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강화회의와 임시정부 수립

<파리강화회의와 위임통치 청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 1918년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승만 박사는 파리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에서 전쟁이 끝나면 약소국가들의 문제가 거론될 것을 예상하면서 그의 은사였던 윌슨 대통령에게 강력히 대한민국의 독립을 부탁할 계획을 세우면서 주변인들에게 함께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했다.

1918년 11월 11일 세계 제1차대전이 휴전되면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서는 12월 1일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 세 사람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대표로 정했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는 김규식을 대표로 정했다. 따라서 1919년 1월 6일 호놀룰루를 출발한 이승만은 1월 15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LA에서 대한인국민회 회장 안창호를 만난 뒤, 2월 3일 뉴욕을 경유하여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여 서재필, 정한경, 장택상, 민규식 등을 만났다.

▲ 대한인국민회(1910년 설립)의 중앙총회 임원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제공

서재필은 파리강화회의 참석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차라리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영문잡지를 발간하자고 했으나, 이승만은 자신을 믿고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뽑아준 이들을 실망시킬 수 없으므로 맡은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면서 파리에서의 독립운동을 도울 수 있도록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대회를 열자고 했다.
서재필을 만난 후 워싱턴에 간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의 면담을 기다리며 국무부를 방문하여 파리행 여권 발급을 요청했으나, 윌슨 대통령과의 면담 거절 통보와 여권발급이 불가하다는 회답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프랭클린 레인 미 내무장관에게도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 정부는 한국 대표의 파리강화회의 참가가 부적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승만과 서재필. 1921. 워싱턴 D.C.

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의 은사였으므로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과 반대로 미국 정부는 일본측에 서 있던 터라 한국인이 파리에 와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해달라고 운운하면 일본측에서 항의하게 될 것이므로 미국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으므로 이박사에게 파리에 가지 말라고 했고 또 가지 못하도록 여권도 발급해주지 않았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파리. 1918.

그 동안 쌓였던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병에 걸린 이승만(44) 박사는 파리강화회의 대표직을 사임한다고 비공식적으로 통보를 하고 '워싱턴 요양원'에 입원하여 그곳에서 집무를 보았다. 국민회에서는 24일 이승만 대표 사임에 대한 건으로 회의를 열었으나 부결되었다. 
이승만 박사는 서재필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미 파리에 가는 것이 불가함을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어 미 정부에서 여권발급을 해주지 않으므로 더이상 추진할 수 없었다. 그래서 파리강화회의 대표직을 사임하려고 한 것인데, 남들은 그의 속도 모르고 독립운동에 대해 과거와 달리 불성실한 태도를 보인다며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 임정 명의로 제출된 파리강화 독립요구서. 1919.4.

좌절감에 빠진 이 박사에게 정한경(28. 鄭翰景 Henry Chung De Young) 박사가 위임통치 청원서를 갖고 찾아왔다. 정한경 박사는 14세에 미국에 가서 한국인으로서(서재필 박사는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미국인) 이승만 박사 이후 미국에서 두번 째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며 이승만, 김규식(38)과 더불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도록 선출된 인물이다. 

▲ 신한청년단 김규식 명의로 제출된 13개조. 1919. 4. 3.

정한경은 이승만과 함께 <위임통치 청원서>를 작성하여 윌슨 대통령과 강화회의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했다. 그 내용은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구해달라는 것과 장차 한국이 독립할 것을 보장해 달라는 것과 한국이 독립할 때까지 국제연맹 하에서 보살펴달라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 대통령 각하, 대한인 국민회 위원회는 본 청원서에 서명한 대표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공식 청원서를 각하에게 제출합니다. ...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2천만의 이름으로 각하에게 청원하니, 각하도 평화 회의에서 우리의 자유를 주창하여, 참석한 열강이 먼저 한국을 일본의 학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장래 완전한 독립을 보증하고, 당분간은 한국을 국제 연맹 통치 밑에 두게 할 것을 빌며, 이렇게 될 경우 대한 반도는 만국 통상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국을 극동의 완충국 혹은 1개 국가로 인정하게 되면 동아 대륙에서의 침략 정책이 없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동양 평화는 영원히 보전될 것입니다."

▲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위임통치 청원서

KBS NEWS <[100년전 외신엔] ④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미국 신문에 235건 언급>(2019.2.16)에 따르면, 그 당시의 상황을 해외 언론이 다룬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919년 3월 10일, 미국 캔자스주의 지역신문 ‘토피카 스테이트 저널(The Topeka State Journal)’은 한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1면 기사로 전한다. 기사는 “한국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으로부터 독립 인정을 요구할 것”이라며 “이승만 박사와 헨리 정(정한경) 박사가 워싱턴에서 파리행 여권을 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 정한경과 이승만. 1921. 11. 워싱턴 군축회의 참석

3월 13일, 이브닝 퍼블릭 레저(Evening Public Ledger)는 “한국을 도와달라고 미국에 호소"(Appeals to US to Aid Koreans)라는 1면 기사를 통해 이 내용을 전한다. 이승만은 “조국에서 일본에 반기를 든 동포 수천 명이 살해당하고 잔인하게 고문당했다”며 이런 ‘일본의 만행’에 항의하고 있다.

이승만의 독립활동에서 논란이 된 것 중 하나가 ‘위임통치’ 문제다. 당시 이승만과 헨리 정은 “한국이 자치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바란다”는 내용의 서한을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당시 언론은 이 내용을 주요 기사로 다룬다. 3월 17일 애리조나 리퍼블리칸(The Arizona Republican)은 1면에서 "윌슨 대통령은 대한인국민회로부터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해 논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한국이 완전한 자치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결정할 때까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앨버커키 모닝 저널(Albuquerque Morning Journal)’은 “한국이 자유를 위해 윌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파리강화회담에 보내진 편지에는 "한국이 일본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게 해 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4월에는 만주와 한성 등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이에 대한 소식이 이어진다. 4월 4일, ‘엘파소 헤럴드’는 “한국 혁명군, 정부 수립”(Korean Rebels set up government)이라는 1면 기사로 만주 임시정부 수립을 알린다.

이후 언론에서 이승만의 호칭은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으로 불린다. 4월 5일, ‘이브닝 퍼블릭 레저(Evening Public Ledger)’는 “기독교인이 한국을 통치한다”(Christians rule Korean republic)며 ‘국무총리’ 이승만의 발언을 전한다. 기사에서 이승만은 “임시정부 내각 구성원 8명 중 7명이 기독교인”이라며 자연스럽게 미국식 정부를 따를 것(Our government will naturally follow the American form of government)이라고 말한다.

6월에는 대통령 당선 소식이 전해진다. 미국 테네시주 지역신문 ‘채터누가 뉴스(The Chattanooga News)’는 6월 16일 ‘대한 공화국’ (The Korean Republic)이라는 칼럼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7년의 투옥과 고문 끝에 이승만 박사가 한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칼럼은 일본의 통치 아래에 있는 한국의 참상을 말한다. “한국인들은 무기도 없이, 오로지 그들의 목소리와 죽을 용기로 혁명을 위해 싸웠다”고 “그들은 자신의 새 공화국 선언문을 비밀리에 제작해야 했고, 대통령을 선출하고도 소식을 전해줄 수조차 없었다”고 설명한다. 같은 칼럼은 이틀 뒤 그레잇팔스트리뷴에도 실린다.

6월 이후 미국 언론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한국의 임시 대통령(Provisional President of Korea)’, ‘임시정부의 대통령(Presid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등으로 불렸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대통령제가 아니었기에 이러한 ‘대통령’ 호칭은 임시정부 내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임명했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호칭 갈등은 임시정부가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헌법 개정으로 일단락 되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로 바꾸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당시 "위임통치 청원서"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위임통치 청원논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2012)>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장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분명한 전제조건 하에” 한국을 일정기간 동안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달라는 구절이 들어있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위임통치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두 사람은 국제법에 정통한 외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청원서를 작성한 후,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검토와 승인을 거쳤다. 또한 신한청년당 파리강화회의 대표 김규식도 위임통치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다. 이것은 온건성향의 독립지사들이 위임통치 청원론을 독립구상으로서 공유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앞줄 오른쪽). 조소앙(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제기한 위임통치 청원은 1910년대 말경의 한국실정과 국제정세를 감안한 현실적 차선책이었다. 그들은 민족자결주의가 고취되고 국제연맹이 창설되는 유리한 국제정세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위임통치를 청원하였다. 이러한 위임통치 청원은 망국적 매국논리나 친미적 사대외교론이 아니라 독립정신에 기초한 실력양성론적 구국외교론이다.
이승만·정한경·김규식의 위임통치 청원론에는 중립국의 지위 하에서 실력을 길러 자주독립의 기반을 닦자고 하는 점진적·단계적인 독립구상이 담겨있다. 그들은 미국의 위임통치 하에서 한국이 일정 기간 중립국의 지위를 누리며 민주주의를 신장시키고, 세계 각국과의 자유통상을 통해 경제력을 증대시키고, 그리고 미일전쟁과 같은 대사건이 일어날 경우에 완전독립을 달성한다고 하는 원대한 독립구상을 위임통치 청원서에 담아냈다.

▲하와이에 온 이승만(왼쪽에서 세번째) 환영회. 1913. 2. 박용만(오른쪽)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에 벌어진 위임통치 청원논쟁은 독립노선의 차이에 따른 사상투쟁과 적대적 경쟁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패권다툼의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그 논쟁은 반임정·반이승만 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한국독립운동가들은 위임통치청원서에 담긴 외교독립론을 한국의 신국가 건설전략에 채용하려는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갖지는 못했던 것이다.
위임통치 청원논쟁은 이승만 세력과 박용만 세력의 세력경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임통치청원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것은 박용만 세력이다. 양측의 대립은 1910년대 중반 하와이에서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뚜렷이 갈라진 노선 차이에 기인한다. 

▲ 네브라스카 주 Hastings의 한인소년병 학교. 1911. 박용만교장(오른쪽에서 두번째)

'외교 독립론'과 '실력 양성론'을 추구한 이승만과 '독립 전쟁론'을 주창한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양립하기 어려운 사이였다. 이들의 사상투쟁과 세력경쟁은 위임통치 청원을 둘러싸고 중국 대륙에서 다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제도와 국제연합의 신탁통치제도는 모두 전후 피식민지 처리방안으로 고안된 장치이다. 한국은 해방 후 미군정의 지배를 3년간 받은 후에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해 남한만의 자주적 민주국가를 수립하였다. 따라서 한국이 위임통치와 같은 신탁통치를 거쳐 부국강병을 달성한 근대국가로 성장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박용만이 이끄는 하와이의 대조선 국민군단. 1914.

자주독립국가인 대한민국은 지금도 미군이 주둔하며 지켜주고 있다. 미군이 함께 훈련을 하며 지켜주면 독립국가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한 현실을 보며 알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은 북한과 똑같이 미군철수를 외치고 있다. 말이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는데, 무지몽매한 자들은 그러한 속임수에 너무나 쉽게 넘어가서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성장해서 부모로부터 독립했다고 해서 부모와 관계가 끊어지는 것도 아니며 다른 이들의 도움없이 혼자 살 수 있는 인간도 없다. 자기 혼자 산다고 할지라도 아프면 병원에 가서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일하러 직장에 나가면 누군가와 함께 공동체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는 일본의 지배에서 일단 벗어나기 위하여 국제연맹의 우산 아래로 피한 뒤 자주 대한민국을 세우고자 한 것인데, "비판하기 위해 비판하는 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무조건 "이승만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1x1=1이 아니라고 우기며 계속해서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다.
필자가 바라기는 남한에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는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이 속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무식하고 무지한 공산주의에서 깨어나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오길 기도할 뿐이다. 

▲ 이승만과 김규식

김규식(1881-1950)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 아래에서 요한(Johann)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했으며 1987년에 도미하여 1903년까지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로노크 대학교(Roanoke Univ.)와 프린스턴 대학원을 졸업한 뒤 한국에 돌아와 1913년까지 언더우드 목사를 도와 YMCA와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0년에는 새문안교회에서 장로임직을 받았으나 일본의 교회 탄압으로 인하여 1913년 중국으로 피한 뒤 독립운동에 힘썼다.
1918년 신한청년단에 의해 파리강화회의 대표자로 선발되었으며 1919년 파리로 떠나기 십여일 전에 김순애 씨와 재혼을 하였다. 전처인 조은수씨와 김순애씨는 같은 정신여학교 출신으로 조은수씨가 죽기 전에 김순애가 김규식의 아내가 되기를 바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김규식과 김순애 부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은 1919년 5월 24일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이라는 국호를 쓴 독립 청원서를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수상 앞으로 전달했으며, 이 서류는 5월 30일 영국 정부에 의해 접수됐다.

여기에는 이승만 임정 대통령이 대한민국은 독립국가임을 강조하며 새로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쓰여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또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3.1운동 등 독립 운동의 결과로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으므로, 독립선언에 따라 국제적 합의나 계약은 임시정부를 통해야만 한국 국민들이 인정할 것이라는 내용을 밝혔다.

▲ 4대 승전국(미, 영, 프, 이) 중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2·8 독립운동에 이어 3·1 운동이 전개되면서, 태극기는 금기물이 되었으며 애국가는 금지곡이 되었다. 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이 고조되면서 3월과 4월 여기저기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곳이 노령과 샹하이 및 한성(서울)에 세워진 임시정부이다.
샹하이에 세워진 임정은 4월 11일 국호제정·관제 개편·임시헌장 제정 등 헌법을 반포하고 이승만 박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추대하였다. 이틀 뒤인 4월 13일에 샹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 중인 김규식에게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 신임장을 발송했다(한일관계사료집). 

▲민찬호 목사(왼쪽 태극기 든 사람), 정한경 박사, (여성 뒤에) 서재필 박사, 이승만 박사

4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재필이 주도하고 이승만과 정한경이 진행을 맡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에서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하게 되면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세울 것"과 "미국식 민주주의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정한경(왼쪽), 이승만(왼쪽에서 세번째), 노디 김(태극기 들고 있는 여인). 1919년 4월 16일

제1차 한인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리틀극장에서부터 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외치며 행진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이다. 이 행진에는 토마스 스미스 필라델피아 시장이 함께 했으며 그는 군악대를 동원해 주었다.

시가 행진 후 이들은 독립기념관에 들어가 이승만 박사는 조지 워싱턴이 사용했던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독립기념관의 미 건국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자리에 앉은 이승만. 정한경(그의 왼쪽 태극기를 든 사람)1919년 4월 16일.

4월 23일에는 한국의 13도 대표들이 인천 만국공원(萬國公園, (현)자유공원)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여 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승만 박사는 한성 임정에서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에 임명되었다. 한성 임시정부는 이상재, 이규갑 등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승만 박사는 이때부터 미국에서 '대한공화국’(Republic of Korea)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8월 25일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한 외교 활동을 하기 위하여 워싱턴에 구미위원부(Korean Commission)를 설치하였다. 구미위원부는 산하에 북남미 지역에 '지방위원회'를 두고, 필라델피아의 '한국통신부'(서재필)와 프랑스의 '파리위원부'(김규식)를 두었다.

▲구미위원부 직원들 (1920. 3.1.) 이승만(앞줄 가운데)
▲구미위원부 공관

그러나 미국은 일본과 손을 잡은 상황이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구미위원부의 외교활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승만 박사는 미국인들에게 일제의 야만적인 폭정과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며 여론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방법을 바꾸었다.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복장을 한 이승만

9월 11일에는 노령, 샹하이, 한성 등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임시정부를 '샹하이'로 정하고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일본제국은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고 이승만 수배령을 내렸으나, 그해 9월 11일 샹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은 헌법을 수정하여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을 선포했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공포하였으며 이 헌법에서 "3·1 운동의 자주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대한민국을 건설한다"는 점을 밝혔다. 

▲대한민국 임시헌법 1919. 4. 11.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초대 국무위원들은 다음과 같이 조직되었다.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군무총장 노백린,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문창범, 노동국총변 안창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 1921. 1. 1.

구미위원부의 외교활동 실패로 인하여 1919년 10월부터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돌아다니며 대한민국 공화국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는 강연을 했다. 그 결과 1920년 3월에 찰스 토마스와 존 쉬로스 상원의원에 의해 아일랜드와 한국의 독립 승인안이 미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으나 34 대 46으로 부결되었으며 이 안건이 미 국회에 4차례나 상정되었다.
이승만 박사는 할 수 있는대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하여 백방으로 애를 썼으나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 박사가 독자적으로 구미위원회를 운영한다며 알력 다툼이 생겼고, 임정은 1925년 4월에 구미위원회 폐지를 결정하고 1928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이승만은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임시 국무총리 이동휘와 여운형 등과 계속해서 대립하면서 좌파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공산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참된 기독교와 자유 민주주의만을 주장했다.

그러자 임시정부 인사들 가운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주장하던 자들은, 이승만이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썼던 것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1919년 2월 25일에 윌슨 대통령에게 대한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대한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 하에 두고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었다. 그러나 당시에 일본이 승전국이었으므로 그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제국을 미국이 위임통치해달라고 청원했다는 거짓말을 지어내거나,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부탁하는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다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비난하였다. 임시정부 안에 공산주의자들이 증가하면서 기독교와 반공을 주장하는 이승만을 축출하기 위하여 그렇게 오해를 살만한 거짓말을 지어내었다.

▲임정 국무원 기념사진. 1919. 10. 11.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분명히 이승만 대통령은 정한경과 함께 국제법에 정통한 외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위임통치 청원서를 작성한 후 국민회 중앙총회장인 안창호의 검토와 승인을 거친 뒤에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처리했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조금만 알아보면 금방 탄로가 날 거짓말을 쉬지않고 지어내는 좌파들의 말에 귀가 얇은 이들은 너무나 쉽게 넘어간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소련의 지원을 받는 임정 내외의 공산주의자들은 임시정부 초기부터 이승만 박사의 면전에서 대통령직을 사임하라거나 국민대표대회를 열어서 그를 몰아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때부터 좌파들은 이승만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지금까지 거짓말을 지어내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므로 마귀에게 미혹된 자들은 어떤 거짓말이건 너무나 잘 넘어간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이승만 죽이기>를 통하여 <대한민국 죽이기>를 이루는 것이다. 즉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를 몰아내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체제의 정부를 세우고 백성들을 가난하고 어리석게 만들어 우민정책을 하는 것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극기

우리나라가 독립하려면 미국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이승만 박사는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으나 계속해서 미국에서 활동했다. 따라서 미국에서 활동하고 샹하이 임시정부에서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난하면서 이승만과 사상이 다른 자들은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탄핵했다.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이처럼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으면 독립된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최초로 세운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지어내어 탄핵한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탄핵 사유가 명확하지 않았으므로 조소앙 등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승만 박사에게 불복하라고 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탄핵을 받아들였다.

▲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 1921. 샹하이. 이승만(가운데). 이동휘(이승만의 왼쪽), 안창호(오른쪽)

거짓에 미혹된 많은 이들이 이승만 박사를 비난하는데, 이승만 박사는 이처럼 탄핵을 받거나 마지막에 4.19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에도 그는 늘 나라와 백성들을 생각했고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우리나라가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으며 다른 어느 종교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대한민국이 세워져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어 세계 열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진국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그렇게 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들에게 지도자의 자리를 맡기지 않으시고 그 모든 것은 이끌고 가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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