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5) 은사(恩賜)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가슴으로 읽는 동시(童詩) 가운데 ‘고슴도치’가 있다. ‘선생님, 저는 가시 때문에/ 풍선 불기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엉덩이로 풍선 터트리기는 니가 최고잖아/ 그러면 됐어.’ 무능해 재주가 전혀 없이 보이는 사람도 뜯어보면 한 가지 끼나 장기는 있다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하나의 재능이 있음을 비유한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는 속담이 있다. 재주 또는 재능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남을 위해 굼벵이가 구르지 않고 남을 위해 고슴도치가 가시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인 은사의 방향은 자신이 아니라 남이다. 공동체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하늘이 주신 은사다.

군대 경험이 있는 자는 군에서 용서 받지 못한 자하며 떠오르는 말이 있을 것이다.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 받을 수 있어도 배식에 실패한 군인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다.” 혹자는 “기상에 둔감한 지휘관, 배식에 실패한 취사병” 두 사람을 떠 올리기도 한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꿀맛 같은 식사를 기대하며 장시간 식판을 들고 기다린 훈련병들에게 밥 국 반찬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동이 나 있는 것을 보고 상상해 보라. 취사장에서는 먼저 먹으려고 하고 많이 먹으려고 서로 경쟁한다. 먼저 배식 받는 사람이 많이 퍼 간다. 성령이 분배하는 은사에는 이런 불상사가 없다. 성령 하나님이 은사를 분배할 때 실수하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부족함이 없도록 주신다. 가장 효과적으로 분배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1. 은사의 다양하게 분배하시는 성령

‘은사들’에 해당하는 ‘carivsmata’(카리스마타)는 베드로전서 4:10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울이 사용한 말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 즉 다양하나 한 성령에 의해 분배되어 진다. ‘성령은 같고’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다(고전 8:4-6). 오성춘의 책 <은사와 목회>(장신대출판부, 1997)에서 은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은사임을 깨달을 때 그것이 나의 교만이나 욕망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 바울은 로마서 12:6에서 은사는 하나님의 우리 각 사람에게 다양하게 주신 것이며 이 사실을 깨닫는 자는 은사를 주신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고 자기중심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은사를 사용하게 되고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일괄한다.

바울은 로마서 5:15과 6:23에서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구속이나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교회에서 특별한 섬김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성령의 은사들이다(12:28 이하).

한글성경에서는 ‘은사’가 단수지만 헬라어성경은 복수 형태로 ‘카리스마톤’, 즉 ‘은사들’이다. 은사들의 분배의 공통적인 근원이 한 분 성령이시다. 달란트는 재능으로 번역한다. 청년 멘토 이영표의 책 ‘생각이 내가 된다’(두란노, 2018)에서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재능을 주셨다. 그런데 그 재능을 노력과 인내, 그리고 시간으로만 찾을 수 있게 하셨다.”고 말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다. ‘여러 가지’에 해당하는 ‘디아이레시스’는 구별이라는 의미보다 할당 또는 분배(distributing)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분배하다, 나누다라는 동사 ‘디아이레오’에서 유래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를 문자적으로 읽으면 ‘다양한 은사를 분배하다’이다. 주체는 성령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분배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성령으로부터 각각 받은 은사를 통하여 도덕적인 신령한 삶 또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은사는 수행하는 혹은 섬기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비교. 고전 14:4). 만약 자신의 발전과 역량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면 재능 또는 재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은사는 개인적으로 받지만 활용은 자신이 아닌 공동체의 유익, 즉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목적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언제나 다른 신자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영적 은사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발전과 유익을 사용하는 것은 영적인 은사라기보다 재능이고 재주가 맞을 것이다.

여기서 ‘은사들’이라고 복수 명사로 쓰여진 이유는 은사를 나눠 주시는 성령의 한 역사를 가리키지 않고, 이 은사를 여러 가지로 나누어 주심을 가리킨다. 고전 12:4-7절에서 은사도 다양하고(4절), 섬김의 방법도 다양하고(5절), 그리고 은사를 따른 활동도 다양하다(6절).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모두 동일한 성령(4절), 동일한 예수님(5절), 그리고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바울이 전달하는 사상은, 은사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모든 은사는 한 성령에 의해서 공급되어진다. 성령이 나누어주시는 것이 은사요 인간의 쟁취에 의해 획득되어 지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은사의 다양성을 삼위 하나님의 연합에 기초한다. 영화 아마데우스(Amadeus)는 '신에게 사랑받는 자'라는 뜻으로 궁중음악가로 인정받던 셀리에리(Salieri)는 신인이며 괴짜인 모차르트(Mozart)의 천재성을 처음에는 부러워하지만 점점 질투하게 되고 시기는 증오로, 증오는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발전한다.

 

2. 은사 vs 재능

고린도전서 7장의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라고 수식하듯 일반적인 은사를 말하는가 아니면 바울처럼 하나님께 받은 은사 또는 더 큰 은사에 해당하는 예언처럼 초대교회에 추신 특이한 은사를 의미하는가.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는 말씀처럼 보편적인 의미로 취급하는 것이 합당하다. 한편으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의 더 큰 은사인 예언이나 방언 등의 특별한 은사들을 마음에 두고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텐트를 잘 만드는 기술을 은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올림피아에 있는 제우스신의 신전에서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올림픽과 범 그리스적 3개 경기 중의 하나인 고린도에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스미아 제전(Isthmian Games)’이다. 이스트미아 경기는 서기전 580년경부터 시작됐고 고린도에서 동쪽으로 9㎞ 떨어진 이스트미아에서 개최됐다. 이 경기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소년 신 팔라이몬에게 헌정하는 축제로 열렸다. 고대올림픽에서는 오직 1명에게만 올리브 관을 씌워 주었다. 고대올림픽의 중요한 정신은 바로 ‘아곤’ 즉 ‘경쟁’이다. 아곤의 근원인 ‘아레테’ 즉 월등함(excellence)을 은사라고 하지 않는다. 즉, 기술이나 재능이나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다. 성령이 주시는 은사가 아니기에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사용하지 않는다.

영적인 은사와 재능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재능은 무엇인가. 무슨 일을 잘한다고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일을 즐겁게 잘 하는가가 관건이다. 결과가 좋으면 더할 나위 없이 재능이 있는 것이다. 물론 타고난 재능은 없더라도, 끈기와 열정을 가지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선다면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 그렇다고 재능이 있고 천재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은 미국 펜실베니아대 앤젤라 Duckworth 교수의 책 ‘GRIT’에서 말한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머리는 좋은 데 노력을 안 하다고 푸념을 한다. 부모의 관점에서 자식이 재능이 있다고 여긴다. 부모의 기대에 부합하여 열심히 노력하면 천재가 되고 영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정말 자녀에게 부모가 생각하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재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재능이 있어야 한다. 성악의 재능이 있는지, 그림에 소질이 있는지, 글쓰기에 재주가 있는지 알려면 그 분야의 고수를 찾아가야 한다. 고수의 눈에는 하수가 빤히 내려다보인다. 아마추어 부모가 얼치기 재주와 재능을 혼돈하여 자식으로 제 명을 못채우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정홍의 동시 가운데 ‘텃밭에서’는 “고구마는 달게 땅콩은 고소하게 고추는 맵게”로 시작하여 “똑같은 땅에서 똑같은 햇볕 아래 똑같이 자랐는데 똑같은 것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산골 마을의 사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 똑같은 주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섬김인데 각양각색이다. 고구마처럼 달게 쓰임 받는 자도 있고 땅콩처럼 고소하게 섬기고 때로는 고추처럼 맵게 사용되는 자도 있지 않은가.

여기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또 하나는 크게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은 데 잘 하는 일이 있다. 어느 것이 은사며 또한 재능이겠는가. 성경에서 은사는 오직 성령이 주시는 것이고 노력과 쟁취가 아닌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타고난 것은 은사가 아니라 천부적 재능이라 해야 한다. 사실 재능이 있는 사람은 하는 일이 일단 재미있다. 그리고 잘 한다. 결과적으로 보람과 함께 열매가 있고 소득이 창출된다. 만약 음악적인 재능 또는 운동의 재능이 있다고 믿고 노력을 게을리 하면 어떻게 될까. 녹슬고 만다. 재능의 한계다. 재능이나 재주가 있는 사람은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허나 자신이 잘 하는 일은 그렇게 비지땀을 흘리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잘 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들이 종종 있다. 그런데 재능이 없는 자는 늘 잘하지 못하는 일을 잘 하려고 하니,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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