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슬픔의 속살은 기쁨이다

춘천의 한림대학교가 2012년 개교 30주년을 맞아 도서관에 <삶의 찬미>란 조각품을 설치했다. 비록 영상이지만 작품 감상에 어려움은 없었다. 나무의 다이아몬드라 칭하는 아프리카 흑단으로 만든 4m 높이에 1톤 무게의 이 작품을 멀리서 보면 그저 불타버린 나뭇등걸이다. 허나 가까이서 살피면 무수한 흑인들의 삶이 녹아있다. 다양한 동작의 인간들은 생생히 살아 있다. 검은 삶을 찬미한 탄자니아 남동부와 모잠비크 북부에 군집한 마콘데(Makonde) 부족의 조각가 요한나 마틴 일행의 손재주가 놀랍다. 흑단에 흑인의 삶을, 한 나무에 한 부족의 역사를 새긴 것은 재주를 넘어선 혼이었다.

타다버린 나무도 껍질을 벗겨내면 속살의 아름다움이 있다. 슬픔의 먼 강폭을 건너면 기쁨의 대지다. 검정을 계속 문지르면 광택이 난다. 오닉스(Onyx)는 그래서 아름답다. 모하메드가 알라의 상징을 검은 돌로 한 것은 흰 돌로 상징된 그리스도를 의식해서였을 것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자리의 검은 돌 위에 세운 것이 카바 신전이라 믿는다. 카스피 해의 주민은 캐비아를 검은 보석이라, 한국인들은 홍합이나 미역을 검은 보석이라 칭한다. 한 때는 연탄을 검은 보석이라 불렀다. 어쨌든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무슨 색이건 간에 아름답다. 검정은 검정대로, 빨강은 빨강대로, 파랑은 파랑대로 있을 때 그 색이 가장 아름답다. 이것이 바로 원래의 색이 지닌 본연의 원색미다.

 

삶은 과거를 보내고 미래를 맞이하는 것

삶은 아름답고 고귀한 경험이다. 태어나면서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길을 떠난다. 길가에서 마주치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길을 닦는다. 때로는 선인들이 걸어간 길을 따르고 하도 다녀 움푹 패인 길도 지난다. 한 번도 지나본 적 없는 길도 걷는다. 높은 고갯길을 만나며 최근에 뚫린 터널도 통과한다. 막다른 골목길에서 돌이키기도 하고 처녀림을 지날 때는 두려움에 뒤섞인 흥분도 느낀다. 지적인 탐구 여행이 곧 자신을 알아감에서 시작되어 부분적이나마 자신을 앎으로 멈춰 섬은 놀라운 경험이다. 인생의 고민을 틀어쥐고 긴 한숨 끝에 삶을 이어가는 것이 명상의 끝자락임을 아는 것도 기쁨이다.

욕망의 먼지를 털고 집착의 외투를 벗는 것이, 공포의 사슬을 끊고 슬픔의 강을 건너는 것이 모두가 예외 없이 풀어야 할 인생의 숙제임을 깨달을 때 삶은 보다 가볍다. 잃어버린 과거의 시간을 찾기 위해 손짓하며 다가오는 미래를 뿌리치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삶은 과거를 미련 없이 보내고 미래를 설렘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 설령 어제처럼 내일을 보내야할 망정 ‘미래 맞이’는 유쾌한 일이다. 삶은 서로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너와 내가 어울려 살아가야 할 거대한 공장인 것을! 시비와 다툼이 어찌 없겠으며 아픔과 미움이 왜 서로의 상처에 덧나지 않겠는가? 그럴지라도 살자!

 

하나님을 움직이는 진지한 믿음

웃음을 팔지 말고 나누라! 가식 없는 미소는 천금보다 귀하다. 사라는 하나님의 생명 약속을 비웃었지만 하나님이 그녀에게 미소(이삭)를 선물하자 미소 짓는 늙은 어미가 되었다. 하늘의 미소가 없으면 땅의 어머니들은 근심에 싸인다. 결혼 5년, 10년이 지나도 자식을 갖지 못한 부모의 애절한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이라면 알 길이 없다. 한나는 자식이 없는 서러움에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하나님의 성전에 엎드렸다. 그의 하소연이 얼마나 절절했던지 엘리 제사장의 눈에 술주정하는 여인으로 비쳐질 정도였다. 사연을 들은 엘리는 한나에게 가벼운 축복을 건넸다. 한나는 엘리의 축복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그 사이에 무겁고 무거우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한나는 엘리의 가벼운 축복을 짓누르던 하나님의 무거운 약속대로 아들을 얻었다. 함박웃음이 그녀의 귓가에까지 걸렸다. 자식이 없어 애타하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권한다. 하나님의 교회를 찾아라! 한이 되고 설움이 된 무자식의 형편을 생명 창시자이신 하나님께 아뢰라! 그 하나님께 귀한 생명 하나를 허락해달라고 빌어보라! 누군가 그대를 축복하거든 한나처럼 무겁게 받아들여라! 말에는 천금의 무게만큼 뱉은 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힘이 있다. 무거움이란 진지함과 믿음을 의미한다. 당신의 진지한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미소 짓게 하리라!

 

가식을 벗고 맞이하는 브니엘의 아침

가식을 버리라! 가식(假飾)은 외식(外飾)이나 허식(虛飾)과도 통하는 표현이다. 실체가 아니라 겉꾸밈을 가리키는 말이다. 겉꾸밈은 약효가 오래 가지 않는다. 몇 번은 통하겠지만 금세 들통 난다. 속이 들어차 있지 않은 사람일수록 겉꾸미기에 여념이 없다. 부로 꾸미고 학위로 꾸미고 직함으로 꾸민다. 형용하는 것이 아무리 대단해도 형용은 형용일 뿐 명사는 아니다. 목사라는 호칭 앞뒤에 박사로 테두리를 한 명함을 보면 그 사람이 우습게 보인다. 주보에까지 박사를 인쇄한 모습을 주님은 어떻게 보실까? 수십 개의 박사보다 영예로운 칭호는 목사다. 가장 영예로움을 감싸는 것들은 쌓일수록 영예의 빛을 잃게 만든다. 꾸밈으로 그대 자신을 칭칭 감는 만큼 그대의 영혼은 볼품없이 화해버리고 만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형 에서로 자기를 꾸몄다. 에서는 호방한 산사람이었으나 야곱은 집사람이었다. 성경은 에서를 털사람으로, 야곱을 매끈매끈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야곱은 모친의 도움으로 염소 새끼의 가죽털로 손과 드러난 목 부분을 꾸미고 시력이 좋지 않던 아버지를 속였다. 그는 모친과 공모하여 거짓 꾸밈으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기만했다. 결과적으로 야곱은 형의 축복을 가로챘다. 그가 얍복의 밤을 보내고 브니엘의 아침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천사와 겨루고 끈질김으로 승리를 쟁취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긴 했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그가 보여주었던 가식 행위는 파렴치함의 극이었다.

 

알참-투명함-맑음의 가치

알참이란 있는 그대로를 내보임이다. 약하면 약한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투명한 자신을 내보임이 진실이다. 알차지 않음에도 뭔가 찬 듯이 보이려는 것이 가식이요 겉꾸밈이다. 진실이 아름답고 당당한 것은 전혀 꾸미지 않은 청정함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속이 차면 깡통 소리가 둔탁해서 잘 울리지 않지만 비면 빌수록 울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기에 이런 세태에 영합한 꾸밈 문화가 꽃핀다. 꾸밈에 이용되는 신기술이 바로 날조요 날조의 명인이 세간에 회자될 때마다 대중은 몸살을 앓는다. 삶의 철칙이란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 가식을 이기는 것은 진실이다. 세상을 뒤덮은 가식의 먹구름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한 줌의 진실이다. 크리스털이 아름다운 이유는 투명함 때문이다. 보석의 가치를 결정함에 있어 투명도(clarity)는 중요한 요인이다. 투명한 인격이란 감춘 구석 없이 사방으로 열려 진실한 사람 됨됨이다.

진실하려면 청정한 바다의 에메랄드 물빛처럼 마음을 맑게 하라! 가꾸라 하지 않음은 가꿈도 뭔가 있는 모습에다 꾸미는 것이기에 그렇다. 마음이 맑으면 눈빛 또한 맑다. 사람의 진실은 눈빛에 드러난다. 눈은 마음의 창이요 거울이다. 시력을 말함이 아니다. 두꺼운 안경을 써도 맑은 영혼의 사람에게서는 맑은 눈동자를 본다. 시리도록 보아도 질리지 않다. 눈의 맑음이 시림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앞 못 보는 소경이라 해도 그의 맑은 마음은 신체의 어느 부분을 통해서라도 전달된다. 그래서 글과 생각으로 보고 마음으로 보며 영혼으로 본다. 지안이, 심안이, 영안이 육안보다 더 깊이 본다.

 

투명 지향적 백의민족

편협한 국수 민족주의운동으로 분열되던 유럽의 심장 파열음을 들으며 상심한 괴테는 귀향길에 올랐다. 육순을 넘긴 시인의 손에 달랑 들린 것은 420년 전 혜성처럼 왔다 유성처럼 사라진 동방의 시인 하피스의 시집 한 권이었다. 옛 페르시아 시인의 시어에 감동한 괴테는 외쳤다. “하피스여, 그대와, 오로지 그대와/나 겨루어 보고 싶소/기쁨도 고통도/우리 둘, 쌍둥이처럼 나누세!” 귀향과 마리아네와의 사랑, 연이어 영감어린 시어들이 내뱉어졌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서방 시인이 쓴 동방의 시’란 부제를 단 그의 <서동시집>(西東詩集)이다. 12권으로 이루어진 이 시집에는 “하피스의 서(書)”가 두 번째에 나올 정도로 그의 정신적 영향은 지대했다.

죽은 자와 쌍둥이기를 원했던 괴테, 사자와 시어를 통한 영혼의 교감을 갈망했던 괴테는 하피스 경배자였고 동방 예찬론자였다. 그의 시집 첫머리에는 제국들의 분열과 붕괴를 바라보며 동방을 피난처로 여긴 그의 마음이 엿보인다. “북과 서와 남이 쪼개진다/왕좌들이 파열한다/제국들이 흔들린다/그대 피하라/순수한 동방에서.......” 하피스로부터 6세기 후의 타고르는 페르시아보다 더 동방인 나라, 고통에 신음하던 그 나라의 미래를 읊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흰 옷을 사랑해서 백의민족이라 불리던 이 민족의 성향은 투명 지향적이라 믿는다.

 

나이를 먹는 것은 충일해지는 것

태양에서 비롯된 빛은 만물을 새롭게 하는 생명이다. 어둔 밤을 밝히는 달 또한 생명의 한 줄기임은 부인할 자 아무도 없다. 미래에서 피어난 희망은 인간을 세우는 기운이다. 과거를 들추는 회상 역시 그러함을 누가 반박할 것인가? 인간은 기막힌 현실에서 고개를 외로 꼬며 외면해도 결국 비슷한 현실을 끊임없이 맞이해야 한다. 삶은 지독한 반복이다. 지울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존재함의 그림자다. 삶이란 지나치고 나면 모두 아쉬운 추억처럼 그립기 한량없다. 고독한 사랑도, 사무친 원한도 살 같은 순간이 스쳐 가면 그만이다. 숨 쉬고 살며 부딪히며 사랑하는 것은 생존의 통과의례다.

평온과 만족만이 삶의 희열은 아니다. 때로는 힘겨워 신음하며 고통에 전율하는 삶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미숙한 인생은 모른다. 삶이 성숙함을 지나 완숙함에 이를 지경이면 내 삶을 이루어온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살날을 잃어감만이 아니다. 살아온 날들을 익혀서 존재를 충일케 하고 영원한 삶의 처소를 향해 나래를 펼치는 적기다. 한 순간도 내버릴 시간이란 없다. 내게 다가와 다채로운 환경 속에서 나와 뒹굴며 내 삶의 실체와 그림자 사이에서 물감처럼 번졌던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삶은 적막강산이었을 것이다. 흔적 없이 찾아와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이 시간의 숙명임을 알기에 나는 나의 모든 날을 오롯이 사랑한다. 행복한 순간에 못지않게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불행했던 순간들이다. 거친 파도가 넘실대는 대양만이 아니라 고요한 호수에도 언제나 파문이 인다. 내 인생의 모든 빛과 어둠을 보듬고 주어진 나의 시간들을 쪽빛보다 푸르게 채색하고프다.

 

가식의 가죽을 벗기면 맑아진 자신을 만나

깨끗해 보이는 쇠뭉치도 고열에 달구고 망치로 내려치면 쇠를 감싸고 있던 불순물들이 벗겨진다. 가식이란 탈과 가면 같고 쇠붙이에 찰싹 붙어있는 불순물과 같다. 탈이나 가면은 벗으면 되지만 쇳덩이의 불순물은 달구고 때려내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가식 중에 가장 벗기기 힘든 가식이 속에 내장된 가식이다. 보통 가식은 겉꾸밈인데 속꾸밈도 있다. 속꾸밈은 옷처럼 훌훌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부처럼 살갗에 붙어있고 깊은 마음 곳곳에 인자가 되어 박혀있다. 이것은 긁어내거나 파낼 수도 없고 벗겨낼 수도 없다. 묵은 땅을 기경하듯 마음을 완전히 뒤집어엎어야 한다. 용광로에 녹인 쇳물로 아예 다른 틀에 넣어 새 모습으로 만들어내듯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한다.

가식은 초기에 벗겨내지 않으면 가죽처럼 질겨졌다 나중에는 고래의 심줄보다 더 질겨진다. 애초에 꾸미지를 말아야 하고 꾸몄다가도 이내 훌훌 벗어버려야 한다. 그래야 삶이 가벼워 편하다. 마음의 위장은 표범의 반점을 벗겨내기보다 힘겨운 일이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란 시구는 자식의 옷을 칭칭 감고 사는 우리, 외식덩어리라 규탄당해도 할 말을 잃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거창한 업적을 남기거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한 거사를 일으킨 것도 아니지만 송백 같은 한 젊은이의 가슴 시린 시 한 조각이 숱한 세월의 벽을 뛰어넘어 애송되는 것은 시에 담긴 투명한 삶을 향한 의지일 것이다. 가식을 벗겨내는 만큼 스스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맑고 그윽하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꾸밈없는 원형미(原型美)

거짓을 또 다른 거짓으로 꾸미고 그것이 거짓이 아닌 양 계속 꾸미는 동안 진실은 유린되고 올바름과 그릇됨이 무엇인지 믿고 살아왔던 다수의 삶은 폭격 맞은 도시처럼 폐허가 되어버린다. 아집이 비뚤어진 양심과 만나면 누구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는 고집불통이 되어버린다. 이는 정신적 혼수상태로서 여러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다. 이런 자를 이웃으로 두면 맑은 날에도 천둥 치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을 각오도 해야 한다. 이런 자가 동료가 되면 살이 썩고 뼈가 깎여나가는 듯한 통증에 시달려야 하고 이런 자가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면 세상은 거덜 난다. 가식의 왕자가 삐딱한 추종자들의 호위를 받는 세상은 망해야 정신 차릴 나라다. 실로 이런 시대를 함께 살아야 하는 삶이 비통스럽고 변화무쌍한 하늘 밑에서 같이 호흡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이 암울하기 짝이 없다.

겉옷처럼 입혀진 가식은 빨리 벗을수록 홀가분하다. 표범의 반점처럼 새겨졌다면 살을 도려내는 아픔도 감수해야 한다. 가식을 벗어 수치가 드러나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전연 없다. 어떤 경우에도 “내 모습 이대로”는 아름다운 고백이다. 여러 겹의 가면을 쓰고 변장술과 포장술이 신의 경지에 이르러 그럴 듯하게 보일 수 있음이 오히려 역겨움이요 수치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스스로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기 까닭이다. 원래의 자기 모습을 간직함이 자연스러움이다. 우리가 자연에 ‘대(大)자를 붙여 대자연이라 스스럼없이 부름도 꾸미지 않은 모습 그대로의 원형질 상태에 있음을 크게 칭송함이다. 아무런 가식 없이 살면 여러 모로 불편해도 중압감을 떨쳐버린 삶은 도리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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