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에 나타난 상반된 지혜

욥기를 이해하는 일반적인 견해는 믿음 좋은 욥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단으로부터 많은 시련과 환난을 겪었지만 끝까지 참고 믿음으로 승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욥은 하나님이 칭찬하실 정도로 동방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이러한 욥의 신앙을 보고 사단은 시기하여 하나님께 도전을 하게 되는데 처음에 사단이 하나님께 요청한 것은 욥에게 있는 재산이었다 사단은 욥이 가지고 있는 재산만 빼앗아 버린다면 욥이 필시 하나님을 부인하게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데 그러나 욥의 대답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였다.(욥1:21) 그러나 사단이 한번에 물러갈 자가 아니다.

사단은 다시 하나님 앞에 가서 이번에는 욥의 뼈와 살을 쳐버리면 그가 반드시 하나님을 부인할 것이라도 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허락을 했지만 욥의 대답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하고 그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입술로 범죄 치 않았다고 했다.(욥2:10)

이렇게 볼 때 욥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신실한 자이다.(욥1:1,2:3)

만약에 욥이 사단으로부터 오는 환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했던 말씀이 거짓말이 될 것이고 나아가서는 사단이 하나님으로부터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자신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고 대단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범주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고 결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승리할 수 없다. 이러한 사단의 지혜가 바로 인간의 지혜이고 이 인간의 지혜의 한계성을 고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을 고발한다.(롬3:20,롬5:20)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사망이 왕 노릇 한다는 뜻이고 사망이 왕 노릇 한다는 것은 사단이 왕 노릇 한다는 뜻이다.

아담 안에서 범죄(犯罪)한 인간은 이러한 사단의 범주를 떠날 수 없고 사단은 하나님의 범주를 떠나지 못하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단의 범주 속에 있던 자가 하나님의 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사단의 정체를 알게 되고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죄의 종이요 사단의 종이기 때문에 주인의 허락 없이는 결코 스스로 사단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다. 사단의 범주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사단보다 강한 자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는 이유는 그가 사단을 공격을 받지만 이미 욥이 사단의 범주를 벗어나 하나님의 범주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욥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다. 어떤 면에서 욥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사단의 공격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사단의 한패이기 때문에 결코 사단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없다. 욥이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사단은 욥을 보고 시기하고 하나님께 시비를 걸어 욥을 시험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러한 사단의 욥을 향한 공격은 에덴동산 안의 아담 하와를 향한 사단의 공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담 하와는 사단의 공격 앞에서 무너졌지만 욥은 사단의 공격을 견디고 이긴다는 차원에서 볼 때 욥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조심스럽게 예견해 볼 수 있다.

욥은 사단의 공격을 잘 견뎌 주었고 이김으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당하실 고난과 핍박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욥이 마지막에 그의 친구들을 위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것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욥이 사단으로부터 두 번의 공격을 잘 견디어 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자기를 핍박하는 친구들을 위해 희생의 번제를 드림으로 친구들을 구원하는 측면에서 볼 때는 분명히 욥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욥이 친구들과 변론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욥 자신(自信)이 얼마나 무지하다는 것을 책망 받고 욥이 회개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 사단으로부터 승리한 욥이 왜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티끌 가운데서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하는 가이다.(욥42:6) 하나님께서 직접 칭찬한 사람인데 왜 하나님은 욥을 책망하시고 욥은 왜 회개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단이 욥을 공격함으로 곤경에 처한 욥을 찾아온 욥과 욥의 친구들과의 변론 속에서 찾아야만 한다.

욥과 욥의 친구들의 대화의 주제는 아무래도 욥에게 나타난 저주이다. 재산과 자식과 아내와 참을 수 없는 질병까지 덮친 욥의 상태는 분명히 누가 봐도 저주받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구약의 율법의 굴레 속에서 그러한 욥의 상태를 보고 저주받은 상태가 아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저주받은 욥의 상태를 둘러싼 욥과 욥의 친구들의 변론이 시작되는데 먼저 욥의 친구들의 입장을 보자. 욥의 친구들은 욥의 그러한 상태를 보고 욥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욥의 모습을 보고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울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리며 머리에 뿌리고 욥 옆에 앉아 한 마디로 안하고 일주일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욥의 상태는 절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욥이 먼저 입을 여는데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차라리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태어난 생일을 저주한다. 욥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자신에게 이러한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욥의 이 말은 욥1:1절과 욥2:3절에 의하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의 입장은 욥의 생각과 다르다. 욥의 친구들의 입장은 현재 욥이 당하고 있는 저주가 까닭 없이 일어난 저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욥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을 친구들에게 들은 욥이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에게 너희들이 참으로 지혜롭고 똑똑한데 그러나 내게 일어난 일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과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죄를 지었더라면 이런 저주를 받는 것이 억울하지도 않고 당연하게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내가 이 정도로 심한 저주를 받을 만큼 악을 행한 역사가 없다는 것이 욥의 생각이다. 즉 욥은 지금 까닭 없이 이러한 저주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세 차례나 욥을 공격하면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하나님께서 네가 아무 죄도 안 지었는데 까닭 없이 너에게 이러한 저주를 내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실수를 하실 리도 없고 그렇게 하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욥과 욥의 친구들의 변론은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욥의 입장도 맞고 욥의 친구들의 말도 맞다. 그런데 왜 욥과 욥의 친구들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가?

둘 다 옳다면 분명히 합의점을 찾아질 것이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만 잘못 생각해도 합의점은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잘못 생각하고 있으면 더더욱 합의점을 찾기 힘들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누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가? 여기서 한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욥과 욥의 친구들 양쪽 다 구약의 사람이이다. 구약의 어느 시대쯤의 사람인가?

욥15:17-19절에 의하면 욥의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겔14:14절과 20절과 렘15:1절과 마22:32절 등을 살펴볼 때 욥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후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욥과 욥의 친구들의 변론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그들은 율법의 대가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시편 잠언 전도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말씀들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욥의 시대는 이미 그들이 율법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율법적 관점에서 욥의 저주 상태를 볼 때 욥의 친구들의 말은 전혀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까닭 없이 하나님을 그렇게 잘 믿는 백성을 저주받게 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 율법(律法)이다. 그러나 정작 고통스러운 사람은 자신도 율법적 관점에 있기 때문에 도무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는 욥의 입장이다. 누구보다도 욥은 자신을 알고 있다 자기가 지금까지 율법의 말씀 안에서 살아온 경험상 지금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은 도무지 하나님께서 일으킨 일이라고는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러한 일을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일으킬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욥의 말들을 종합해 보면 이러한 일들을 분명히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는데 왜 이러한 일을 자기에게 일으켰는지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욥은 친구들이 말하는 그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저주를 받는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이러한 욥의 상태를 모르고 율법적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욥이 숨겨놓은 죄악이 있을 것이라고 하고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게 되는 것이다.

설사 욥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욥의 친구들은 네가 알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는 욥의 입장은 참으로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욥은 지금 자신에게 다가온 저주와 함께 친구들의 자기를 모르고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는 친구들의 말을 받아줘야 하는 이중적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욥과 욥의 친구들 모두 욥이 받고 있는 저주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볼 수 있다.

욥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는데 이런 재앙이 덮쳐온 것에 대해서 무지하고 욥의 친구들은 욥이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욥이 죄를 지었다고 몰아붙이는 무지 속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욥과 욥의 친구들 모두 구약의 율법적 정황 속에 놓여져 있는 한계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욥과 욥의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욥은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느라고 스스로 의로운 자가 되어 버렸다.(욥32:1) 즉 자신이 의롭게 됨으로 하나님께서 불의하게 되는 그런 상황으로 대화가 끌려가 버린 것이다.

이것은 군데 군데 나타나는 욥의 변론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욥은 친구들과 대화 속에서 적지 않게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불의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어떤 면에서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사단의 보이지 않는 교묘한 전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율법의 한계성 속에 있는 인간은 얼마든지 이러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욥이 하나님께 책망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 욥을 칭찬하던 하나님께서 나중에 욥을 책망하신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자세하게 보면 하나님의 은총 즉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역사보다는 율법 안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유지해 보려는 욥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려다가 그것이 지나쳐 자기 의가 되어 버리는 죄를 짓는 형상이다. 즉 욥과 욥의 친구들은 율법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총의 세계에 대해서 무지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볼 때 의롭고 흠이 없고 정직하고 순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일 수 있다

그러나 롬3:10절의 말씀에 근거해서 볼 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는 것은 이러한 상대적인 차원에서 한 것이지 결코 욥이 죄가 없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신 이유는 다른 이유가 있다. 문제는 욥이 스스로 하나님보다 낫다고 하여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참된 뜻은 어디에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다가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회개를 하는 것으로 보아 욥이 완전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욥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욥기는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와 함께 지혜서이다.

그러므로 욥기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의 오묘함을 배워야 한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이다. 이러한 욥의 모습을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인 아담 하와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즉 죄 없다는 욥의 모습 속에서 무죄 상태인 아담 하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욥이 까닭 없이 당하는 저주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욥이 죄 없이 사단에게 당하는 고난과 저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에게 당하는 고난과 저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에게서 첫째 아담과 둘재 아담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욥이 회개하고 친구들을 위해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욥의 친구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은총을 받는 것을 통해서도 욥에게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충분하게 받아낼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는 욥의 모습이다. 욥이 친구들과의 과정 속에서 욥은 분명히 까닭 없이 찾아온 고난과 저주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리고 욥이 친구들의 변론을 충분하게 감당해 내고 있다.

이것은 예수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대화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죄 없으신 예수를 이유 없이 핍박하고 멸시하고 죄를 책잡으려고 예수의 코앞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에게 말 한마디로 책잡히지 않으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사로잡혀 십자가로 가신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길은 그들의 의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욥의 회개를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욥을 찾아오셔서 일으키신 회개의 사건은 먼저 욥을 그리스도처럼 의롭게 하시고 그리고 욥의 친구들 즉 예수의 저주를 자기 죄 때문이라고 공격했던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니까 회개한 욥의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 회개하기 전까지의 욥의 모습은 처음에 하나님이 칭찬할 때는 타락하기 전의 아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회개할 수밖에 없는 죄인 된 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욥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욥이 첫째 아담도 되고 둘째 아담도 되고 그리고 욥 개인으로 보아서는 율법 아래서 친구들과 함께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욥의 모습 속에서 또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 죄 없이 고난과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죽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욥의 까닭 없는 재앙을 통해서 확증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죄를 지어서 주어지는 고난이라기보다는 사단의 일을 멸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신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랑의 차원에서 일아 나는 은총의 사건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내게 좋은 일이든 나뿐 일이든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욥속에 생명만큼은 건드리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우리 안에 사단이 도무지 건드릴 수 없는 예수그리스도가 계심을 믿고 흔들리지 않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내게서 예수 그리스도 만이 존귀하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중심을 잡아 주어지는 삶의 과정에서말씀과 기도를 따라 승리하는 것이 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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