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고난받음,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변화되신 후에 내려오셔서 두 번째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변화산은 다볼산(Mt. Tabor, 588m)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헐몬산(Mt, Hermon, 2,814m)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베드로 사도의 고백 후 6일(마태, 마가 9:2), 8일(누가) 후에 일어났다고 보고한다. 다볼산이 변화산으로 지목된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모친 헬레나의 열성으로 건축한 수도원 때문이다. 지금도 구교의 수도원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구교는 다볼산으로 보려하고, 신교는 헐몬산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1. [막 9:1-13 변화산 변형]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1절).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오는 것”은 성령강림과 교회설립으로 볼 수 있다. 1절은 문맥이 맞지 않는다. 현재형으로 제시하지만, 현재는 보지 못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현재 보고 있는 것(현재적 임재성-황원하)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회 단시간적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변화산의 영광 등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그 날이 오면, 그곳에 있던 사람이 자기 현재(그 시점에서는 미래)에서 볼 것이고, 그 후 모든 신자들은 현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오심은 교회의 설립과 유지이다.

6일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변형(變形, TRANSFIGURATION)되셨다. 예수께서 변형되신 것은 죽음과 부활과 영광으로 연결된다. 그 영광으로 가려면 십자가를 져야 한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고(no cross no crown),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My Heart I Give Thee, Lord, Promptly and Sincerely). 필자는 관용(tolerance)주의 대해서 십자가는 포기하고 영광만을 취하려 한다고 제시했다(cross no crown yes). 주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빛으로 변형되신 예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말씀을 나누셨다(4절). 베드로 사도는 무서움과 황홀감에 빠져 횡설수설을 했다(5-6절). 초막 셋,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짓고 머물자고 제언한 것이다. 앞에서 베드로 사도가 한 믿음 고백은 예수께서 주되심에 대해서 온전한 고백이 부족한 것이다. 주께서 꾸짖음을 하셨지만 온전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때 구름이 몰려오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7절). 구름 속에서 난 음성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였다(7절, Et vox facta est de caelis, et venit vox de nube, dicens 비교. 막 1:11). 구름 속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음성은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초막 셋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모세와 엘리야와 구름이 있을 때는 사도들은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오직 예수와 있을 때에 참 평안이 왔다(8절,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1문).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셨다(9절).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10절), 엘리야에 대해서 두서없이 질문했다(11절). 예수께서 엘리야를 세례 요한으로 지목하셨고, 누구도 믿지 않음을 지적하셨다(13절). 세례 요한은 엘리야로 모든 것을 회복하여, 언약의 사자를 영접하도록 했다. 그러나 엘리야를 함부로 대함으로 언약의 사자도 함부로 대했다. 결국 인자께서 많은 고난과 멸시를 당할 수 밖에 없다(12-13절). 하나님의 선지자를 함부로 대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를 거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 이해할 수 없는(unreasonable) 일은 인간이 했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사랑하신 더 이해할 수 없는(absolutely unreasonable) 하나님의 경륜이 있다.

2. [막 9:14-29 변화산 아래의 풍경]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이 기다리는 장소에 내려오셨다. 그 곳에는 큰 무리가 제자들을 둘러싸여 서기관들과 논쟁하고 있었다(14절). 예수께서 오심을 보고 무리들이 예수께 문안할 때,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으셨다(15-16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귀신들린 자기 아들을 제자들이 쫓지 못함에 대한 불평이었다. 귀신들인 아들이 사로잡혀 파리해지고 있어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는데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18절). 예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꾸짖으셨다(19절).

예수께서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명령하셨다(19절). 아이가 예수 앞에 설 때에, 귀신이 예수를 보고 아이로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렸다(20절). 예수께서 아이의 아버지에게 경위를 물으니, 어릴 때부터 귀신을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다는 것이다(21절).

그리고 아버지는 예수께 하실 수 있거든 자비를 간청했다(21절), 예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다(22절).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예수께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간청했다(24절). 예수께서 무리가 더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귀신을 쫓으셨다(25절). 예수께서 믿음을 주시는 분으로 표적을 보이셨다. 제자들에게 믿음의 확신과 믿음의 저자가 누구인지 밝히셨다(참고 히 12:2). 표적에 머문 신앙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예수께서 가시적인 표적으로 제자들을 훈련시키셨지만, 성령이 오신 뒤에는 복음선포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운영했다. 아이러니하게 교회가 제국을 통일했을 때에 심각한 부패가 일어났다.

구경거리가 끝난 무리들은 모두 돌아갔고, 집에 들어가서 제자들이 예수께 자기들은 왜 쫓아내지 못했는지를 물었다(28절). 예수께서는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29절). ‘믿음’과 ‘기도’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영적인 세계는 인간의 경영이나 지혜로 들어갈 수 없다.

3. [막 9:30-32 두 번째 죽음과 부활 예언] 예수께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때 제자들에게 죽임 당함과 삼일 부활을 두 번째로 말씀하셨다(31절).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고 질문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두려워했다(32절). 제자들께서 주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주의 십자가를 보았고 부활을 보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두려움에 빠져 횡설수설을 일삼는 사람이 있으며, 그 횡설수설을 따르는 무리들도 있다. 죽음과 부활을 깨달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이 임해야 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부나 타협이나 절충이 없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혹자들은 길거리에서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담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길거리가 아니라 자기의 삶의 영역(현장)이어야 한다. 삶과 관련이 없는 길거리에서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것을 두려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 평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복음전함을 제한하는 것은 좋지 않다.

4. [막 9:33-37 누가 큰가?] 예수께서 죽음과 부활을 고지하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큰가?”에 대해서 논쟁했다(3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첫째라고 말씀하셨다(35절). 모든 위정자들은 선거 유세에서 섬기는 일군이 되겠다고 공언(公言)하지만, 곧 공언(空言)이 된다. 교회 사역자들도 섬긴다고 공언(空言)하며 첫째 위치를 강탈한 부류가 있다. 예수께서는 섬기는 자의 모델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고 명령하셨다(36-37절). 교회 사역에서 소자(小子)를 영접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장로교는 소자를 영접할 수 있는 정치, 질서를 확립했다. ‘집사’를 전문성직자에서 평신도로 이관해서 섬기도록 한 것이다. 장로교 집사는 목사의 말씀 사역에 대한 보조자가 아니라 구제를 전문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직분으로 구체화시켰다. 경제적 약자 등을 집사가 목사와 동역하며 섬기도록 했다. 목사는 직분의 동등성을 견지했다. 장로교 목사가 작은 자를 섬기지 못한다면 장로교 목사가 아니다.

5. [막 9:38-50 우리는 누구인가?] 요한 사도가 예수께 나와서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은데 금하도록 요구했다(38절). 예수께서 금하지 않도록 하셨다(39절). 예수께서는 그가 진실로 자기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제자로 보신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한 자로 평가했다(40절). 이단에 판별의 시금석이다. 이단은 매우 교묘하다. 이단은 예수 이름으로 예수의 교회를 반대하며 훼방한다. 예수 이름을 높일 때에는 함께할수 있지만, 예수 이름으로 예수를 훼방하고 박해할 때는 금지시키는 것이다. 다른 교파라 할지라도 교회를 반대하지 않으면 굳이 금지하지 않도록 가이드라인을 주신 것이다. 학문은 다양한 의견 개진이 자유롭다. 교회 안에 이단 분별과 학문 활동의 두 영역이 필요하다. 이단이 발흥하여 교회에 피해를 주고 훼방하는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변호해야 하고, 드러나지 않는 교묘한 이설(異說)에 대해서 학문적인 변호를 진행해야 한다. 거짓 교사는 직접으로 대적하지 않고 겸손과 온유와 지혜로 대적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생각하며 물 한 그릇을 주는 것이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41절).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위치에 있다. 그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것은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하다. 유기된 사람은 유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유기된 자를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매우 악하다. 그것은 자기의 종으로 삼아 두고두고 부려먹으며 갈취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는 차라리 그 자를 목에 매여 바다에 던지는 것이 죄가 덜하다고 했다(43절). 지옥의 무서움을 지옥과 불로 비유했다(44-49절). 불로써 소금치는 듯한 곳이 지옥이다. 소금은 지옥과 세상에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 때 마음에 소금을 두고 모두와 화목할 수 있어야 한다(50절).

6. 전능하신 하나님, 어린양의 영광을 보나이다. 믿음이 없음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대한의 땅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 전파에 모두 합력하여 힘써 전파하게 하옵소서. 악한 자들의 입술에 힘을 빼시고, 의인의 입술에 지혜를 발에 힘을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date. 2nd. 2019.10.01.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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