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풍전등화 조국 앞에 상하도록 흘릴 눈물

나는 유다의 마지막 시기에 살았던 예레미야처럼 시대의 마지막 때를 살아간다고 믿는다. 전쟁과 난리의 소문이 그치지 않으나 사람들은 평화를 외친다. 세계 도처에서 경고음이 들리나 사람들은 잠시 놀라고 이내 잊는다. 웃음과 환호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웃음을 잃어버린 나는 울 수밖에 없다. 나도 환한 웃음을 짓고 싶지만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 다수의 군중은 택한 백성을 지킬 것이라는 약속에 기대어 풍요의 노래를 합창한다. 평화를 외치고 약속을 상기시키는 위로의 메시지가 강산에 차고 넘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는한 조국의 미래는 견고하다고 외친다. 나도 진정 그러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허나 영적 현실은 그와 같은 안전보장에서 거리가 멀다. 하나님이 높이 드신 심판의 채찍을 거두시지 않는한 조국은 풍전등화의 위기다. 경계의 말씀과 담즙 같은 말씀을 흘리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마음에 순종함이며, 긍휼의 눈물에 영혼을 적시는 것은 지금이 웃을 때가 아니라 울 때임을 알기 때문이다. 경건한 눈물의 사람이 그립다. 주님! 눈물에 상하기까지 울게 하소서!

2차 대전의 영웅들인 미소불독(美蘇佛獨)의 맥아더, 쥬코프, 롬멜, 몽고메리에 비견될 정도로 걸프전의 영웅으로 부각되었던 슈와르츠코프(H.N. Schwarzkopf Jr.) 사령관이 ABC방송의 바바라 월터스와 대담을 가졌을 때의 이야기다. “오늘날 미국의 가장 큰 적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미소 짓는 불독의 얼굴인 사령관이 건넨 답변은 의외의 내용이었다. “이라크와 같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이 나라에서 눈물 없는 남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강한 남자는 눈물 흘리지 않는 자인가? ‘그렇다’라는 분위기에서 자란 철부지는 고교 시절 사랑하는 막내가 익사했을 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육신과 마음의 고통을 겪는 상황에 처해서도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주님의 절절한 사랑에 눈물을 쏟고 난 이후로 눈물은 주님 앞에 엎딘 나의 표징이 되었다. 예전에 비해 결코 약해지지 않은 자신이지만 자주 그리고 뜨겁게 눈물을 흘린다.

 

아프고 슬퍼도 눈물 없던 강한 남자

졸병 시절의 군대 이야기 한 토막! 탄약사 경비를 맡았던 경비중대에 소속되어 근무 중일 때 술 취한 중고참이 대뜸 졸병 둘을 불러 호통을 치더니 다짜고짜 엎드리게 했다. 충청도 시골 출신이었던 중고참은 평소에 잘 대해주던 호인이었다. 술이 호인을 괴인으로 돌변시켰다. 근처의 소나무 군락지에서 소나무 한 그루를 꺾더니 낫으로 대충 다듬어 꽤 굵은 몽둥이를 만들어 무지막지하게 내리쳤다. 전우는 한 대 맞을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떼굴떼굴 굴렀다. 나도 꽤 맞았고 우악스런 힘으로 쳐대는 매질에 상당히 아팠지만 일체의 고통스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함께 맞았던 전우는 엉덩이 살이 다 해져 그 밤에 울먹이며 잠자리에서 말했다. “당장 돈을 써서라도 이놈의 부대를 떠날 거야!” 다음 주에 착한 얼굴의 전우는 편한 운전병으로 옮겨갔다. 필자는 엎어진 채로 보름을 누워 지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강한 남자라 생각했었다. 그것은 강함의 표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랜 습성 탓인지 여전히 우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 그래도 자주 눈물 흘린다. 물론 아무 때나 값싸게 눈물샘을 가동시키지는 않는다. 역시 군대 시절에 제대 말년을 앞두고 세 번째 공수유격을 갔을 때 맹장이 터져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몇 시간에 걸친 수술은 잘 되었으나 열두 군데 실로 꿰맨 곳에 농이 생겨 살이 안쪽으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보름을 중환자실에, 거의 한 달이 넘도록 일반 병상에서 보내야 했다. 재수술을 위해 썩어가는 부위를 빙 둘러가며 생살을 도려내기로 결정했을 때 난 군의관에게 마취 없이 해줄 것을 부탁했다. 일인용 침대에 누워 양손으로 침대 다리를 붙든 채 큼지막한 가위로 생살을 도려내는 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수술을 마쳤다. 군의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슬프고 아파도 울지 않고 신음소리 내지 않는 것을 강함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깨어진 영혼에서 솟구치는 눈물

현대교회의 가장 큰 약점 역시 신자들의 눈에서 눈물이 메마름이라 단정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영적생활의 최고 단계에서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눈물 경험을 많이 한다. 말씀을 읽기만 해도 눈물이고 기도를 하거나 찬송을 할 때면 어김없이 눈물이 난다. 설교를 눈물 없이 외칠 수 없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다. 길을 걸을 때나 일을 할 때, 깨어 있을 때나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한 눈물이 넘친다. 주의 종을 생각해도 눈물이요 신자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다. 눈물 없이 보내는 날이 없을 정도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눈시울을 충혈 시키고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볼을 타고 흐른다. 그런데 그 눈물이 언제부턴가 마르기 시작했다. 메마른 눈물은 영혼의 적이다. 팍팍한 삶은 오랜 가뭄 끝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균열이 간 마음의 흔적이다. 메마른 생각에서 터져 나온 말은 푸석푸석 먼지만 일으킨다.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마음을 녹일 것은 하늘의 보물인 새벽이슬이다. 하늘의 은총에 닿은 한 방울의 눈물만이 메마른 영혼을 살리는 단비다.

눈물은 감성만이 아니라 영성의 표현이다. 영이 깨어진 사람에게는 영성 깃든 눈물이 있다. 눈물은 눈물샘에서 흐르기 전에 긍휼로 다져진 마음에서 흐른다. 깨어진 영혼에서 깨끗한 눈물이 솟구친다. 아픈 만큼 성숙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만이 아니다. 눈물도 아픈 만큼 정결해진다. 깨끗한 눈물을 머금은 눈은 얼마나 그윽하고 아름다운지! 메마른 마음에는 이런 눈물이 고이지 않는다. 눈물을 강수처럼 쏟아도 마음을 적시지 못한다. 이런 눈물에 젖지 않은 영혼에는 온기가 없다. 냉혹한 사람은 울지 않는다. 세상에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진 영혼이라야 운다. 우리가 주님 제자의 길을 걷는 신자라면 마땅히 울어야 한다. 세상이 가슴을 치지 않아도 우리는 슬피 울어야 한다. 우리가 우는 것은 세상의 반응을 기대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패역에 우리 자신이 반응해서 운다. 형형한 눈빛도 아름답지만 촉촉이 젖은 눈을 바라보노라면 선한 분위기를 느낀다.

 

눈물로 교신(交信)하고 통곡으로 화답(和答)하라

독사 같은 눈빛에는 눈물이 고일 수가 없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눈을 비둘기에 비유했음은 맑고 순결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투명한 눈물 빛은 순결함과 정결함의 정수(精髓)다. 눈에 힘이 들어가면 눈물샘이 닫힌다. 나는 인간의 감정을 넘어 성령의 감동을 따라 우는 거룩한 울보가 되고 싶다. 영혼을 사랑해서 울고 영혼이 안타까워 울며 건짐 받은 영혼이 기뻐서 울고 싶다. 그런 눈물이 내 눈에 고일 때 나는 무한한 감격과 은혜를 느낀다. 오랫동안 긍휼을 위해 기도했기에 긍휼의 눈물이 흐를 때 눈은 눈물에 젖어도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 찼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긍휼과 애통이 있다’고. 거룩한 눈물이 동반된 긍휼과 애통에는 하늘의 자비와 위로가 약속되었다. 그래서 함께 울기를 권하는 것이다. 울고 울자!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대지를 적시고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마음을 적신다. 하늘이 흐느끼면 이슬이 되고 울면 비가 되고 울부짖으면 눈비가 된다. 마음이 흐느끼면 애곡성이 되고 영혼이 오열하면 애통성이 된다. 증자(曾子)는 “새가 죽을 때에는 그 울음이 구슬프다”(鳥之將死 其鳴也哀) 했는데 나는 살아서 애달픈 울음을 울고 싶다. 안톤 슈나크(Anton Schnack)는 그의 뛰어난 수필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노래했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슬프게 하는 것들, 일상의 경험만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 펼쳐지는 온갖 일들 때문에 눈물을 쏟아야 한다. 그런 연유로 함께 눈물 흘리는 이들이 정한 곳에서 정한 시간에 정한 목적을 위해 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피리 소리 듣고 가슴 치며 성전 한구석에 엎뎌 가슴 치는 세리 같은 거룩한 울보들이 눈물로 교신하고 통곡으로 화답하는 그런 일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원한다.

 

내일이 없는 미래를 위해 흘릴 눈물

세상 사람들은 이유도 모르고 눈물을 터뜨릴 때가 많지만 신자에게는 까닭모를 눈물이란 없다. 예레미야의 말이다.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렘 22:10) 과거 때문에 울지 말고 미래가 없는 미래를 울라는 말이다. 성인(요시야 왕)은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애도할 이유가 없으나 악인(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왕)은 귀향길이 막힐 것이니 울어야 한다. 희망이 사라진 삶엔 울만한 이유가 있다. 희망 속에 거해도 울어야 한다. 우리의 희망이 내 자녀들의 세대에도 그렇게 작용하기를 기대하면서 탄원하는 심정으로 울어야 한다. 얻기보다 어려운 것이 지킴이라면 우리가 힘들게 얻은 희망의 성채를 자녀들이 온전히 보전시켜 가도록 지금은 울며 씨를 뿌려야 한다. 우리의 눈물은 끝났을지라도 그들의 풍성한 곡식단이 있을 내일을 위해 눈물의 파종을 감당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주님을 위해 우는 자들이 있었다. 가슴을 치면서 슬피 울던 여인들은 큰 무리를 이루었다. 주님은 그들의 울음을 중단시키셨다. 그들이 정작 울어야 할 대상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녀였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우리는 주님을 위해 울기 원한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자신을 위해 울 것을 명하신다. 자신을 위해 진심어린 눈물을 흘러보지 않는 자가 주님을 위해 적절한 울음을 울지는 못한다. 자식을 위해 뜨거운 눈물 흘리지 못하는 자가 주님을 위해 진정한 울음을 울기는 어렵다.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자식을 위해 뜨겁게 눈물 흘려야 한다.

지금은 울고 탄식할 때다. 우리의 둔감해진 영혼을 각성시키려면 울어야 한다. 기후의 변화를 예측하면서 춤추고 울어야 할 때를 분간치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자 울어야 한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우리 모두는 울며 통곡해야 한다. 말씀을 거점 삼아 기도하며 기도를 그루터기 삼아 말씀을 외치지 못하는 우리의 유명무실한 경건을 내버리기 위해 울어야 한다. 아직도 죄 가운데 머물며 주님의 품에 안기기를 거절하는 우리의 잘난 자식들을 위해 울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함 없이 세상의 성공과 향락에 코가 꿰어 정처 없이 끌려 다니는 신자들의 행적을 그치도록 울어야 한다. 우리와 우리의 자식을 위해 울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구원과 성도들의 변화를 위해 울어야 한다.

 

눈물로 세워진 사도, 눈물로 씌어진 서신

주님을 만난 바울이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신의 중죄, 교회의 싹들을 잘라버리고 신자들을 투옥하며 죽이는데 앞장섰던 대죄를 놓고 회개와 자성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저주와 패배의 십자가가 축복과 승리의 십자가로 대체되는 경험을 온 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향한 그의 여정은 이후의 선교 사역에 크나큰 이정표가 되었다. 그곳에서 모세오경과 역사서와 그리고 시가서와 예언서들을 다시 읽고 묵상하며 복음의 빛 안에서 재해석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회개와 경건의 능력을 위한 기도에 그치지 않는 눈물로 채웠을 것이다. 하도 울어 그에게 육체의 가시인 안질이 생겼던 것은 아닐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라비아의 3년이 없었다면 사도행전의 역사는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눈물의 사도였다.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만난 주님으로 인해 3일간 실명 상태에 놓였을 때 마치 소경처럼 진리를 모르고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하나님의 아들을 욕되게 했던 그 일이 생각나 통한의 눈물을 엄청 쏟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포박되어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 순교 당했던 이들의 기억으로 매일을 눈물로 보냈을 것이다.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하는 전도자의 길로 나서며 한 때 그가 헐었던 주님의 교회를 다시 세우며 신자들을 가르칠 때 그의 삶과 사역에는 눈물이 메마르지 않았다. 실제로 바울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에베소의 성도들을 훈계했다(행 20:31). 고린도교회를 위해 애통한 마음과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써 보냈다(고후 2:4).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눈물로 잘못을 지적했다(빌 3:18). 자신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해 마음에 그치지 않은 고통과 큰 근심으로 짓눌렀던 것은 뜨거운 눈물의 중보였다(롬 9:1-3). 모세, 사무엘, 예레미야, 주님처럼 그는 쉼 없이 울었다.

 

주님은 내 눈물의 근원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있다. 달리 괴로움이 있어서가 아니다. 삶은 평탄치 못해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의 고통과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살아가면서 한 번도 햇볕을 쪼이지 못했거나 바람을 맞지 않았거나 비에 젖지 않았던 사람은 없다. 거친 땅에 호흡하며 살면서 벌레에게 물려 죽을 수 있는 인간의 처지란 모두 거기서 거기다. 아무리 잔잔한 호수라도 미세한 물결의 흔들림을 들여다보면 빠르고 거세며 격렬하다. 삶의 아픔과 무거움은 살아있음의 존재양식이다. 알 수 없는 눈물의 근원을 더듬다보면 내 존재의 깊이가 그렇게 얕음에 놀란다. 갈고 닦은 영성의 깊이는 한 길의 깊이에서 헤매고 영혼의 갈증은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넓이로 마음을 짓누른다. 주님의 존재가 내 삶을 공기처럼 채우면 영혼은 긍휼의 눈물과 함께 한 치의 깊이를 내린다.

주님은 내 눈물의 근원이다. 그분을 생각하고 묵상함이 즐겁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되어 내 속의 나를 적신다. 울컥 하는 마음과 동시에 흐르는 것은 눈시울이 아니라 굵은 눈물이다. 투명한 눈물방울에 비친 것은 영롱하신 주님의 형체시다. 내 영혼을 채우신 주님이 한 방울의 눈물에 환상처럼 비친다. 울지 않고 배길 수 있으랴? 오늘 나는 이 눈물에 젖어 강단에 오를 것이다. 쓰러졌지만 다시 일으키시는 그분 손길을, 그렇게 재기와 역전의 삶을 일궜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러기 원하는 내 영혼의 작은 소원을 말할 것이다. 지옥으로 달려가는 영혼을 아버지의 품으로 이끌기 위한 영적 싸움의 싸움은 녹록치 않다. 피땀눈물을 쏟으며 외친다. 내가 눈물 흘리는 이유는 단 하나, 사랑에 빚진 자로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한 영혼을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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