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 외로운 천사.

내가 20대 초반인 70년대 초, 그때 나는 자살 후유증으로, 결핵 말기 진단을 받은지 3년째 되던 해에, 
고시 동문과 신도안(神都岸)이란 마을을 품고 있는, 계룡산 자락의 조그만 암자로 책 몇권을 싸들고 가서, 
여름 한철을 보낸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곳에 참 희한한 기인들을 많이 보거나 들은 기억이 있다.
오늘 난, 한가하게 그런 기인들 얘기를 하려는게 아니다.

얼마전 나는, 역시 지난 날 고시 동문이, 설악산 자락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식을 하면서, 무위자연하며 살고 있는 친구를 오랫만에 만나, 사람사는 얘기를 나누다가, 그 친구로부터, 이 설악산 자락에서 요즘같은 각박한 세상에서, 아주 보석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듣기 힘든 미담을 들었다. 
이 친구 얘긴즉, 이 땅에서 가장 정감어린 사람을 얘기하라면, 바로 '설악산 지게꾼인 임기종씨' 라고 단정하듯 운을 뗀 그의 말이, 나는 너무도 의아해서, “임기종 그 분이 자네와 어떤 사이인데?” 하고 물어 보았다. 

"임기종씨는, 40년이 넘도록 설악산에서 지게질만 한 지게꾼이고, 키가 160cm도 되지 않고, 몸무게는 60kg도 나가지 않고, 
머리숱은 듬성 듬성하고, 
이빨은 거의 빠지거나 삭아서, 발음까지 어눌한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임기종씨에대한 친구의 얘기는 이렇다.
임기종씨는,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지게질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오로지 설악산에서 짐을 져 나르고 있고, 
그 삯을 받아서 정신지체 2급의 아내와 
그 아내보다 더 심각한 정신장애를 가진 아들을 부양하고 사는 '산 사나이'라고했다
맨 몸으로 걸어도 힘든 산길을, 
40kg이 넘는 짐을 지고 날마다 산을 오르내리는 임기종씨. 
하루에 적게는 4번, 많게는 12번이나 설악산을 오르내린다고 한다. 

설악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상인들과, 사찰에 필요한 생필품을 등짐으로 져다주고 그가 받는 삯이,
한 달에 150만원 남짓이라고 한다. 
한 달에 150만원, 누구에게는 이 돈이, 
별 것 아닌 돈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이 돈이, 땀으로 얻은 돈이기에 금쪽 같지만, 그러나 자신에겐  충분한 돈이라고 한단다. 
아내가 장애인이라, 정부로부터 생활 보조비를 받기 때문에, 
부족한 가운데서도 생활이 가능하고, 
술 담배를 전혀 안 하고, 허튼 곳에 돈을 쓰지 않으니, 먹고 사는데 불편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한낱 지게꾼에 불과한 그를, 
많은 사람들이 '작은 거인'이라고 칭송하는 까닭은, 그가 그렇게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고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무려 십수년이 넘도록 장애인 학교와, 장애인 요양시설에 생필품을 지원하고, 홀로사는 노인들을 보살피고,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자신이 번 돈 모두를 사용 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삶 전부를 포를 떠서 희생하는 것이기에, 그 삶이 더욱 소중하게 보인다.

지금까지 임기종씨가 그렇게 사용한 돈이, 무려 일억원가까이 된다고 하니, 설악산을 수백번을 오르내리며 번 피같은 돈을 그가 치열하게 살아온 삶만큼이나, 참  값지고 보람되게 씌여지고 있다. 
“힘들게 일을 하지만, 적어도 땀 흘려서 
번 돈 만큼은, 내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억만금보다 귀한 그의 희생적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이 진솔한 고백!, 
얼마나 감동적인 멧세지인가!.
임기종씨의 이 진순무구한 삶에, 
나는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연봉이 수억이네 수십억이네 하는 기업가들도, 입만 열었다하면 국민 국민 하는 정친인들이나, 이 정치인들에 부화뇌동하는 우중(愚衆)들이 결코 아닌, 
우리가 사는 이 사회 공동체 내에서 꼭 있어야 할, 이러한 작은 거인들이 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힘든 것이 남을 돕는 일인데, 
날마다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을, 
오롯이 남을 위해 사용하는 그의 선한 마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가!.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마다 산을 오른다. 
자신이 지게를 짊어지지 않으면, 휴게소 상인들이 장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가스통을 4개나 짊어지고 산을 오르기도 하고, 어떤 날은, 100kg이 넘는 대형 냉장고를 통째로 짊어지고, 
산을 오르기도 한다. 

“처음에는 지게를 지는 요령을 몰라, 작대기를 짚고 일어서다가 넘어지기 일쑤였단다. 
너무 힘들어 몇 번이나 그만둘 생각도 했다고한다. 하지만 처음 시작한 일이니, 하다보면 언젠가는 할수있으리라 믿고 열심히 배운 덕으로, 지금은 지게를 지고 산에오르는 일에 달인이 되었단다.

그의 진솔한 고백을 들어 보세요.
"그때는 오로지 몸뚱이 하나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때 배운게 지게지는 일이라, 지금까지 설악산 지게꾼이 된 것이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설악산을 오르 내렸 으니, 이 세상에 나보다 설악산을 더 많이 오른 사람은 아마 없을 거란다.
매일 오르지만 지겹다는 마음은 전혀 없어요.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철마다 설악산의 풍경은 바뀌니까요. 
그러니 고맙지요.”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모두 잃고 살았 단다.
열 살이 갓 넘었을 때, 부모가 연달아 세상을 떠났다고한다. 
너무너무 가난한 집안이었기에, 
남기고 간 육남매 외엔, 부모가 물려준 것이라곤, 가난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단다. 
그는 6남매의 셋째였단다. 
그렇게 남겨진 6남매는, 제각기 자기 입을 해결해야 했단다.
초등학교 5학년도 못 마친 그는, 남의 집 머슴살이부터 시작했다고한다. 
그러다가 돌고 돌아 설악산 지게꾼이 되었단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한 지게꾼 선배로부터, 정신지체 2급에다 걸음걸이도 불편한 여성을 소개 받았단다. 
그 선배는, “이런 여자는 자네와 살림을 살아도 결코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며, 그에게 배필로 소개를 했다고 한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의 아내는, 일곱 살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단다.
“이런 여자를 내게 소개해준 것은, 
내가 별 볼일 없어서도 그랬겠지만,
어쨌든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에 어찌나 애처롭던지요. 
저런 몸이니 그동안 주위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홀대와 구박을 받았을까 싶어서, 따지지 않고 내가 돌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 이해타산을 초월한 이 전혀 때묻지 않은 진순무구한 심성을 닮고 싶어진다.

아내와 정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으니,
많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것조차도 자신의 팔자로 받아 들이고 산단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그의 아내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끝까지 그녀를 돌볼 수 밖에 없단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아들은 말을 못했고, 아내보다 더 심각한 정신장애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아내가 정신장애를 겪고 있으니, 
그 아이의 뒤 치다꺼리를 하려면, 자신이 일을 그만 둬야 했는데, 도저히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단다. 

결국, 아이를 강릉에 있는 어느 시설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이를 데려다 주고 떠나 오는데, 그는 ‘나만 편하려고 그랬다’는 죄책감이 들었단다. 
그래서 용달차에 과자 20만원 어치를 싣고서 다시 발길을 돌려, 
시설로 되돌아 갔었다고 한다. 

그 과자를 먹으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니, 아이들보다 자신이 훨씬 더 기뻤었다 고 한다. 
그때 처음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그 사람만 기쁜 것이 아니라, 자신도 기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깨달음 얼마나 진순한 깨달음인가!'
그때부터 임기종씨는, 지게일로 번 돈 모두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었다 고 말한다. 

무려 40년 동안, 설악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였지만, 
설악산 말고 다른 산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임기종씨.
옛날 '나뭇군과 선녀'라는 전설에, 
하늘에서 천사가, 설악산에 목욕하러 내려왔다가, 미처 올라가지 못한 천사 한 명이 있었다던데 그 사람이 바로 임기종씨가 아닐가 싶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아서, 언제나 부족하다며, 늘 더 가지려고 바둥거리며 사는 우리네,
집에 있는 것 손에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입에 있는 것까지도 뺏어 먹으려고 하는 우리, 배 고픈 것은 참아도 시새워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우리,
이고 지고 갈 것도 아닌데, 
우리는 너무 많이 욕심내고, 
너무 많이 놀고 먹고, 
너무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고려대, 총신대학원 졸업, 광운대 정보복지대학원 졸업, 서울 용산소망교회 경남 하동교회 부산 영도교회 시무. 현재, 행복이 가득한 교회(예장합동) 행복이 가득한 집(요양원) 시무

◆ 사과 한 알 

1942년 겨울은 유독히 춥고 암울한 나날 이었다. 

독일, 이태리, 일본 3국의 전범자들이 저지른
제2차 세계대전이, 전세계인들의 생명을 파리목숨처럼 유린하며, 전장의 용광로 속에 넣고 달구던 때, 
독일 나치즘에 미친 살인마들이 만든 유태인 강제 수용소에서는, 인간을 마치 도축장의 가축처럼 살육하는, 그 처절한 수용소에서의 하루 하루가 내일이 없는 절망의 나날이었다. 
그 수용소에 어린 나는 여니때와 똑같이, 
그 날도 종잇장처럼 얇은 누더기 옷을 걸치고 추위에 떨며 서 있었다.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런 악몽 같은 현실이, 나에게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러나 눈을 씻고 보아도 그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나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친구들과 한창 즐겁게 뛰어놀고 있을 나이에, 기성인들의 전쟁 놀음에 '묻지마'식으로 이유없이 당한,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억울한 피해자지만, 
어디다 하소연할수도 없는 버림받은자가 된 것이다.

한창 미래를 계획하고, 성장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갖는 꿈에 부풀어 있어야 할 나이였다. 
그러나 그 꿈들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자가 아니었다. 

집에서 붙잡혀 수만 명의 다른 유태인과 힘께 이곳에 끌려온 이후로, 
나는 하루하루, 순간 순간이 숨을쉬고 있는게 아니라,  불안과 공포가 목을 죄듯 가슴에 져며와 숨이 막히는, 절망의 지옥이었다. 
나는 어느때부턴가 철조망이 둘러쳐진 담장 곁을 추위로부터 체온을 지키기 위해 앙상하게 마른 몸을 두 팔로 감싸고서 힘겹게 걷곤했다.

허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배가 너무 너무 고팠다. 
입에 음식이 들어간지가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너무도 오랫동안 배가 고팠다. 
사람이 먹을수 있는 음식은 꿈 속에서나 있었다. 
같이 있던 사람들은 날마다 사라져 갔고, 
가족들과 행복했었던 지난날들은 단지 꿈 속에나 있었던 머언 옛날 처럼 여겨졌다.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던 절망앞에서 나는 점점 더 깊은 절망의  수렁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 

그 순간 철조망 건너편을 지나가고 있는 한 소녀가 눈에 띄었다. 
그 소녀도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 보았다. 
날 보는 그 눈은 너무도 애잔한 눈빛이었 다. 내가 처한 극단적인 상황을 이해한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나는 첨 보는 이 낯선 소녀가 가련한 나의 모습을 바라 보는 것이 너무 수치스러워 고개를 돌리고만 싶었다. 
그럼에도 뭔가에 끌리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그녀가 호주머니 안에 손을 넣더니 빨간 사과 하나를 꺼냈다. 
아름답고 광택이 나는 빨간 사과였다. 
아, 저런 사과를 먹어 본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던가! 
그녀는 조심스레 누가 지켜 보는이가 없나 왼쪽 오른쪽을 살피더니,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그 사과를 철조망 너머로 던졌다. 
나는 얼른 달려가서 추위에 얼어붙어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 사과를 집어들었다.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나의 절대절명의 극한적인 상황에서 이 사과 한 알은 그야말로 내게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생명 그 자체였다. 
나는 그 소녀가 준 사과를 손에 쥔채로 그 소녀가 멀리 사라져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 다음날, 나는 나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고 똑같은 시간에 다시 철조망 근처로 나갔다. 
물론 그 소녀가 다시 나오리라고 기대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곳에 갇혀 있는 나에게는 아무리 허황되고 부질없는 착각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한 줄기의 희망을 던져준 그녀를 다시 보고파 찰라의 망서림도 없이 소녀를 만난 어제의 그자리로 갔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수용소에서 그녀는 나에게 말로 형언할수 없는 희망의 끈을 던져 주었기에 할수만 있다면 난 그 끈을 단단히 붙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가 내 시야에 나타 났다. 그리고 또 그녀는 나를 위하여 어제처럼 사과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어제와 똑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철조망 너머로 사과를 던져주었다. 
이번에는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내가 그 사과를 잡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볼 수 있도록 그것을 높이 쳐들었다. 
그녀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나를 동정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바깥세상과 소통이 단절된지 오래된 나는  절해고도 아니 지옥같은 이 수용소 에서 그녀를 만나 하루에 한번 잠간 이름도 모르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광활한 사막에서 물을 만난 이상으로 가슴터지게 벅찬 삶의 오아시스 였다.

그리고 아주 오랫만에 처음으로 난 
내 가슴 속에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일곱 달 동안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만났다. 
어떤 때는 몇 마디 말을 주고받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냥 사과만 오갔다. 
그렇지만 그녀는 단순히 내 허기진 배만 채워 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다를 바 없었다. 
그토록 그녀는 내 영혼에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나 또한 어떤 의미로든 그녀의 영혼을 채워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다른 수용소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삶의 끝을 의미했다. 
그것은 분명히 나와 내 친구와의 최후의 만남이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것은 나에게는 삶의 끝을 의미 했다.
이튿날 소녀를 만나 인사를 하면서 내 가슴은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나는 떨려서 거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단지 이렇게 말했다. 

"내일부터는 사과를 갖고 오지마. 
나는 다른 수용소로 가게 될거야. 
우린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야." 
나는 자제력을 잃기 전에 얼른 등을 돌려 철조망으로부터 달아났다. 
나는 차마 뒤를 돌아 볼 수가 없었다. 
만일 뒤를 돌아보았다면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았을 것이고,  그녀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여러 달이 지나고 악몽과도 같은 고통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소녀에 대한 기억은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도 나를 붙들어 주었다. 
언제라도 '눈을 감기만 하면' 마음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천진난만하고 진순무구한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언제라도 그녀가 건네 주는 사과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긴 악몽이 끝이 났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파리목숨만도 못하게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간 그 지옥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선택받은 사람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나는 인간의 탐욕이 낳은 이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포함해 나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하지만 아직도 난 그 소녀에 대한 기억을 가슴속 깊이간직하고 있었다. 
그 기억이 나로 하녀금 삶의 의지를 갖게 했고, 나는 미국으로 건너와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다시 여러 해가 흘러, 1957년이 되었다. 
그때 나는 뉴욕 시에 살고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나에게 자기가 아는 어떤 여성을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몇 번을 거절하다가 그 친구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수없어 나는 그 자리에 나갔다. 
그런데 '로마'라는 이름의 그녀는 좋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나처럼 이민자였기 때문에, 우리는 최소한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민자들은 전쟁의 세월에 대해 물을 때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아주 말 조심을 하곤 했다. 
그녀도 그것을 의식해선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쟁 동안에는 어디에 있었나요?" 
내가 대답했다. 
"독일에 있는 유태인 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로마는 문득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지었다. 
고통스럽지만 잊을수 없는 어떤 기억을 떠 올리는 듯했다. 
내가 느낌으로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로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문득 지난 과거에 있었던 옛 추억을 잠시 떠 올라서요.
어린 소녀였을 때, 나는 유태인 강제수용소 근처에 살고 있었어요. 
그 곳에 한 소년이 갇혀있었는데, 꽤 오랫동안 나는 날마다 그 소년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나는 그소년을 만날때마다 사과 한알을 건네주곤 했었지요. 
철조망 너머로 사과를 던져 주면 그 소년은 무척 행복해했지요." 

로마는 무겁게 한숨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가를 설명하기는 무척 어려워요. 
어쨌든 우리는 그때 너무 어렸고, 몇 마디 얘기밖에 주고받을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둘 다 서로를 무척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소년이 다른 많은 유태인처럼 처형되었으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우리가 서로 사랑의 눈길을 주고받았던 그 여러 달 동안의 그의 모습만을 기억하려고 애를 쓰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터지거나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말을 더듬으며 로마에게 물었다. 
"그 소년이 어느 날 당신에게 '내일부터는 사과를 가져오지마. 
난 다른 수용소로 끌려가니까' 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로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알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 소년이니까요, 로마." 

우리 둘은 한참동안 벙어리가 된듯 말이 없었다. 오직 가슴벅찬 침묵만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차츰 시간의 장막이 걷히면서 우리는 눈동자에 감격과 회한의 눈물방울 속에 어려있는 서로의 영혼을 알아보았다. 
우리가 한때 그토록 사랑했고, 
그 이후에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그 영혼 깊은 곳에 서려 있는 그 추억을!. 

마침내 내가 말했다. 
"로마, 난 한동안 당신과 헤어져야만 했었소. 하지만 이제 다시는 당신과 헤어 지고 싶지 않소. 
이제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당신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소. 
나와 결혼해 주겠소?" 
나는 그녀의 눈에서 한때 내가 보았던 그 반짝임을 다시 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네,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우리는 서로를 껴안았다. 
그 여러 달 동안 그토록 갈망했지만, 철조망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그 간절한 포옹이었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다시는 우리 사이를 갈라 놓을수 없었다. 

내가 로마와 다시 만난 그날로부터 
어언 40년이 흘렀다. 
절대자의 섭리는 그 전쟁 기간 동안 나에게 희망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만나게 했고, 이제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다시 다시 만날수있게한 것 이다. 

1996년 봄, 발렌타인 데이에 나는 로마와 함께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했다. 
나는 수천만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절대자의 섭리에 의해 다시 재회한 환희를 날마다 내 가슴으로 느끼는 감동을 말했다. 
"로마, 당신은 그 강제 수용소에서 내가 배가 고플 때 사과 한 알로 나를 먹여 주었소. 
그리고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오. 
아무리 받아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오. 
나에게는 매순간 당신의 사랑이 필요하오." 

반전, 충격, 허탈......

감동적인 이 러브스토리는 2008년 학자들에 의해 거짓으로 밝혀졌다. 사소하고도 거대한 기만으로 세상과 자신을 속였던 헤르만 로젠블라트(Herman Rosenblat)가 2월 5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로젠블라트는 1929년 9월 23일 폴란드 트리부날스키의 피오트르쿠프(Piotrkow)라는 마을의 한 유대인 상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39년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는 그의 마을에 유대인 게토를 세운다. 그도 엄마와 세 형들과 함께 게토에 수용된다. 2살 되던 해 어머니는 독가스 시설을 갖춘 트레블링카(Treblinka) 수용소로 이감됐다. 그와 형제들은 1944년 7월 쉴리벤(schlieben) 인근의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감돼 45년 2월까지 강제노동에 동원됐고, 체코 테레지엔슈타트 캠프로 옮겨진 뒤 종전을 맞이했다.

로젠블라트는 95년 말 ‘뉴욕포스트’의 사랑 이야기 콘테스트에 저 사연을 응모, 당선된다. 그의 사연은 그해 크리스마스 직전 몇몇 신문에 소개됐다. 그 무렵 로젠블라트를 인터뷰했던 마이애미 헤럴드의 한 기자(Diana Moskovitz)는 그의 사연이 거짓으로 판명된 직후인 2009년 가디언지 기자를 만나 그가 거짓말쟁이라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의 사연이 눈덩이처럼 커져 통제하기 힘들어진 게 조금 불편한 듯한, 상냥하고 순진한 노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 할아버지를 연상케 했어요. 모두가 정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더라도 그냥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들이요.”

96년 로젠블라트는 오프라 윈프리 쇼 출연으로 그의 사연은 미국 전역은 물론 외신을 타고 세계로 전파됐다. 펭귄 출판그룹의 자회사인 버클리 북스는 자서전 출판계약을 맺었고, 영화사인 애틀랜틱 오버시스 픽쳐스는 판권을 사들인다. 그는 이런저런 강연과 유대인 교육행사 등에 초빙돼 연설하기도 했다.

로젠블라트는 자신의 결혼 50주년이던 2007년에도 윈프리 쇼에 출연, J.C 페니에서 산 반지를 아내 로마 래지스키 로젠블라트(Roma Radzicki Rosenblat)에게 끼워주며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했고, 윈프리는 “22년 방송 경험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며 그들의 사연을 띄웠다.

2008년 12월 25일, 켄 왈츠를 비롯한 몇몇 홀로코스트 학자들이 ‘The New Republic’에 저 사실을 집중적으로 밝히며 의문을 제기한다. 로젠블라트는 이틀 뒤인 27일, 마침내 진실을 고백한다. 그는 “로마와의 인연은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지만 홀로코스트 체험 등 나머지는 모두 완벽한 진실”이라며 “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었다.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인내를 환기시키고 싶었다.”고 밝혔다. ‘굿모닝 아메리카’와의 인터뷰에서는 “그것(로마와의 인연)은 거짓이 아니라 나의 상상이었다. 그리고 나의 상상 안에서 내 마음 안에서 그것은 진실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녀가 거기 있었고, 내게 사과를 던져줬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의 거짓을 저렇게 해명(?)했을 뿐, 공개적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출판사는 판권 계약을 해지하고 계약금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진실이 밝혀지기 직전인 2008년 8월 출간된 아동용 도서 역시 회수해 폐기했고, 이미 팔려나간 2,000여 권도 환불조치했다. 하지만 영화사는 제작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처음부터 그의 회고록에 허구적 내용을 대폭 가미할 계획이었고, 드러난 진실 위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심리를 탐구하겠다는 거였다. 영화사측은 로젠블라트에게 영화 판권 수입 전액을 홀로코스트 생존자 자선단체에 기부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 당했다고 2009년 1월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세상은 로젠블라트를 비난했다. 그것은 그의 사연에 감동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엄청난 수모를 겪으며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사실 그 전부터 둘째 형 샘은 2007년 작고할 때까지 동생과 관계를 끊고 지냈고, 자녀들도 아버지를 회유하며 대외 활동을 만류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숨질 때까지 마이애미 북부의 한 쇠락한 아파트에서 아내 로마와 칩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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