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사형수인 자신을 사면해 주신 감격

요한 11장 1절-44절 나자로야, 네 무덤에서 일어나 나오라! 

예수께서는 왜 나자로가 죽은 다음에 찾아오셨을까? 수많은 예루살렘의 목격자들 앞에서 죽은 나자로를 부활시키신 이유는 무엇일까?

죽은 인간을 되살리는 위력에 두려움을 느낀 인간들은 없는 죄도 뒤집어씌워 살해하려고 달려드리라는 것을 예수께서는 아셨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왜 그 두려운 권능으로 그 살인자들을 징계하지 않으시고, 그냥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을까?

예수께선 자신의 부활 이후에도, 나자로 경우와는 달리, 자신을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이들 앞에만 나타나셨다. 왜 자신을 불법재판으로 살해한 자들 앞에는 직접 나타나지 않으셨을까?

나자로 부활 사건을 대하면, 이런 여러 가지 질문이 함께 떠오른다. 그리고 그 여러 질문들이 합쳐져, 단 하나의 질문으로 정리되어 떠오른다.

사람들은 예수와 만나는 첫 순간을, 일상적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다를 바 없는, 그저 평이한 일과(日課) 중의 하나로 지나칠 수 있다. 또 사실 그렇게 지나치곤 한다. 관계를 맺는 모든 이들에게 있는 개별성, 예수에게도 그런 남다른 개별성은 있긴 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 예수의 남다른 개별성이 자신의 전 생애를 바꾸는 충격이라고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이도 없고, 그럴만한 자세를 가진 인간도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미 깊은 영적 죽음의 잠에 침몰해 있는 까닭이다. 그 육체 또한 영적 죽음의 결과로 ‘죽음을 향해 침몰해 가는 존재’인 까닭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이 영적 죽음의 잠을 일깨우러 오신 ‘새 아담’이시다. 영적 죽음의 잠을 깨우심으로써, 인간의 육신도 흙으로 다시 해체되어 되돌아가는 비통한 슬픔에서 건지시고자 오신 메시아이시다.

그러나 인간 가운데에는 그것이 자신의 ‘영적(靈的) 죽음’의 잠을 일깨우는 엄청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이가 없다. 또 이 영적 죽음이 결국 육적(肉的)인 죽음까지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인간도 없다. 그것도 그럴 것이, 원래 죽은 자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로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자로 부활 사건은 이처럼 ‘예수 앞에 선 인간의 영적 죽음’을 들어내 줌에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이 이 사건이 주는 첫 번째 중대한 메시지이다.

그렇다. 죽은 나자로! 바로 이 사람처럼 어떤 인간이든, 예수라는 빛 앞에 끌려오는 순간, 이미 ‘진행되고 있는 영적 죽음’의 잠을 자는 자로 드러난다. 그 사실을 감출 수 없이 발가벗겨진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실존 상황을 나자로는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영적 죽음을 인해 필연적으로 닥칠 육신의 죽음의 증상도 폭로하고 있다. 예수께서 나자로의 죽음의 현장에 찾아 오셨을 때, 통분히 여기며 우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 우신 이유를 보면, 나자로 육신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이셨을까?  이 문제를 풀면, 앞서 말한 첫 번째 메시지의 근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이 예수 앞에 놓인 인간의 죽음일까?” 바로 이 문제가 여기서 반드시 인식이 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나 방향 정도는 반드시 잡혀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죽음의 현장에 나타나시는 시각(時刻)을 처음부터 나자로의 숨이 진 이후의 시각으로 택하시고 있었다. 그것도 사람들 보기에 나자로 시체가 썩어 냄새가 진동할 시각을 고의적으로 기다리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신 목적이 ‘이미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인간을 깨우러 오셨음’을 들어내 주고자 함이다. 그것이 이 사건이 주는 두 번째 메시지이다. 죽은 나자로가 되살아나 무덤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오듯, 예수를 만난 모든 인간들은 죽었다가도 되살아나야 함을 보여준다. ‘전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 사건을 예수 자신께서 ‘거듭 남(重生)’이란 용어를 쓰셨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라고 하셨다.

얼핏 보기에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결하면, 두 번째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히 들어난다.

“무엇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 난 생명일까?” 바로 이 문제가 여기서 반드시 인식되고, 받아 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나 방향 정도가 반드시 잡혀야 한다. 나자로 사건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온 세상에 명확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죽음의 형벌 아래에 놓인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있음을 온 세계에 알리고자 나자로가 죽은 다음에 예루살렘 문턱에 있는 베다니 마을로 찾아오신 것이다. 그것도 ‘예수 수배령’이 내린 상황에서 몸을 드러내고 찾아오신 것이다. 그것이 이 사건을 통해 던져주는 세 번째 메시지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예수께서 그 공생애(公生涯)를 마감하려던 해의 유월절 바로 얼마 전이어서, 그 명절을 위해 전 세계로부터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순례자들과 장사꾼들이 예루살렘으로 엄청나게 몰려드는 계절이다. 또 나자로는 예루살렘 주변의 빈민들에게나 부자들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살다 죽은 장소는 예루살렘 입구이기도 하고 부자와 빈민들 거주지역의 경계선이 되는 베다니라는 마을이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때와 인물과 장소를 골라 죽은 사람을 되살리셨다. 왜 그러셨을까? 

“죽은 인간을 되살리고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여기 있다!” 이런 메시지를 세상에 던지는 행위이셨다.

예수께서 나자로를 부활시키며,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러나 예루살렘 종교-정치의 담당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예루살렘 시민들은 어떤 자세를 취했는가?

바로 죽은 자를 되살려준 그 일 때문에 예수에 대한 수배령(手配令)은 한층 더 심하게 강화되었다. 예수 살해자들은 밤중에 불법재판 자리를 여는가 하면, 소수 시민들의 데모조차 막을 힘도 없는 빌라도 법정에 이 예수를 세워놓았다. 그리고는 동원된 군중의 함성이 터지게 하며, 빌라도를 압박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그를 살해한 값은 우리와 우리 후손이 받을 테니, 빌라도 당신은 우리에게 그를 죽이도록 허락하라!” 그런 일을 당할 것을 잘 아시는 예수께서 미리 던지시는 메시지!

이런 메시지가 이 나자로 부활 사건 속에 들어있다. 그런 메시지 내용은 그 전후 컨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약간의 부연(敷衍) 설명을 여기 덧붙인다.

예수께서는 원래 나자로 뿐만 아니라 회당장(會堂長; Synagogue의 관리 책임자이면서 오늘의 초등학교 교장에 해당됨.) 야이로의 딸과 나인이란 성(城)의 과부 아들도 부활시키신 일이 있다. 그런데 그 두 경우는 예수께서 그 시간과 인물과 장소를 의도적으로 택하지를 않으셨다.

그래서 나자로 부활 이전의 두 사건은 인간의 부활이 구원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날 일로 여겨지게 하는 메시지가 아직 명백하지를 않았다. 그저 아주 잘 신뢰하고 이해해 주어 보았자, ‘옛날 엘리야 선지자 같은 이가 죽은 사람 살려 줬다더니, 그런 일이 또 한번 예수에 의해서도 벌어졌구나.’ 하는 정도로 여기고 지나칠 수 있었다.

이런 부활은 구원받는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여긴다. 왜냐하면, 그 되살림 받은 경우가 극히 예외적으로 특혜를 입은 이들에게나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런 기적으로 되살아난 사람들이 모두 결국 그 몸이 다시 흙으로 돌아갔었다. 동시에 이 기적을 행하신 예수께서 ‘부활은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날 일’이라고, 아직 대중들에게는 직접 선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자로 이전의 부활 사건은 아직 예외적인 ‘특이(特異)의 경우’로 여겨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예수의 활동에는 그의 적대 세력이 퍼뜨린 악의적인 루머가 항상 따르고 있었고, 예수께서는 그에 관한 무슨 해명이나 변명 같은 것도 하지 않으셨다. 또 예수께서는 나자로 이전의 부활사건에서는 무슨 특별한 해석이나 설명이 없이 지나치셨다. 그래서 악한 소문이 실제 사건보다 더 많이 부풀려졌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이 두 기적에 대한 신뢰감이 희석(稀釋)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나자로의 부활 사건은 모든 인간을 죽음의 저주에서 영원히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의지를 예수께서 스스로 드러낸 사건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선, 예수께서 이 사건을 다른 부활 사건과 어떻게 차별화해서 다루시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특히 이 일을 하고자 했던 당시, 당국에 의해 ‘예수 체포령’이 내린 상황이었음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바로 대 도시 예루살렘 교외인 베다니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끓게 되는 유월절 계절이 다가오는 때에, 공개적으로 듣고 보도록 죽은 사람을 되살려 주는 행동을 하셨던 그리스도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죽은 나자로를 향해 “나자로야, 나오라!”하고 당당하게 외치시는 예수의 모습을 한번 상상을 해 보라. 예수를 이해 못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당연히 정신이 좀 돈 사람이거나 요술을 가장한 속임수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사건은, 온 예루살렘에 대소동이 일어날 만큼, 나자로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보고 들은 민중들에 의해 확인이 되도록 전개되었다. 동시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부활시킨 사건들도 그 동안 이상한 루머와 함께 그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고 있었는데, 이젠 그것도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 루머라는 것도 실은 예수의 반대파들에 의해 날조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예수는 귀신들린 정신 이상자도 아니고, 속임수 이단이나 요술쟁이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예수에 대한 그들의 악의와 살해음모가 백일하에 들어 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를 신뢰하고 따르는 민중들은 그와 너무나 대조가 되는 유태(猶太) 특권층의 야비한 위선(僞善)에 대해 언제 거대한 거부의 물결을 일으킬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예수의 반대파들은 이 사태에 대한 양단간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런 조치가 없으면, 자신들의 사회적 특권과 명예가 송두리 채 붕괴될 위기감을 느낄 정도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유월절을 그냥 넘기면, 그 위험한 상황은 필연코 닥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수배령에 따른 조치를 더욱 강화했다. 당시의 이런 역사적 상황을 사실대로 바르게 인식하고,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기 전에 그 무덤 앞에서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의미를 음미해야 한다. 그러면, 이 세 번째 메시지가 명백히 들어 날 것이다. 특히 이 기도를 드린 동기가 이 세 번째 메시지와 관련된다는 것을 유념(留念)하여 살펴야 할 것이다. 그 세 번째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새겨보자.

“죽음의 형벌 아래에 놓인 인간을 되살리고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여기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 실제로 죽은 사람을 무덤에서 불러내시는 행위로 선언하신 것이다. 그 기도 내용 자체가 또한 이 선언을 명백하게 하신 것이다. 이 기도를 나자로를 살리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과 합하여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아버지시여, 제가 말한(요청한) 것을 이번에도 들어 주셨나이다. 이제껏 아버지께서는 늘 제 말을 들어주셨나이다. 그것이 제게 힘이고, 기쁨이며, 늘 감사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오늘 제 기도는 여기 세상의 죄악과 그 형벌에 눌린 이 불쌍한 무리들을 위함이오니, 곧 저들을 죽음과 지옥의 고통에서 건지고자 제가 온 것을 알리고자 함이옵니다.

아버지! 그것도 제 뜻대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 뜻을 좇아 구하러 온 것을 저들이 믿어야 하옵니다. 이를 위해 오늘 나자로의 부활을 허락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사도 요한이 이 대목의 기도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복음서에 기록할 때, 새삼 그 거룩하고 웅대한 권능 앞에 떨리는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직 무덤 안에 있는 나자로를 ‘이미 부활한 사람’으로 바라보며 기도하셨고, 산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불러 무덤에서 이끌어내신 것이다. 그 특이한 권능이 명확한 객관성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이런 과정을 다 지켜보며, 복음서를 기록할 것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시고 취한 행동이시다. 아니, 이 경우는 단순히 아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도록 요한까지 이끌어 주셨던 것이다. 그 기록은 당대의 기술 수준으로는 온 세상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가장 효과적으로 신뢰성 있게 이 사건의 사실성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그 전달 내용 가운데 이 기도내용까지 포함시킴으로써, 나자로 부활이 하나님 자신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을 온 세상이 부인할 수 없게 만드신 것이다.

이 기도내용을 되살펴 보면, 나자로 부활을 통해 예수께서 온 세상에 포고(布告)하시는 메시지가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 귀와 양심과 영혼을 뒤흔드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권능 앞에 정직하게 선 이들은 이 질문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그 해답의 실마리나 방향만이라도 잡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의 문제 앞에 정직하게 마주 설 용기를 내야 한다. 죽음 앞에 정직하게 마주설 용기란 죽음의 독을 녹이고 풀어내는 힘이어야 한다.

무엇이 예수 권능의 정체인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음까지도 이기게 한 힘일까? 

죽음의 독은 무엇인가? 절대허무-절대고통-절대절망-절대공포, 이것이 그 독이다.

인생을 향한 4대 근원질문에 따른 네 가지 잘못된 대답이 이 허무, 고통, 절망, 그리고 공포이다. 한번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의 입장(인생철학 ; 뱀의 유혹에 따른 철학)에 따라 이 네 근원질문에 대한 대답을 무엇이라 했을지 요약해 보자.

  1. 아담아, 너는 어디로부터 왔느냐?  ‘나는 내 존재의 근원보다 내 스스로 내 존재의 주인이 되는 것이 더 문제이다.’(자기본위)

  2. 아담아, 너는 어디를 향해 가느냐?  ‘나는 내 의지대로 모든 것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만들어가며, 그것을 즐기겠다.’(자기중심)

  3. 아담아, 너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나는 내 욕망성취에 따른 손익관계를 잘 조정하여 내 행복을 극대화해야 한다.’(이기주의)

  4. 아담아, 너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렇게 사는 동안, 나는 허무의 어둠 속에 내던졌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자기모순감 속에서 삶에 대한 권태와 자기혐오의 깊은 구덩이로, 도피할 수 없는 공포와 죽음의 구덩이로 가는, .... !’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의 아가페 관계에서 끊어진 인간들 모두가 이런 상황에 갇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간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를 죄악에 대한 형벌로 여기는 ‘아벨과 같은 무리’이다. 그런가 하면, 그것을 자신의 악(원죄)에 대한 형벌로 여기지 않고, ‘자연’이요, ‘운명’으로 여기는 ‘가인과 같은 무리’가 있다. 이 두 갈래의 사람들은 예수의 빛(구약/신약 성경) 앞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아벨의 무리는 즉시 예수의 아가페 품속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가인의 무리는 희생적 사랑을 주며 함께 그렇게 살자고 하는 예수를 증오하며 죽이려 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아가페 관계가 끊어진 인간존재란 그 존재근거 자체가 사라지는 상태에 빠지게 됨(허무)으로써, 존재가치도 의미도 없는 자(고통)가 되고 만다. 그런 인간의 행위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도 손해가 되는 것도 서로 엇바뀌는 작용을 하다가 결국 그 모두가 죽음이라는 끝없는 어둠(절망)속으로 빠져드는 과정이 된다. 그러다가, 그런 상황에 빠진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바로 그때 인간은 ‘도피로가 없는 공포의 구덩이’에 자신이 갇혀있음 느끼게 된다. 도피로가 없는 완전절망의 조건은 이 네 요소는 어느 것 하나 따로 작용하지 않고,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함께 작용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 죽음이 주는 독의 효과는 ‘아가페 낙원과의 절대단절’의 힘으로 나타난다. 그 힘의 작용은 하나님 쪽에서 보면, ‘정의의 화염검’이 회오리치며 심판하는 역사이다. 그러나 그 상황을 심판당한 아담 쪽에서 보면, 모든 희망의 빛이 격절되어 끊어진 절망적 공포의 어둠이 된다.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이 다시는 ‘아가페 영생의 세계’인 그 낙원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 모든 인류는 그 절대허무-절대고통-절대절망-절대공포의 독을 자신의 가슴 속에서 다 녹여 없애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힘 있게 일어서야 한다. 모든 아벨의 무리들은 반드시 그럴 수 있도록 예수께서는 나자로를 살리신 것이다. 교회는 그 예수를 위해, 그 하나님 자녀들을 위해 일어서야 한다.

인간을 아벨의 입장에 서게 해 주면, 자연히 우리 가슴에 새겨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메시지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 나자로 부활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 다룬 문제들은 바로 이 남은 문제를 다루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해도 좋을 만큼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이미 앞에서부터 거듭 말해온 원죄 문제의 해결, 그래서 거기에 연관된 죽음을 원천적으로 해소시킬 수 있는 길의 제시, 바로 그것이다. 예수께서는 나자로를 되살리시면서, 이 엄청난 문제 해결의 길을 제시해 보이셨고, 이 사건의 전개과정에 그 메시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원죄-죽음의 문제 해결인 한, 거기엔 반드시 이 원죄와 죽음을 인간에게 끌어온 ‘악마(뱀)’를 심판하고 그의 힘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길 역시 제시되고 있다.

그 뱀-원죄-죽음, 그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 악의 사슬을 어떻게 깨트리고 계신가?

인간의 죽음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죄악에 대한 형벌’이다. 이 사실은 앞에서 누누이 말해 왔다.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자연현상이 아닌 형벌이라 하는가?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 자신의 죽음에 관해 아담에게 처음으로 언급하신 것은 인간에게 ‘원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하신 대목에서였다. 아담의 죽음은 죄악에 대한 형벌로 오는 현상임을 그 당시 확고히 말씀하셨다.

- 네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

인간의 원죄란 무엇인가? 원죄가 무엇이기에 인간에게서 아가페 영이 떠나게 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무엇이기에 아담을 ‘아가페 불감증’(영적 죽음)이라는 무저갱에 던질 수 있었는가?

태초에 뱀의 속임수 유혹을 좇아, 아담이 하나님과의 ‘아가페 관계’를 배반하고, 자기본위-자기중심-이기주의의 자세로 삶의 방향을 잡은 것이 원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생명은 영적으로는 ‘아가페(희생적 사랑)의 영’이다. 하나님(진리)을 생명을 바쳐 경배하고 섬기는 자세, 자신의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삶, 그것이 아가페 영으로 사는 삶이다. 육체의 생리구조와 기능은 이 아가페의 삶을 물리적인 세계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창조되어 있다. 즉 그 생명의 영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아가페의 형상화(形象化)’! 이것이 인간(아담)의 형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단언컨대, 아담은 우주 안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형상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리는 종’으로 창조된 천사들도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까닭이다. 그 천사들 가운데 이를 시샘한 천사가 있는데, 그가 바로 ‘루시퍼’ 즉 타락한 천사이다. 그런데 그런 아담의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이라 한 것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하나님 자신도 인간에게는 오로지 이 ‘아가페의 관계’ 안에서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해 자신을 ‘아가페를 통해서만’ 아담과 관계를 맺기로 결단하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담을 낳으시고 희생적 사랑으로만 관계를 맺으실 분의 호칭을 무어라 해야 하는가?

‘아버지 하나님’! 오로지 그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스스로를 아담의 아버지로서 관계를 맺기(아가페 관계)로 결단하시고, 아담도 그 아가페 삶 안으로 부르신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이 아가페 삶을 선택하도록 하신 것이다. 아담으로 하여금 영원토록 아가페 삶의 자세를 지키도록 스스로 결단하게 한 열매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아담의 아가페 관계’는 그 자체가 인간의 생명이요, 그것이 깨지면 인간은 죽게 되어 있다. 먼저 그 영혼 즉 아가페의 영이 죽는다. 그것이 형벌 받은 상태로 드러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가페 불감증’이다. 이 영혼의 죽음을 인해 육신은 자연히 그 뒤를 좇아 흙으로 해체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타락한 아담은 죽음의 개념도 타락하여,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죽음으로 여기게 되었다. 실질적인 죽음은 바로 아가페 불감증인데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뱀과 똑같은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창세기의 뱀의 의도와 말을 살펴보면, 아담을 향한 이 하나님의 아가페를 철저하게 중상모략을 하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아담으로 하여금 스스로 아가페 관계를 부수고, 그 정반대의 길을 택하게 하였다. 하나님에 관한 뱀의 참소(讒訴) 내용은 무엇인가?

- 하나님은 실은 이기주의자로서, 너를 속였다! 너를 영구히 사랑(아가페)의 노예로 묶어놓고,네 주인 노릇을 하며 지배하려는 이기주의자이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섬기기만 하라고? 그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한번 먹어 봐! 정말 죽는가, 절대로 안 죽어! 먹으면, 오히려 네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선악을 알게 돼! 네가 이것을 먹고 자기처럼 지혜롭게 될까 보아, 하나님은 네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거야! 먹어라! 하나님 속임수에서 벗어나야 해. 그래서 너도 너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해! 네게 이익이 되는 것을 선이라 하고 네게 손해를 끼치는 것을 악이라 할 수 있는 지혜에 눈을 떠서, 하나님같이 되어야 해! -

원죄는 이처럼 아가페의 영을 거부하고, 하나님과의 아가페 관계를 정면으로 모욕하고 파괴하는 행위였다. 하와는 이 뱀의 말을 좇아 먼저 원죄를 범했다. 아담은 그 아내의 말을 좇아, 이 원죄를 함께 범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자기본위-자기중심-이기주의의 자세로 돌아서는 순간, 아가페의 호흡은 멎고, 육체의 아가페 생리기능은 파괴되어, 자연면역 능력은 감소되다가 퇴화하였다. 그래서 결국 육체는 노화(老化)의 저주에 묶이어, 흙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성경은 이처럼 인간의 죽음은 자연현상이 아니고,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원죄와 그로 인해 범하게 된 모든 자범죄(自犯罪)에 대한 형벌로서, 인간에게 재난과 노화현상과 죽음이 닥친 것이다.

원래 죽음이, 인간들이 흔히 생각하듯, 한낱 자연현상이라면, 그 죽음을 인간들은 잠을 맞이하듯이 평안하게 맞이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을 절대고통-절대허무-절대절망-절대공포로 맞이한다. 평상시에 자신이 ‘죽음을 향해 불가항력적으로 끌려 나가는 삶’이라는 것도 절대공포를 인한 ‘도피적인 자기최면’으로 간신히 잊고 사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삷 자체가 ‘형벌 안에 놓인 삶’이라는 것을 말한다.

물론, 형벌 그 자체를 ‘자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려면, ‘형벌로서의 인생을 정직하게 고민하는 것도 자연이다’ 하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말 자체가 얼마나 자가당착에 빠진 말인가? 좀 더 정직하게 이 문제 앞에 서보면, 이런 죽음을 자연현상이라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말에 불과함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죽음의 원인이 되고 있는 원죄 앞에 인간들은 정직하고 진지하고 용기있게 나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죽음의 쏘는 독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의 피’로 녹이고 씻어낼 수 없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에 감격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 이런 정직성을 발휘할 용기를 지닌 인간은 이 세상에는 없다. 다만 예수 앞에 설 때에만 정직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인간 앞에서 그 죽음의 위력을 사정없이 짓부수는 위력을 보인 까닭이다. 이 나자로 부활 사건은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 죽음을 부수기 위해 오셨다고 외치시는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이 나자로 부활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류는 이 예수와의 조우(遭遇)를 통해 ‘새로운 희망’의 기회 앞에 서거나, ‘영원한 절망’의 문 앞에 서거나 하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단 한번의 ‘절대기회’인 까닭이다. 그렇다. 이 ‘예수’라고 하는 ‘절대기회’ 앞에 모든 인간은 불가피하게 세워지게 되었다.

형벌로서의 죽음이 인간에게 쏘는 독화살, 그것은 인간이 용기를 가지고 죽음 앞에 정직하게 대면할 수 없게 만든다. ‘절대고통-절대허무-절대절망-절대공포’의 위력, 그것이 바로 아담의 후손들이 낙원을 향해 되돌아설 힘을 잃게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나서면, 이 죽음의 독이 해독된다. 그 절대의 고통과 허무와 절망과 공포가 어떻게 홀연히 사라진다. 도대체 어떻게 하여 이런 기적이 벌어지는가?

* 예수께서는 우선 즉시 나자로 부활 앞에 우리를 세우신다.

* 그리고는 곧바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세우신다.

* 그 다음, 그분 자신의 부활의 빛 앞에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 결국 우리는 그분의 승천을 주목할 수 있게 하신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의 쏘는 독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신다! 이 예수와의 만남, 이것이 바로 그 죽음의 독화살을 쳐내고, 그 독을 우리 가슴에서 녹이고, 후련하게 씻어낼 수 있게 하는 ‘절대생명’의 기회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게 하는가?

우선, 이 절대생명의 빛은 죽음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주는 조명등 역할을 한다. 예수의 인격과 나 자신의 인격의 차이, 그 언행과 그로 말미암은 결과의 차이, ....그래서 그 죽음의 독이 바로 자신의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이로 인해 우리들을 거기에서 벗어나게 하시고자 속죄의 희생을 치러주시는 메시아의 사랑을 알아보게 하신다. 즉 ‘아가페 불감증’이라는 영적 죽음의 잠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하신다. 그 사랑 앞에 통곡하며 감사할 수 있게 한다. 그 감사 속에서 메시아께서 베푸시는 아가페를 감격으로 받으며, 그 ‘아가페 삶’을 결단할 수 있게 하신다. 그 결단의 기회 .... , 인간은 이 절대생명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 네가 이를 믿느냐?”  그런데, 영원한 생명의 문 앞에 초대하시는 특이한 과정을 살펴보라.

나자로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십자가 죽음 앞에는 온 세상 사람들 누구나 세워 놓으신다. 즉 죽은 사람인 나인 성(城) 과부의 아들과 야이로 회당장의 딸, 그리고 나자로를 부활시킨 사건은 온 세상사람 누구나 보고 들을 수 있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든 말든, 그에게 원수 노릇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다 보여주셨다.

그럼으로써, 그 죽음의 독을 해소시킬 수 있는 길이 예수에게 있음을 보여 주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과 승천 사건은 아가페 삶을 결단한 이들만 보게 하셨다.

영생으로 직접 이어지는 부활은 아가페 생명의 눈을 뜬 이들에게만 보이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이들은 예수께서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옮겨져 가시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이런 차별화를 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원죄에 속한 ‘아가페 불감증 환자’들에겐 나자로의 부활은 보게 하시면서도,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은 볼 수 없게 하셨을까? 아가페를 거부하는 자들에겐 예수께서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지니고 있음은 보여 주셨다. 그러면서도, 정작 영생 그 자체를 이미 실현하고 있는 모습은 보여 주려 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이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면, 드디어 나자로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해답은 이 질문 자체 속에 들어 있다.

아가페불감증 환자들은 왜 영생으로 이어지는 부활은 볼 수 없을까? 

아가페 거부자들에게는 그 거부의 순간에 아가페 빛이 무서운 심판의 불꽃 칼이 된 까닭이다. 그래서 그 영혼을 아가페 불감증의 어둠속에 유폐시키면서도, 육신조차 파멸해야 하는 심판에서는 ‘제한적으로 대피’시키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육신의 죽음을 유예(猶豫)시켜, 그 영혼이 메시아의 속죄은총을 받을 기회를 갖게 하고자 하심이다. 초림 당시에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인류에게 보여주신 부활은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부활했다가 다시 죽어야 한 ‘잠정부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생으로 이어지는 부활로서, ‘영생부활’이었다. 예수께서 살려주신 나인 성 과부의 아들과 야이로 회당장의 딸, 그리고 나자로는 잠정부활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은 영생부활이었다. 예수께서 부활시킨 그 세 사람은 영생으로 나가는 권능 자체를 보여주진 않으셨다.

그들은 부활했지만, 잠시 동안 그 육신이 죽었다가 되살아난 생명을 유지했을 뿐이다. 영생으로 이어지진 않고, 모두들 다시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부활은 ‘잠정부활’이었고, ‘영생으로 나가는 부활’ 즉 ‘영생부활’의 첫 열매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 잠정부활은 예수께서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지니신 분임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 잠정부활 자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누리게 하는지’를 보여 주진 않으셨다.

따라서 예수를 거부하는 이들은 영생으로 들어갈 문의 열쇠를 예수께서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 ‘잠정부활’만을 목격한 것이지, 그 열쇠가 무엇이고, 그 사용법이 무언지는 알 수 없었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아가페 삶을 거부하는 한, 이 영생의 세계는 절대로 볼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서 왜 아가페 불감증 환자들이 영생의 세계를 볼 수 없는지 확실해진다. 영생의 세계는 아가페 세계이다. 그렇다면, ‘아가페 색맹(色盲) 환자’가 아가페 세계를 볼 수 없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로 인해 예수께서 초림 당시 유대 땅에서 인간을 부활시킨 이 세 사건들 즉 ‘잠정부활’ 사건은 두 갈래의 모습으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윤리의 삶’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전하는 내용이다. 다른 또 하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생명을 걸고 따르는 사람들이 전하는 내용이다. 함께 직접 보고 듣고 전하는 내용이지만, 그 사건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정반대의 내용과 의미로 전해진 것이다.

예수의 아가페 삶을 거부하는 자들은 이 부활사건 원래의 모습을 훼손시켰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그 사건들을 성경에 기록하고, 그 원형을 유지하고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었다. 그래서, 만약에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을 부활시키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은 전해지지 않고, 그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어째서 이토록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나는 변형이 일어났을까? 인간의 부활은 인간 자신에게 충격적인 감동과 감사의 일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왜곡 변형시키고 희석(稀釋)시킬 만큼 거부감을 갖는 인간들이 있을까? 그 이유는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전자(前者) 즉 예수의 아가페 삶을 거부하는 인간들은 예수의 요구가 자신을 파괴하고 죽이는 것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이미 앞에서 원죄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런 인생관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도 고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반응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또 그런 이들은 ‘아가페 색맹’ 상태이므로, 예수의 아가페 세계는 실재(實在)하지도 않고 실재할 수도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런 이들은 이 부활사건을 얼마든지 악의적으로 왜곡 변형시키는 거짓말을 하다가, 신뢰성 없는 사건으로 취급하며 희석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 ‘잠정부활’ 사건 자체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몄다고 하는 중상모략을 온 세상에 퍼트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정치-종교적 탄압으로 그 부활사건을 전하는 이들을 죽이거나, 사악한 권세를 신비화하기 위하여 괴이하게 변형시키기도 하였다. 그 변형된 이야기들 가운데에는 나자로가 영생하는 성인이 되었다고도 하고, 그래서 이단적인 ‘나자로파 교회’도 나타났다. 그 부활한 나자로 가족이 프랑스 쪽으로 망명하여, 유럽 프랑크 왕국의 초석이 되었다고도 했다.

그런 수많은 변형 가운데 극치를 이루는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가사(假死) 상태에서 숨겨져, 나자로 가정의 치료로 일어났다는 이야기이다. 이를 토대로 한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예수는 나자로 가족과 유럽으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예수는 나자로의 누이인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후손을 퍼트렸다고 한다. 그 예수의 후손들이 후에 유럽 왕가의 조상이 되었다고도 하였다. 소위 ‘성배(聖杯)’ 전설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자세를 볼 때, 이들에게 만일 영생부활의 빛을 보게 했다면, 당연히 그 영생을 ‘자신이 확보할 이기적 이익’으로 삼고, 거래나 탈취의 품목으로 취급했을 것이다. 그런 아가페 모독과 반역의 자세로 ‘아가페 영생의 빛’을 본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 그 빛은 당연히 이런 아가페 모독과 반역의 눈부터 태울 것이요, 그런 모독과 반역의 의지로 가득 찬 그 존재는 즉시 파멸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지 않으셨다.

안나스나 가야바 앞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면, 그들은 두려워 떨며 엎드릴 것이고 자진하여 순종을 맹세하리라고 대부분 상상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을 ‘아가페 영생의 세계’에 그들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용서는 진실한 회개를 하는 자에게 베풀어진다. 두려워서 항복하여 엎드리는 자는 자신의 이기적 자세를 잘못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속으로는 이기적인 자세를 굳히고 있는 자세이다. 모든 우상숭배는 바로 이 자세에서 비롯된다.

아가페 윤리와 이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반(反) 아가페 자세’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것을 고쳐주시길 바라는 자세라야 참된 회개의 자세이다. 안나스나 가야바라 할지라도 이런 진실한 회개를 하면, 용서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에 눌려 두려워 항복하는 것은 우상숭배 자세요, 자신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겠다는 이해타산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의 빛이 비쳐 용서를 해 주려해도, 불속에 던져진 지푸라기처럼 태워져 없어진다. 아가페 윤리는 원죄(自己本位-自己中心-利己主義)의 자세를 태워 없애는 심판(正義)의 불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생으로 이어지는 부활의 ‘첫 열매’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영생 자체를 실현한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빛을 볼 사람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만 보여 주셔야만 하였다. 그들만이 이 빛 앞에 설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와의 만남! 이것이 바로 그 죽음의 독화살을 쳐내고, 그 독을 우리 가슴에서 녹이고, 후련하게 씻어낼 수 있게 하는 ‘절대생명’의 기회이다. 이 절대생명의 빛은 죽음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주는 조명등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죽음의 쏘는 독이 바로 자신의 죄악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우리 인생들을 거기에서 벗어나게 하시고자 속죄의 희생을 치러주시는 메시아 앞에 통곡하며 감사할 수 있게 한다. 그 감사 속에서 메시아께서 베푸시는 아가페를 감격으로 받으며, 그 아가페 삶을 결단할 수 있는 기회! .... , 인간은 이 절대생명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 네가 이를 믿느냐?”

죽음의 형벌 원인이 된 죄악은 태초의 인류 조상 아담이 범한 원죄에서 비롯되었다. 그 원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인 ‘아가페의 영’을 거부한 죄악이다.

아가페의 영은 영원한 생명력 그 자체이다. 원죄는 이 아가페의 영을 인간에게서 떠나게 만들었다. 그러자, 인간은 그 즉시 ‘아가페 불감증’이라는 무저갱(無底坑 ; abyss)에 침몰하고, 영적 죽음의 잠에 빠졌다. 아가페를 느끼고 인식하고 선택하고 실천하는 기능들이 모조리 왜곡되고 마비되어 버렸다. 결국 자신이 그런 아가페 생명을 지닌 거룩한 존재였던 것 자체를 잊었다.

그래서 세상은 생존경쟁의 정글이 되고, 그 속에서 이기적 거래와 타협을 하다가, 안 되면 속임수를 쓰며 투쟁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으려는 것이 비정상으로 보이게 되었다. 누군가 아가페 희생 비슷한 빛을 드러내는 것만 보아도, 어리석은 순진 덩어리로 비웃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이의 사랑을 자신의 먹거리로 삼거나, 짐스러우면 냉혹하게 버린다. 조금이라도 손실을 끼치는 듯하면, 잔인하게 물어뜯는다.

그렇게 살다가 비참한 노화와 병과 재난 속에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 그것이 자연스런 인생으로 보게 되었다. 인간들의 육신도 흙으로 되돌아가는 해체과정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자연’이라 보았고, 지극히 정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시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구원은 인간의 원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낸다. 원죄가 드러나야 원죄를 인한 형벌인 죽음의 실상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죽음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드러난다. 죽은 자는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예수의 ‘아가페 조명등(照明燈) 밑에서만 그 두려운 실상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예수에 의해 드러나는 것은 이런 어둠의 실상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아가페 윤리)가 그 찬란한 영광의 빛 그대로 나타난다. 아가페 생명의 순결하고 현란한 아름다움이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래서 죽음의 쏘는 독과 위력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속절없이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드러난다. 당연하다! 그래야 그에 대비(對比)되는 죽음이 죽음으로, 부패가 부패로 드러나, 그것이 결코 ‘자연’도 아니고, ‘정상’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불의와 부패가 제 모습 그대로를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는 역사는 ‘악의 의지(意志)’에 대한 심판이라는 사실이다. 죄악과 부패와 죽음을 몰고 온 것은 고의적인 ‘아가페 반역의지(反逆意志)’의 행위에서 온 까닭이다. 결코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지는 생명 유기체의 자연적 소멸과 같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악을 드러내는 일은 동시에 그 고의성을 띈 악의 의지는 정당한 의의 권세의 통치대상이 되어, 심판에 의해 소멸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앞에서 죽음과 그 쏘는 독인 어둠의 권세가 붕괴되는 것은 하나님의 공명정대하신 정의의 심판이라는 것도 온 세상에 밝혀진다. 단, 그 심판의 주요 목적은 ‘죄악과 죽음을 제거’ 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 심판의 또 다른 하나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죽음과 어둠의 권세로부터 구원하는 역사이다. 그래서 그 심판은 반드시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는 역사가 우선순위로 행해진다.

*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고뇌하는 자를 ‘성별(聖別)’하여,  그들을 ‘아가페 거부 문화(Anti-Agape Culture)’의 권력악(적그리스도 체제)에서 ‘해방’시킨 후,  개인적/집단적 영혼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정결하게 씻게 하고(淨潔禮式 ; 회개),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삶을 살기로 결단하게 하는 일이 앞서야 한다.

따라서 ‘나자로 부활 사건’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구원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나타나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심판받을 자들에게는 어떤 악을 드러내는 조명등인지도 살펴야 한다. 이 부활사건을 이런 면에서도 살펴야 할 이유는 그 사건 자체가 잘 드러낸다. 나자로 부활사건을 잘 관찰해 보라. 무엇보다 형형(炯炯)한 불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권세가 나타나고 있다.

이 권위와 권세는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의 빛이 온 우주를 가득 채우는 사랑의 온기(溫氣)요, 희망이 어린 생명의 힘을 베푸시는 든든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마르다나 요한에게는 바로 그렇게 드러났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악의 실체를 드러내는 정의의 불칼이 등장한 셈이 된다. 가령, 당시에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예수 체포령’을 내린 자들은 나자로 부활사건을 보고,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했을지 상상해 보면, 즉시 알 수 있는 일이다.

왜냐? 나자로를 되살린 이 예수에게는 죽음의 형벌을 없애는 그런 ‘사죄권(赦罪權)’과 ‘형 면제권(刑 免除權)’과 ‘부활권(復活權)’이 귀속(歸屬)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그것은 동시에 예수에게 ‘형 집행권’이 당연히 귀속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그런 권세와 권위를 지니신 예수께서는 그 권리행사를 위해 왜 하필 ‘십자가의 길’을 택하여 나가셨는지, 비로소 이해가 된다.

그 십자가의 현장에서 아가페에 대한 자신의 못질이 잘못임을 안 인간은 누구나 깨닫는다,

‘원죄를 인한 형벌에서 인간을 풀어주신 속죄(贖罪)의 피’가 얼마나 처절한 희생인지를.

그것이 얼마나 놀랍고 무모하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자비인지를.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아가페가 얼마나 절절하신지를.

그런 하나님을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한 자신이야말로 얼마나 간악한 이기주의자였는지를.

인간을 이런 간악한 길로 나가게 한 자의 참소가 얼마나 사악한 행위였는지를.

예수께서는 인간에 대한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왜 이런 방법으로 드러내실까? 

창조주의 권위와 권능으로만 인간을 부활시킬 수 있다. 즉 이런 인간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지닐 수 있다. 그런 권세이므로, 구차스럽게 나자로를 부활시키는 방법으로 하지 않아도, 예수께서는 인간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선포방법’은 많고 많다. 또 그렇게 하신다 하여, 그 절대권을 누가 무어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렇게 나자로를 일깨우는 방법을 택하셨을까?

거기에는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신 예수 그리스도 나름으로의 절실한 사유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볼만한 징후가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그 정통권세의 선포를 할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히 비셨다고 고백하신 바 있다. 나자로 무덤 앞에서 예수께서 드린 기도를 다시 잘 생각해 보라. 그것은 이런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나자로를 되살리도록 아버지께서 허락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이 아들의 기도를 모두 들어주심을 저들이 알게 되어, 아버지와 아들을 믿게 하셨나이다!”

왜 예수께서는 그의 권세선포를 나자로 부활 사건으로 하시기로 하셨을까?

유월절 계절에 예루살렘 문턱에서 온 예루살렘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 그것도 순수 유대 혈통이 아닌 사람을 골라, 부활의 대드라마를 펼쳐 보이셨을까? 그 동기가 무엇일까?

인간에 대한 예수의 자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의 각도, 그것은 오로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 아가페(사랑)’의 자세였다. 그것을 확고하게 밝히고자 나자로를 부활시키셨다.

아담의 후손은 뱀이 준 ‘원죄 안에 갇힌 자세’이다. 그런 자세라면, 자신이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쥐었다면, 그 힘과 위광(威光)을 자랑하고 내세우며, 당연히 지배자로 군림하려 한다. 절대로 예수와 같은 자세나 접근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그런 인간에게 예수께선 전혀 다른 자세로 다가오셨다. 오로지 아가페의 실현이 목표였다. 그러므로 원죄를 죄가 아닌 정상적 삶의 자세로 말하는 가인의 자세를 악하다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세를 차별화하여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는다 해도, 실은 인간 입장에서 그것을 왈가왈부(曰可曰否)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주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의 절대권리이기 때문이다. 토기(土器)가 토기장이(土器匠)에게 “당신은 왜 나를 임금님 방의 탁자에 오를 아름다운 꽃병으로 만들지 않고, 이렇게 거지 동냥 그릇이 되게 했단 말입니까?” 하고 불평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인간창조 동기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하고 말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기적인 자세’를 갖느냐, 아니면 희생적인 ‘사랑의 자세’를 갖느냐에 따라 인간의 삶에 주는 영향은 엄청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자세에 따라 인간의 삶은 천국도 될 수 있고, 지옥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입장에서는 이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 왜 나자로를 죽기까지 기다렸다가 부활시키셨을까? 죽음도 이겨내는 그의 권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죽음의 힘에 눌린 인간들에게 희망의 문을 열어주기 위함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요한이 전하는 나자로 부활사건 기록 가운데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유의해서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나자로의 무덤(굴) 입구에 이르시자, 단단하게 고정되어 막고 있는 바위 문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무덤 문을 열어라!”

이 한 마디에 주변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그곳에 와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전무후무한 요구에 사람들은 이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 하는 얼굴이 되어, 무덤 쪽으로 그 눈과 귀와 발걸음이 모이기 시작했다.

“주여, 죽은지 이미 나흘이나 되어,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할 텐데요. 그래도. -?”

잠시 뜸을 드리다, 할 수 없이 뒤를 따르던 나자로의 누이 마르다가 말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을 작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을 짐작도 못한 대답이었다. 마르다의 이 말은 실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자 예수께선 결국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마르다에게 핀잔을 주시고야 말았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이 핀잔을 들은 마르다의 심정이 어떠했으리라 보는가?

-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 ? -

마르다의 입이 굳었다. 그러나 가슴은 뛰었다. 예수께서 언급하시는 그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에 잔득 매달리는 심정이 되었다. 나인 성 과부의 청년 아들 생각이 번쩍 스쳤다. 그에 따라 마르다의 눈도 빛이 났다. 덩달아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방실 웃으며 머릿속에 꽃처럼 피어났다. 마르다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꽃송이처럼 솟으려는 것을 참고 물리었다.

- 무덤 문을 열어서 볼만한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무엇이겠는가? 죽은 나자로, 내 오라버니를 살리시려는 게 틀림없어! -

마르다는 그렇게 단정했다. 얼굴은 제절로 화안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손짓하여 힘 있는 장정들을 불러, 무덤 입구의 그 큰 돌을 옮겨 열도록 하는 마르다의 눈동자도 커진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주님 뒤에서 앞으로 종종걸음 치며 나서더니, 돌아서서 자기 스승님을 바라본다. 그 모양이 꼭 어린 참새 새끼가 제 어미를 보고 날개를 파르르 떨며 좋아서 어쩔 바 모르는 몸짓이다. 그녀는 자기 주님 눈을 어린애처럼 바라보며 드디어 화안히 웃었다. 그 웃음이 눈물의 꽃망울이 되어 똑 떨어졌다.

예수께서는 아직 눈물이 그 눈에 가득 고이신 채, 슬몃 그녀에게 곁눈을 주시고는 미연히 웃으신다. 그러더니 곧 뒤에 처진 요한 쪽을 돌아보신다. 요한도 이미 상황 돌아가는 것을 눈치채고 잰 걸음으로 단숨에 형님 뒤에 붙어 섰다. 그때 장정 두 명이 무덤 문을 열려고 힘을 쓴다. 마르다는 어느 새 요한 뒤에 경건히 읍(揖)하는 자세로 선다. 문이 처음엔 잘 열리지 않다가, 쿠르릉 소리를 내더니, 드디어 부드럽게 구르며 열린다.

순간, 온 천지가 모든 동작을 멈추고 고요해졌다. 베드로와 야고보도 요한을 따라 무덤이 있는 언덕을 오르고 있다가, 입을 벌린 채 멈춰 섰다. 나자로의 죽음을 인해 그곳 사람들 가슴을 누르고 있던 우울한 먹구름도 그 뭉글거리던 힘이 멈췄다. 모든 이들의 눈과 마음이 이 먹구름에게서 떠나, 지금 벙싯 열리고 있는 무덤 문 쪽으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그 두 팔을 하늘을 향해 기도자세로 들어 올리시는 모습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벙싯 열린 무덤의 어둠을 배경으로 예수의 휜옷을 입은 형상은 모두의 눈에 깊은 인상으로 박혔다. 때마침 청명한 하늘을 향해 기이하도록 아름다운 노래를 하며 영롱하게 빛나는 새 한 마리가 드높이 날아오른다.

“아버지, 제 말을 이번에도 들어 주셨나이다. 아버지께서는 늘 제 소청을 들어 주시나이다. 오늘 제 이 기도는 그걸 새삼 감사하고자 함보다 여기 둘러 선 이 불쌍한 무리들을 위함이옵니다. 제가 세상에 온 것은 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저들을 죽음에서 건지는 데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저들이 알고 믿게 하고자 함이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만인이 보는 가운데 죽은 나자로의 무덤을 열어 놓으셨다. 그 상태에서 이 기도를 하셨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실은 온 인류를 향한 강한 메시지를 선포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것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선포하시는 메시지이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나는 내 아버지의 뜻을 좇아, 너희 인생들을 죽음의 쏘는 독에서 건져주고자 세상에 왔노라! -

나자로는 아직 아무 변화가 없이 죽음의 잠을 자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무덤 문을 열어놓고, 죽은 ‘나자로를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으셨다. 나자로를 자신이 살리게 되어 있음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 주심을 감사하는 기도를 하신 것이다. 그렇게 보여 줄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셨다는 기도이다. 이 말씀은 나자로는 이제 예수의 부활 명령에 따라 되살아 나오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무덤 문이 열려 있는 이 순간에도 아직 나자로가 죽음의 잠 속에 있는 것도 감사하고,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일도 감사하다는 뜻이다.

나자로의 죽음을 확인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부활시키는 현장을 목격하게 하는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상황의 조성을 예수께서 일부러 만드신 모양새이다. 나자로를 이렇게 되살려 줌으로써,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정확하게 인식시키려 하신 것이다. 즉 자신은 모든 인생들을 죽음의 쏘는 독에서 건지고자 오셨음을 알려주시려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뜻대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로운 계획을 좇은 것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자기 뜻대로 인생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지배하는 권력자로 온 것이 전혀 아님을 명확하게 알리시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그 기도 내용을 되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고 앞에서 말한 것이다.

“아버지시여, 제가 말한(요청한) 것을 이번에도 들어 주셨나이다. 이제껏 아버지께서는 늘 제 말을 들어주셨나이다. 그것이 제게 힘이고, 기쁨이며, 늘 감사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오늘 제 기도는 여기 세상의 죄악과 그 형벌에 눌린 이 불쌍한 무리들을 위함이오니, 곧 저들을 죽음과 지옥의 고통에서 건지고자 제가 온 것을 알리고자 함이옵니다. 아버지! 그것도 제 뜻대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 뜻을 좇아 구하러 온 것을 저들이 믿어야 하옵니다. 이를 위해 오늘 나자로의 부활을 허락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나자로를 부활시키신 동기는 명백하다. 인간은 예수에 의해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고자 하심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기, 그것은 오로지 인간애(人間愛)였던 것이다.

이것이 이 사건의 네 번째 메시지이다. 이 의도가 사실이었음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나자로 부활 사건을 일으킨 동기

예수께서 이 나자로 부활 사건을 일으킨 동기를 예수의 권세를 보이기 위함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또 그런 이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시각(視覺)이 옳다고 하는 단정적인 태도를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령 단정적인 태도는 아닌 경우라 해도, 이런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결정적인 계기는 결국 죽음을 극복하는 권세 즉 부활의 능력 때문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 부활의 동기인 예수의 사랑에 대해서는 그저 부차적인 관심이나 갖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태도가 옳은 것일까?

나자로를 일단 부활시켜 놓으면, 결과적으로 예수의 권세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그대로이다. 또 이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분명히 예수께서 가지셨었다. 그것도 앞에서 이미 지적한대로이다. 하지만 결코 그것이 제일의적인 동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부차적 동기였다.

예수께서 죽음도 이기는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는 것이 제일의적 목적이었다면, 그렇게 말한 사람은 예수를 ‘이기적인 지배자’로 여기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다. 예수를 그렇게 단정하고 보는 이들은 그 자신이 이기적인 자세를 갖고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아니 그렇게 사는 것을 하나도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와의 관계를 ‘서로를 이용하는 이해관계(利害關係)’로 맺고자 하게 된다. 이런 자세로 예수에게 나오면, 예수를 이용할 만큼 이용하다 결국 배신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대적하는 무리들도 있지만 말이다. 원래 나자로 부활 당시 예수를 죽이기로 음모했던 유태인들은 바로 이런 무리들이었다. 그런데 인간 가운데 이렇지 않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실은 없다. 단 하나도 없다.

인간들이 이렇게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원죄(原罪) 때문이다. 나자로 부활 사건에서는 예수께서 깊은 슬픔으로 우셨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여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간결히 창세기의 원죄에 관해 해설해 둔다. 태초의 뱀이 우리 인류의 조상에게 나타나 미혹(迷惑)한 내용의 핵심은 무엇이었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에서 떠나 ‘이기적인 이해(利害) 관계’로 변질시킨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로 인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이 맺어야 할 다른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도 ‘이기적인 이해관계’로 변질되고 말았다. 인간의 원죄에 관해 말할 때, 일반적으로는 뱀이 간교한 거짓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불순종’의 죄악을 범하게 했다고들 말한다. 그 말 자체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냥 ‘불순종’이란 말로만 그 미혹의 핵심이 들어 났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왜냐? 만일 인간의 원죄를 ‘불순종’이란 말로 굳혀 놓으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질서’가 된다. 그렇게 되면, 강자(强者)인 하나님은 약자(弱者)인 인간을 일방적으로 이용하고 부리는 지배자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神)’이요, ‘이기적인 신’이라고 영혼이 부패한 인간들은 여기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에게 그 부패한 인간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려 하겠는가? 당연히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맺으려 할뿐이다. 이것은 바로 뱀이 추구했던 모습 그 대로이다.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관계, 신인(神人) 관계가 만일 여기에 머물러 있게 되면,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에 해당된다. 그것은 성경이 늘 경고하는 죄악이다. 딸이나 며느리가 아버지를 창녀 같은 자세로 대한다면, 아내가 남편을 창녀 같은 자세로 대하려 한다면, 그 아버지와 남편에 대해 얼마나 큰 모욕이 되겠는가? 그것으로도 모자라 제 더러운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다고 다른 남자에게 찾아 가 온갖 교태를 부리며 음란한 정을 통하려 한다면, 그 아버지와 남편의 분노가 얼마나 무섭게 폭발하겠는가? 말하자면, 뱀은 바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파괴되도록 올무를 놓았던 것이다.

이런 자세로 하나님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기막힌 희생적 사랑을 행하신다 해도, 인간은 그것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길 수밖에 없게 된다. 십자가의 희생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부활을 보는 시각이나 모두 이 모양으로 왜곡되어 있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나자로의 부활도 예수의 권능을 과시하려는 쪽으로 단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눈으로는 예수께서 인간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참다운 의도를 영원히 알 수 없다. 또 그의 부활의 은총을 결코 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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