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24) 목자(牧者)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목자가 집중해야 할 한 가지

1970년대 말 한 지방 국립대 입시문제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의 뜻을 쓰시오.’ 답은 ‘정신을 한곳으로 모으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랴.’이다. 그런데 당시 채점 교수들이 무릎을 치게 한 답이 있었다. 정답보다 더 점수를 주고 싶었던 희대의 오답이 있었다고 한다. 한 전직 장관이 “이건 실화”라며 밝힌 얘기다. “정신이 1도라도 비뚤어지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 마음을 하나에 집중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삼가다는 것은 주의한다는 뜻이고 집중한다는 것이다. ‘집중한다’고 하는 것은 100가지 것에 대해 NO라고 말할 때 비로소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에 대해 다 관심을 기울이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몰입은커녕 단 하나에도 집중하지 않는 것이다. 몰입은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목자에게 ‘그 하나가 무엇인가’. 목자가 삼가야 할 하나가 있다. 영적 리더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자신이 왜 목장에 있는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즉 양 떼를 맡은 자로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기 개념이 분명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이 먼저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조심하고, 그 다음에 그들에게 맡겨진 양 떼를 위하여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만일 영적 리더로서 자신의 영적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다른 사람을 제대로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leader’라는 단어는 원래 ‘여행하다’를 뜻하던 고대 영어 ‘lithan’에서 나왔다. ‘길잡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원래 선사시대 유럽인은 부족 단위로 양을 방목해서 먹고 산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 지리에 밝고, 안전하게 여행하는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 길잡이 역할을 했다. 영적 리더가 갖는 가장 커다란 싸움은 자기 삶을 정연하게 하는 것이다.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촌철살인은 백미로 꼽아도 좋을 것이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Robert Murray Mckinney의 말을 상기시킨다. “나의 사람들의 가장 커다란 필요는 나의 개인적인 거룩이다.”

성령은 에베소 장로들을 목자로 또는 감독자로 세웠다. 성령을 언급하는 것은 목자나 장로직이 은사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성령께서 장로들에게 목자로서 자신과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고,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치기 위한 필수적인 자질들을 분명히 부여하셨기 때문에 장로들이 임명되고 인정받았다고 말해 주는 것 같다.

 

1. 목자는 자기 개념이 분명해야 한다

양떼들이 있는 초장에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온 양 떼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필 수 있다(잠 27:23). 그들에게 집중할 수 있다. 만일 이런 정체성이 혼란이 있고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이해가 흐릿하게 되면 양 떼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게으름과 지루함과 불평·원망이 물밀 듯 밀려올 것이다. 자기개념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심리 기제 중 하나다. 개개인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 인식에는 자신에 대한 다양한 정보, 예를 들어 이름, 신체적 특징, 성격, 직업, 가족, 물건 등 자신과 관련된 수많은 정보가 포함된다.

목자가 삼가야 할 하나, 즉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는 무엇인가. 목자가 집중해야 할 것은 자신과 온 양 떼다. 주변 경관도 아니다. 여건도 아니다. 임금도 아니다. 오직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자신은 목자라는 사실과 목자는 온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정체성과 책임감이다. 특히 저녁이 되어 양 떼를 우리에 넣을 때 목자는 신경을 써야 한다.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집중 또 집중해야 한다. 목자는 양들을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시편 23:4에서 밝히는 것처럼 목자의 손에 ‘지팡이와 막대기’라는 두 종류의 도구를 지니고 있었다. 전자는 곤봉같이 생긴 무기다. 후자는 양들이 양 우리로 들어갈 때 그 등위로 펼침으로써 계수하거나(레 27:32), 구출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된 손잡이가 구부러진 평범한 물건이다. 우리가 불면에 시달릴 때 양을 세는 것의 기원이 양치기들에게 있다. 프랑스어에는 ‘compter les moutons’라는 관용어가 있는데, ‘잠을 청하기 위해 양을 세다’라는 뜻이다. 라다크 히말리아 유목민들은 양 400마리의 이름을 일일이 지어주고, 다 알고 있다. 오늘날도 중동의 목자들은 우물가에서나 한밤중에도 뒤썩인 양떼들을 단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따르는 양들을 불러냄으로써 구분할 수 있다. 목자는 양 가운데 누가 젖을 짜는 날인지, 어디가 아픈지 매일매일 살핀다. 그릇된 길로 가는 양에게는 돌팔매질로 양 앞에 돌을 떨어뜨려 무리로 돌아오게 한다. 한 마리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양몰이 개에게 나머지 양을 맡기고 찾아 나선다. 1566년 퇴계 선생이 박순(朴淳)에게 편지 중 한 대목이다. “한 수만 잘못 두면 한 판 전체를 망치고 만다”. 바둑에서 한 수의 실착은 치명적이다.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려 무리수를 두었다가 오히려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괜찮겠지 방심하다가 대마를 죽인다. 일파만파로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자멸한다. 잘나갈 때 방심하지 말고 삼가고 또 삼가는 것이 옳다.

히브리인들의 유목 및 농경 생활에 있어서 양의 중요성과 양과 목자는 특별히 영적인 진리들을 위한 적합한 비유로서 나타난다. 목자들은 양의 공급자, 인도자, 보호자, 충실한 동무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보호 아래에 놓인 동물들에 대해서 권위와 지도력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양에 집중하는 자가 목자다. 양이 아니고 보수에 집중하는 자는 삯꾼이다. 양이 아니고 환경이나 날씨에 신경을 쓰는 자는 도둑이다. 양은 다른 무리에서 온 양을 식별할 줄 알고, 양치기의 얼굴을 길게는 2년까지 기억하며, 어떤 능선과 바위와 냇물이 목초지의 경계인지 한 번 배우면 잊지 않는다고 한다. 양은 고집이 아주 센 동물이다. 집을 찾아갈 깜냥이 안 되면서 고집만 세서 목동을 힘들게 한다.

 

2. 목자는 자신과 양 떼를 위하여 집중하라

하나님이 양 떼를 치는 은유는 교회를 돌보며 인도하는 목양에 적용된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메시지의 결론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크게 세 가지 책임을 언급하고 있다. 삼가라, 치라, 일깨우라. 바울은 목회자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책임을 요약하고 있다. 교회의 영적 리더는 무엇보다 자신과 온 교회를 위하여 삼가야 한다. ‘삼가라’는 ‘προσέχω’(프로세코)이다. 도덕적 권면을 줄 때 사용하는 표준적 용어였다. 목자가 자신의 위치와 임무를 망각하고 온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지 못하면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교회의 영적 리더는 공격의 최전선에 있는 존재들이다. 목자들이 양떼를 보호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과 온 양떼을 위하여 삼가라고 권면하였다면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를 단행하고 새로운 조선의 궁궐을 완성하고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 새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이라고 한다. 정도전은 ‘춘추’에서,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고 간언한다. 왕이 된 자는 넓은 방에서 한가히 거처할 때에는 빈한한 선비를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되면 맑고 그늘진 것을 생각해 본 뒤 만백성의 봉양하는 데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Aristoteles는 ‘시학’에서 치명적 실수를 ‘'ἁμαρτία'’(하마르티아)라고 불렀다. 원래의 의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한다. 그 의미는 과녁 빗나가기다. 궁수가 화살로 과녁을 명중시키지 못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활을 쏘는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혹은 그 존재를 인식하더라도 활쏘기 연습을 게을리 해 화살을 과녁 안으로 보내지 못하는 경우다. 목자가 삼가지 못하여 치명적 실수를 범하는 경우도 같다. 자신과 양 떼를 위하여 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 제국은 후원자 체계라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부유한 집이 후원자가 되어 35명에서 50명 정도의 가정을 감당했다. 사도시대의 가정교회에 이와 유사한 구조가 있었다. 각 가정교회 공동체에는 그들에게 정해진 한 사람의 장로가 있었다. 후원자는 아니다. 목자로서 또는 감독으로서 구성원들을 돌보는 자다. 정기적으로 일정 지역의 전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함께, 필시 야외에서 모임을 가졌을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목자로서 삼가라는 권면은 당나라 때 명신(名臣) 위징(魏徵)이 당 태종에게 올린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疏)’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태종에게 열 가지 반드시 명심해야 할 내용을 간언(諫言)하는 상소라는 뜻이다. 그 중에 한 가지다. “처음에 시작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능히 끝을 잘 마치는 자는 거의 없다.” “나태하고 게을러질까 두려울 때는 반드시 일의 시작을 신중히 하고 일의 끝을 잘 삼가야 한다(愼始而敬終).” 바울은 염두한 것은 장로들의 나태와 게으름이 아니라 앞으로 교회에 침투할 이리와 내부에서 발생할 거짓 교사들이다. 바울은 예언자는 아니지만 미래를 내다볼 때, 에베소 교회의 전망이 아주 유망한 것만은 아니었다. 교회에서 지도자 중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서 그들의 추종자들을 이단의 곁길로 이끌었다. 현재 에페수스(Ephesus)는 성지순례지로 유명할 뿐이다. 바티칸이 공인한 산 위의 마리아 집과 고대 7대 불가사의였던 아르테미스 신전. 정통과 이단, 성모와 우상이 가득한 유적지로 존재할 뿐이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에서 바울이 예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목회서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 2:1에서는 이런 이단들과 투쟁하느라 그리스도에 대한 첫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런 경향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던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삼가라, 그의 명령을 따르라고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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