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가 말하는 “성공” (3)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성공신화(成功神話)를 초월한 성공실화(成功實話)

당신에게 묻노니 당신에게 인생 최고의 날은 언제이며 당신이 이룬 최고의 성공은 무엇인가? 생각지 말고 답해보라! 당신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호흡처럼 흘러나오는 당신의 답변을 듣고 싶다. 큰 성공이 아니어도 좋다. 그것이 설혹 실패라 할지라도 부끄럽지 않은 실패라면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검은 성공의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 앞에서, 역사와 운명 앞에서 거짓 없이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그대만의 성공 스토리를 말해보라! 사람들은 너무 세속적인 성공 이야기에 굶주려 있다. 세속을 살아가면서 세속적 기준이 아닌 삶의 경험을 성공이라 부를 수 있음은 우리가 세속적인 영광과 명성을 초월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세속적 가치의 성공은 바닷물처럼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더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갈증을 일으키지 않는, 있는 갈증마저 해소시켜주는 그런 성공이다.

세상이 듣기 원하는 성공 사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당신 영혼에 간직된 그 이야기를 들려 달라! 오색찬란하지 않아도 좋다. 칠색 무지갯빛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흑백이면 어떻고 아예 단색이라 해도 괜찮다. 영혼의 계절을 지내온 자로서 영혼이 울고 웃는 그 소리, 하나님을 만난 영혼의 진솔한 고백을 듣고 싶다. 꾸밈도 없이, 거친 모습 그대로의 호흡 같은 신음소리를 듣고 싶다. 고운 모양이 없어도 좋다. 풍채가 없어도 그만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접한 순간의 바로 그 탄성을 듣고 싶다. 너무 맛깔스러움과 빛깔을 강조하다보니 성공 본연의 신비감이 퇴색되어버렸다. 한 가지 틀에서 양산되는 플라스틱 제품처럼 규격화되고 상품화된 성공 신드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성공이라면 지상에서 영원한 것이란 결코 없다. 우리가 원하고 지향하는 성공은 그런 류가 아니다. 당신은 이제 나와 더불어 색다른 성공담을 나누어보지 않겠는가? 성공신화가 아니라 성공실화를 말이다. 현세와 내세를 잇는 성공실화라면 듣고 싶은 이야기다.

 

목회성공신상(牧會成功神像)을 깨뜨리라

조국교회 곳곳에 안치된 목회 성공의 신상을 깨뜨려야 한다. 젊은 사역자들의 마음에 조각된 금 신상 같은 성공신화의 스케치를 지워야 한다. 성공이란 개념을 무시한 채 결단코 한 번이라도 ‘난 성공을 추구하며 목회한 적이 없노라!’며 강력 반박할 이도 있을 것이다. 성공을 꼭 최고 정상의 자리로만 생각지 말라! 규모는 작아도 지금보다 여러 면에서 나은 상태를 정말 동경한 적이 한 번도 없는가? 변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면서 목회 현실을 탈피해보려 한 적이 정말 없는가? 성공은 크고 작은 규모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 만족 못하는 마음과 의식의 문제다. 내적 성숙과 달리 외적 성장에 마음을 뺏긴 적이 있었으리라! 그것이 죄는 아니니까! 허깨비 같은 성장주의는 보톡스 주사처럼 의욕의 노화를 방지하지만 부작용이 더 크다. 상한 통조림에서 생긴 독성 바이러스를 정제하여 만든 보톡스는 마치 상한 성장신학에서 파생된 거대물량주의를 정제한 대형교회 신드롬과 다를 바 없다. 기독교를 상품화하고 교회를 기업화하는 특이 현상을 뻔히 보면서도 누구 하나 제동을 걸려 하지 않는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런 성장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자신 안에도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펼치고 교회가 세워졌던 역사적 배경을 찬찬히 훑어보라! 그들이 주안점을 둔 것이 수의 증가였던가? 교회 건축이었던가? 교회가 크면 그만큼 구원하는 영혼의 숫자도 자연 증가할 것이 아니냐며 반문하는 이들도 있다. 그럴 듯한 변명에 불과한 것은 구원 얻을 자가 상상 외로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순도 면에서는 오히려 작은 교회가 더욱 보람차다. 원시 교회라 일컬어지는 초대교회의 주 된 타깃은 영혼 구원이었다. 말씀 선포의 핵심도 여기에 있었고 기도의 내용도 이 주위를 맴돌았다. 모이는 장소가 강변이든 가정집이든 그들이 가치를 둔 것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였다. 시간의 길고 짧음이 흉이 되지 않았고 장소의 누추함이나 불편함에 마음 빼앗기지 않았다. 주님의 임재 하나면 족했다. 성도의 사귐이면 모자람이 없었다. 하나님을 찬양함에 기쁨이 넘쳤고 기도는 열정과 확신으로 팽팽했다. 그런 모습은 이전 시대의 것이요 자신도 그런 적이 있었노라며 무덤덤하게 대하는 이들을 보면 왠지 착잡한 심정이다. 이것이 시대착오적이라면 차라리 원시인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성공의 열매보다 소중한 것은 사람

성급히 배우려 하지 말고 찬찬히 배우라! 늦게 배운 걸음이 오래 간다. 사람이 직립 보행을 하기까지 기고 구르고 뒤뚱거리며 아장아장 걷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허비하는가? 망아지나 송아지에 비하면 갑갑증이 난다. 그렇게 느려터진 인간의 보행이지만 세상 도처에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지구를 떠나 달나라에까지 흔적을 남겼다. 어떤 동물도 이르지 못한 곳에 첫 걸음 딛기에 느렸던 인간은 짐승들로선 결코 불가능한 위대한 발자국들을 남겼다. 성공 노하우(know how)도 중요하고 성공 두왓(do what)도 중요하다. 성공 후이즈(who is)는 더 중요하다. 방법론도, 목적 설정도 중요하지만 인간은 더 중요하다.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세운 목표와 시행착오 끝에 익힌 방법론은 성공 추구자들에게 어떤 빛을 비춘다. 성공 자체보다 성공의 과정이 중요하듯, 성공의 열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았음을 잘 아는 우리가, 성공자들의 밝은 빛 뒤에 감춰진 깊은 그림자를 눈치 챈 우리가, 성공을 위해 서두르는 것은 이치상 맞지 않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이 걸어야 할 인생의 길이란 게 있다. 다른 길의 숫자만큼 성공의 양태도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개인의 능력도 다르고 처한 현실도 다르고 문제를 해석하는 관점이나 해결 방식도 다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성공 비결이 모든 이에게 적용 가능한 보편 원리는 아니다. 성공의 의미도 제각각일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에서의 성공으로 만족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정상의 성공에서도 여전히 목마른 이가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배움 곧 학습이다. 어떤 형태와 양식의 성공이든 성공에 이르려면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성공 능력은 곧 학습 능력이다. 이론도 배워야 하고 실전도 익혀야 한다. 영적 내공 쌓기도 배워야 하고 현대적인 기기 사용법에도 익숙해야 한다. 나이를 장애로 여기는 마음은 배움의 원수다. 나이가 들수록 배움의 강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포장한 성공 신화(神話), 진솔한 성공 실화(實話)

성공의 경험을 포장해 신화로 둔갑시켜버리면 영웅담으로 변색된다. 영웅의 노래는 모두를 위한 노래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추구할 가치 있는 삶이라면 반드시 성공실화여야 한다. 실화면 충분하다. 신화까지 격상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사람을 높이다보면 결국 신의 위치에까지 가야 직성이 풀린다. 신화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신화 속에 등장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역사적 실존 인물에 대한 신화화 작업은 그렇게 꾸민다 해서 하루아침에 인간이 신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신의 세계에 속하고 인간은 인간세계에 속한다. 노니는 세상의 차원 자체가 다르다. 억지로 신이 된다 해도 기껏해야 반인반신 정도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인반신이 아니라 반인반수의 실상임을 알게 된다. 신이 되려하는 인간의 운명은 늘 짐승으로 끝난다는 사실이다. 성공이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이야기라면 당연히 성공신화가 아닌 성공실화여야 옳다.

신화라면 두고두고 전해져야 옳다.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거론되었던 인물들의 삶을 지금이라도 살펴보라. 여전히 신화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아니면 쇠락의 징조가 보이는지, 아니면 아예 밑바닥으로 주저앉아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옥스퍼드 사전은 성공을 “목적 성취”, 신화를 “넓게 유포되었어도 거짓된 신념이나 개념”이라 정의한다. 목적 성취는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일단 선한 일이다. 거짓된 신념이나 개념은 거짓이기에 일단 악한 일이다. 성공신화는 선과 악이 결합된 것과 흡사하다. 부적절한 용어 선정이 아닐 수 없다. 실화는 실제 이야기이니 성공실화야말로 어울리는 표현이다. 가장 강하고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상상 속의 신화가 아닌 일상에서 부딪힌 너와 나의 진솔한 이야기다.

성공이 보석이라면 신화는 보석을 더욱 돋보이도록 하는 보석함과 같다. 아무리 공들여 만든 화려한 보석함이라 해도 보석함이 보석은 아니다. 결국 이런 신화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한다. 개인도 기업도 성공신화 리스트에 오르면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 스타덤에 오른다.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 청년 창업가 OOO....... 대통령이 되거나 한 조직의 수장이 되든지 혹은 실패를 딛고 재기에 성공한 기업가와 스포츠맨이 나타나면 주위 사람들이, 언론이, 세태가 그들을 신화라는 울타리에 가두어버린다.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듯 대중들이 바라보고 카타르시스를 얻고 대리 만족을 하거나 아니면 본인이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려는 전의를 불태운다. 책방을 뒤져보라! 성공의 열쇠, 비법, 조건, 법칙, 스텝, 노하우, 방정식 등 성공과 연관된 비술들이 다양하게 제시되는 요즘 세상이다. 비법도 한 가지에서 셋, 다섯, 일곱, 열 둘, 천차만별이다. 비법이란 비법이 총망라해서 다양하게 제시되는 요즘 세상이다. 그 모든 비법을 통달하고 몽땅 적용하면 비슷한 성공 하나에 도달할 수 있을까?

 

목회성공(牧會聖功)이라는 신기루와 금송아지

가장 듣기 거북한 소리가 목회 성공이다. 목회에는 성공 실패가 없다. 기준이 어디 있으며 누가 성공 실패라 단정하는가? 성공은 신기루요 환영이며 금송아지다. 목회에 성공이 없다면 실패 또한 없다. 목회에서 성공 실패를 논하는 사람들은 목회가 뭔지 몰라서 그렇다. 소위 목회 성공을 이룬 이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목회 성공의 요인으로 기도, 말씀, 특정 은사 등 그럴듯한 이유들을 나열한다. 말씀이 인용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란 약방의 감초식 발언이 나오지만 결국은 그 중심에 한 인간이 있다. 목회는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맡은 자가 구할 것은 충성뿐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든지 악하고 게으른 종이든지 둘 중의 하나다. 유형을 다양하게 나누자면 수십, 수백 가지도 되지만 주님은 단 둘로 압축하셨다. 충성된 종 아니면 게으른 종이다.

성공의 잣대로 볼 때 성공 축에 아예 끼지 못하여 실패자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이들을 본 적은 없는가? 그들의 모습은 당신에게 어떻게 보이며 당신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성공 실패 개념을 적용하지 않고 살아온 삶이어서 그런지 나로선 가타부타할 만한 소재가 없다. 내가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나 나나 게으른 종으로 낙인찍힐지 모른다는 마음이다. 나름대로 부지런히 살아왔어도 아직도 근면 수준은 아닌 것 같아 부지런을 떨어보지만 언제까지 이 열기가 식지 않을지 모르겠다. 필자의 주변에는 성공 부류에 드는 이들도 있다. 분신 같이 여긴 관계도 찬바람 한 번 불어치니 추풍낙엽이 따로 없다. 평생을 배신하지 않고 배신당한 쪽에 서게 됨을 감사드린다. 평생을 이어온 황금 같은 우정도 결국 우스꽝스럽게 막 내림을 보면서 사울의 갑옷을 입고 기우뚱거리는 다윗에겐 차라리 골리앗의 우정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교회 안에 가득한 성공신드롬, 성공축제

성공을 그토록 갈망하는 무리들 틈에서 실제로 성공을 이루는 사람이기에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특별하다. 그들에게도 삶과 사역에서 배워야할 요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럴 가치가 있다면 겸허히 배워야 한다. 성공 이후에 더욱 겸손하고 성공을 했음에도 옛 친구를 변함없이 찾는다면 한여름에 생수 같은 소식이다. 그렇지 않고 성공신화의 일원이 되어 그리스신화나 로마신화의 신들처럼 마치 신이 된 듯 거들먹거린다면 추하고 역겹다. 셀러브리티(celebrity)의 정회원이 되어 그들만의 신세계에서 노닌다면 재앙의 날에 그들을 도울 자가 모조리 사라진다. 에머슨(R.W. Emerson)의 시 <진정한 성공> 전반부는 바른 성공을 노래한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해서 어려워 보이는 삶은 위인의 것 아닌 우리 모두의 실제 이야기(實話)다.

각종 성공 축제가 교회를 휩쓴다. 왜곡된 성경의 파도를 타고 대양을 항해하고픈 욕심에서일까? 어설픈 성공에 목을 매단 이들의 영혼은 잠시도 쉬지 못한다. 안팎에서 닦달하는 소리가 거세기 때문이다. 성공 신드롬의 주사를 맞은 지도급 인사들은 성공을 줄창 노래하고 사방으로 들볶이는 신자들의 처지가 안쓰럽기 짝이 없다. 성공에도 올곧은 성공이 있고 비뚤어진 성공이 있다. 바른 성공은 있어도 틀린 성공이란 없다. 틀리다면 애당초 성공이 아니다. 틀리다기보다 다르다고 표현함이 제격일 것이다. 성공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보기에 자기와 사뭇 다른 성공은 성공이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성공은 엄연한 성공이다.

 

범인(凡人)이 예수로 변화 되는 성공실화

고민하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성공신화가 아닌 성공실화다. 성공실화는 성공신화와 판이하게 다르다. 실화 속에는 실패와 좌절, 고통과 아픔처럼 알리고 싶지 않은 민낯의 삶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도 실화를 바탕으로 전개되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신화 속에 부풀린 우리의 가슴을 날렵한 실화로 정돈할 필요가 있다. 재삼 강조하건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화가 아니라 실화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매일 부딪히며 경험하는 일상의 크고 작은 감동들이다. 아니 감동이 아니면 어떠하랴! 실화의 매력 포인트는 꾸밈없이 전개되는 생생함이다. 실화는 자신이 출연하면서 무수한 경험들을 체감할 수 있어 현장감도 더하고 정녕 가슴 시린 감동이다. 이제 우리의 신화는 닫히고 실화의 세계가 열려야 한다. 성공실화의 주인공은 평범하게 태어났어도 비범한 일을 이룬다. 이는 단순히 개천에서 용 나는 경우와 다르다. 도리어 존재의 변화를 통해 삶의 변혁을 꾀함이다. 다시 말해 예수 믿고 새 사람 되어 새 일을 이룸이다. 뻔한 결론이고 식상한 표현이라 생각지 말라! 하나님을 믿음이 지혜의 근본이라면 그 지혜야말로 성공하기에 유익(전 10:10)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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