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전문가칼럼
【한명철 목사】 유능제강(柔能制剛)
  • 한명철 목사
  • 승인 2019.09.14 10:10
  • 댓글 0
  • 조회수 541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고수는 강함을 익혀 부드러움을 가진다

현실의 삶에서 싸움 없이 모두가 평화로우면 최선이지만 세상에는 어떤 형태로든 크고 작은 싸움이 있다. 가까운 사람에서부터 먼 이웃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의 싸움은 느닷없이 일어난다. 경쟁 형태를 띤 기업 간의 싸움, 스포츠에서의 경기, 나라간의 전쟁이 그러하다. 피할 수 없는 경쟁이나 경기가 아니라 피할 수 있는 싸움의 경우에는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고수들은 되도록 싸움을 피한다. 싸움 결과를 알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고국을 방문했을 때 바람의 파이터로 알려진 최배달(본명은 최영의) 관장의 제자인 한 분을 만났다. 극진 가라데의 창시자에게서 배우고 다른 무술들까지 익혀 모두 48단에 이르는 진정한 고수다. 작달만한 키에 다부진 체격이었지만 악수를 나누고 대화를 이어가며 겸손히 기도를 받던 그 모습에서는 무도인이라 여길 만한 어떤 것도 없었다. 젊은 날의 기운에 힘입어 격파와 발차기에 매달렸던 옛 기억을 잠시 떠올리며 강함을 익혀 부드러움이 몸에 배인 진정한 고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수가 풍기는 것은 살기가 아니라 생기다. 하수나 덜 익은 고수급들이 싸움을 즐기지 진정한 고수는 싸움을 즐기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싸우지 않을 수 있다면 최선이다. 싸우지 않아 피해를 막고 이기고 지는 팽팽한 기류에서도 벗어나 편하다. 승패의 갈림이 없으니 모두가 일종의 평등 상태에 놓인다. 차선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상대가 싸움을 걸어도 싸움을 피한다. 그러면 이김에서도 자유롭고 짐에서도 자유롭다, 강자가 싸움을 피함은 약자가 살고자 싸움을 피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손자병법>에도 최고의 승리란 상대의 싸울 의지를 꺾는 벌모(伐謨)라 표현했다. 백전백승보다 더 위대한 것은 승수는 모자라더라도 부전이승(不戰而勝)이다. 만약에 싸워야 한다면 반드시 이긴다. 고수란 이기는 법을 안다. 그래서 고수다.

 

가진 자와 가해자에게 무른 법

한국은 이상하다. 범죄자가 체포되면 얼굴부터 가린다. 흉악범일 경우의 신원보호는 경호차원에 가깝다. 익명으로 처리되거나 변성하여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다. 범죄자의 인권 운운하며 행하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작태가 낳는 것은 흉악 범죄의 확산이다. 언제라도 석방되면 이전보다 더 악랄한 범죄자가 될 확률은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할 때보다 더 높다. 마땅히 범죄자의 신원은 백일하에 공개해야 한다. 그의 가족과 자녀들이 부끄러워서라도 범죄 충동을 막을 수 있을는지 뉘 알랴? 국가적인 경제사범이나 전문해커, 가정파괴범, 미성년자 성 추행범들은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 수용시켜야 한다. 수용소군도는 그들 같은 존재를 위해 불가피하게 필요하다.

작은 도둑은 철창신세라도 큰 도둑은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기막힌 현실이다. 송사리를 잡는 데는 어뢰를 사용하고 대어를 잡을 때는 대낚시 수준이다. 국가 급의 범죄에는 몸통은 한없이 축소되고 깃털만 허공을 날린다. 가진 자의 법 사각지대 탈출 경로는 수준급이다. 경호원을 대동하고 해외로 도피하는 모습이 흡사 첩보 작전을 능가한다. 쓴 웃음이 절로 나고 쓸데없는 한숨만 들락거린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 평등하게 적용하고 집행해야 한다. 일부 특권층을 비호할 피난처가 숨어 있다면 악법이다. 이러니 대중의 한이 쌓이고 민초들의 삶이 고달프지 않겠는가? 삼진 아웃 제도도 너무 무르다. 투 스트라이크 아웃으로 진전시켜 모든 분야에 적용시켜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의 경우에는 원 스트라이크 아웃 제도로 강화시켜야 한다. 당연한 도덕적 책무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삼킨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는 막다른 골목에서의 선택이다. 탈출로를 봉쇄당한 쥐는 결국 자기 속을 파고든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피할 틈을 열어주지 않으면 쥐가 고양이를 문다. 주님이냐? 맘몬이냐? 는 회색의 중간지대가 없는 생사의 갈림길이다. 당연히 주님을 선택하고 말씀과 기도에 올인 함이 아름답다. 선택하지 못해 고민하는 시간이 늘면 선악의 비무장지대가 마음에 형성된다.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세계에서는 약육강식도 통하지 않는다. 생존본능은 모든 본능에 앞선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삼키는 예는 자연에서 흔하다. 작은 개울물이 큰 달빛을 품는다. 작은 기업이 큰 기업을 삼키기도 한다. 블랙홀은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모래알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블랙홀은 자기 덩치보다 큰 별들을 삼키면서 덩치를 키웠다. 아인슈타인이 1915년 완성한 <일반 상대성원리>에서 블랙홀의 존재를 처음 언급한 이후로 지금까지 블랙홀의 크기 역시 엄청나게 불어났다. 하나의 은하에 10억 개의 블랙홀이 있으니 전체 은하계에 산재한 블랙홀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블랙홀과 블랙홀이 대치했을 때 삼키는 것만이 살아남는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영적 원리

섹스피어가 “어린이는 어른들의 아버지”라 표현했을 때 아이는 어른보다 크다. 대국인 남의 나라보다 소국인 내 나라가 가슴을 채우면 조국은 다른 나라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크다. 방축에 바늘구멍만한 틈이 생기면 수원지의 모든 물이 결국 그 벌어진 틈을 통해 쏟아져 내리니 결국 작은 틈이 큰물을 흡수하는 격이다. 토끼는 경주에서 거북을 이긴다. 그런데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경우가 현실세계에 존재한다. 빠른 것이 능사가 아님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은 느린 것을 살피기 시작했다. 슬로우 시티(slow city)는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자기 덩치보다 큰 먹이도 통 채로 삼키는 뱀이 있다. 폭풍우를 버티려는 소나무뿌리가 통째로 뽑혀도 자그만 가지는 생존한다.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고 어리석음으로 지혜를 이김이 십자가 정신이다. 부드럽고 강함은 주님의 품성이다. 주님께는 양의 부드러움과 사자의 강인함, 비둘기의 온유함과 독수리의 강함이 있다. 사랑과 공의를 나타냄에 치우침이 없다. 두 개의 이질적 성품이 주님의 인격 안에서 아무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타원의 두 중심점처럼 주님의 품성을 익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사랑과 공의로 교회의 체질을 개선하라

우리 안에도 주님을 닮아 이런 품성이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의 인격이 고르지 못해 두 개의 성품이 자주 충돌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사랑은 원수의 증오를 이길 만큼 부드럽지 못하고, 우리의 공의는 불의를 단죄할 만큼 날 서지 못하다. 우리의 사랑은 거칠고 우리의 공의는 둔하다. 사랑도, 공의도 모두 어중간한 선에서 활발할 뿐 사랑이 사랑답고 공의가 공의다운 차원까지는 미치지를 못한다. 이 두 가지 성품은 긍휼의 마음에서 완성을 본다. 긍휼은 사랑과 공의의 완제품이다. 긍휼에는 모든 허물을 덮는 사랑의 힘과 함께 심판을 이기는 능력이 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긍휼한 마음으로 한국교회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제언한다. 다음 사항들만 시정된다면 조국교회의 체질 개선이 이뤄지지 않을까? 세습 근절, 교파우월주의의 타파, 정년제의 하향 조정, 저질 부흥사 퇴출, 권위주의적 목회 포기, 분립 개척, 물질의 우상화 경향 척결, 임지 교환의 제도적 방지, 직분의 방만한 수여 폐지, 교회의 독선적 태도 변화, 금권 선거 관련자 처벌 강화, 불건전한 신학 사상의 근절, 정치 목사와 정치 장로의 축출, 양적 성장에 치우친 목회관 시정, 실천이 따르지 않는 신앙의 대변혁, 한기총을 비롯한 유관 기관들의 해체, 초교파적인 이단 대처, 기복적 신앙을 부추기는 비성경적 설교 공개 비판, 신학교 난립과 무자격 목회자의 양산을 막기 위한 통폐합 운동, 대 사회적 영향력 강화를 위한 교회의 순기능 보완책 마련, 유명무실한 선교단체들의 축소와 선교단체들 간의 전략적 협력, 올바른 신학과 선교와 목회의 패러다임 확립을 위한 신학자, 선교사, 목회자들의 상생 노력 등이다.

 

조국교회의 현 주소, 자만과 맘모니즘

한국교회에 두드러진 문제를 하나 꼽으라면 영적 자만심을 들 수 있다. 한국교회에는 세계의 여타 교회들이 쫓아오지 못할 특별한 무엇이 있다. 기도와 헌금과 집회의 열기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부흥, 열심, 집회 등의 탁월한 면으로 인한 영적 자부심이 부풀려져 영적 자만심으로 변형되었다. 제2의 이스라엘 운운은 나르시즘의 전형적인 예요 집단적 교만이다. 하나님께서 한국을 제2의 이스라엘로 삼으신 적이 없다. 겸하여 성장지상주의가 한국교회를 부흥케 했고 병들게 했다. 성장신학의 공과는 분명하다. 현상적이요 일시적인 성장과 본질적이요 장구한 합병증이다. 부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을 황금송아지로 대치시켰던 아론의 종교가 맘모니즘에 더럽혀진 한국교회의 실상이다. 한국교회의 지도력은 신본주의를 내세워 매우 권위주의적이다. 신본주의에 빗대어 목회자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 카리스마 형 목회자들의 전횡은 그 어느 시대보다 바리새적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은 학위 남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박사 가운이 우상 보자기가 되었다. 주님이 포기한 명성을 되찾고 주님이 버린 쓰레기를 보물처럼 여기는 박사병 환자들을 걸러내야 한다. 실력도 없으면서 실력자의 제복을 입음이 얼마나 위험하고 수치스러운지 모른다. 허명에서 자유로워야 주님께 실명으로 호명된다. 나아가 한국교회의 분열은 속도와 정도에서 세계 제일이다. 이중 잣대도 고질적이다. 자신에게는 은혜의 복음을 적용하고 타인/타 교단에 대해서는 율법주의를 표방한다. 한국교회는 자신을 모른다.

 

세상에 영합한 말씀은 배신의 시대를 낳아

에피소드 한 토막을 소개한다. 최근에 어떤 교인이 지역의 한 은퇴 목사님을 만나 “요즈음 교회를 가면 설교를 통해 메시지를 듣는 것이 아니라 마사지를 받고 온다!”고 푸념했다 한다. 신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던 설교가 마침내 전신의 가려운 곳을 어루만지고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마사지에까지 이르렀다는 표현은 과히 비극 상황이다. 메시지가 아닌 마사지로 말씀의 권세와 능력을 땅바닥에 내팽개친 설교자의 죄악은 결단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말씀을 경홀히 한 자의 말로를 성경은 누누이 전한다. 우리도 주님처럼 채찍을 들지만 사랑과 은혜라는 미명 아래 내려치지 못하고 가만히 내려놓지 않았던가! 우린 그저 그럴듯한 폼만 잡다 어설프게 물러서곤 한다. 주님으로서는 정말 열불 날 일이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인간 상황에 영합하지 않는다. 예언자들은 시대에 맞는 말씀이 아니라 늘 시대를 앞서가는 말씀을 전했다. 죄의 결과로 인해 모든 시대는 하나님에게 반역적이었다. 배신(背信)이 배신(背神)을 낳았다. 배신의 가장 전형적인 표가 바로 말씀에 대한 학대다. 시대에 합당한 말씀도 정죄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라 환영받지 못했다. 그들의 한 박자 빠른 말씀은 자주 대중의 외면을 당했다. 소수의 남은 자들이 말씀의 진미를 알았다. 메시지가 마사지로 변하고 섞음이 썩음으로까지 나가면 변질은 부패를 낳는다. 부패의 악취가 진동하면 벌 나비는 도망가고 똥파리 떼만 몰려든다.

 

성령님이 일하시고 진리가 약동하는 설교

번영신학의 기초를 이룬 말씀들이나 형통과 축복을 가장한 그럴듯한 메시지가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약하게 만들고 이기적으로 변질시켰는지 모른다. 유익한 정보와 산뜻한 독후감을 방불할 만큼의 세련된 설교에서 십자가와 보혈의 원색적인 복음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 말의 성찬(盛饌), 해석과 적용 그리고 그 내용을 드라마틱하게 만들 예화들이 한 편의 설교에서 별빛처럼 반짝인다. 이를 위해 극적 예화를 만들어내는 사기꾼들도 극성이다. 스스로 만족한 설교자의 상기된 표정과 겉꾸미기의 달인이 되어버린 신자들의 부푼 몸집만이 교회당을 가득 채운다. 성경의 바른 해석이 외면당하고 칼 같이 찌르는 말씀, 불같이 태우는 말씀의 기세가 사라진 강단에는 희망이 없다. 모이는 숫자는 별 의미가 없다. 바른 메시지를 전하는 바른 메신저 주위에 몰려든 군중이 아니라면 허접쓰레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표현대로 불이 공력을 나타낼 때 타버릴 나무나 풀이나 짚의 신세일 것이기에 그렇다.

교회의 크기와 관계없이, 목회의 진전과 상관없이 설교자는 말씀에 대한 깊고 진지한 연구를 통해 생수를 길어내고 그것을 갈한 영혼들에게 마시도록 하는 외로워도 의로운 길에 서야 한다. 그렇게 진리를 알아 자유를 얻고 그 얻은 자유로 어둠과 거짓에 포박된 영혼들을 풀어놓아 자유케 해야 한다. 우리의 메시지에 진리가 약동하지 않으면 진리의 선포에 따라 역사하기 위해 찾아오셨던 성령은 그다지 할 일이 없어 빈 손 들고 보좌로 복귀하신다. 신령을 가장한 거짓 신령함이 물결치는 곳에 성령은 한시도 계실 수 없으시다. 설교 도중에 성경 몇 구절이 인용되고 십자가와 보혈이 언급되었다 해서 그런 메시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원색적인 설교는 주님의 메시지나 사도들의 메시지에 잘 드러나 있다. 비교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물론 복음적 설교처럼 비슷하게 꾸미는 재간꾼들도 있지만 사람들은 속아도 성령은 속지 않으신다. 인간의 외침, 소리의 전달은 있지만 단지 그뿐이다. 설교를 돕는 소도구들과 성능 좋은 마이크, 전달 기술과 말재주가 빛을 발하긴 하지만 이미 성령이 저만치 물러간 설교는 도덕적 훈계나 훌륭한 강연에 머물고 만다.

 

한명철 목사  jesuspointer@naver.com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명철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