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관심의 크기가 내려놓음의 질과 양을 결정한다.

8월 14일 저녁 춘천을 향해 달려갔다. 기도원 마당에 잔디가 무성하게 자랐고, 주변에 풀이 많이 자랐다. 저녁 8시 서치 등을 환하게 밝히고 마당의 잔디를 깎았다. 낮이 아니라 밤이라 강렬한 햇빛이 없고, 선선한 바람도 불기에 일하기 좋은 밤이다. 몸에서 땀이 물 흐르듯 샘솟고 있지만 행복하다. 예초기가 지나간 자리는 일정하게 정리되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마당의 잔디가 보기 좋은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내 마음도 깨끗하게 정리되는 기분이다. 홀로 밤하늘의 별과 구름을 보며 깊은 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맑은 공기를 마시는 시간이 왜 그리 행복한지. 진정한 힐링은 나의 땀 방울과 마음과 정성이 쏟아진 곳에 있음을 다시 기억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행복'이란 형용사를 느끼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다. 나를 비우고 진액을 태울때  찾아오는 기쁨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너무 머리로 계산하고 살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떠나 말없이 봉사의 삶을 산다면, 땀 방울이 주는 그 깊은 의미를 쉽게 느낄 수 있다. 때로는 거꾸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도 행복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 '머리'로 살던 사람은 '몸'으로 반응하고, '몸'으로 반응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머리'를 사용하면 된다.

나의 삶의 자리는 목사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 앉아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만나 회의를 하고 교제를 하며 상담을 한다. 머리를 쓰고 사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거꾸로 삶의 계획표를 만들어서 살고 있다. 시간이 나면 운동삼아 교회를 가꾸거나 주변을 정리 정돈한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내 안이 정결해지는 기분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온 느낌이다. 머리를 쓰고 살던 사람이 여가 시간에 머리를 쓰는 일을 한다면 금방 탈진이라는 진단이 내려질것이다.  그러면 좋은 일을 하면서 행복과 거리가 먼 지친 심신을 가지고 불행이란 늪에 갇히게 된다.

교회 생활을 힘들어 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조금만 봉사라는 짐이 주어지면 왜 그리 힘들어하는지, 불편함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 편한 예배, 편안 나눔, 편안한 공간, 편안한 대접, 모든 것이 자신의 '편리함'과 '편안함'이 중요한 목표요 관점이 되었다. 목회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교인들에게 봉사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교회 풍토이다.  교회보다 나의 목표가 더 중요하면 더 이상 헌신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헌신없는 신앙, 희생이 없는 삶은 늘 불행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너무 머리로 재단하고, 계산하는 삶을 청산해야 한다. 그래야 행복이란 진정한 힐링을 선물 받을 수 있다. 행복의 가치는 돈으로 경험할 수 없는 진정한 삶의 활력소이다.

잠을 자고 일어나, 8.15을 다시 기억하는 아침이 되었다. 금년에는 민족의 해방을 맞이한지  74주년이다. 문득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된 시가 생각이 났다. 그들은 그 해방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126편).

 

우리 선조들도 36년간의 치욕과 설움앞에서 갑자기  찾아온 조국의 해방앞에서 목 놓아 울었고, 뛸 듯이 기뻐했고, 심장이 터질것 같은 기쁨으로 길거리로 뛰쳐나와 외쳤다.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양손에 태극기를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눈물로 기도의 제단을 쌓았다.

지난 밤에 이어  8.15 아침에 기도원 주변 풀을 깍았다. 내가 쓰임받을 곳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땀을 흘릴 장소가 있다는 것이 왜 이리 감사한지...

핸드폰을 열어보니, 페북에서 2013년 8월 15일에 쓴 글이 떠 있었다. 글을 읽어보니 미리 예고도 없이, 하루 전날밤 성도들에게 교회 공사하니 시간 계신분들은 교회로 오세요라는 공지를 했다. 과연 의논도 없이 진행된 공사에 누가 참여할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그 날의 기록을 페북에 남겼는데, 6년 만에 잊혀졌던 추억을 읽게 되었다. 참으로 행복했다.

6년이 지난, 오늘 나는 교회가 아니라 기도원에서 비를 맞으며 풀을 깍고 있다. 청승 맞은 모습이 아니라 행복한 모습으로 주님의 성전 주변을 정리하고 있다. 나의 땀방울이 흐르는 곳은 언제나 의미가 있고, 그 끝은 진짜 행복하다는 말로 마무리가 된다.

 

 

▣교회 식당 새옷 갈아 입히기

     (2003년 8월 15일 페북에 남긴 글)

 

3년만에 교회 식당의 외벽과 데크와 모든 나무로 만든 테이블을 도색했다.

새벽 5시부터 시작된 공사가 저녁 7시에 끝났다. 무더위를 직접 맞으며, 오늘을 보냈다.
성도들과 땀을 흘리며 함께 교회를 가꾸었다.

미리 계획도 되어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어제 교회 공사 메세지를 보냈으니, 성도들이 얼마나 황당할까?

그러나, 우리는 해냈다.
또 한 고비 믿음의 거룩한 추억의 사건을 써내려갔다.

함께 동참했던 성도들의 내려놓음의 헌신.
이들은 오늘 시간과 노동과 땀을 드렸다.

장로님은 가족들과 함께 외출을 계획했던것을 포기했고,
집사님은 사업상 바쁜 스케줄인데, 오셔서 오후 2시까지 함께 땀을 흘렸다.
젊은 집사님들은 광복절날 자녀들과 나들이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목사의 메세지받고, 눈총을 받으며,
교회로 달려왔다.
또, 청년들은 아침 일찍나와 몇시간 일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달려갔다.

목사를 잘못 만나,
황금같은 연휴 첫날,
힘든 노동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했고, 최선을 다해 땀과 정성을 드렸다.
단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기에
오늘이란 연휴 첫날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랑과 관심의 크기가 내려놓음의 질과 양을 결정한다.

나는, 하루종일 함께하면서
이런생각이 들었다.

우리 세대는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철저히 주님께 내려놓는 것이, 익숙하고 편한데.

우리를 이어갈 다음세대 친구들도
우리처럼 할수있을까?

사전에 어떤 교감도 없이
갑자기 교회일이 있으니
시간되시는분 동참하세요.
메세지 달랑받고,
시간을 포기하고 기꺼히 달려올 수 있을까?

웬지, 자신이 없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실때
그 장면이 계속 머리에 빙빙 돌았다.
나를 따라오라는 그 한마디 듣고
제자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즉시 예수님을 따랐다.

이것이 제자다.
제자는 자기의 생각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나를 부르시고, 선택하신,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달려가는 순종의 사람이다.
여기서부터
사역이 시작된다.

그런데, 오늘날 제자들은 사역을 시작도 하기전에 너무 자기생각에 빠져있다.
너무도 똑똑해서 주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왜, 그렇게도 빈공간이 없는지,
왜, 그렇게 복잡하고, 이유와 변명이 그리 많은지...

나는 목회자로서 행복하다.
마음껏 섬길수있는 주님이 계시기에 행복하다.

마음껏 나의 전부를 드려도 늘 더드리고 싶어서, 목말라하는 교회가 있기에 행복하다.
목사에게있어서 교회는 단순히 재정을 보충받는 직장이 아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교회는 나의 생명의 가치를 전부드리는 결단과 드림의 장소이다.
나의 존재의 가치를 늘 확인할수있는 교회가 있다는것이 눈물 나도록 행복하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땅에서 목사다운 분이라고 인정하며, 목사를 아끼고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내가 이땅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보살피고, 격려하고, 주님의 나라와 의를 함께 세울 동역자들이 있기에 행복하다.

헌신, 내려놓음, 포기, 드림, 섬김, 복음, 십자가, 부활, 재림, 천국, 구원, 사다리되어주기, 복음, 열방, 전도, 선교

나는
이 단어들을 좋아한다.

오늘
다시 결단해본다.

하나님보다 앞선 가치는 절대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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