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내 영혼을 정결케 하는 눈물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가 흘리는 것은 눈의 물 곧 눈물이 아니라 마음의 물 곧 맘물이다. 피에서 붉고 흰 혈구가 증발되어 남은 투명한 액체다. 마음이 물이 되어 흐르는 것은 찌르는 아픔 때문이다. 마음이 아파 영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만성통증에 시달린다. 내 참담한 영혼의 모습이 가여워서 울고 그런 나를 감싸시는 주님의 긍휼이 감사해서 운다. 엎드려 부르짖으나 아직 나의 기도에는 애절함이 모자라고 간절히 구하지만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탐욕으로 부어오른 간땡이가 절여져 콩알만큼 줄어들지 못했다. 세상사는 간이 클수록 좋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간이 작을수록 좋다. 예레미야처럼 간이 아예 녹아 물처럼 땅에 쏟아지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간이 줄어들기는커녕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커져버렸다. 오래 참고 기다려주셨음에도 변화를 이루지 못한 내 억척같은 의지와 쓸데없는 고집 때문이다. 그래서 하염없이 운다.

그런데 눈물로 녹이고 애통으로 녹여도 내 눈은 상하지 않고, 탄식의 눈시울에 젖고 비탄의 눈물이 흐르지만 간은 녹지 않는다. 아직도 나의 눈물은 흘릴 눈물의 적량을 채우지 못한다. 울 수밖에 없는 이유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울어야 하고 눈물샘이 터질 만큼 울고 싶다.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수분이 눈물 되어 내 육신이 미라처럼 메말라가도 내 꺾이지 않는 교만과 질긴 고집 때문에 한없이 울고 싶다. 울다 지쳐 쓰러질 정도가 아니라 울다 호흡이 멎는다 해도 울음다운 울음을 울고 싶다. 울음은 내 영혼의 정결을 위해 허락하신 은총의 액체다. 눈물이 메말라버려도 흐느낌만은 계속되리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되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니 눈물이 마를 걱정도 없다. 죽는 순간까지 내가 포기치 않고 울 수 있음은 크나큰 은총이다.

 

변하지 않는 모습 앞에 흐르는 눈물

내가 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변하지 않는 내 모습 때문이다. 변해도 여전히 변치 않는 내 알맹이가 나의 변화를 부끄럽게 한다. 극적 변화에 감격해 울고 변화의 순간을 세밀하게 묘사하면 듣는 이들도 덩달아 운다. 그럼에도 나의 변화에는 영속성이 없다. 마치 꿈속과 같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고 아무리 앞을 향해 달렸는데 돌아보면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자아의 죽음을 선포하고 믿음으로 간주했다며 당당히 일어서도 그런 나를 비웃는 것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다. 탐욕에서 해방된 지는 오래되었다. 해마다 기념하는 광복절처럼 때마다 감격을 누린다. 구원의 확신을 묻는 이에게 거듭난 시점까지 밝히며 순간 은혜의 감정에 젖어든다. 한 때 분명히 그런 적은 있지만 지금 나의 모습은 속 빈 강정처럼 비절참절이다. 사탄의 졸개들이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모습이 더욱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원수의 지적을 무시할 수 없음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탄의 정죄는 너무도 정확하고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지독한 통증을 유발한다.

욕심 사나운 사람들에 비하면 성인의 경지에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모든 욕심에서 자유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내게 어떤 바람이 있음은 욕심의 기운이다. 그것이 아무리 선한 바람이라 할지라도 가장 투명한 형태의 욕심에 다름 아니다. 성령의 소욕 안에 몸을 숨겨 아닌척해도 마음이 편치 않다. 이 바람과 소원마저 버려야 한다. 매일에 광복의 날이 되고 매순간이 영혼의 해방과 자유를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바람마저 욕심의 그림자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물이 아래로 서로 다투는 것도 욕심일까? 그게 자연스러움이라면 나의 모든 바람과 소원이 그리되고 싶다. 나는 곧게 펴졌으나 아직도 찌그러진 모습의 영혼을 사랑한다. 울면서 사랑한다. 주님이 이런 나를 품에 안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눈물은 거룩한 긍휼의 눈물

사랑하는 이를 대하면서도 가슴이 먹먹함은 왜일까? 애써 웃음 지어보여도 눈물이 메마른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내가 저를 사랑하는데 저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저의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지 못해서 눈물로 대신한다.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기쁨은 합할수록 커진다. 하지만 그런 경구가 무색하리만큼 고통은 나누어도 더욱 더 커지기만 한다. 내가 차라리 눈물을 쏟으면서 저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나는 강한 자들의 눈물을 믿지 않는다. 동정의 눈물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판다. 동정하는 본인의 영혼도 더러워진다. 동정은 사랑이 아니다. 연민의 눈물은 어떠한가? 동정보다는 훨씬 예쁜 모습을 갖추었다. 연민 또한 베푸는 자의 자기만족일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감정이 무엇일까? 자기연민이다. 주님은 자주 눈물을 흘리셨다. 고통당하고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 우셨다. 그것은 동정의 눈물도, 연민의 눈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동일시의 능력으로 느껴 우는 울음이었다. 우리는 단지 슬픔 때문에 흐느껴 운다. 그러나 주님은 슬픈 영혼을 자신과 동일시하심으로 느껴 운다. 굳이 주님의 울음을 연민으로 표현하자면 “거룩한 연민”이다. 성경적 표현은 긍휼(라함)이다. 주님의 눈물은 거의 긍휼의 눈물이셨다. 사랑과 고통이 뒤섞인 긍휼은 이미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알려주신 바다. 가시와 담으로 막고 거친 들에서 타일러도 등 돌리던 음부(淫婦) 같은 자기 백성을 향하신 애타는 눈물의 중심에 ‘라함’이 있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나를 위한 눈물과 남을 위한 눈물

상대의 고통을 나누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짊어지는 것이 긍휼이다. 난 이런 긍휼을 구한다. 거짓 없는 눈물은 긍휼에 이르는 첫 관문이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여섯 지파씩 나누어 여섯 지파는 그리심산에, 나머지 여섯 지파는 에발산에 세우셨다. 말씀 순종자에 대한 축복을 선포하실 때 그리심산의 여섯 지파는 아멘으로 화답했고, 말씀 거역자에 대한 저주를 선포하실 때 에발산의 여섯 지파가 아멘으로 화답했다. 똑같은 아멘의 화답이었지만 그들은 달리 쓰임 받았다. 솔직히 난 악인들을 향한 진노의 도구로 사용되길 원치 않는다. 의인들을 위한 긍휼의 도구로 사용되길 원한다. 하나님이 모세와 바로를 들어 사용하실 때 한 사람은 진노의 그릇으로, 다른 한 사람은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하셨다. 긍휼의 그릇으로 부족하다면 긍휼의 통로로라도 쓰이기를 바란다. 바로가 아니라 모세처럼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기를 소원한다. 긍휼의 통로나 그릇 되기 원하는 바람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은 더욱 투명하다.

나는 스스로의 곤고함과 고통의 무게에 눌려 울지 않는다. 울지 않는 소년에서 울지 않는 청년으로, 울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한 내게 눈물은 호화로운 것이다. 태어나며 큰 울음을 울었던 내게 주님의 눈물은 충격이었다. 강하기에 눈물을 거부했던 나,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강함의 나이테를 늘여갔던 난 피눈물을 흘리는 강자 앞에서 무너졌다. 강하신 그분, 능하신 그분이 상한 영혼 앞에서 우셨고 십자가 앞에서 통곡하셨다. 이제 나도 운다. 남을 위한 눈물은 주님이 주신 긍휼의 마음 때문이며 나를 위한 눈물은 내 상한 마음 때문이다. 나는 나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 나는 나를 호되게 다룬다. 죽였고 계속 죽인다. 십자가에 못 박았고 지금도 못 박고 있다. 정과 욕심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녀석들과의 줄다리기는 임종자리까지 갈 것 같다.

 

주님의 심장에 닿아있는 눈물의 원천

내게 끈덕진 마음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다. 죄와 더불어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은 나다, 눈물은 흘려도 피는 흘리지 않는다. 주님께서 피 흘려주심으로 내가 흘릴 피를 대신하셨다. 주님을 위해 운다 함은 곧 주님 때문에 운다는 뜻이다. 그 주님 때문에 나는 나를 위해 운다. 구속 받은 은혜의 감격도 있지만 그렇게 된 값어치를 하기 위해서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긍휼의 그릇이 되기 위해 운다. 긍휼로 채워지면 긍휼의 눈물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주님 때문에 나는 너를 위해 울고 교회를 위해 울고 세상을 위해 운다. 결국 나를 위한 눈물은 나의 벗과 세상에 있는 숱한 영혼들을 위한 눈물이다.

주님은 모두를 위해 우셨을지라도 나는 그러지 못하다. 나는 내 그릇의 크기를 안다. 소자인 내 뺨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은 비록 적을지라도 결코 값싸지는 않다. 내 눈물의 결정체에는 황금덩이를 부끄럽게 만들 가치가 있다. 내게 있는 눈물은 금강석보다 귀한 긍휼의 관을 타고 흐른다. 눈물의 원천은 주님의 심장에 닿아 있다. 이 눈물은 눈물샘이 아니라 영혼의 깊이에서 솟구친다. 주님이 내 영혼 깊은 곳에 생명의 샘을 파셨다. 한 바가지의 눈물도 귀하지만 한 방울의 눈물마저 허비할 수 없다.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해 흘리는 내 눈물을 주님은 자신의 병에 담으신다. 자신의 긍휼을 닮은 눈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거룩하지 못한 눈물과 긍휼에서 비롯되지 않은 눈물을 흘리곤 하는가? 악어만이 거짓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사악한 영혼의 소유자는 거짓 울음의 달인이다. 그의 우는 체하는 연기에 수많은 영혼이 무너졌다. 거짓 울음은 아예 찔끔거리게 해서도 안 된다. 거짓 울음에서 나오는 눈물은 눈물 같아도 눈물이 아니다. 거짓 눈물로 영혼을 사고파는 이들도 있다. 통곡할 일이다. 한 영혼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자는 결코 영혼을 위한 긍휼의 눈물을 흘릴 수 없다. 긍휼의 눈물 한 방울에는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값어치를 지녔다.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은 성도의 눈물을 존귀하게 여기신다.

 

나의 눈물을 닦아 주실 주님으로 만족

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가? 나중에 웃음으로 곡식 단을 거두기 위해서다. 열매가 없으면 어찌 되는가?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우리의 할 일은 열매의 수확이 아니라 씨의 파종이다. 하나님이 주시면 거두고 주지 않으시면 다시 씨를 뿌리면 그만이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고백처럼, 하박국의 노래처럼 기뻐하고 웃어야 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있어야 할 것이 없는 6겹의 고통에서도 감사한다. 육무상락(六無常樂)이다. 어디 육무상락에 그치겠는가! 모두 없어도 감사했을 전무상락(全無常樂)에도 미칠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 하박국이여!

인생이 고통과 번민뿐이라고 한탄할 이유가 없다. 흐르는 눈물을 친히 닦아주실 주님 한 분이면 족하지 않은가? 주님 한 분이면 족하다.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해야 한다.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주님이시라면 우리가 흘리는 눈물에 적어도 재를 섞지는 않을 것이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우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시편 기자는 우리의 눈물을 병에 담으시는 주님을 노래했지만 요한이 그린 주님은 우리가 흘리는 모든 눈물을 깨끗이 닦아주실 분이시다. 그래서 그 나라에 이를 때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웃음뿐일 것이다. 마지막 웃음을 짓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를 위한 긍휼의 눈물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이 웃게 하실 날까지 채울 눈물

가장 잘 웃는 자는 최후에 웃는 자다. 마지막에 웃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지나치다 할 정도로 울어야 한다. 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지체 말고 울어야 한다. 사방의 환경이 눈물뿐이고 내가 흘린 눈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가 된다 해도 울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시게 하는 형편에서 너털웃음을 웃는 것은 강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눈물도 헤프지 않지만 웃음도 헤프지 않다. 하나님이 웃게 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까지 계속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우는 것이 아름답다. 때에 맞는 통곡은 풍악 소리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다. 그것이 낮은 흐느낌이나 가벼운 훌쩍거림이든지. 슬픈 애곡성이나 통한의 애통성이든지, 그것이 합해져 거대한 통곡이든지 울 수 있는 정도로 울고 싶은 만큼 울어야 한다.

나는 욥의 눈물을 사랑한다. 생명을 닳아가며 내질렀던 고통의 비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불타버린 잿더미 위에서, 붕괴되어버린 삶의 현장에서, 무너진 터, 거름무더기에 퍼질러 앉아 방성대곡하던 그의 처참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긍휼의 그릇과 통로에 눈을 뜨게 하시고 뒤늦게 눈물샘을 터트린 주님을 찬양한다. 주님은 아예 나를 눈물의 강과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 그때 이후로 나는 자주자주 눈물을 흘리며 그 흘린 눈물을 다시 마신다. 홍해를 갈라지게 하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것은 주님의 손길이었다. 바닷물의 경계를 명하시고 파도의 침입을 한정지으신 주님께서 능히 눈물을 닦아주실 것을 알기에 쏟아지는 눈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들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만은 아니다. 그 아픔을 녹여내지 못하는 내 사랑의 열기가 부족해서 더더욱 한탄한다. 그렇게 연단하고 엎드리고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음에도 여전히 나는 넘치는 긍휼의 바다를 헤엄치지 못하고 기껏 발목이나 무릎 정도를 적시면서 만족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이 아프다. 주님이 주신 때를 놓쳐서이다. 또 다시 영혼을 적실 적시(適時)를 기다려야 하는 이 상황을 어이 탓하랴? 그것이 육신에 매인 내 영혼의 한계인 것을! 그것도 내가 우는 이유 중의 하나다. 내 평생에 웃음을 거둬가는 대신 울 수 있는 눈물의 양이 채워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할 눈물의 양을 비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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