만 당시 변증론을 역설적으로 쓰지 않으면 안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과 소명의식에서 8만 페이지의 책을 저술하였다.

오늘날 찾아야 될 루터의 역사적 의미는 '인간이란 오직 하나님에게만 종속되었으므로, 어떤 인위적인 것에도 메이지 않는다'는 "자유의 정신(갈5:1)"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루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에 못지 않게 마귀를 만나며 살았다는 그의 고백은 오직 철학과 이성에 붙잡힌 신학자가 아니라 이를 포함하는 오직 말씀에 붇잡힌 신학자로서 미가와 같이 천상회의를 예시(豫示)하는 통찰력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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