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옛적 신앙을 기억하는 기도

옛적 신앙을 회복하고파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이제 와서 옛날이 그리운 것은 그때의 믿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 친구 박상훈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발을 들인 것이 오늘까지 이르렀다. 신앙이 뭔지도 잘 몰랐고 예배의 의미도 채 알기도 전에 교회 가면 모든 것이 신기했고 마냥 좋았다. 그래서 자주 교회를 찾았다. 아파서 학교는 결석해도 교회 출석만은 끝까지 고집했다. 새벽기도에 참석했던 시절도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어린 나이에 새벽을 깨우고 태풍이 지나간 흔적을 뒤로 하고 어스름 새벽을 달리다 고압선에 감전되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정동영 선생님이 그림 궤도를 넘기며 <천로역정>을 수요일 저녁마다 얘기하셨는데 장망성을 떠난 기독도가 십자가 앞에서 등에 지고 있던 죄 짐이 풀려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울며 회개했다. 수요일과 주일이면 울려오던 교회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어린 마음에도 신심이 자라기 시작했나 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다시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믿음은 조금씩 자라난 것 같았다. 고2때 사랑하던 막내 동생이 친구들과 바닷가에 수영하러 갔다 싸늘한 시신으로 변했다. 인생의 허망함을 절감했지만 그럴수록 교회를 찾았고 열공하던 내게 성령님이 찾아오셨다. 에베소의 성도들처럼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난 성령의 여러 현상에 많이 놀랐고 사랑하던 동생을 잃어 공허한 마음은 새로운 신앙세계에 이내 끌렸다. 당시 또래들과 함께 교회에 모여 시도한 40일 철야기도는 잊지 못할 신앙의 추억이 되었다. 수개월 후, 성령의 은사를 접한 기쁨은 대단했고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으로 숱한 집회에 참석했으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기도원 순례로 이어졌다. 목회자의 길이 어떤지 상세히 몰랐지만 당시로서는 복음을 전할 뜨거운 마음이 너무 커서 달리 의미 있는 삶을 찾지 못했다. 극구 반대하시던 어머님이 1년 후에 부흥회를 통해 은혜 받으시고 아들 앞에 무릎 꿇고 목회자가 되겠다는 헌신이 그토록 고귀한 결단이었음을 모르고 반대했음을 용서해달라며 지금이라도 마음이 변치 않았다면 신학교에 가도 좋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고 세월은 흘러 벌써 목회자로 살아온 지 41년째가 되었다.

 

세상과 절연된 골방의 기도

요즈음 자주 엎드린다. 보잘 것 없는 내 기도의 골방에 들어간다. 방이 아니라 침대 곁 한쪽 구석에 방석을 깐 것이 고작이지만 내겐 이제 익숙한 자리가 되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엎드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 이 골방에 엎드린다.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주님과 독대하는 그 자리에서 세상과 절연한 채 마음을 쏟는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것은 기도의 언어다. 세련된 문장은 아니어도 짧은 음절들로 이루어진 기도가 반복되어 토해진다. 주님 앞에 엎드린 내 모습이 어찌 그리 약하고 보잘 것 없는지, 가릴 것도 감출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자신을 가지런히 눕힌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제 육신의 껍질을 벗기고 각을 떠야 한다면 그리 하옵소서! 이 밤에 죽겠나이다. 주님의 뜻을 밝히기 위해 등잔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면 제 몸의 기름을 짜내시옵소서! 제 표현은 투박해도 제 영혼의 갈망과 진심을 주님은 아시나이다.’

종으로 불러주셨는데 종답게 살아온 흔적이 너무 적어서 부끄러움과 죄송스러움에 유구무언이다. 언제라도 이 생명을 거두신다 한들 나로선 할 말이 없다. 여러 번 사선을 넘게 하셨고 2년 전 죽을병에서 살려주신 분도 주님이시다. 데려가려 하셨다면 그때가 적절했을지 모른다. 허나 주님은 소생의 약속을 철석같은 말씀으로 확인시켜 주셨다. 그래서 몸에 또 다른 이상 징후가 생겨도 아직은 아니라는 마음이 든다. “성령으로 뜨겁게, 강하게, 새롭게, 태우시고 정결케 하시며 온전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울부짖는다. ‘이제 말씀 암송을 통한 진리의 속살을 음미해가는 중인데, 아직도 전하지 못한 말씀들이 복음의 파편 되어 제 영혼 곳곳에 박혀 있는데, 심령은 불에 덴 듯 화끈한 열기로 가득하고 입술에는 허공으로 흩어질 수 없는 말씀의 입자들이 살아 꿈틀대는데 계속 호흡할 이유로는 충분치 않겠는지요? 주님, 그저께도 엎드렸고 어젯밤에도 엎드렸나이다. 마음 같아서는 온 밤을 지새울 것 같았는데 피곤한 육신을 이기지 못해 간밤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나이다.’ “주님, 주님”을 쉴 새 없이 부르며 어느새 잠이 들었나 보다.

 

가슴을 쥐어짜며 진액을 쏟는 간절한 기도

8개월 만에 만난 김목사 내외는 여전히 굳세고 아름다웠다. 참 고달픈 세월을 지냈지만 그들의 넉넉한 마음은 한결같았고 작은 목회일망정 행복해하는 진심에 악수를 나누는 손에다 힘을 주었다. 그의 남은 사역을 응원한다. 아내는 매월 한 번 있는 지역의 중보기도 모임에 갔다. 혼자가 되니 주님이 더욱 그립다. ‘주님, 이 밤에는 제발 주님의 그 영광을 다시 뵙길 원합니다. 그때처럼 징조는 없어도 그런 갈망이 제게 넘칩니다. 주님, 자꾸 눈물이 납니다. 주님의 사랑이 한량없고 저의 불충이 깊고 두터워 더욱 그렇습니다. 흐느낌이 울음으로 변하고 애곡성이 되더니 이내 애통성입니다. 주님, 급기야 찬송을 부릅니다. 찬송가의 노랫말이 가슴을 때립니다. 수십 년간 부르며 익숙한 곡조와 노랫말들이 옛 기억을 떠올려 그윽한 감격에 휘감기는 시린 영혼입니다. 보혈의 찬양과 십자가의 찬양은 늘 불러도 은혜가 솟구칩니다. 천국에 관한 찬송 역시 더 없는 영적 감흥에 젖게 만듭니다. 곡조가 깃든 이 아름다운 기도문들에 배인 절절한 사연을 주님은 모두 아실 것이니 그 찬송의 주인공들이 지녔던 영감에 한껏 취해 부르고 다시 불러봅니다.’

깊은 밤 주변을 깨울 수 없어 가슴을 쥐어짜며 진액을 쏟아내며 읍소한다. ‘오, 주님! 내 주님! 살아계신 예수님! 이 죄인을 용서하옵소서! 저는 제 자신의 죄를 압니다. 그래서 저의 완악함과 고집을 인하여 가슴 칩니다. 악한 자들의 악행을 꾸짖지 못하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사랑 때문에 용서하는 것도 아니고 은혜로 덮는 것도 아니면서 거룩한 분노라 포장하지만 인간적 감정을 숨길 수 없습니다. 목자 잃은 양떼들을 잠시 보살피면서 험악한 현장을 매주 대해야 하는 종의 마음은 많이 상해 있습니다. 천국의 앞마당에서 지옥의 불길을 쳐다보아야 하는 괴로움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어둠은 소리 없이 찾아와서 새벽 첫 빛이 이르기까지 흑암의 깊이를 더해만 간다. 어둠이 깊을수록 주님으로부터 발산되는 한 줄기 빛의 광선이 눈부시다. 빛은 어둠을 잘게 부수면서 동시에 간절함의 열기를 북돋운다. 3년 6개월 메말랐던 척박한 땅에 단비의 소리를 듣게 했던 엘리야의 기도는 간절함으로 하늘 꼭대기에 이르게 하지 않았던가!

 

주의 긍휼 힘입어 부르짖는 기도

옛적 어린 마음에도 간절함의 의미를 어슴푸레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정말 뜨겁게 부르짖었다.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는 습관은 그때 얻은 것이다. 울부짖어 구하던 그 몸짓을 어이 잊을 수 있겠는가? 목이 터져라 주님을 부르며 회개의 동작이 뜨거운 언어와 광란에 가까운 몸부림으로 배어있었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고 얼굴이 퉁퉁 붓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래도 가슴에 쌓인 죄가 넘치는 것 같아 온 밤을 지새우며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다. 아, 그날의 주님이 그립고 그립다. 지금 내 마음의 열기는 활화산에서 분출되는 용암이나 용광로에서 쏟아져 내리는 벌건 쇳물 정도가 아니다. 지옥의 거센 불길보다 더 뜨거운 열정이 상기된 영혼을 태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외쳐야 한다. 외치기 전에 엎드려 구하여야 한다. 영혼 사랑과 복음 진리의 칼 같은 말씀. 불같은 역사를 접하게 해달라고 오열해야 한다. 내 몸의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 수만 있다면 세상을 깨우는 북소리 삼아 두드릴 것이다. 구속의 언어가 내 혀 속에서 쉼 없이 구른다. 구령열에 불타는 마음이 식기 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 고함쳐야 한다.

능력의 말씀이 풍성하나 아직도 허기진 마음이다. 주님의 은혜가 부족하진 않으나 여전히 목마르다. 내 눈에서 벗겨져야 할 비늘이 남아 있다. 영안은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주님이 하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주님보다 더 큰 일은 꿈도 꾸어보지 못한 상태다. 그만큼 내 영적 걸음은 비참할 정도로 더뎠고 사역에는 지독한 땀 냄새도 없었다. 많이 그리고 자주 울었지만 간이 물처럼 쏟아질 만큼은 아니었다. 말씀을 많이 읽었지만 통달의 길은 아직도 멀고 기도로 엎드렸지만 무릎엔 약대는커녕 토끼의 굳은살조차 박이지 못했다. 그래서 부끄럽고 여태껏 그 부끄러움을 씻지 못한 지난 세월이 마냥 억울하다. 여전히 갈 길은 멀어 출발선에 선 심정으로 전력 질주를 다짐한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주님이 길이 참아주셨다는 점이요 폐기 처분해도 마땅한 미말의 종을 외면치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이런 긍휼이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주님 앞에서 숨 한 번 내쉬기 어려웠을 것이다. 도단성을 포위한 아람 군대를 오히려 겹겹이 에워싼 천군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게하시처럼 영계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치 못하는 어두운 나의 안목을 새롭게 해주시기만을 고대한다.

얍복 나루터와 감람산로 이어진 기도의 골방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초대교회 때만의 일이어서는 곤란하다. 귀신이 쫓겨나고 놀라운 치유가 그치지 않음은 이미 중단된 사역이어서는 안 된다. 능력의 하나님은 변함없으시고 성령의 부어주심도 여전하다면 지금이야말로 더 패역한 시대이기에 더더욱 기사와 이적은 오늘의 교회가 실연해보여야 할 하나님 살아계심의 증거여야 마땅하다. 주님께서 이 작은 종의 생명을 취하시기 전까지 이런 날이 우리 가운데 보이길 앙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면 그리해야만 옳다. 결국 교회에 고유했던 영성과 권위를 우리가 상실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기도해야 할 종들이 기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쓰실 만한 도구로 준비되지 못한 나를 비롯한 이 땅의 무수한 종들에게 뚜렷한 불신과 게으름 까닭이 아니겠는가? 왜 소위 초자연적인 사역은 불가능한 영역에다 묶어놓고 작은 기적들에 만족하며 사는 성도들로 만들어버렸는가? 불같은 기도! 태양을 기브온 위에 머무르고 달을 아얄론 골짜기에 정지키시며 일영표를 15도 뒤로 물러가게 했던 그런 기도, 우주의 운행에 변화를 가져올 그런 기도에 목숨 걸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골방은 죽음의 자리다. 이 성별된 공간은 진액을 짜내는 기도를 하다 혼절해도 지켜야 할 나의 얍복 나루터요 감람산이다. 하나님이 죽이신다면 기꺼이 죽으리라!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그 얼마였던가! 지금껏 살려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분명 있을 것이다. 죽을 자리를 찾아야 한다면 말씀을 암송, 묵상하는 자리, 울부짖는 기도의 골방만큼 걸출한 명당도 없을 것이다. 좌청룡우백호가 아니라 좌말씀우기도가 명당이다. 생사의 기로에서 삶의 의지를 자주 불태웠던 나로서 생존이 얼마나 크나큰 은총인지 너무도 잘 안다. 그럼에도 은혜 안에서 죽음에의 의지를 가다듬고 생명 포기를 동경하는 것은 말씀과 기도에 그만한 가치를 두고 싶은 내 염원의 발로(發露)다. 영혼에 생기로 임한 말씀을 온 몸으로 외치리라! 뇌성이 되고 화염이 될 산 말씀을 풀어놓아 자유케 하리라! 산꼭대기에 서서 하늘 중앙으로 솟구칠 진리의 함성을 고하리라! 골짜기에서 몸을 일으켰던 마른 해골처럼 상해서 널브러진 영혼들에 이한 검처럼 베고 화살촉처럼 파고들리라! 나팔소리 들리지 않는 망루에 홀로 올라 천사장이 울릴 나팔소리에 귀 기울이리라! 북소리 잦아든 전쟁터에서 찢어진 북 대신 풀피리 입에 물고 용사의 주검을 기리리라!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체험하는 기도

‘아, 이 밤에 그렇게 주님께 나아가렵니다. 연약한 종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피곤을 핑계대지 않고 연약함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일사각오로 기도에 몰입하고픕니다. 주님, 기도의 영을 7갑절 부어주시옵소서! 저의 입술이 아니라 영혼으로 오열케 하옵소서! 소리 죽여 드리는 기도이지만 제 간구가 지옥의 터를 흔들게 하옵소서! 천국의 요소마다 세워진 종탑에서 황금종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게 하옵소서! 틈을 잇는 기도만이 아니라 빔을 채우는 기도이게 하옵소서! 천사의 날개를 펄럭이고 천군의 창검을 벼리는 천상의 메아리 되게 하옵소서! 이 밤에 드리는 기도가 화살기도, 미사일 기도처럼 보좌에 관중하는 기도이게 하옵소서! 기도 중에 스러질 수 있다면 기도에 제 마지막 호흡을 묻고 싶습니다. 언제라도 좋습니다. 수면 중이라면 꿈속에서라도 부르짖으며 주님의 품안에 들게 하옵소서! 감히 중보드립니다. 가라앉은 심령들마다 원기를 회복시키시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망을 뜨겁게 하옵소서! 멸망당한 영혼들의 핏값을 제 손에서 찾지 아니하도록 영혼 얻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게 하옵소서!’

‘오, 주님, 하나님 살아계심을 저들이 알게 하옵소서! 머리로가 아니고 습관적 인식으로가 아닌 경험적으로 알게 하옵소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알현케 하옵소서!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시고 모세와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듯 말씀하시던 그 친밀함으로 소수의 종들에게 임해 주옵소서! 칠십 장로들에게 예언의 영이 임해 예언했을 때 모세를 위해 질투하던 여호수아를 모세가 나무랐던 사건을 기억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모든 종들에게 친림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늘 소수의 택자(擇者)들에게 강림하셨습니다. 그 소수에 들기 원하는 자로서 제발 저를 그냥 지나치지 마옵소서! 하나님이 손수 찾아오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저 신학적으로 변증하고 신앙적으로 확신하며 영적 감각으로 잠시 느낄 뿐입니다. 하나님 살아계신 증거가 말씀으로 강력히 전파되기 원합니다. 하나님 살아계신 증거를 증명하는 산 역사가 뒤따르길 원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복음의 불모지에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현현처럼 영적 불모지가 되어버린 이 땅의 교회들과 심령에 폭풍처럼 임하옵소서!’


사도들의 기도가 여기서 이뤄지길 바라며

10년을 하루같이 암송하며 묵상하며 외치는 말씀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Now, Lord, consider their threats and enable your servants to speak your word with great boldness. Stretch out your hand to heal and perform miraculous signs and wonders through the name of your holy servant Jesus. 행 4:29-30) 예수의 이름이 지닌 권세와 능력, 은혜와 축복, 기적과 영광을 힘입어 오늘도 중단치 않고 이 기도를 드린다. 기대감과 함께 가난한 마음으로 골방 나들이에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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