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관점’으로 읽는 성경 이야기 ⑧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
라반과 야곱의 운명적 만남과 감사 이야기
성경배경 : 창세기 29-31장
‘내 아버지 연세 많고 힘도 빠져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그때는 내가 동생 야곱을 죽이리라’(창 27:41) 에서의 말에 살의(殺意)가 있어 너무나도 걱정스런 친구들은 조용히 그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 부랴부랴, 남편과 아들을 설득한 리브가는 급히 노자 돈과 괘나리 봇짐 하나 만들어 야곱을 피신시켰다. 리브가의 명분은 ‘우리 아들 야곱은 가나안(헷) 사람의 딸들로 장가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창 27:46).
어원적으로 영어의 낱말 ‘감사하다’(thank)는 ‘생각하다’(think)에서 왔다. 생각함 없이 감사가 나올 수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잘 생각해보면 전부가 감사하고 감격할 것뿐이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깊이 생각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라반의 삶과 야곱의 삶을 통해 누가 더 생각하는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를 보자. 감사하는 사람과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도 확실히 구분될 것이다.
한편 라반은 심술 굳고 놀기를 좋아하는 아들들이 하나같이 못마땅했지만 그들만 탓할 수는 없었다. 자신을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다. 라반은 젊은 날을 회상하면서 ‘에이! 아들 녀석들이 하나같이 나처럼 한량기질을 타고났을까?’ ‘닮아도 너무 닮았어!’라며 혼자 신세타령을 하는 날이 많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유추이다.
딸들을 시켜 양과 염소를 돌보게 하는 일은 흔치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그 동네사람은 물론 이웃마을에까지 소문난 일이었다.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창 29:6b).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창 29:9). 당시 그 지역의 목동들은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양들을 치러 다니는 일을 모두 알았다는 뜻이다. 정말 라반은 별로 감사할 일이 없었을까. 라반에게 아들들은 늘 근심거리였지만 딸 중에 라헬은 씩씩하여 목동 일을 잘 감당하고 있었다. 아들들은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저들은 늘 한량들이 모여드는 곳에만 몰려다녔다. 싸움판, 놀음판, 내기판, 시전(市廛)의 모리배들이 몰려드는 그런 곳을 늘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니 라반에게 감사할 일이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옳다. 다만 딸 레아와 라헬이 아들의 몫(목양하는 일)을 해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한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가나안에 시집간 누이의 아들 야곱이 자기 집에 들어오더니 한 달이 되도록 체류하는 게 아닌가. 따지고 보면 이는 복덩어리였다. 자신의 장성한 딸들을 생각해도 그렇고, 집에서 키우는 짐승들을 생각해도 그렇다. 살림을 잘 돌봐줄 일군이 절대로 필요한 시절이었다. 라헬, 레아가 아무리 남자답고 활기차게 움직이며 양들을 잘 돌본다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딸의 힘씀과 남정네의 힘씀은 어딘가 모르게 다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라반은 야곱의 등장과 함께 감사를 입에 달고 살아도 될 만큼 감격스러운 일들이 늘 많았다. 헌데 라반은 모든 일을 재정 수익적 관점에서만 생활을 했기에 감사할 일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어디 인간사(人間事)라는 게 계산만으로 되는 것이던가? 유명 디자이너에게 어떤 일을 시켜도 일반적인 사람에 비해 수십 배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아닌가? 그만한 가치 때문이다.
사실 라반의 집에 야곱이 들어오고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들 몫을 단단히 감당하는 생활력 있는 그였으므로 얼마나 복이 넝쿨 채 들어온 것인가. 그런데 라반은 계산을 할 때마다 자신이 손해를 본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므로 감사와 긍정과 고마움의 마음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야곱은 빈손으로 온 친구가 아닌가? 명분은 결혼이지만 알고 보니 에서를 피해서 도망 온 신세가 아닌가? 내가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게야. 야곱은 처음 거렁뱅이 신세였어. 자기가 거두어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거지가 되고 말았지 아마.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시작한 야곱 아닌가(삶, 결혼, 재산 등). 무지렁이 같은 야곱을 내가 먹이고 재우는 꼴이 아닌가?’ 이런 식의 잣대였기에 라반에게 야곱이란 늘 위험스런 존재였다. 그러니 감사가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라반이 감사할 수 없었을까? 야곱이로 말하자면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가. 아들들은 밖으로만 도는데 야곱은 집을 사수하며 목양을 하지 않는가. 감사한 일이다. 야곱이 사위가 되었으니 아들인 셈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딸들 시집보낼 걱정에(사윗감 때문에) 고민하던 차였는데 마침 믿을만한 조카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야곱이를 사위로 맞이한 순간부터 집안의 일은 물론 목양을 하는 집 밖의 문제까지 일거에 해결됐으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었다.
한편 야곱의 결혼이야기다. 첫 부인 레아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라헬을 더 사랑했을 뿐이다(창 29:18). 야곱은 신혼첫날 밤부터 외삼촌으로부터 속임수의 쓴맛을 보았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는 줄 뻔히 아는 데 말이다. 그렇다고 라헬을 먼저 결혼시킬 경우 문제는 레아였다. 당시 그 지방의 관례도 그렇거니와 언니를 놓아두고 동생을 먼저 시집보냈다가는 레아를 포기해야 할 판이다. 꾀돌이 라반의 고민은 곧 해결이다. 컴컴한 방에서 신혼 첫날을 지낸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자신의 여식을 결혼시킬 때 ‘라헬보다는 레아를 야곱에게 먼저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라반은 야곱의 첫 부인으로 레아를 지목하여 야곱의 방에 밀어 넣었다.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창 29:23)
야곱은 첫날밤 신혼을 치렀지만 아침에 그만 경악했다. 신부가 뒤바뀐 것이다. 야곱이 항의했다. ‘외삼촌이 내게 이같이 할 수 있습니까?’, ‘외삼촌이 조카를 속이다니 말이 되는 겁니까?’(창 29:25). 하지만 라반은 우리지방의 풍속이라는 말로 일축한다. 하지만 ‘7일을 채우라, 7일을 채우면 다시금 라헬도 주겠다.’며 야곱을 달랜다. 물론 7년간 섬기고 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음은 물론이다. 사실 따지자면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이 아니라 14년을 일한 셈이다. 라헬을 사랑했기에 며칠처럼 여겨졌다(창 29:20). 항상 즐거웠다. 기뻤다. 감사했다. 그리고 행복했다. 야곱에게 처가살이는 속고 속이는 변화의 연속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패턴은 감사였다. 그렇기에 견딜 수 있었다.
야곱은 7년 7일을 일하고 아내를 둘이나 얻었다. 라헬을 사랑하여 일한 덕에 7년이란 세월이 대단히 짧게 느껴졌다. 늘 즐거웠고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레아가 첫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에 잠시 기분이 묘했으나 사랑하는 라헬을 또 아내로 얻었으니 감사하지 못할 일이 또 뭐란 말인가. 사실, 야곱은 집을 나오던 날 어머니가 챙겨준 작은 괴나리봇짐이 고작이었다. 그것은 하란 땅에 들어온 지 달포가 지나기 전 이미 모두 없어졌다. 지금은 7년이 지난 시간이다. 자기가 가지고 온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얻고, 입고, 번 것뿐이다. 지금은 7년 전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집밖의 일이란 거의 경험이 없었다. 외부일은 형님의 소관이었다. 자신은 가정 안에서 어머니의 하는 일을 늘 보고배우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하란 땅에 온 야곱은 집 안팎을 돌보느라 눈 코 뜰 새가 없다. 집에서는 레아에 라헬에 그들의 몸종이 둘이지만 지금은 모두 아내다. 더군다나 라헬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의 몸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아내가 되었고, 첫 부인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추자, 자기의 몸종 실바를 또 야곱에게 주니 이제는 아내가 넷이다. 이걸 웃어야할지? 울어야 할지? 아들이 요셉까지 11명이요, 딸 디나를 포함하면 12남매를 둔 사내가 되었다.
집밖의 일은 또 어떠한가. 라반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야곱은 외삼촌의 양과 염소들을 돌보았는데, 목양은 전적으로 야곱의 담당이었다. 14년이 되어가자 야곱은 고향생각이 간절했다. 여기서 일하여 얻은 처자를 데리고 떠나게 해 달라고 말했다(창 30:25,26). 하지만 라반의 생각은 달랐다. 야곱을 타이르고 설득하는데 공을 들인다. 제일성은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안다는 것이다(창 30:27). 둘째는 이제부터는 네 품삯을 네가 정하면 주겠다는 것이다(28). 야곱이 제안한 품삯대로 주신다면 머물겠다는 말에, 라반은 그것 또한 허락해 주었다(34). 야곱이 자기 집에 머무는 것이 어떤 대가보다도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라반은 야곱과 언약을 하던 그 날 즉시 아들들을 동원하여 계약을 위반하는 일을 꾸민다. 야곱이의 것을 제로에서 시작하도록 꾸민 전략이다. 숫염소와 암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 그리고 아롱진 것들을 가려서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겨버렸다. 공간적으로 사흘길이나 떼어놓은 것이다. 야곱은 불공정하고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는 꼴이었다.
야곱이라고 가만있을쏜가. 야곱은 어디에서 얻은 지혜인지는 모르나 특별한 기지를 발휘한다.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껍질을 벗기니 얼룩얼룩한 흰점들이 생겼다. 그것을 양들이 몰려와 물먹으러 올 때 잘 보이도록 시냇가에 설치해 놓았다. 이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신기한 대책이었다. 갈증이 심해지는 오후 물먹으려 몰려드는 양과 염소들은 얼룩얼룩한 문양을 보면서 짝짓기를 하였다. 신기하게도 이 후에 낳는 새끼마다 얼룩얼룩하거나 점이 있는 아롱진 새끼들이 태어났다. 모두 야곱의 재산이었다. 외삼촌 라반이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속이는 것이라면 야곱의 속임수는 디지털적이다. 아무도 눈치 챌 수 없는 치밀한 기법이었다. 야곱은 속임수의 명수다웠다. 튼튼하고 건강한 양들이 짝짓기를 할 때는 얼룩가지를 세워 자기 것이 되게 했다. 반면 약한 양들이 짝짓기를 할 때는 가지를 치워버리니 라반의 것이 되었던 것이다.
이쯤 되니, 야곱의 재산은 날마다 번창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창 30:43).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라반의 재산은 늘기는 늘었지만 야곱의 형편만 못하였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라반의 아들들은 이런 소문을 내었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창 31:1). 이 소문을 들은 라반의 맘이 편할 리 없다. 야곱이 외삼촌의 얼굴을 보건 데 예전과 같지 않은 것이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고 소문이 꼬리를 물어오는 날이면 큰 싸움이 날판이다. 집안의 공기가 을씨년스럽다.
이 때 여호와의 말씀이 야곱에게 들려온다.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 31:3). 음성을 듣는 즉시 야곱은 라헬과 레아를 들로 불어내었다. 아버님의 안색이 예전과 같지가 않은데 시간을 끌다가는 큰일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야곱은 여기서도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도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은 야곱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돕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미 아버님은 자신을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다고 한다. 한글개역성경에 보면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라고 기술한다. 품삯을 속인 장본인은 다름 아닌 아내들의 아버지 되는 라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언제나 옳다. 야곱이 떠날 때가 됐음을 일러주신 것이다.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 하란으로 가던 첫날 밤(벧엘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던 말씀을 떠올렸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야곱은 밧단아람 땅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을 통해 온갖 시험과 훈련을 거듭하였다. 메마른 땅이요 광야 같은 땅이었다. 그것은 혈혈단신(孑孑單身) 연약하던 야곱의 삶을 풍요롭게 한 훈련장이었다. 외삼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인 외사촌들과의 온갖 풍파 속에서도 꿋꿋하게 일어서는 토대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무너지지 않았고, 재산을 탕진하지 않았다. 믿음의 시험장이었고, 감사의 시험대에서 승리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