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본지 고문(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1944년 만주신학교 봄 학기였다. 박윤선 교수가 채플을 인도하면서 신학생들과 함께 시편 찬송가 206장을 합창하였다. [이 찬송은 1908년 「창숑가」에서부터 불려왔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게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의 모든 것 두렵잖네…”

라고 박윤선 교수는 온 신학생들과 함께 뜨거운 가슴으로 목청을 크게 높이고 찬양을 불렀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고, 일제는 모든 교회와 단체와 기관에 감시체제를 가동하고, 목사나 신학교 교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때였다. 일제는 국권을 뺏고, 말과 글을 뺏고, 교회마저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넘어간 판에, 만주에서 박윤선 교수님과 신학생들은 이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요 방패가 하심을 소리 높여 찬송했다. 일제가 아무리 박해를 가하고 주의 종들을 괴롭히고 신사참배를 강요해도 만유의 주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세상이 뒤집어 지고 난리를 쳐도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이기고 승리케 하신다는 뜻으로 이 찬송을 불렀다. 서슬이 퍼런 일제의 감시 체제하에 찬송도 제대로 부를 수 없었다.

이 찬송의 가사는 시편 46편의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곡조는 영국 국가의 곡이다. 1740년 케리(H. Carey)가 작곡한 것으로서 미국 찬송가 에 나와있다. 지금은 한국 교회 성도들이 외부적 환난과 핍박이 없으니 잘 부르지 않는 찬송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 찬송만큼 가슴을 뜨겁게 하고 위로가 되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박윤선 교수가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게”라는 찬송 인도로 큰 문제가 생겼다. 박윤선 교수는 그 찬송 인도로 당국에 고발조치 되었다. 

당시에 만주신학교에 세분의 교수가 있었는데 박윤선, 박형룡, 일본인 국지(기꾸지) 였다. 일본인 교수 국지는 일본 헌병대 스파이였다. 국지는 박윤선 목사와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재학할 당시에 아주 가까운 동창이었다. 하지만 국지는 신학자이기는 해도 일본제국주의의 손발이 되어 박윤선, 박형룡 교수의 뒷조사를 다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국지는 박윤선, 박형룡 교수의 약점을 파악하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자였다. 국지는 박윤선 목사가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해 동경에 가 있다가 만주 봉천으로 건너왔다는 것을 탐지했다. 일본인 국지는 박윤선의 약점을 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지는 박형룡 박사도 뒷조사를 하여 약점을 찾았다. 박형룡 박사도 평양신학교에서 신사참배를 피하여 동경을 거쳐 만주에 와있는 것을 알았다. 

이 시기는 한참 대동아 전쟁을 하는 중인데, 국지는 박윤선 교수가 적성국가의 곡조를 불렀다고 일본 헌병대에 고발한 것이다. 이에 일본 헌병대는 이국본 이라는 헌병대장을 신학교에 파송하여 진상조사에 착수 했고, 문제가 심각해지자 박윤선 교수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 매일같이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더욱 난감한 것은 신학생 중에 산본, 성신, 김신 등의 학생들은 국지 교수의 끄나풀로서 박형룡, 박윤선 교수의 강의를 일일이 점검하고 국지 교수에게 일일이 보고해 왔다. 박윤선 목사는 박형룡 박사와 비슷하게 국내에 있는 것 보다 동경에 가 있는 것이 신사참배를 피하는 방법이었고, 만주로 가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박윤선 박사는 이기선,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처럼 평생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신사참배를 피하여 망명한 것에 대해서 늘 자신의 연약과 부족을 회개하면서 살았다.

박윤선 교수의 채플 인도를 일본 헌병대에 고발한 일본교수 국지는 노골적으로 선포하기를 “이 신학교는 시국인식을 잘 하지 못한다. 영국․미국을 숭배하고 장개석을 예찬하는 민족주의자가 있다.”고 위협하였다. 국지는 박형룡, 박윤선 두 교수를 민족주의자로 몰아 붙였다. 일본은 대동아 전쟁에 승리할 줄 착각했었다. 그래서 1938년 평양신학교는 폐교되고 친일 신학원이 생기자 박형룡, 박윤선이 발붙일 곳은 만주 신학원이 유일했었다.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게”라는 찬송을 부르다가 일본 헌병대에서 고발당하고 문초를 받던 박윤선 목사에게는 이 찬송이 뼛속 깊이 우러나는 간증의 찬송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어느 골방에서, 토굴에서 기도하는 북한 성도들에게, 또한 복음 때문에 고난 받고 있는 전 세계 성도들에게 이 찬송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게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를 불러주고 싶다. (이 글은 필자의 최근 저서 「나의 스승 박윤선 박사」중에서 pp87-90을 요약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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