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배은(背恩)을 없애고 망덕(忘德)을 경계하라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은 열이었지만 돌아와 감사를 표한 것은 사마리아인 하나뿐이었다. 주님이 물으셨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무감사로 일관하는 뻔뻔한 인간들을 고발한 외침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배은망덕으로 답하기 일쑤다. 은혜를 저버리고 베푼 정을 잊는 것은 인간성 중에서 가장 못된 부분이다. 일상에서 배은망덕의 표본을 채취하기란 아주 쉽다. 어떤 노숙자는 자신에게 도움을 베푼 성당만 골라 털다 철창신세가 되었다. 구치소에서 갓 출소한 여성 절도 피의자는 자신을 도와주었던 여성 교도관의 뒤통수를 가격했다가 역시 철창신세가 되었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배은망덕의 예는 수도 없다. 배은을 없애고 망덕을 경계하라!

고양이는 애완동물 중에서 배은망덕을 상기시킨다. 먹이를 주는 사육사의 손을 물어버리는 하이에나처럼 고양이는 식사 도중에 방해를 받으면 표독스런 낯빛으로 변한다. 주인도 예외가 없다. 섬뜩하고 살벌하다.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기에 늘 깎아줘야 한다. 개는 생각할수록 충직한 애완동물이다. 발로 차도 꼬리를 치며 달려든다. 고양이 같은 인간은 늘 사랑을 받다가도 자신의 존재감이 위협당하거나 먹이를 빼앗긴다 싶으면 눈을 치뜬다. 이에 비해 개 같은 인간(비유요 욕이 아님)은 두들겨 맞고 공개적으로 망신당해도 이전의 은혜를 기억하고 물지 않는다. 충직한 개보다 못한 불충과 불의의 인간이 많다.

 

다윗의 길과 나발의 길

물에 빠진 사람을 건졌더니 보따리 내어 놓으라 생트집이다. 고대한국인이 세운 대마도를 귀속시키지 않고 내어주었더니 대마도를 차지한 일본이 독도까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긴다.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을 복속시켜 중국을 평안케 해주었더니 동북 공정의 역사 왜곡으로 되갚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풍전등화의 조국을 해방시켰더니 맥아더 원수를 통일의 원수라고 악을 쓴다. 십 년 넘게 온갖 정성으로 병수발을 들었더니 못난 남편은 그런 조강지처에게 이혼 청구를 한다.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을 간신히 끌어올렸더니 구명줄로 꼰 넝쿨이 거칠어 살갗에 상처를 냈다고 투정이다.

친구의 배반은 어처구니없다. “어처구니”란 원래 맷돌을 돌릴 때 잡는 손잡이를 일컫는다. 맷돌을 돌리려는데 응당 있어야 할 어처구니가 없다. 황당한 일이다. 배은망덕한 사람은 불량 끼가 있고 성정이 미련하다. 나발은 다윗이 베푼 은혜를 저버렸다가 몸이 돌덩이처럼 굳어 꼴사나운 죽음을 당했다. 이에 반해 은혜를 베푸는 사람 다윗은 요나단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잊지 않았다. 사울 가문이 멸족 당했지만 길르앗 산의 마길이란 사람 집에 은거하던 므비보셋을 찾아 은혜를 갚았다. 다윗의 보은 정신은 끈질기고 철저했다.

 

은혜를 배신한 이스라엘의 역사

사울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자 블레셋 군대는 그의 시체를 전승 기념으로 벧산 성벽에 높이 매달았다. 이 비보를 접하자 예전에 사울을 통해 암몬 족속의 침공을 받았을 때 구원받았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야간 기습을 통해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되찾고 7일 금식으로 예를 표했다. 사울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많았지만 그것을 잊을 만한 시기에도 잊지 않은 이는 그들뿐이었다. 아름다운 일이다. 은혜를 뼈에 새겨 잊지 않으려는(刻骨難忘) 마음이 있어야 죽어서라도 은혜를 갚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이 가능하다. 부디 망원보은(忘怨報恩)하라!

배은망덕은 단순히 은혜를 잊음이 아니라 원수로 되갚음임을 명심해야 한다. 암몬의 통치자 하눈은 선친이 베푼 은혜를 생각하고 다윗이 보낸 조문 사절에게 수치를 가하여 강제 추방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음이다. 유다의 요아스 왕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치 않고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을 책망한 제사장 스가랴를 돌로 쳐 죽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음이다. 어려서 벌거숭이에 피투성이였던 이스라엘을 품어 성장시켰으나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젖을 물렸던 야훼의 품을 떠나 잡신의 품에 안겼다. 은혜를 원수로 갚음이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음이다. 친어미보다 이스라엘을 더 애지중지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음이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때를 알지 못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음이다. 주님은 가룟 유다의 됨됨이를 아시고도 그를 내치지 않으셨으나 유다는 주님을 유대 당국자들의 손에 내쳤다. 은혜를 원수로 갚음이다. 오늘 내가 누군가의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나야말로 인간 말종이다.

 

배신의 집적물이 쌓이는 시대

요즈음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서로가 상대를 향해 배신의 아이콘이라 외쳐대는 혼란한 시기다. 인간 역사는 배신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곳곳마다 켜켜이 쌓인 것은 헤아릴 수 없는 배신의 집적물, 배신하고 배신당한 인간들의 얘기 보따리들이다. 편안한 얼굴을 내보여도 사람들은 저마다 배신당한 쓰라린 추억을 안고 산다. 그런데 그런 그 역시 누군가에 의해 배신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것이니 누가 누구를 원망하며 탓할 수 있으랴! 수원수구(誰怨誰咎)가 따로 없다. 배신에 관한 말을 자세히 들어보라! “내가 배신했다!”는 고백은 들을 수 없고 죄다 “내가 배신당했다!”는 하소연뿐이다. ‘내로남불’이란 말은 배신자의 주문으로 안성맞춤이다.

사기(史記)에는 나라의 패망을 앞당기고 민족의 운명을 파국으로 몰고 간 배신자들의 죄업이 단죄되어 있다. 정치권에서는 배신의 아이콘이라는 주홍 글씨가 서로를 향해 난무한다. 몇 세기가 흐르면 그들 중의 얼마는 배신자의 낙인으로 얼룩진 신숙주의 반열에 끼일 지도 모른다. 원래 숙주나물의 본명은 녹두나물이었다. 하도 맛이 잘 변해서 변절자였던 신숙주의 이름에서 따와 숙주나물로 불렀다 하니 풀뿌리 민중의 한을 풀어가는 해학이 참으로 대단하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정당하게 내려야 하겠지만 배신행위 자체를 사람들은 못견뎌한다.

 

사탄의 끈질긴 파괴력 배신(背信)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우롱한 처사는 나쁜 배신에 속한다. 왕이 백성을 속이고 위정자가 시민을 속이고 지도자가 추종자를 속이고, 이런 속임이 쌓이고 쌓여 배신의 독한 열매를 영글게 한다. 작은 자들은 배신의 세월을 묻어버리고 사는데 소위 큰 자들은 배신의 악행을 전혀 뉘우치지 않는다면 이는 불공평이요 악이다. 정책을 내세워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가 비일비재하다. 드러내놓고 사기극을 벌이는 권력 집단의 철면피 같은 악행은 반드시 뿌리를 뽑고 몸통을 드러내야 한다.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되었을 때 용공분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집안이 거덜 나고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던 아픈 기억들은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이 국가적 악을 인정하고 사과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승자에 의해 삐딱하게 기술되는 역사라 할지라도 생사람 잡는 역사 날조만은 피해야 한다. 있는 역사를 지우고 바꾸는 것도 죄악이지만 없는 역사를 있는 것처럼 조작하는 악은 죄질이 더욱 나쁘다. 그런 자가 있다면 면죄부 없는 영구한 단죄의 올가미를 씌워야 한다. 도끼는 믿을 것이 못 된다. 언젠가 내 발등을 찍기 때문이다. 머리통이 깨져도 살아나면 상대의 발꿈치를 문다. 그것이 사탄의 끈질긴 파괴력이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에는 적이 되고 적이 동지로 변해버리는 불신의 시대에서 배신자의 말로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배신의 두 얼굴, 여우의 교활함과 뱀의 간교함

은혜를 원수로 갚는 계층을 살펴보면 정치계와 종교계가 우열을 다툰다. 하루사이에 얼굴색을 바꾸기는 손바닥 뒤집기다. 시저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주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는 배신의 강도에서 막상막하다. 차이는 스물일곱 번의 칼질과 은전 30냥이다. 그들이 지옥의 아랫목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루시퍼의 타락이나 아담의 타락은 창조주 하나님을 배신한 질감이 다르지 않다. 이태리 속담에 “모피장사는 당나귀 가죽보다 여우 가죽을 더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커닝은 죄의 본성과 부합된다. 교활함은 커닝이다. 학창시절 커닝의 매력에 빠져 누구나 한두 번쯤은 곁눈질을 해보았을 것이다.

배신하는 영혼은 여우의 교활함(cunning)과 뱀의 간교함(crafting)을 넘어선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지도자의 덕목으로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교활함을 칭송했지만 현실세계에서 가장 유사했던 히틀러는 인류의 재앙이었다. 악어는 배가 아무리 고파도 자신의 이빨을 스케일링해주는 새를 삼키지 않는다. 악어는 먹이를 씹으면서 씹히는 먹이를 위해 눈물이라도 흘리지만 배신자는 웃으며 먹잇감을 질근질근 씹는다.

 

역사의 배신자 교회의 배신자

지난 천 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뽑힌 칭기즈칸은 2000년 <Time>지의 겉표지를 장식했다. 그의 영웅다운 면모는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배신자는 사정없이 죽였음을 보아 알 수 있다. 간웅인 조조도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주인 황규를 배신한 묘택을 죽였다. 한신을 고발한 그의 하인도 배신자로 죽임을 당했다. 다윗은 관용의 사람이었으나 사울의 목을 베어다 바친 병사를 죽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배신과 관용, 다시 관용을 뒤집는 배신의 줄기찬 역사였다. 결국 하나님의 관용보다 이스라엘의 배신이 앞서는 바람에 그들은 멸망당했다.

을사오적과 같은 민족 반역자는 이천만 동포의 발에 밟혀야 마땅했지만 수괴인 이완용을 비롯한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을 처단하지 못했음은 통탄할 일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민족반역의 원흉인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음은 대한 남아로서의 통쾌한 응징이었다. 회사의 기밀을 빼돌려 경쟁 회사에 팔아 이득을 챙긴 인간쓰레기는 매장되어야 한다. 기업의 최신기술이나 나라의 기밀을 빼돌려 경쟁국이나 적국에 매도한 벌레 같은 인간들은 중형으로 다스려야 한다. 순교의 피를 더럽히는 교회의 배도자들 역시 출교 처분해야 한다.

 

배신의 영토를 삼키는 민중의 불길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니다. 아직도 생생한 역사의 비극인데 우리의 의식에선 사라지는 중이다. 일제의 강제징용, 소련의 강제이주는 힘없는 소한(小韓)제국의 가여운 운명이었다. 그뿐인가? 해방은 되었어도 떠밀리다시피 해서 얻은 조국의 현실은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변해 혼란기의 신생 조국은 사상적 대립으로 서로를 향해 배신자의 낙인을 찍었다. 북으로부터 기울어진 가마에서 불의 재앙들이 쏟아졌다. 수백만이 목숨을 잃었다. 승자 없는 전쟁은 나라의 허리를 잘라 삼팔선은 분단의 상징으로 부끄러운 생명을 여태껏 이어오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한다.

만주 하얼빈 역사에 울려 퍼진 7발의 총성은 이천 만 동포의 한 맺힌 절규였다. 밟으면 꿈틀거리고 싹둑 자르면 다시 여린 싹을 내밀던 고단한 조국이었다. 태우면 잿더미 속에서도 불씨를 키워 불길을 만들고 막으면 다시 치솟는 지하의 물길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사이비 지도자들의 행태에 분노한 민중들이 기지개를 켰다. 배신의 쓰라림에 목 놓아 울던 풀뿌리 민중은 이제 성난 파도가 되어 세계사의 협곡을 뒤덮는다. 거침없이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배신자들의 영토를 삼킨다. 말없는 민중이 진정한 조국의 첨병이다. 배신의 세월을 기억 속에 묻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시시때때로 몸을 일으켜 억울함을 호소한다.

 

적이 동지 되고 동지가 적이 되다

어제의 적이 오늘에는 동지로 변하고 오늘의 동지가 언젠가 내게 총구를 겨눌 적으로 돌변함이 다반사인 현대에서 배신의 저울은 얼마만큼 기울어져야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동북아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장남인 남생이 당나라에 귀순하자 사수대첩(蛇水戰鬪, 662년)으로 전의를 상실한 당나라에게 고구려 정복의 물꼬를 틔워주었다. 고질적인 권력 암투로 인해 정쟁의 피비린내로 점철되었던 조선의 정치사는 배신의 세월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사육신을 비롯한 가담자들은 배신자 김질의 밀고로 무참하게 척살되었다. 변절자 신숙주와 함께 출세가도를 달린 김질이었지만 그의 사후 수백 년이 지났지만 배신자의 낙인은 더욱 또렷하다. 측근에 의해 이뤄지는 배신행위는 동기와 목적이 어떡하든 비겁한 일이다. 동학군의 지도자인 녹두장군 전봉준은 동학교도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청산리 전투의 명장 김좌진 장군은 등 뒤에서 부하에게 저격당했다. 한국독립당의 위원장인 김구 선생은 독립당원인 안두희에게 암살되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최측근에게 시해되었다.

메데 제국의 후손인 쿠르드족은 현대사에서 열강에 의해 배신의 상처를 가장 깊게 받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서 독립을 약속받았으나 터키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오히려 분할되어 이란, 터키, 시리아와 이라크로 유입되었다. 이후로 쿠르드족은 꾸준한 독립운동을 벌였으나 미국에 의해 두 번이나 연거푸 배신당함으로 역사상 한 번도 국가를 세우지 못한 민족적 불운을 겪고 있다. 4천만의 인구와 장구한 역사를 지녔음에도 매번 강대국들이 내려친 배신의 철퇴에 가격 당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배신은 개인과 집단이나 국가에 의해 자행되며 단위가 클수록 상처 또한 깊고 강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 난무한 속임과 기만의 언행은 배신 경주에 버금 갈 정도다. 통치자가 국민을 우롱하거나 지도자가 기막힐 정도로 교묘한 말장난을 하고 그럴듯한 표정을 꾸며대는 것은 그들이 이미 보통 인간이기를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처럼 어짊이 사라진 지도자에게 기댈 것은 절망뿐이다. 모두 장탄식을 늘어놓을 뿐 뾰족한 대안이 없다. 국가의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걸머지지 않는 한 이 나라는 전혀 타의에 의해 엉뚱한 방향으로 급선회될 수 있을 것이기에 매우 우려스럽다. 배신의 기류를 벗어나려면 솔직함이 장려되고 자리에 들고 남이 공정해야 한다. 때로는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자리를 망칠 수가 있다. 무작정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니다. 복지부동이면 결국 시간이 해결사로 나설 것이다. 민심도 통하지 않고 천심마저 외면당하면 파국뿐이다. 이 두렵고 무자비한 배신의 세월이 속히 지나기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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