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노래하는 것은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저절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노래하라 기뻐하라 즐거워하라고 명령한 것을 보면 그런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저절로 노래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명령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령이란 그냥 두면 안 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으로 사람은 누구나 기쁘고 즐거울 때 노래할 수 있습니다. 기쁘고 즐거워 노래하는 것은 누가 강제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노래하라 기뻐하라 즐거워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노래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지만 현실에서 당면하고 있는 작은 불만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총체적으로 보면 엄청난 특권과 은혜를 누리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일상의 작은 구체적 불만이 엄청난 특권과 은혜를 압도하여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게 합니다. 이런 경우가 어느 개인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상황임을 전제하기 때문에 성경이 노래와 기뻐하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을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동하여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운 기쁨과 즐거움에 북받쳐 노래하는 경우가 있고 그런 감동은 없지만 은혜 받은 사실을 인정하여 의지적으로 노래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도 후자의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노래할 것과 기뻐할 것과 즐거워할 것을 명령 받고 있습니다. 감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깨달음과 의지로 노래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노래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인생의 특징 중의 하나는 고난입니다. 인생이 고달픈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인생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지만 타락한 인간이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난은 모든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독교의 복음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주제입니다. 복음 자체가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거나 전하거나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반드시 복음과 함께 고난에도 참여하도록 요청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고난을 제거한 복음을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고난을 빼버리면 그 복음은 참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고난을 통해 이루어졌고 복음을 믿고 그 복음에 참여한 이들은 고난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고난 자체는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고난은 노래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과는 반대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노래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명령과 함께 고난에도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면 이는 모순입니다. 모든 사상과 철학과 이념과 학문은 모순을 피해가야 합니다. 모순을 받아들이면 학문이나 사상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순에 의해 제재를 받지도 않고 모순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도 않습니다. 사상과 이론과 학문이라면 고난에 참여할 것과 노래할 것을 동시에 명령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모순을 범하는 순간 모든 사상과 이론과 학문은 그 권위를 잃고 맙니다. 하지만 성경은 합리와 모순에 의해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므로 그것을 능가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없고 어둠이 있다는 것은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 고난에 참여할 것과 노래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논리적으로는 성립이 안 되는 모순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노래합니다.     

복음 없는 고난은 절망을 주지만 복음과 함께 하는 고난은 절망 중에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설이고 신비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 역설과 신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복음은 역설이고 하나님의 사랑도 역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삶도 역설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상식을 뛰어 넘는 역설이 됩니다. 실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데 기뻐하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6백여 년 전 유대 나라는 변화의 격랑에 휩쓸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는 앗수르가 지배하고 있었으나 신흥 제국 바벨론의 세력이 점점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무모하리만치 앗수르에 저항하였지만 남 유대는 조공을 바치며 비굴한 외교로 거의 100여 년을 버텨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는 점점 힘이 약해지고 새로운 제국 바벨론은 점점 강해져서 결국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주전 587년에는 유대까지 정복하였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스바냐는 앗수르가 베벨론에 의해 무너지기 전에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로 보아 앗수르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 동안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비굴한 외교로 버텨 오던 유대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유대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였습니다. 이 때 유대가 취해야 할 선택은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버텨 왔지만 이제는 바벨론을 섬겨야 합니다. 자존심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발 빠르게 힘이 강한 바벨론에 아부를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너무나 엄청난 현실이기 때문에 선지자라고 하여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유대는 외교적 노력을 해 볼 겨를도 없이 바벨론에 의해 무참하게 무너집니다. 

그런데 스바냐는 이 상황을 신학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였습니다. 앗수르가 망하고 베벨론이 부상하는 것을 단순히 국제 질서의 개편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로 본 것입니다.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바벨론 제국의 지배아래 들어가고 주권과 신앙의 정체성마저 처참하게 무너지는 상황을 스바냐 선지자는 제국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바벨론이 의롭다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미국이라는 패권국을 통해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2차 대전 때는 독일과 일본과 이탈리아를 통하여 세계를 징치하셨습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국가의 존립은 단순한 전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방법입니다. 악랄하고 못된 제국의 독재자, 독일의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나, 소련의 스탈린이나, 일본의 천황이나 그 외의 어떤 침략 국가나 독재자라도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 국가를 쓰신다는 것이 그 개인과 국가가 정의롭고 정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고 무조건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구약의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알렉산드나 로마나 지금의 미국이 패권국으로 힘을 떨치는 것이 의롭고 정당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역사가 바로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지금도 그런 교훈을 통해 세계 질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해 앗수르를 심판하시고 또 나중에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바벨론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베벨론 제국은 일시적으로 유대를 심판하는 도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신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나 나라도 필요에 따라 쓰십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 16:4). 바벨론이 앗수를 무너뜨리고 유대를 무참히 무너뜨린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심판 중에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 긍휼은 온 나라와 민족이 우상에 빠져 있는 중에도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이들을 남겨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남은 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인데 국가와 민족이 지리멸렬되는 상황에서도 악을 행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먹고 평안히 잠을 잘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요? 스바냐는 그 가능성을 선포합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모든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도자와 부자들은 더 불안합니다. 국제 질서가 개편되고 유대가 섬겨야 할 주인이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 바뀝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가 그를 믿는 남은 자들에게 선포됩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노래하라! 기뻐하라!즐거워하라’입니다. 이제 곧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많은 백성들이 죽고 포로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우상을 섬기지 않은 남은 자들이라고 안전할 리 없습니다. 화는 그들에게도 미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지자는 노래하라, 기뻐하라, 즐거워하라고 외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노래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집과 성전은 무너지고 가족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 갑니다. 유대 사람은 나라와 주권을 잃었습니다. 집도 잃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춥고 배고프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뿐입니다.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의 말대로라면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가 노래하라 기뻐하라 즐거워하라고 한 메시지는 무슨 뜻일까요? 그 의미는 이 모든 것도 결국은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길게 보아야 합니다. 길게 보아도 내일에 대한 보장이 없으면 노래하고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이 모든 것은 결국 다 지나간다는 전제에서 그들이 진정 노래하고 기뻐할 일이 예비 되어 있음을 일러 줍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사 49:15, 습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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