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7월 19일 타계한 이승만 박사를 추모하며, 대한민국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위에 건국하고자 심혈을 기울이며, 끊임없이 기독교 국가로 발전시키려고 애썼던 이승만 박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을 이야기 할 때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를 빼놓을 수 없으며, 이승만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며 사유재산제도와 주일휴무제도 및 군목ㆍ형목ㆍ원목 제도 등의 기반이 세워진 것은 이승만 박사에 의한 것이며 이 제도들은 모두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남 이승만 박사를 통하여 이승만이 아니라 이승만의 하나님을 보아야 하며, 이승만 박사를 칭찬하고 싶을 때 이승만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기독교계가 떠들썩한 이유는 바로 대한민국이 기독교국가로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질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을 볼 수 없는 것이며, 주님께서는 크리스천들이 다시 일어나 변질되어가는 대한민국의 건국 정신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다시금 기억하도록 섭리하고 계신 것이다.

그 동안 몇몇 기독교인이라는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세워지긴 했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한 표라도 더 얻고 싶은 욕망에 죽은 자들 앞에 분향하며, 우상에게 절을 하는 등 하나님 앞에서 망령된 일을 서슴없이 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다.

내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안전한 반석위에 세워지는 길은 다시금 이승만박사와 같은 건국정신 즉 하나님만이 한국을 지키시며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사람이 대통령으로 세워져야만 한다. 고레스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미국 대통령으로 트럼프를 세우셔서 오바마가 동성애를 끌어들이고 미국은 더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을 바꾸어가고 계신 것처럼 한국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회주의와 성정체성의 혼란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배재학당을 짓는 모습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아펜젤로)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양녕대군(讓寧大君: 태종의 장남)의 16대손으로, 황해도 평산에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두 형이 모두 사망해서 6대 독자가 되었다.

20대에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894년에 청일전쟁이 끝나고 7월에 과거제도가 폐지되므로 1885년 이승만은 20세에 아펜젤러(H. G. Appenzeller)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영어와 기독교리를 배웠으며 서재필 박사에게 역사, 정치, 세계 지리, 토론과 웅변술 등을 배우며 '자유·평등·권리' 등 자유 민주주의 제도에 눈을 뜨게 되었다. 

1896년 서재필 박사의 영향을 받아 개화에 눈이 뜬 13명의 학생들이 11월 30일 '학생 토론회'인 협성회(協成會)를 만들었다. 협성회는 매주 모여서 자주독립·자유민권·자강개혁(自强改革) 등을 공개 토론하였는데, 2년 뒤인 1898년 2월에는 3백여명의 회원으로 늘어났고, 학생 단체에서 사회단체로 변모하였다. 협성회에서 자유민주주의 방식의 열띤 토론은 이승만에게 유창한 연설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부친 경선공과 함께 찍은 서당 시절 이승만(오른쪽)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들어가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유가에서 태어난 나는 중국고전과 역사, 문화, 종교 등에 관한 책들을 습득하여 과거시험을 보는 것을 나의 의무로 여겼고, 유교만큼 훌륭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또 나를 생일 때마다 서울 근처에 있는 큰 절인 '되무가이'(?)[되무개(?)]에 보내어 장수다복을 빌도록 하곤 하였었다.

내가 이처럼 암흑 속에서 진리를 찾고 있는 동안 조선 땅에는 새 시대의 동이 트고 있었다. 외국공관들이 세워지고 외국어학교들이 정부에 의해 설립되었을 뿐 아니라 외국선교사들이 서울 장안에서 예수를 찬미하고 그에 대한 소식을 전파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유교학교[서당]를 떠나 '새것'을 배우러 간 친구들을 반역자로 취급하고 있던 나에게 친구들이 때때로 놀러 와서 전보, 철도, 비행기 등등 서양에서 발명된 기괴한 것들에 대해 배우라고 역설했지만 나는 "그들이 천지를 개변해도 나는 어머니의 종교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일축하곤 했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은 우리나라로 하여금 동양의 구세계는 현대문명의 광범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 낡아 빠지고 많이 악용되어오던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는데, 이 조치는 전국 방방곡곡에 묻혀 있던 야망적인 청년들의 가장 고귀한 꿈을 산산이 부수는 조치였다. 그런데 진보당정권은 여러 가지 학교를 세우고 관비로 운영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외국어를 배우고 서양문명을 배우도록 온갖 장려를 하고 설득을 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고민을 하던 끝에 배재학당에 가서 영어를 배우기로 작정하였지만 며칠간 나의 작정한 바를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천하에 몹쓸 교리'를 가르치는 학당에 나가는 것을 허락할 것 같지 않았다. 학교에 갔더니 노블(Noble)씨가 아침예배에 참석하라고 했다. 그는 내가 난생 처음으로 말을 건넨 외국 사람이었다. 이익재에게 물어보니 학생들은 누구나 예배에 참석하게 되어 있어서 나도 참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889년. 배재학당 학생들

예배 실에서 나는 뒷줄에 않아서 그 반에 있는 모든 것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키가 큰 아펜젤러씨가 강단에 서서 청중에게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는데 나로서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려고 갔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고 또 내 마음 속에 깊이 느껴진 것은 1천9백여 년 전에 죽었다는 사람이 나의 영혼을 구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혼자서 생각했다. 

'아니 그래, 저렇게 놀라운 일들을 한다는 사람들이 정말 그런 바보 같은 교리를 믿는단 말인가. 아마 저 사람들은 자기들은 그것을 믿지 않으면서 그저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 왔는가 보다. 그러니까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만 교회에 가는구나. 위대한 부처를 알고 공자의 지혜를 아는 유식한 학자야 어디 저런 교리를 믿을 수가 있겠나.'

결론을 지은 나의 마음에 편안을 느꼈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알려드렸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믿기에는 너무 총명해요, 어디 배운 선비가 그들의 교인이 되는 것을 보신 일이 있으셔요?" 하였더니 어머니는 약간 안도감을 가지시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 후에 곧 내가 서양문명의 영향 하에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협성회회보

1896년 7월 2일에는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조직되었다. 독립협회는 당시 종주국 행세를 하고 있는 청나라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반청(反淸)을 주장하면서 미국과 프랑스, 일본 등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다.

1897년 7월 8일은 이조 5백년 역사에서 독립 국가로 넘어가는 터닝포인트가 되는 거대한 획을 긋는 일이 발생했다. 이날 정동감리교회당에서 배재학당 개교 12년 만에 거행되는 첫 졸업식이 열렸다.

정부 고관들과 주한 외국 사절들을 비롯한 6백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아펜젤러의 사회로 시작된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이승만이 연설을 했다. 그는 ‘조선의 독립’(The Independence of Corea)'이라는 제목으로 당시의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 및 청일전쟁의 결과 그리고 자주 자유를 통한 국가 개혁을 유창한 영어로 연설했으며, 연설 후에는 '독립가'를 영어로 불었다.

아펜젤러는 한국 최초의 영문 잡지이며 개신교 월간잡지인 ‘코리안 레퍼지토리’(1882-1898)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숙한 이 졸업생대표는 ‘조선의 독립’을 연설 제목으로 택했다. 이것은 조선에서 처음 거행되는 대학(College) 졸업식 연제로 매우 적절하다. 독립만이 이들 젊은이들이 교육받은 것을 실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줄 것이다. 이승만의 어법은 훌륭했고 감정도 대담하게 표현했으며 발음도 깨끗하고 명확했다.”

코리안 레퍼지토리

이승만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6세에 천자문과 통감을 떼고 8세가 되기 전에 사서오경을 마스터 했을 정도로 그는 외우는 데 천부적 소질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배재학당에 들어가서도 영어 사전을 비롯한 모든 교재들을 몽땅 외워버렸다. 그래서 입학한지 6개월만에 영어 보조교사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뛰어난 암기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게으르면 그러한 재능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는 매우 성실했으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이는 한성감옥에서 6여년간의 그의 행보를 통해 더 잘 알 수 있다.

"나의 어머니는 나더러 천자문을 외우게 하였다. 천자문 독본에는 그야말로 1천자의 글이 실려 있다. 나는 여섯 살 때에 천자문을 모두 외웠는데, 그것을 축복하기 위해 우리 집에서는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다가 큰 잔치를 베풀었었다. 그때 나의 부모님들의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였는지 모른다. 나의 첫 시상도 어머니가 가르쳐주었다. 내가 어릴 때 지은 한 귀절의 아동시가 나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새겨졌던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그런 시를 지으려고 애를 쓰곤 했다.
風無手 搖樹木
月無足 橫蒼空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건너간다.)"

"나는 어머니 몰래 배재학당에 가기로 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에 대해서 허황한 풍설이 많았다. 그들의 눈과 피부색, 노블(Noble)의사가 나에게 영어 알파벳을 가르쳐 주었다. 벙커(Bunker)씨와 아펜젤러(Appenzeller). 화이팅(Georgiana Whiting) 의사가 선교사로 새로 왔는데 내가 그의 첫 한국말 교사가 되었다. 

나의 첫 월급은 은전으로 20원이었는데 [그 돈이 하도 많아서] 나의 모친은 겁에 질릴 정도로 놀라셨다. 당시 부친은 늘 타지방을 방랑하였고 집에 계시지 않았다. 나는 배재학당에서 영어교사로 채용되었다. 영어공부를 시작한 것이 6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영어선생이 되었다고 하여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아비슨(Dr. O R Avison) 의사가 나의 상투를 잘라주었는데 나는 그 후 얼마동안 어머니 곁에 가지를 못했었다... 나는 병원에 붙어 있는 작은방에서 이틀 밤을 지냈다. 왜냐하면 나는 어머니가 놀라실까봐 집에 가기를 꺼렸던 것이다. 내가 나타났을 때 어머니는 무척 놀라고 자식이 죽은 듯이 통곡을 하였다."

Dr. Avison

1898년 1월 1일에는 주간지 『협성회회보』를 발행했는데, 당시 발행부수는 2천부였다. 이 주간지는 한글신문이었으며 성경과 찬송가를 인쇄하기 위해 배재학당에 인쇄기가 있었으므로 정부의 도움 없이 신문을 만들 수 있었다. 총 4면으로 1면 논설, 2면 국내 정세, 3면 국외 정세, 4면 학생회 관련 기사를 실었다.

이승만의 협성회 활동은 정치인으로 가는 발판이 되었으며, 협성회회보에서의 주필 활동은 언론인의 첫 발을 내딛게 했다.

그의 글은 매의 눈과 같아서 주변에서 염려하며 주의를 많이 주었는데, 이승만은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 지면을 통해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위험한 사상을 힘을 다해서 역설했다. …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나 다른 사람들은 내가 급진적인 행동을 계속하다가는 목이 잘리게 될 것이라고 여러 번 충고해 주었지만 그 신문은 친러파 정부와 러시아 공사관의 위협으로 생겨난 여러 가지 고난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계속 발간되었다.”

세상을 보는 통찰력과 글쓰는 재주가 뛰어난 이승만은 23세인 같은 해 4월 9일에 유영석, 양홍묵과 함께 『매일신문』(Daily Newspaper)을 창간했다. 4월 2일에 14번째 『협성회회보』를 마지막으로 일간지인 매일신문으로 바뀌었다. 매일신문은 당시 문맹률이 90%나 되는 조선의 무지한 백성을 잠에서 깨우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이다. 

그는 사장이면서 주필이며 기자로서 매일신문을 발행하는 첫 신문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회원들의 극진한 성의로 이 회보가 거의 천 여장이 나아가니 우리 회보를 보시는 이들께 감사함을 치하한다"면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피력했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내가 배재학당에 가기로 한 것은 영어를 배우려는 큰 야심 때문이었고, 그래서 나는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나는 영어보다도 더 귀중한 것을 배웠는데, 그것은 즉 정치적인 자유이다. 
한국의 대중이 무자비한 정치적 탄압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기독교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법에 의해서 그들 통치자의 독재로부터 보호되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젊은이의 마음속에 어떠한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혼자서 우리도 그런 정치이론을 채택할 수만 있다면 짓밟혀 사는 나의 동족에게 크나큰 축복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념하에 나는 몇몇 청년의 도움을 받으면서 신문을 시작하였는데 '협성회회보'는 한국 사람들만으로 제작되는 신문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의 것이었다...
나는 배재학당에서 다른 학생들과 '협성회 회보'를 시작하였고 그 주필이 되었다. 조그마한 학생들의 신문이 정부 고관들을 비판하게 되자 곧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아펜젤러 교장은 우리들한테 사설을 검열 받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의 신문으로는 발간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독립정신이 강한 유영석과 나는 학교를 나와서 한국 최초의 일간지를 내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우리더러 외국의 보호를 받지 않고 그런 신문을 발간하면 위험하다고 했지만, '매일신문은 아주 호평을 받게 되어 서재필박사는 우리 신문 때문에 자기의 신문 [독립신문]을 팔 수 없다고까지 하게 되었다.
이때 러일전쟁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은 고종을 사이에 두고 각축하고 있었는데, 고종은 러일 양국이 주고받는 공과 같았다."

매일신문

이승만은 또 1898년 8월 10일에 유영석과 함께  『뎨국(제국)신문』을 창간했는데, 이는 '대한제국'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이 신문을 통하여 이승만은 일본의 '한성신보'와 겨루기를 하였는데,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부당한 점들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속담을 보여주듯 그의 펜은 한국의 독립을 막는 나라들 특히 일본의 칼을 겨눈 무기였다.

제국신문

그는 망해가는 이조 5백년을 바라보며 봉건주의에서 벗어나 입헌군주국을 소망하며 서재필이 세운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1898년 3월 10일 독립협회의 제1차 만민공동회에서 23세의 나이에 총대위원으로 선출되어 만민공동회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때 이들의 노력으로 러시아는 더이상 대한제국에서의 모든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1898년 11월에는 우리나라 5천년 역사에서 최초로 의회가 생겼다.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외치며 주도한 만민공동회의 투쟁으로 고종 황제는 황제의 자문기관인 '중추원'(中樞院)을 '의회'로 개편하여 50명의 의관(議官:국회의원)을 선임하였는데, 50명 중 3분의 2가 수구파였으며 독립협회측은 17명이었다. 이때 이승만은 24세로 '종 9품 의관'이 되었다.

그러나 수구파들이 만든 음모론을 듣고 위기의식을 느낀 고종은 역모로 판단하여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지도자 17명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후 이승만은 고종 양위(讓位)사건에 연루되어 혐의를 받고 1899년 1월 9일 체포되어 경무청에 수감된 뒤 종신형을 언도받고 한성감옥에 가게 되었다. 감옥에 가서도 그는 3년간 계속해서 논설을 쓰면서 투쟁을 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갔기에 애굽의 총리가 된 것처럼, 이승만 역시 감옥에서 주님을 만나고 독립국가의 대통령이 될 기초를 쌓았다.

한성감옥의 종신 죄수 이승만(왼쪽, 쇠사슬에 묶여있음) 앞줄 오른쪽부터 김정식, 이상재, 유성준, 홍재기, 강원달

"당시 독립관에서는 거의 매일 정치권리 [민구너]를 요구하는 수천 명의 사람으로 번잡했다. 그 클럽에서 나는 급진적 지도자 중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그 클럽[독립협회] 사람 17명이 수감되었을 때 그들은 황제에게 나를 '유일하게 위험한 분자'라고 보고했다. 

정부가 독립협회를 폐지하고, 나를 고문한 후 나무칼로 족쇄를 채우고 어두운 감독 속에 가두었을 때 나는 두려워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있으면 다른 세상에 갈 터인데 저 외국 사람들이 나에게 말해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에 가 있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의 말하던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말인데, 그 말이 나의 마음에 떠오르자마자 나는 나의 목에 걸려 있던 나무칼에 머리를 숙이고 "오, 하나님. 나의 나라와 나의 영혼을 구하여 주시옵소서!"하며 기도했다."([청년 이승만 자서전] 중)

감옥 안에서의 이승만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이에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힌 이승만은 머리에는 칼, 손에는 수갑, 발에는 형틀을 씌워 탈옥을 하지 못하도록 감금되었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을 보면, 그가 잡혀서 태장 100대를 맞고 종신형에 처해지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는 대동합방론을 주창하는 자들과 여러 번 비밀회견을 한 일이 있다. 일본의 정책은 첫째 러일전쟁을 하는 것이었고 그 후에 미일전쟁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일본은 동양을 서구 각국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이러한 전쟁을 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한국과 청국은 일본과 손을 잡고 생존을 위한 투쟁에 같이 참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주장을 일본사람이 쓴 '러일전쟁과 미일전쟁' 이란 책에서 읽은 바 있으며 또 그들의 이러한 전쟁을 준비하는 동기에 깊이 감명되었다. 이 일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오래 전인 1896년경이었다.
   내가 체포된 것은 아슬아슬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체포된 후] 미국공사와 경무청의 고문관은 내가 고문을 당하거나 부당한 형벌을 받을까 염려하여 매일 [감옥에] 나를 보러 오곤 했다. 나는 이런 일은 독립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므로 그들의 간섭을 싫어했다. 그러나 미국공사는 황제가 외국 사신들을 증거인으로 세우고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였던 것이므로 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다시 뛰쳐나가 민중운동을 시작하려고 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다시 나서서 그들을 부르기를 원하고 있었는데 나는 주상호(주시경의 본명)로 부터 시국정세를 듣고 있었다.
   우리는 [내가 탈옥하여 뛰쳐나오면] 민족주의자 군중이 감옥문 밖에서 나를 맞이하여 종로로 달려가서 군중대회를 다시 열기로 결정하였다. 권총이 [감옥 속에] 들어왔다. 어느 날 오후 최정식과 서상대, 그리고 나는 감옥을 뛰쳐나왔다. 
   두 사람은 감리교 컴파운드(Compaund: 선교사 주택지)로 뛰어갔으나 나는 아무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너무 실망하여 쓰러져 버렸다. 나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서로 약속한 시간에 대한 오차가 있어서 바깥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 때 우리가 나갔던 것이다. [탈옥할 때에] 나는 권총을 사용하지 않았다[발사하지를 않았다]. 
   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그의 손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나는 병영으로 끌려갔다. 칼을 뽑아 쥔 많은 병정들의 나를 둘러싸고 끌어갔다... 나는 경무청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박달북에게 고문을 당했다. 그는 왕당파로 나와 가장 원한에 사무치는 원수였었다... 그리고 나는 또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때 나는 그 감옥으로 다시 끌려가기 전에 얼마나 죽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나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풀어대는 그들은 격분한 동물들 같았다. 족쇄, 수갑, 형틀 … 
   어떤 늙은 죄수가 비밀히 감옥 속으로 들여온 신문을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주었다. 지난밤에 이승만이가 사형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나의 부친은 나의 시체를 찾으려고 감옥 문 앞에 왔다 가셨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내가 품고 있던 질문은 꼭 한 가지, 이제 나는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학교 예배실에서 들은 설교를 기억하고 즉시로 목에 씌운 형틀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 주시고, 나의 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

알렌(Horace. N. Allen)

"성경책 한 권이 몰래 들어왔다. 죄수 한 명은 간수가 오는지 보기 위해 파수를 섰고 또 한 명은 책장을 넘겨주었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7개월 동안 나는 형틀을 쓰고 있었다. 

나의 정적이었던 홍종우가 고등재판소 재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그의 앞에서 나의 형틀을 제거하도록 명령하였다. 홍은 보황회의 회장으로 나에게 가장 큰 정적 둘 중의 하나였는데 재판장이 되어 나의 사건을 결정하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나의 생명을 살리려고 온갖 힘을 써주었다. 참으로 인생의 야릇한 역전이었다.

나는 나의 죄와 도망간 나의 공범자들의 죄 때문에 법에 의하여 사형될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최정식이 잡혀서 형무소로 돌아왔는데 그가 잡혔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면할 것이라고 모두들 말했다. 그와 내가 재판을 같이 받게 된 날 나는 몸이 쇠약해서 몸을 가눌 수 없는 처지였었다. 그는 활기 있게, 그리고 웅변조로 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워 쓰는데 나는 나 자신을 방어할 기력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 말을 많이 하다가 나에 대한 증언 중에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를 하였다. 따라서 판사는 다음 날 그를 추궁하기 시작하였는데 결국 그가 전날 말한 말에 걸려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물질적 증거로 나의 권총이 제출되었는데 나는 한방도 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나는 재판과정에서 별로 할 말이 없었고 판사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결론을 지었다. 최고재판소의 재판장 홍종우가 나의 부친에게 나의 생명을 구해주기로 결정하였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는 소식은 퍽 후에 들었다.

최정식이 사형되는 날, 그는 교수대로 끌려가면서 나더러 "이승만씨, 잘 있으시오. 당신은 살아서 우리가 같이 시작한 일을 끝맺으시오"하고 말했다.

나는 무기징역과 매 1백대를 선고받았다. 나의 부친은 매를 때리는 간수에게 돈 얼마를 주셨는데 그 자는 바로 우리가 파옥할 때 다리에 총을 맞은 자였다.(김윤길) 아버지는 돈을 주시면서 1백대를 맞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태형집행 준비가 되었을 때 입회하러 온 판사는 매 때리기를 시작하라고 명령을 하고는 창문을 닫고 가버렸다. 그 간수는 하나 둘 셋 세면서 몽둥이를 들었다 놨다 했는데 태형이 끝났을 때 내 몸에는 아무 상처도 나지 않았다."

이승만(왼쪽에서 세번째)

1899년 1월 30일에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힌 이승만은 종신형이지만 사형수와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는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7개월 동안 나는 10kg(20파운드)쯤 무게가 나가는 나무로 만든 목걸이(칼 : 수판)를 목에 달고 두 손은 수갑에 채우고 발은 형틀(차꼬)에 끼워져 있었다. [그런 나에게] 다른 죄수들은 몰래 감옥으로 들여온 조간신문에서 밤중에 내가 사형되었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준 일이 몇 번이나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의 선친은 나의 죽은 몸을 매장하겠다고 찾으러 오시곤 하셨다. 
   사형선고를 받은 살인수가 나와 같은 형틀에 얽매여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간수와 사형집행리와 순검이 갑자기 감옥 문을 열고 우리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방안에 있던 죄수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사형집행리에게 넘겨질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형틀을 열고는 살인수를 끌어내고 나는 다시 형틀에 잠가버렸다. 나는 "이 다음은 나로구나"하고 독백하면서 오히려 내가 먼저 끌려가서 빨리 끝이 나버렸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서 수갑과 형틀이 벗겨지자 삶에 대한 욕망이 나에게 서서히 떠올라왔다. 내가 그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감방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나는 7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포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어떤 이들은 사형장에게 끌려가면서 마치 내가 그들을 구해줄 수 있는 듯 나의 이름을 크게 부르곤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가서 편안히 죽으시오"라고 고함을 쳐주는 것이었다. 
   무거운 칼 소리가 들려올 때의 그 복잡한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장호익 장군도 우리 감방 바로 뒤에서 단수단했다. 그는 세 번째 칼 소리가 날 때까지 계속하여 만세를 불렀다. 나는 요새도 꿈속에서 감옥시절의 이런 저런 일을 보곤 한다."

청일전기

이승만은 감옥에서 틈이 나는대로 성경책으로 영어를 공부하면서 『영한사전』을 편찬했고, 청일전쟁에 대한 중국 서적인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했다([청일전기]). 뿐만아니라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전도하며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기독교를 포교하며 전도인의 직무에 힘썼다.

이승만과 함께 감옥살이를 했던 신흥우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글을 쓸 수 있는 그 무엇이나 책은 일체 못 들여오게 되어 있었지만 간수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묵인해주었다. 우남은 화영자전(일본어 - 영어)을 가지고 있었고 아펜젤러와 벙커씨는 잡지 '뉴욕 아웃룩(New York Outlook)와 '인디펜던트(Independent)를 들여보내 주었다.
   죄수들은 일척직경쯤 되는 항아리를 가지고 있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승만은 그 항아리를 눕혀놓고 그 속에 몰래 들여온 양초를 켜고 공부를 하곤 했다. 간수들이 올 때는 그 항아리를 벽으로 돌려놓으면 불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러면서 영어를 배웠다. 미국잡지들이 그의 교과서였다. 
   그는 또 붉은 물감을 몰래 들여와서는 잉크를 만들어 낡은 잡지에 글쓰기 연습을 하곤 했다. 그 후 그는 눈을 감고도 잡지에서 읽은 문장들을 외웠다. 그는 사전에 있는 영어단어를 모두 외웠다. 그는 수감되기 전에 '제국신문'을 편집하였고 감옥 속에서도 그 신문의 논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승만이 정규적으로 글을 쓸 때면 그 신문의 독자가 늘었고 정치적 압력으로 그의 글이 나가지 못할 때는 독자가 줄곤 했다."

아펜젤러 선교사 가족

한성감옥에서 어느날 자신도 죽으면 어떻게 되나를 생각하던 중 아펜젤러 선교사의 설교가 생각나서 자신의 영혼과 우리나라를 구해달라(Oh God, save my soul and save my country)는 기도를 간절히 하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게 된 이승만은 감옥안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사대부 출신 정치범인 이원긍·이상재·유성준·김정식·홍재기·김린·안국선 등과 한성감옥 간수장 이중진 등 40여 명에게 전도하였다. 

이승만은 그가 목에 차던 칼에서 자유로와지자 독서와 글을 쓰며 전도하는 데 힘썼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감옥 안에 책을 넣어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독립을 외치는 이승만과 같은 애국자에게 기독교 신앙이 들어가면 누구보다 열심히 전도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옥으로 수많은 책을 넣어주었다. 감옥 안에서 그가 읽은 책들은 그의 미래를 향한 비전인 조국의 독립과 기독교로 세워지는 민주주의 국가의 초석을 만들어 주었다.

선교사들은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라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도왔다. 그가 사형수가 되지 않도록 힘을 써서 종신형을 언도받았으며 또한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이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들을 보살폈으며, 언더우드도 자주 찾아왔으며 에비슨 등은 콜레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데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감옥에 약품을 넣어주었다. 

이승만을 면회한 언더우드 선교사

선교사들의 예상대로 이승만은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던 옥중 성경학교를 만들었다. 그의 예수교를 전파하는 열심에 감동받은 선교사들은 정말 열심히 그를 도왔다. 성서공회에서 50원을 주어 책장을 만들었으며 일본과 상해에서 이 소식을 들은 선교사들은 서책을 보내왔다.

이승만은 감옥서장 김영선에게 옥중 학당을 세우도록 요청했다. 이에 감동한 김영선과 간수부장 이중진은 그가 옥중에서 죄수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협력하여 옥중 성경반이 만들어졌다. 1902년 이승만은 선교사들이 넣어준 책들로 옥중 도서관을 만들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아이들과 어른으로 나누어서 전도하며 한글과 영어 교육을 시켰다. 

특히 아이들 수십명에게는 제2외국어인 영어와 일어를 가르치고 산수와 세계지리 등도 가르쳤고 어른들은 성경과 신학문을 가르쳤다. 교사로는 이승만 외에 양의종과 신흥우가 도왔으며 성경공부방이 기도의 방이 되었고 결국 그곳은 예배의 처소가 되었다.

그들은 감옥 안에서 예배를 시작하게 되면서 감옥을 '복당'(福堂)이라고 불렀다. 이세상에서 '감옥'을 '복된 집'이라고 부르는 곳이 또 있을까?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전도의 귀한 도구로 사용한 이승만이 있었기에 그리고 임마누엘 하시는 주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에 겨울에 난로도 없고 콜레라로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도 정부에서 의약품 하나 지원해주지 않는 그러한 곳을 '복당'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세상에서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옥중에 있는 죄수들을 위하여 학교를 만들고 그들을 교육하며 전도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승만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대한민국을 문맹률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힘썼던 것이다. 그는 감옥 안에서 이미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모든 백성이 구원받기를 갈망하며 그 길을 달려갔던 것이다.

그가 감옥 안에 수감된 사대부들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에게 전도한 것은 정치적인 야망 때문이 아니라 “오직 대한민국의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과 같은 기독교를 근본으로 한 민주주의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되 반드시 독립된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나라의 존망은 기독교 신앙 위에 세워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감옥 안에 있는 이승만은 독립의 중요성을 깨닫고 몰래 글을 써서 현 조정관리들의 무능과 부패로 인한 망국에 대해 경종을 울렸으나, 고종과 관리들은 전혀 개혁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선교사 에디(Sherwood Eddy. 1871-1963)를 통해 받은 성경을 읽으며 후에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자기들 스스로 대단히 값지게 여기는 것을 주기 위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1902년은 콜레라가 급격히 퍼져서 감옥 안팎으로 수많은 인명이 죽었다. 기록에 의하면 2만3천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감옥안에 있는 죄수들까지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 당시 이승만이 [신학월보] 5월호(1903)에 '옥중 전도'를 통해 회고한 내용을 보면, 4-5일 동안에 60여명이 그의 눈앞에서 죽었으며 하루에 그의 앞에서 17명이 죽었으나 간수들이 한번 왔다가면 오지 않아서 그 다음날까지 시신들과 함께 호흡을 하며 섞여 지내야만 했다. 

그렇게 시신들과 함께 호흡을 하며 지내도 그는 무사히 넘기고 그런 기회를 당하여 복음 말씀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기쁨을 이기지 못할 일이라고 고백했다.

죄수들이 계속해서 쓰러지고 죽어나가는 사이에 이승만은 그들을 돌보면서 선교사 에비슨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콜레라로 죽어가는 이들과 살아있는 자들 사이에서 삶과 죽음이 서로 뒤섞인 가운데 죽어가는 자들의 영혼을 구원해야한다는 신앙심으로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했다. 그러한 이승만을 바라보는 옥중 환자들은 "이승만"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과 같이 한성감옥 안에서는 "옥중 천사 이승만"이 있었다. 그러한 이승만은 죄수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러한 사망의 골짜기에서 소자를 불쌍히 여기며 사랑을 베풀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이승만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은혜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험하고 험한 중에서 험한 괴질까지 겪으며 무사히 목숨을 부지한 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보호하신 은혜가 아니면 인력으로 못 하였을 바이오...” 어려운 가운데 ‘무릎꿇고 기도할 양이면 하나님이 오셔서 머리에 두 손을 얹으시고 나와 같이 기도해주시는 것 같았다’ (계속)

미국지사장 김수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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