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왕국의 눈물 오키나와

기독교대한감리회 중앙연회 부흥단의 2019년도 임원수련회는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에서 진행되었다. 중앙연회 부흥단(단장 조현태 목사, 상용교회)은 임원들의 선교 열정 고취와 수양을 위해서 매해 현지 선교사와 연계를 한 선교지 탐방을 진행해오고 있다.

오랜 기도와 계획 끝에 결정된 일본 오키나와 선교지 탐방이었지만, 근래 악화된 한일 관계나 일본 제품 불매운동 등은 임원수련회를 떠나는 우리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월요일 오후 15명의 부흥단 임원들은 오키나와행 항공기에 몸을 싣고 오키나와로 향했다. 두 시간 여의 비행시간은 기대와 설렘의 거리만큼 짧게 다가왔다. 나하 공항에 도착하자 이정선 선교사·민은아 선교사(사이타마 그리스도교회, 성남 일본선교교회 소속)가 25인승 미니버스를 직접 몰고 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공항을 나서자 대한민국보다 한 달은 빠를 듯 한 오키나와 무더운 공기가 턱밑을 채웠다.

이정선 선교사·민은아 선교사(사이타마 그리스도교회, 성남 일본선교교회 소속)

오키나와는 일본의 변방이다. 일단 거리상으로도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보다는 대만에 더 가깝다.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일본 본토에서 출발한 선교사 내외의 비행시간이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부흥단 일행보다 더 오래 걸릴 정도다. 하지만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의 마음의 거리는 그 보다 훨씬 더 멀어 보였다.

공항에 도착한 부흥단 일행은 슈리성 인근 류큐사보 아시비우나(琉球茶房 あしびうなぁ) 가정식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아시비우나 식당은 류큐의 오랜 민가를 개조해서 식당으로 꾸몄기 때문에 류큐 지방의 전통 가옥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일본 음식은 대체로 달고 짜다. 하지만 아시비우나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식당이어서 그런지 우리 입맛에도 맞았고, 한화로 만 원 정도로 가격도 적당했다. 나는 돈가스와 우동이 세트로 나오는 음식을 주문했다. 어디서든 특별히 음식을 고를 수 없을 때 돈가스는 정답이다.

아시비우나 식당의 두 가지 큰 특징은 오키나와 지역의 정원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과 중국의 전통 악기인 삼현(三絃)이 오키나와에 와서 변형된 샤미센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오키나와 방언으로 샤미센을 연주하는 여인의 노랫말은 선교사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식사를 다 마친 우리 일행을 오랫동안 자리에 머물게 할 만큼 애절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류큐왕국의 아리랑 같은 느낌이었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근처 슈리성을 방문했다. 저녁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입장이 허용된 시간이었다. 나하 시내에 있는 슈리성은 사실 450년 류큐왕국의 수도 역할을 한 성이다. 오래전부터 중국과 조공관계를 이어온 성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흔적보다 중국의 흔적이 더 많다.

슈리성 문은 우리나라의 광화문처럼 인식되고 있다. 문 입구에는 “류큐왕국은 예절을 중시하는 나라이다’라는 의미의 ‘守禮之邦(수례지방)’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그것이 바로 오키나와의 오랜 과거였다.

어둔 저녁에 슈리성 정상에서 바로 본 오키나와 도시는 마치 3개의 제국의 교집합처럼 그 어둔 중심에 서 있는 듯했다. 중국과 교역을 하며 조공도 올렸지만 그래도 단독 국가로 서 있던 류큐왕국과 1875년 메이지유신 이후 개화기를 거치며 일본에 강제로 복속(服屬)된 이후 2차 세계대전이라는 태풍의 길목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던 시대, 그리고 미(美) 군정 아래 미군기지로 오늘까지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곳이 바로 오키나와이다. 오키나와의 이런 역사적인 특징은 일본 사람들에게도 차별과 외면을 받는 현재의 배경이다.

일본 본토 사람들이 생각하는 오키나와에 대한 인식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극명히 드러났다. 1945년 4월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하고자 총력을 다 쏟아부었다. 실질적으로는 제주도보다 면적이 작은 오키나와 본섬을 최강국 미국이 점령하고자 힘을 썼지만, 무려 3개월에 걸친 저항이 있었다. 그때 일본은 오키나와의 여학생들까지 총동원한 소위 애국전쟁에 그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3개월 동안 저항은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1/3인 15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더 비극적인 것은 미군에 의해서 죽은 숫자보다 일본에 의해서 죽거나 자결을 강요당한 숫자가 더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은 조선과 대만, 오키나와의 여성을 상대로 위안부 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일본 정부는 집단자결을 강행한 일이나 위안부 사건에 대해서 철저히 숨기고 외면하면서 강요된 위안부는 없었고, 오키나와전에서 숨진 130명의 여고생을 ‘히메유리 학도병’으로 미화시키며, 미국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말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오키나와 해안에 상륙하는 미군

이렇게 슈리성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대부분이 파괴되었을 정도로 전쟁의 상흔이 깊은 성이다.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 포탄 자국이나, 미군기지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일본 특유의 복원력으로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하며 과거와 현재를 담아냈다. 그러나 오키나와 원주민들의 깊은 내면까지 복원되지는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인들에게는 철저히 외톨이로 살아간다. 일본 본토인들의 오키나와에 대한 인식은 집단 따돌림(이지매)만큼 무섭다. 그들은 지금도 화려했던 류큐 제국을 꿈꾸며 눈물 흘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픔이 있는 도시 오키나와. 그곳을 부흥단 일행이 찾아간 것이다. 물론 오키나와의 눈물을 우리가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일본인이면서도 이방인인 그들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다가섬의 첫걸음이 아닌가 생각했다.

1945년 6월 오티나와전투(沖縄戦)에서 20여만 명이 사망한 것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평화공원으로 공원 내 ‘평화의 초석’(平和の礎)에 새겨진 명단은 오키나와 14만 9456명, 오키나와 이외 일본 본토 7만 7426명, 미국 1만 4009명, 영국 62명, 대만 34명, 한국 380명, 북한 82명 등 24만 1468명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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